천안교회에서 열리고 있는 2021 미래교회포럼(대표 오병욱 목사)의 첫 번째 발표자 고려신학대학원 권수경 교수의 발제(고통의 신학적 의미)에 대해 문지환 목사(하나교회 부목사)가 논찬했다. 다음은 논찬문 전문.

2021미포에서 논찬하는 문지환 목사
2021미포에서 논찬하는 문지환 목사

고통의 신학적 의미  논찬

문지환 목사(하나교회)

권수경 교수님의 발표에 감사합니다. 저는는 발표자의 몇몇 논문과 강의, 그리고 단행본을 접한 적이 있는데, 그 때마다 참 따뜻고 실천적인 학자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는 언제나 복음 전파를 최우선 가치로 여기며 이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책임있는 삶을 강조합니다. 오늘 논문 역시 같은 맥락에 서 있습니다. 개별적 고통인 코로나19 대유행을 통해 보편적 고통을 고민하고 복음의 빛 아래 해석할 뿐 아니라 사랑과 선행을 종용하기 때문입니다. 이 논문에 담긴 저자의 따뜻한 목소리가 목회 현장과 성도의 삶에서 발화하길 소망합니다. 평범한 목사로서 학문적인 논찬보다는 소회 정도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복음에서 출발하는 전개가 긍정적입니다. 고통의 이유와 의미, 그것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해결책까지 모두 복음에 근거해 제안합니다. 이제는 old-shool이 된 것 같은 반틸의 전제주의, 정암의 계시의존사색의 부활을 보는 듯합니다. 개인과 주변에 일어나는 실존적 고통은 인간과 관계된, 혹은 인간을 아는 지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언제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결국 고통에 대한 진정한 해답은 하나님 계시에 의존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합니다. 성경, 복음, 계시가 보여주는 고통의 의미를 알아가기에 좋은 출발선입니다.

둘째, 고통에 대한 잘못된 접근을 교정합니다. 자연 종교가 해법으로 제시하는 대증요법(고행, 금욕, 절제, 자선 등)과 무기력한 수용이 가진 문제점을 잘 지적합니다(. 고통에 대한 자연적 접근). 알게 모르게 목회자와 신자들도 이런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통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한채,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며 울며 겨자먹기로 고통을 내 마음가짐의 문제로 치부하는 태도말입니다. 논문은 고통에 대한 자연종교적 자세를 교정하고 목회 현장에서 고통받는 성도를 목양할 때 주의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셋째, 복음전파를 종용합니다. 저자는 고통을 계기로 불신자가 복음으로 나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고통을 통해 특정할 수는 없지만 문제를 인식하기 때문입니다(p.7). 불의한 고통 때문에 냉소적으로 변해버린 불신자에게 신정론은 너무 차갑습니다(p.9). 따뜻한 사랑이 해결책인데(p.12) “불신자에게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의 최고봉은 복음의 변증”(p.13)이라고 주장합니다. 고통을 통해서조차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될 것을 기대하는 저자의 바램이 엿보입니다. 포스트모던 사회는 복음전파를 폭력적인 일로 인식합니다. 코로나를 통과하면서 오해든 실수든 교회가 복음전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이 만연한 세상에서 교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 잊지 않도록 논문이 상기시킵니다.

넷째, 책임있는 대사회적 선행을 당부합니다. 신앙의 사유화, 개인화가 절정에 치달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외침입니다. 교회는 천상의 공동체지만 땅을 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통해 세상에서 의와 공도를 행할 백성을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세상 나라를 하나님께 인도할 제사장 나라며, 이 땅에서 역할할 빛과 소금입니다. 사회적인 악, 부조리와 결합해 모두를 괴롭히는 부당한 고통에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있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사랑으로 이웃의 고통을 줄이라(p.15)는 당부가 이 사순절 시기에 더욱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다섯째, 죄가 들어오기 전 하나님의 형상 인간에게 고통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었을지 궁금합니다(p.6). 저자는 앞서 고통은 직접적인 아픔, 몸이 느끼는 감각, 뇌로 전달되어 느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는데(p.2), 과연 첫인류는 뇌가 인지하는 고통이 없었을지 의문입니다. 단순한 예로 아담이 실족해 바윗돌 위에 넘어졌다면 피가나고 뼈가 부러지며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저자는 논지를 이어가면서 죽음과 고통을 거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 1 . 고통의 원인에서 그런데 고통이 왔다. 원인은 죄다”, “고통은 하나님을 거역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다두 문장의 고통을 죽음으로 치환해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아니 보다 정합한 문장들이 됩니다.[1] 이런 비약은 라. 1. 부당한 고통, 까닭 모를 고통에서도 보입니다. 저자는 마지막 날 구원의 완성이 고통에서의 건짐이라고 말합니다. . 1. 문제의 해결에서도 십자가의 고통은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모두 죽음이 아니라 고통을 언급합니다. 물론 저자도 고통의 절정인 죽음을 말하고, “죄가 죽음을 가져왔다고 언급하면서 둘을 구분하는 듯 합니다. 하지만 논문 전반에서 저자는 죽음과 고통을 동의어로 사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결국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을 통해 저자의 주장이 성립합니다.

죄는 죽음의 원인이다.

죽음은 곧 고통이다.

따라서 죄는 고통의 원인이다.

고난과 고통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모호한 것처럼(. 2) 죽음과 고통을 동의어로 취급해도 좋다면 수용하기 어려운 전개도 아닙니다. 하지만 죽음이 지닌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성격을 약간은 간과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죽음은 상식선에서 생각해도 고통보다 크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1] 죄의 삭은 사망이니라. 6:23

  그는 진노로 길을 닦으사 그들의 목숨이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하시고78:50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