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다, 살고 싶다

안지선 연구원(카도쉬아카데미 교육위원회)
안지선 연구원(카도쉬아카데미 교육위원회)

 

버킷리스트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의 목록을 뜻한다. 이것을 적어보면 바쁘게 살았던 지난 삶을 돌아보게 되고, 멀게만 느껴졌던 죽음이 그리 먼일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인지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버킷리스트의 항목들을 정말 실현하고 못 하고는 어쩌면 진짜 목적이 아닐 수 있다. 당장 그것들을 실현하지 못할지라도 죽음을 눈앞으로 가까이 당겨와 버킷리스트를 적어본 사람은 죽음이 아닌 을 붙잡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에 대한 애착과 감사, 겸허함과 활력을 되찾는 것이 버킷리스트의 진짜 목적이 아닐까? 모든 이들의 버킷리스트의 방향이 이라면, 태아의 버킷리스트는 무엇을 향하고 있을까?

필자는 TV에서 자유롭게 낙태할 권리를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이 낙태에 대해 논할 때, ‘생명담론을 빼놓고 여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 필자는 이 시대 유명 여성운동가들의 입에서 저토록 무지하고 불공평하며 잔인한 말이 표정 변화 하나 없이 흘러나오는 것에 매우 놀랐다. 낙태에 대하여 침묵하지 않고 앞장서서 목소리를 내는 자들이라면 태아의 생명문제에 대하여 어떤 입장인지 분명하게 밝히기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어도 자신들이 태아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지 정도는 진지하게 토론할 자세가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낙태에 있어서 태아는 제1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생명담론으로는 낙태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생명담론을 건너뛰는 무책임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그들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간단히 스킵해버린 생명담론을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펼치고 싶다.

Photo by Glenn Carstens-Peters on Unsplash
Photo by Glenn Carstens-Peters on Unsplash

살아있는()’ 존재들은 단순히 ()’이라 부르지 않고 생명(生命)’이라고 부르는 것은 많은 생각을 가지게 한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이 죽음을 향해 가고 있지만, 죽기를 명령받기보다는 살기를 명령받았다는 뜻으로도 보이는 단어가 생명(生命)’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포 하나하나에 그 명령이 새겨져 있다. ‘생명(生命)’들은 존재하라는 이 명령에 따라 본능적으로 살기를 원하며, 죽기 전에 그 명령을 이어받을 존재들, 즉 후손을 남긴다. 그렇게 나의 생명과 자녀의 생명을 향한 사랑을 통해 이 명령이 충족될 때 생명을 만드신 분도, ‘생명을 받아 지키는 자도 온전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

그럼 이제 태아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해보자. ‘태아가 생명인가, 아닌가를 보는 관점에 따라 낙태에 대하여 첨예한 입장의 차이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태아는 살라는 명령에 가장 충실한 존재들이다. 태아의 모든 신경은 온통 살겠다는 목적과 의지에 집중되어 있다. 무언가를 보고 싶고, 놀고 싶고, 즐기고 싶은 욕구는 모두 열 달 뒤로 미루었다. 가장 사랑하는 엄마를 느끼고 싶은 것조차 살겠다는 목적을 위해 다른 욕구들과 함께 뒤로 미뤄놓은 태아이다. 아니, 살겠다는 목적 외에 다른 모든 욕구들을 아직 인지조차 못 하고 있는 존재가 태아이다. 이렇듯 캄캄한 어둠 가운데 탯줄 하나에 의지한 태아의 절실한 소원 한가지는 오직 살고 싶다.’이다.

살고 싶다.’

그렇다. 단 한 줄의 이 문장이 태아의 버킷리스트 전부이다. 태아의 버킷리스트는 다른 모든 이들의 버킷리스트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게 을 향하고 있다.

이처럼 살아내라는, 생존하라는 명령에 가장 충실한 존재이며, 스스로가 원하는 단 하나의 소원 또한 살고 싶다는 것밖에 없는 태아는 생명인가 아닌가. 필자는 이 땅의 모든 태아들이 무사히 생명지키기라는 자신의 목적을 반드시 달성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밝은 세상에서 생명의 위협 없이 귀엽고 재치 있는 소원들로 버킷리스트를 새롭게 채울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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