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눈을 감고 이 단어를 천천히

가슴에서부터 입술까지 끌어올려 본다

 

안지선 연구원(카도쉬아카데미 교육위원회)
안지선 연구원(카도쉬아카데미 교육위원회)

홍길동전에서 길동은 첩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다. 그는 눈앞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집을 떠나 야인이 되고 만다. 길동이 갖지 못한 것은 단지 아버지라는 세 글자의 단어가 아니었다. 길동이 가지고 싶었던 말, “아버지는 어떤 의미인 걸까?

'아버지'. 눈을 감고 이 단어를 천천히 가슴에서부터 입술까지 끌어올려 본다. 참으로 큰 말이 아닌가. 그 안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담겼는지, 얼마나 큰 힘을 지녔는지, 또 얼마나 뜨거운 온도를 가졌는지 누가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어린 시절 아버지는 자녀 앞의 장애물들을 큰 팔로 휘휘 헤쳐준다. 자녀가 다 자라면 아버지는 이제 자녀의 뒤에서 든든히 등을 바쳐준다. 그를 아버지라고 마음껏 부를 수 있는 것은 자녀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권리이다. 단어의 크기만큼 아버지에게서 큰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에게도, 아주 다른 모습의 아버지에게서 큰 상처를 받고 자란 사람에게도 아버지라는 단어는 그리움이고 동경이며, 뿌리이고, 우주이다.

육신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든지 우리 모두는 그렇게 아버지에게서 나와서 아버지를 향해가는 존재들로서, 인생이란 그 뜻 그대로의 진짜 아버지를 찾아가는 여정이라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땅의 아버지들은 자녀들의 참 아버지 찾기여정에서 나름의 이정표가 되는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아버지라는 세 글자는 종이 위에 쓰인 선 몇 개의 단순한 조합이 아니다. 만약 이 단어를 지우고 없애려는 시도가 있다면 그 목적은 분명 참 아버지, 즉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고 빼앗으려는 시도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있는 지금 이 시대에 지구상의 어떤 나라들은 아버지지우기를 이미 시작했다. 동성결혼이 합법인 나라들에서 모든 교육기관의 서식에 아버지’, ‘어머니를 지우고 부모1’, ‘부모2’로 쓰도록 법을 바꾸었다. 동성 커플의 자녀들이 학교 서류에 쓰인 아버지’, ‘어머니라는 표기 때문에 혐오와 차별을 느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남편’, ‘아내라는 단어도 파트너1’, ‘파트너2’로 바꿔 사용한다. 동성 커플들을 위한 조치들로 각종 공식서류에서 일상적이고 소중한 단어들이 형식적인 단어들로 대체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서류상으로만 머물지 않고 생활 속에도 강요되고 있다. 뉴욕의 어느 사립학교에서 아이들이 학교에 있는 동안은 일상적인 대화에서조차 아버지어머니라는 말을 쓰지 말라는 지침을 내려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어린아이들의 작은 입에까지 재갈을 물려야만 모두가 평등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라는 생각이 담긴 젠더주류화운동의 파도는 이제 대한민국을 덮치고 있다. 중앙정부와 일부 국회의원, 교육 당국과 각 지방자치단체, 국가인권위원회, 여성가족부 등이 끊임없이 시도 중인 차별금지법, 평등법, 건강가족법, 학생인권조례, 세계시민교육, 성인지감수성 정책들의 기저에 깔린 젠더주류화운동이 지향하는 세상에는 아버지/어머니’, ‘남편/아내’, ‘아들/’, ‘며느리/사위’, ‘/오빠’, ‘누나/언니’, ‘남동생/여동생과 같은 사랑스러운 단어들은 없다.

게이 커플에게는 어머니/아내/며느리라는 단어가 혐오로 들리고, 레즈비언 커플에게는 아버지/남편/사위라는 단어가 혐오로 들리기 때문이다. 남자로 태어났지만, 성을 바꾸고 싶은 형제에게는 /오빠/남동생이라는 단어가, 그 반대의 경우는 누나/언니/여동생이라는 단어가 혐오로 들려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할 것이다. 그러면 온갖 인권단체들은 일어나서 저 단어들이 제발 우리 귀에 들리지 않게 해달라고 시위를 하고 로비를 할 것이다.

젠더주류화 운동이 성공하고 동성결혼이 합법이 되어, 그들을 배려하느라 이같은 단어들에 대한 사용이 모두 금지된 사회를 상상해보자. 단어가 사라진 만큼 그 관계성도 희미해질 것이다. 대가 없는 사랑을 나눠주는 분들을 부를 단어도 없고, 관계도 끊어진 사회가 되는 것이다. 인류는 아마도 각자의 섬에서 공허함과 절망 속에 메말라가면서도 아버지어머니를 부를 수도 없고, 부를 줄도 모를 것이다. 필자의 이런 상상이 허무맹랑한 헛된 공상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지금의 젠더주류화 운동의 양상을 보면 이런 상상이 전혀 근거 없는 기우가 아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신분제도 등이 바뀔 때, 역사 속으로 사라져 사어(死語)가 된 호칭들이 수없이 많다. 이와 같이 결혼제도를 바꾸어 동성혼이 합법인 나라의 레즈비언 커플에게 입양된 아이들을 생각해보라. 이 아이들은 아버지라는 단어와 그 관계를 박탈당한 이 시대의 길동이 들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젠더주류화 운동가들이 그런 아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아이들과 사회 전체에게 아버지/어머니대신 부모1/부모2’를 사용하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길동은 아버지하나만 잃고도 야인이 되었는데, 우리 모두 길동이가 되라는 것인가.

그들의 계획이 정말 다 이루어져 아버지라는 단어가 역사의 뒤로 사라지고 고어 혹은 사어가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참 아버지라는 것을 전하기 전에 아버지가 무엇인지 먼저 알려줘야만 하는 참담한 상황에 놓이지 않겠는가. ‘아버지를 지우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도 찾을 수도 전할 수도 없게 하려는 사탄의 전략 앞에 온 교회가 지혜를 구하며 적극적으로 일어설 때이다.

 

대한기독사진가협회 제비/김종욱 님 작품
대한기독사진가협회 제비/김종욱 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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