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미포2차 포럼,
"보편적 고통에 대한 교회의 응답"을 주제로
천안교회당에서 열려

2021년 미래교회포럼(대표 오병욱 목사) 2차 포럼이 "보편적 고통에 대한 교회의 응답"이라는 주제로 28일 천안교회(담임 이재황 목사) 예배당에서 열렸다.

인사하는 미포 대표 오병욱 목사
인사하는 미포 대표 오병욱 목사

오병욱 목사가 폭우 가운데서도 대면으로 온라인으로 모여 주심에 감사 인사하고 기도함으로 포럼이 시작되었다. 

2021 2차 미포가 열리고 있는 천안교회당
2021 2차 미포가 열리고 있는 천안교회당

첫 번째 순서로 고려신학대학원 하재성 교수가 "복음과 보편적 고통(코로나 시대의 이해): 목회적 관점에서 가정과 관련해서 교회는 어떻게 보듬고 있는가? 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하 교수의 논문에 대해 채충원 목사(한밭교회)가 논찬하고 질문과 토론이 이어졌다. 다음은 하재성 교수의 발제문 전문.

발제하는 하재성 교수, 격리 조치로 인해 온라인으로 발제했다. 
발제하는 하재성 교수, 코로나 접촉자 격리 조치로 인해 온라인으로 발제했다. 

 


복음과 보편적 고통(코로나 시대의 이해): 목회적 관점에서

가정과 관련해서 교회는 어떻게 보듬고 있는가?

 

하재성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실천신학)

하재성 교수(고려신학대학원)
하재성 교수(고려신학대학원)

여는 글

2020710일 오후 6시부터 대한민국 정부는 우리 개신교회의 정규예배 외 각종 대면 모임 활동 및 행사 금지, 음식 제공 및 단체 식사 금지, 출입자 증상 확인 및 유증상자 등 출입 제한, 예배 등 종교행사 전/후 시설 소독하기 등 교회 핵심 방역수칙 준수를 의무화하였다. 당시 질병관리본부는 교회 이용자들에게 예배 시 찬송 자제, 통성 기도 등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말하는 행위 금지, 시설 내 음식 섭취 금지, 마스크 착용 및 이용자 간 거리 두기(2m, 최소1m) 등 구체적 지시사항들을 법적으로 강제하여 지키게 하였다.

20215월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코로나 19의 감염은 줄어들지 않아 국민들에게 방역의 피로감이 커가는 가운데 교회들은 방역 수칙을 지키면서도 예배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특히 대면 접촉이 제한된 상황에서 예배, 심방, 교제 등 핵심 사역을 유지하면서도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계속하려는 목회자들의 기도와 창의적 노력은 상상 이상이다. 비록 교회마다 형편과 사정은 다르지만,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코로나 이전보다 심도 있는 영적 돌봄과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장 및 여론조사와 교회 마케팅 전문기관인 미국의 바르나(Barna) 조사에 따르면 코로나 가운데서도 55%의 미국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영적 상태, 건강 상태, 재정 상태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으며, 43%의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이런 필요들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응답하였다. 비록 코로나로 정기적인 모임에 참여할 수 없는 성도들이 많아 33%의 목회자들은 제자 양육에 어려움이 있다고 보고하고 있지만, 그 외 66%의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위한 1:1 양육을 계속하고 있다고 말했다.1) 특히 SNS와 통신기술의 발달로 비대면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이 크게 작용하여 영상예배와 심방, 훈련과 소그룹 모임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계속해 가려는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감염 위험, 격리와 거리두기, 사회적 모임 제한 등의 방역 정책 한가운데서 생계 활동을 하는 성도들의 삶은 훨씬 치열하며,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들과 위험에 노출되어 왔다. 경제 활동의 위축으로 재정적 손실을 본 것은 보통이고, 청년들의 실업과 취업 기회 위축, 노인들의 고립과 우울증, 학부모들의 자녀 돌봄과 교육 부담, 감염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등 예배 문제를 제외하고서라도 성도들이 일상에서 경험하는 고민과 갈등은 헤아리기 어렵다.

이럴 때 교회와 목회자의 적절한 관심과 영적 돌봄이 다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비록 성도들의 고통을 즉시 해결해주는 것은 아닐지라도, 목회자의 사역은, 예일대학교의 목회상담학자 James Dittes의 말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현실을 [스스로] 진술하게 하도록 격려하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변화시키며, 필요할 때 창의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돕는데 깊이 헌신되어 있기 때문이다.2) 따라서 목회자가 섬길 수 있는 영적인 자원들과 교회가 제공하는 공동체 자원은 감염병 가운데 고통과 손실을 겪는 성도들로 하여금 고통 속에서의 감사, 영적 의미의 회복, 코로나 이후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유지하게 해주는 중요한 매개가 될 수 있다.

 

펴는 글

1. 보듬음의 핵심: “하나님을 아는 것

목회자가 성도를 보듬고 돌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종교개혁자 칼빈이 유일하게 선한 교황이라 일컬었던 그레고리 대제(주후 540604)는 미신으로 가득한 기독교를 성경 말씀에 기초한 공동체로 만들었던 개혁자였다. 목회적 돌봄에 관한 네 권에 걸친 그의 책 목회율(Liber Regulae Pastoralis)은 좋은 목회자들을 마음의 의사라 지칭하면서, 그들의 자격과 태도와 선택, 그리고 적절한 활동에 대하여 실제적인 목회 지침들을 제공하였다.

그레고리에 따르면 목회자는 양무리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거꾸로가 아니다. 그는 목회자의 참된 영적 성장은 수도원의 금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일의 삶의 혼돈 가운데서 복음을 주석하는 것이라 말한다. 목회자의 권위가 강했던 중세 초기에 그레고리는 참된 목자는 양떼를 보호하며 보존할 뿐만 아니라, 따뜻함과 권위 사이에 균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돌봄이란 통치자가 자기 백성들에게 어머니의 인자함과 아버지의 징계를 보여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들을 위한 염려와 징계가 가혹하거나 인자함이 해이해지지 않도록 신중해야만 한다.3)

 

그레고리는 목회자가 생각에 있어 순수해야 하며, 행동의 모범이 되고, 침묵에서 신중하며, 유익한 말을 하고, 모든 사람에게 동정하는 가까운 이웃이 될것을 요청한다.4) 이를 위해 목회자는 겸손해야 하며, 자신의 목회적 권위를 잘 인식하여 신실한 성도들을 동등한 존재로 여기며 비뚤어진 사람들에게는 담대하게 교정을 실행하도록 요구하였다.5) 그가 말하는 참된 목회적 돌봄은 곧 왕처럼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권세자가 아니라 우리의 신실한 믿음의 조상들처럼 양떼의 목자가 되는 것이다.6)

그레고리는 목회자의 철저한 자기 성찰과 규율의 적용을 요구한다. 그에 따르면 목회자는 자신을 먼저 강하게 쳐야 한다... 자신의 무감각이 무엇이든 세심한 마음으로 찾아내어... 엄격한 혹평으로 [스스로를] 교정하고, 통곡 가운데 자기 잘못을 [먼저] 처벌해야 한다.”7) 그런 순수한 목자의 마음으로 양떼인 성도의 필요가 어떤 것인지 이해하고 거기에 우선순위를 두어야만 하는 것이다.8)

전염병이라는 큰 위기 가운데서도 목회자의 목자로서의 임무에 있어서 우선순위는 분명하다. 그레고리의 말처럼 결국 양떼를 먹이는 목자의 핵심 임무는 혼란스런 삶의 무질서와 혼돈 가운데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석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순수한 복음으로 먼저 목회자 자신의 삶이 변화되고, 이어서 그 복음을 전달받는 성도들의 삶이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20세기에 등장한 목회상담운동으로 전통적 영혼 돌봄의 개념은 개인화된 위로와 마음에 난 상처의 치유로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Freud의 심리분석학이나 Carl Rogers의 인본주의 심리학이 초창기 목회상담의 큰 줄기를 이루면서 자칫 심리학에 기울어진 돌봄이 되는 것은 아닌지 20세기 신학자들과 성도들의 우려를 낳았다.9) 다행히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심리학 위주의 목회상담의 흐름을 반성하며, 거기에 신학과 복음을 다시 회복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과연 그 목소리들이 호소력이 있어서 한편으로는 상담에 있어서 성경 무오성과 죄의 고백을 중시하는 Jay Adams의 성경적 상담이 기독교 상담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졌고, Gary CollinsScott Peck과 같은 기독교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이 성경 중심의 보수적 신학을 유지하면서도 심리학적 균형을 유지하려 하였다. 목회상담에서도 Reinhold Niebuhr, Paul Tillich, Don Browning과 같은 신학자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하여 심리 역동보다는 신학적 윤리, 정신분석학적 환원주의보다 기독교적 인간관이 적극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후예들 가운데 다수는 여전히 목회적 돌봄과 상담에 있어서 보편적 기독교 진리보다 개별적 돌봄에 더 우선순위를 두는 경우가 허다하다. 성경 본문을 저버리고 현실 문제만을 풀어주려고 설교했던 과거 뉴욕의 Harry Fosdic 목사나, 동성애와 신앙 사이에서 갈등하는 많은 사람을 위해 성경의 기준을 재고해야 한다는 Larry Graham과 같은 목회신학자들의 주장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성경 본문과의 진지한 씨름의 부재, 전통의 본질적 연속성과 그로 인한 양육의 상실, 진정한 필요보다 겉으로 드러나는 필요들만 치유함으로써 기독교의 궁극적인 문제를 다루는데 실패하였다.10) 저명한 성경해석학자 Anthony Thiselton은 이처럼 성경 텍스트보다 현재의 상황에 더 큰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성경 텍스트를 도구적 자료정도로 취급하는 현대 실천신학에 대해 경고한다.11) 비록 그가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상황적 개별성과 공감과 들음의 목회적 민감성에 대해 이해하지만, 성경 텍스트가 개인화 되거나 성경 자료와 현재적 상황을 등가의 대칭물로보아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한다.12)

영혼을 돌보는 것과 돌봄의 기준을 변경하는 것은 결코 동일할 수 없다. 더군다나 기독교 진리의 핵심인 성경의 성령 영감성을 부인하고 돌봄의 상황에 따라, 혹은 돌봄 대상자의 형편에 따라 진리의 기준을 변경한다면, 그것은 더는 기독교일 수 없다. 코로나 19라는 심각한 보편적 전염병 상황에서 교회가 가정과 성도를 어떻게 보듬어야 하는가 하는 것도 이 맥락에서 먼저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 돌봄의 핵심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변함없는 복음의 해석과 순수한 선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때로 상담자들이나 사역자들이 오해하는 것은 사람을 돌보는 것이 마치 궁극적 진리와 맞먹는 사랑의 행동이라 여기는 것이다. 물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해야 할 인간으로서의 우선순위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죄책감 느끼는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하나님이나 천국이 인간 창의력의 산물일 뿐이므로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영혼을 무책임하게 만드는 인간 중심적 상담자들의 임시 반창고 처방일 뿐이다.

돌봄에 있어 위로가 중요하다. 그것은 바울이 로마 교회에 요구하듯 함께 감정을 공유하는 공감에서 온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12:15). ‘무정’(無情, apathy)이 시대와 사회의 정신이던 로마 시대에 바울이 교회를 공감 공동체로 소개한 것은 그 시대 정신에 비추어 충격적인 가르침이었다. 기독교 공동체의 특징이 감정을 이해하고 일치시키는 공감이기 때문이다. 공동체 안에서의 감정적 필요에 응답하는 것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참된 이웃사랑이었다.

이처럼 기독교 상담에 있어 위로와 공감은 경청의 핵심이지만, 복음으로 새사람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분별력이 있어 진리가 없거나 왜곡된 달콤한 위로가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없음을 잘 안다. 비록 달콤하지 않더라도 말씀의 책망을 받는 것에서 오히려 영혼의 참된 위로를 누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코로나 19 상황에서 교회와 목회자가 성도들과 그들의 가정을 보듬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설교를 통해 순수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한 재난과 상실은 어쩌면 모든 사람의 몫이다. 어떤 사람은 수익을, 또 어떤 사람은 직장을, 어떤 사람은 건강을, 또 어떤 사람은 가족을 상실했을 수 있다. 욥의 친구들은 모든 것을 잃은 욥을 위해 첫 7일 동안 함께 애통하며 위로하였다. 지금도 욥의 친구들처럼 유대인들은 낡은 상자나 탁자에 앉아 애도하는 시간을 가지는 시팅 쉬바(sitting shiva)를 수행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바른 복음과 위로는 없고, 경직된 인과론을 거꾸로 추측하여 욥과 그의 자녀들이 범죄한 것이라 몰아세웠다. 그것은 욥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는 행동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38:2).

그러나 하나님은 아들과 딸들을 잃고 모든 재산을 잃은 욥에게, “왜 나에게?”라는 질문에 대한 답 대신 초월적인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한낱 제한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을 비교하여 질문하신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38:4). 이유를 알 수도 없고 끝을 알 수도 없는 고난을 겪을 때, 고난 당하는 인간에게는 감추어진 비밀이 창조자이며 초월하여 계신 하나님께는 알려진 것을 알기만 하여도 우리에게는 위로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아는 것,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분의 관점에서 삶을 재조명/통찰하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로운 처분에 의탁하는 것은 순수하게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서 가능한 영적 결단이다. 어떤 말로도 위로받을 수 없고, 또 어떤 값이나 행위로도 보상받을 수 없는 인간의 고난과 고통이 초월하여 인간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비로소 궁극적인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비록 우리 시대의 문화를 지배하는 내러티브에서 고난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손을 써 볼 도리가 없이 부정적’”이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통을 피하려 하지만,13)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 분과 더 가까워지는 방편이 된다.

치유적 예배에 대한 필자의 2013년 논문의 주제는 치유 목적의 예배가 진정한 예배일 수 없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바른 예배는 인간에게 치유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하나님의 도움으로 인간 창조의 원형인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회복되고 발휘되는 시간이 바로 예배이.... ...진정한 모든 예배는 하나님 중심적이다. 인간의 마음이 중요한 것은 맞지만, 예배의 중심은 말씀이며, 그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예배의 참된 중심이 되신다. 예배는 예배이며,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목적을 가질 수 없다.”14)

 

어떤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갔을 때, 그는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죄를 용서하시고 죄인을 환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다: “이처럼 신적 행위가 중심이 되는 예배에는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의미를 가진다. 초월자(the Holy)를 경험한 것 자체가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인 것이다.”15)

예배는 단회적으로 끝나는 사건이라기보다 예배자가 고통과 고난을 겪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지속되고 반복되는 보편적 신앙 경험이다. 예배 인도자들의 권위는 은혜와 말씀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다.16) 아울러 예배가 비록 전적으로 하나님께 향한 것이지만, 예배는 정돈되지 않는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모여 드리는 것이다.”17)

물론 예배를 통해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에도 맹점은 있다. 그것은 예배 인도자가 고통당하는 예배자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형식에 맞추어 예전을 집행함으로써 예배자의 필요를 물리쳐버리는 것, , 성도들의 삶과 괴리된 예배 인도자의 예배 집행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18) 예배를 예배자들의 삶과 통합하기 위해 예배 인도자는 좋은 경청자이어야 한다. 예배 인도자는 영혼 돌봄에 해로운 경직성을 내려놓고, 예배자들의 삶에 정서적으로 깊이 있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인간의 상황에 반응하고 반영하는 인격적 유연성을 가지고 살아있는 예배를 인도해야한다.19)

그렇지만 예배 자체는 예배 인도자나 예배자 성도의 개별성이 주목 대상이 아니다: “예배에 있어서 어느 성도의 이야기나 고난의 개별성이 예배를 흔들어 놓을 만큼 크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참된 예배의 대상이자 주체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전의 규범적 목표는 인간에 대한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20)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필요는 예배를 통해 서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예배 인도자는 고통받는 그리스도인들이 예배의 자리에 나오도록 초청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바른 예배를 드리도록 안내해야 한다. 깊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예배에 스스로 나옴으로써 참된 돌봄과 보듬음의 행위를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돌봄이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돌봄은 진리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오는 것이며, 고통의 상황과 무관하게 삼위 하나님만이 예배자 곧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실 수 있다. 목회돌봄과 상담사전의 표현처럼, “기독교 예배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신비 가운데 인간을 형성하고 표현하는 것이라면 예배와 목회적 돌봄의 관련성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21)

 

 

2. 보편적 고통의 영적 이해와 개별적 공감

듀크 대학교의 기독교 윤리학자 Stanley Hauerwas는 고통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이론적이기보다 우리가 알고 사랑하는 실제 사람들에게 발생하여 우리 마음을 찢어 놓는 것이라고 말한다.22) 그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고통이 무엇인지 적절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으며 고통이 주는 어려움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도 전무한 형편이다. 그래서 그는 고통이 아무런 초점이 없는 것이라 정의하였다.23) 의미와 목적을 찾기도 어렵고, 문제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손쉬운 위로나 공동체의 한 부분으로서의 이야기조차 이어가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행복과는 달리 고통의 가장 어려운 점은 쉽게 공유하기 어려운 침묵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24) 고통은 독특하여 우리가 평소에 할 수 있는 이야기의 흐름을 끊고,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거나 마음을 나누기도 힘든 깊은 침묵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나마 예술가들이나 문학가, 다큐멘터리나 영화 제작자들이 말하지 못하는 개인과 집단의 고통을 예술과 영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은 창의적인 고통 공유와 치유의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의 개별성에 대하여 Hauerwas어느 두 고통이 같은 법은 없다: 나의 고통은, 예컨대, 나의 개인사의 상황에서 발생하며 그러므로 그것은 나만의 고유한 것이라 말한다.25) 비록 코로나 19 전염병이 전세계적인 보편적 고통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맞이하고 경험하는 고통은 개별적이며, 거기서 느끼는 고통의 강도도 각각 다르다.

고통에 답하다의 저자 Tim Keller 목사 역시 고통과 역경의 다양성만큼 다양한 성경의 가르침을 강조한다. 시련을 겪고 있는 어떤 사람도 하나같이 시련을 겪고 있지만 고통과 괴로움의 원인과 모양은 천차만별이다.”26) 각자가 겪는 시련과 고통이 다르듯, 그들이 위로 받고 힘을 얻는 근원도 다르므로, “고난의 다양성을 인식하지 않는 한, 역경에 제대로 대처하거나 다른 이들이 올바르게 맞서도록 도울 수 없다.”27)

인생의 고통과 시련의 특성상 개인화 되고, 그 깊이 역시 개별화되어 고립된 가운데 목회자가 가진 지위는 특별하다. 다른 어떤 직업과 달리 목회자에게는 고통당하는 사람을 주도적으로 찾아갈 수 있는 심방의 권한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 코로나 전염병 시기에 심방을 부담스러워하는 기저질환자들이나 젊은 가족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것을 존중하는 것도 목회자로서는 성도를 목회적으로 돌보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목회자가 성도들을 정기적으로 개별 방문하고, 그 가운데서도 고통받는 성도들을 돌보는 것은 마땅히 기대되었고 바람직하게 여겨졌다.

예컨대 과거 필자가 훈련받은 병원 임상 사역 가운데(Clinical Pastoral Education) 환자들의 목회자 방문에 대한 기대와 신뢰는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위로의 사역이 이루어지게 하였다. 병석에 함께 해주는 목회자의 방문과 경청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임석의 사역’(ministry of presence)을 실현하였다. 이것은 곧 17세기의 청교도 목회자 Richard Baxter가 말하는 심방의 의미이기도 하다. 그에 따르면 참된 목자는 슬픔과 눈물을 함께 나누고, 잘 경청하며, 비밀을 유지하고, 양심이 과도하게 요동할 때도 검열관이 되지 말아야할 것을 강조하였다.28) 그는 공적인 설교만으로 목회사역은 충분하지 않으며, 개인적 가르침과 개별적 돌봄을 위해 목회적 기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목회자는 특히 고난당하는 성도들을 만나고 경청해야 할 의무가 있다. “고난은 인간을 겸손하게 하고 자신의 결점을 자각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29) 그러나 이처럼 낮아진 어색하고 이상한 고난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그나마 부끄러움 없이 마주하여 신뢰 가운데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목회자들이다. 이들은 비밀을 유지하고, 집중하여 경청하며, 또한 하나님께 기도하며 축복할 권위를 가졌기 때문이다. 주님께 위임받은 권한으로 하나님의 입이 되어 복음을 선포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귀가 되어 성도와 가정의 어려움을 경청하고 함께 아파해 주는 성령님의 사역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목회자의 설교는 보편적이지만 돌봄은 개별적이어야 한다. 목회자는 최선을 다하여 성도들의 개별적 고통에 경청하고 거기에 공감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성도들은 이미 목회자의 보편적 가르침을 많은 설교를 통해 익히 알고 있다. 고통의 개별성에 훈련된 공감으로 반응하지 않은 채 돌봄을 일반화해버리거나 돌봄의 순간마저 경청 없는 훈시와 일방적인 코멘트로 마무리한다면, 고난 중에 있는 가족들을 보듬기보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곧 욥의 친구들처럼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욥의 친구들은 보편적 신앙적 판단으로 욥을 정죄하고, 죽은 자녀들을 비난했을 뿐 욥의 특별하고 개별적인 이야기에는 귀를 막았다. 욥의 매우 예외적인 이야기 곧 순전하므로 고난을 받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고난임을 받아들이지도, 인정하지도 않았다. “욥의 삶에는 하나님의 추궁을 받을 거리가 하나도 없었다... 욥의 시련은 응징이라든지, 삶에 도사린 어떤 흠을 책망하고 바꾸려는 훈계가 아니었다.”30) 그들은 일방적인 판단자이자 교리의 적용자들이었을 뿐 훈련된 공감으로 사정을 경청하거나 그의 고통의 개별적 예외를 인정하지 않았다.

욥과 같이 가족의 죽음과 같은 갑작스런 상처와 상실을 경험하는 것을 트라우마 곧 외상(外傷)이라 부른다. 이것은 그리이스 어로 상처”(Τραύμα)이며, 피부가 상하거나 신체적으로 외형이 파손되는 것을 말한다. 심리학에서 트라우마는 심한 신체 손상이나 죽음을 초래한 충격적인 사건을 뜻하며, 대표적으로 교통사고, 강간, 폭행, 유괴, 살인, 화재, 전쟁, 자연재해(지진, 홍수, 화산폭발)등을 가리킨다.31)

삶에서 트라우마가 발생했다는 것은 삶의 의미 생성(meaning-making) 기능이 파열된 것을 의미한다. 그로 인해 한 사람의 인생에서 자신을 보는 방식, 세상을 보는 방식, 그리고 다른 사람을 보는 방식이 충격적으로 변형되는 것을 경험하며, 회복 탄력성이 저하될 수 있다.32) 특히 가족의 갑작스런 죽음은 언제나 트라우마를 일으킬 수 있다. 코로나로 입원 가족 방문이나 장례의 애도조차 할 수 없을 때 코로나 이후 트라우마 재경험 가능성도 높을 것으로 예상한다.

다만 트라우마의 똑같은 충격을 받더라도 그것을 느끼는 강도는 사람과 가정에 따라 다르므로, 성도들을 돌보는 목회자는 경청을 통해 회복 탄력성(resilience)의 개별성을 이해해야 한다. 회복 탄력성이란 위기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능력 즉 가족들이 스트레스와 위협, 트라우마, 혹은 위기에, 이전보다 더 강하고 더 잘 대처할 수 있는 자원들로 성장과 회복의 잠재력을 가진 것을 말한다.33) 회복 탄력성을 발견한다고 하는 것은 그 가정의 문제에 집중하기보다 잠재력과 가능성을 더 관심 있게 발견하고 부각시킴으로써 회복의 능력을 확장하는 것이다. 여기에 필요한 친구와 가족의 네트워크와 공동체 가운데 목회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가족 내에서의 공통 신앙은 다른 무엇보다도 가족들을 견고하게 묶어 주는 줄이며, 가족들이 신뢰하는 사역자는 가족들이 서로를 격려하고 회복 탄력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상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성도들이 도움을 요청하는 가정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부부 혹은 부모 자녀 사이의 소통에 관한 문제이다. 물론 여기에는 자녀 양육, 재정문제 등에 대한 의문도 포함된다.34) 그러나 가족과 가정의 문제는 표면상의 서술 내용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940년대 세계 제2차 대전 이후 가족 이론에 유입된 싸이버네틱스(cybernetics) 개념은 가족 문제에 있어서 문제의 내용 자체보다 가족 간에 일어나는 역동 즉 가족 구성원 간의 소통의 과정에 더 큰 관심을 두게 되었다. 싸이버네틱스는 우선 정보의 전달과 통제를 통한 기계적 소통의 학문이지만 동시에 모든 종류의 시스템에 대한 연구이므로 가족 이론에서 중요한 가족 체계 이론 역시 싸이버네틱스의 피드백 분석을 통해 가족들의 행동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목회자는 성도 한 사람만 아니라, ()가 속한 전체로서의 가족 체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이해해야만 그 사람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가족 체계의 역동성을 분석하면서 가족 간의 손상된 유대 관계를 치유하고 좀 더 바람직한 모습의 가족으로 변화하도록 안내하여야한다.35) 예를 들면, 압살롬의 비행과 반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암논의 다말 강간 사건과 아버지 다윗 왕의 장기간 갈등의 방치라는 구조적 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싸이버네틱스는 사회 현실이나 실재가 어떻게 구성원들의 상호소통에 의해 만들어지는지를 연구하는 사회구성주의(social constructionism)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 결과 가족 구성원이 가정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어떻게 말하는지와 같은 내러티브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결국 사건들의 의미도 개인이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달리 결정되고 상대화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물론 목회자는 가정에서의 신앙 기준과 행동에 대해 규범적이고 윤리적으로 이야기해야 하는 상담자이다. 그런 면에서 사회구성주의가 말하는 상대주의적 가치 혹은 포스트모던 다원주의의 가치를 그대로 수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족 개개인의 이야기에 충분히 경청하되 영적 의미를 탐색하는 데 있어서는 경청과 판단 사이에 균형 잡힌 신학적 분별력을 소유해야 한다.

가족 이야기의 개별성에 반대되는 것이 피상성이다. 성도들의 개별적인 사정을 경청하지 않은 채, 혹은 그 이야기의 맥락을 가족체계의 차원에서 전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표면적으로 사건만 이해하는 것은 성도들의 영적 안내에 방해를 일으킬 수 있다. 내면과 외면, 가족 관계와 소통을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채 경험에 기초한 규범만을 내세우는 것은 마치 엘리 제사장이 한나의 마음 아픈 사연을 알지 못한 채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삼상1:14)고 잘못 분석, 잘못 충고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면밀하게 경청하고 개별적으로 응답하는 것이 참된 돌봄이다.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고 적절하게 응대하는 것이 진정한 돌봄이다.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거나 수용되는 일은 인간 삶에서 매우 값진 차원이다. 그것은 또한 어떤 종류의 돌봄이든 그 돌봄의 첫걸음이기도 하다....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이야기와 우리의 반응은 서로 연결된다. 우리는 참으로 빈번하게 자 알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대화에서조차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상대를 쉽사리 무시하거나 충고만 하려 든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바르고 주의 깊게 듣고, 이해하는 것을 정확하고 애정있게 나누기 위해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안전한 환경을 조성하여 거기서 가장 적절한 시간에 친밀한 이야기를 나누려는 결심은 돌봄이 필요한 모든 관계 속에서 긴요한 선물이다.36)

 

개인과 가족에 따라 코로나를 경험하는 강도는 다르다. 내성적이고 관계 자원이 충분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따로 예배를 드리는 전염병 상황에 더 잘 적응할 수도 있다. 반면 외향적이며 관계 의존적인 사람들에게는 비대면 예배가 답답하고 공포스러우며, 자녀들의 공부마저 책임져야 하는 새로운 임무들이 큰 압박감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코로나가 공동체 전체의 일상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는 상황에서 다양한 종류의 트라우마는 의미생성(meaning-making)의 파열자신을 보는 방식, 세상을 보는 방식, 그리고 다른 사람을 보는 방식에 변화를 일으킨다.37) 여기에 필요한 것은 개별적인 사람 돌봄이며, 내러티브의 관점에서 돌봄이란 곧 이야기 들음을 의미하는 것이다.38)

가족들은 새롭고 다양한 불확실성의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새로운 결정들을 내려야 하는 부담과 위기에 처하였다. 말 그대로 불확실성은 크고, 긍휼은 드문 시기,” 그리고 사람들은 갈등하며 힘들어하지만 말하지는 않는시기를 맞이하였다.39) 거기에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의미생성의 기능은 약화되었다. 그럴 때 목회자를 통한 개별적 돌봄과 심방에서 오는 경청과 공감은, 예일 대학교의 목회상담학자 James Dittes의 언급과 같이, 성도들의 삶에서 의미가 슬픔을 극복하고, 전체성이 해체를 극복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40)

 

3. 목회적 돌봄의 창의성과 교회의 소망

1) 목회 현장의 어려움과 창의적 돌봄

코로나 19 시대에 한국교회가 한때 정부와 미디어로부터 감염원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면서 코로나 이후의 전망이 매우 어둡기도 하였다. 그러나 필자가 20여 명의 담임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코로나 시대, 성도들의 가정을 돌보는 교회의 심방과 상담에 대해 문의하였을 때, 비록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는 코로나 이전과 같이 회복되지 않았을지라도, 주님의 교회는 결코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교회마다 규모가 다르고 교회가 자리한 지역 상황이 다르지만, 성도들을 참된 예배자와 제자로 세우려는 목회자들의 목양 노력은 힘든 상황에서 더욱 창의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 코로나 이전보다 성도들의 헌신과 선교 헌금이 더 많아졌다는 보고를 보았을 때는 전염병 때문에 발생한 집회 제한과 통제가 오히려 교회의 생명력을 더욱 빛나게 함을 알 수 있었다.

(1) 고난으로 인한 복음의 순수성 회복

전남에서 사역하는 한 목회자는 처음에 코로나 19로 인한 예배 모임 제한으로 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하였다. 노년층 성도들이 많은 탓에 예배로 모이거나 심방을 하는 것이 많이 어려워졌고 정기적인 모임 가운데 일부는 모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모임이 줄어들고 목회자에게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서, 일정에 쫓겨 바쁘게 일하는 대신 자신이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달려왔던가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른 어떤 행사나 봉사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시 전하고 성경 말씀을 더욱 순수하게 가르치는 쪽으로 설교와 목회의 방향을 잡았을 때, 성도들이 더 행복하고 진지하게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을 체험하였다고 하였다. 결국 코로나 19라는 세계적인 전염병과 예배 모임 금지라는 행정명령 가운데서 목회자에게 주어진 잠깐의 쉴 틈이 교회에 전파되는 복음을 더욱 순수하게 만든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2) 대면 예배에 대한 정공법돌파

코로나19 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교회들은 비대면 예배를 진행하면서도 방역 지침을 준수하며 예배당에서의 대면 예배를 계속해 왔다. 비대면 예배가 예배자들과 교회 이웃들이 느끼는 감염 불안에 대한 이웃사랑의 배려였다면, 힘들어도 대면 예배를 계속해 온 교회들은 코로나 19 가운데서도 예배를 계속하기로 선택한 것에 대한 자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교회의 변함없는 예배는 성도 개개인과 가정을 돌보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목회적 돌봄이다. 예배는 고통 가운데 있는 성도들의 다양한 사정과 형편을 품을 수 있는 큰 품과 같다. 목회자의 예배 인도와 성경 중심의 설교는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하나님의 음성이면서도 그들의 이야기를 품는 큰 이야기이다. 대면예배에 중점을 두고 예배를 계속해 온 다소 보수적인 분위기의 한 교회 목회자는 시대에 흔들림 없이 말씀(성경) 중심으로 바르게 가려고 하는데 그 점이 성도들에게 공감을 주었다고 평가하였다(W교회 P목사). 그 과정은 힘들었지만 이제 와서 보면 그것이 성도들의 자랑과 자부심이 되었다.

(3) 대면 심방의 변화와 심화

네 명 이상의 모임이 금지되면서 코로나 이전의 심방이 소형화되어 가정이나 식당, 카페 등에서 심방이 이루어지는 경우들이 많다. 비록 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 어려운 가정을 심방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만, 수도권의 한 목회자에 따르면 오히려 목회자 부부만 참여하는 지금의 심방이 훨씬 집중이 잘 되고 산만해지는 것이 없어서 유익하다고 말한다. 이전처럼 많은 인원이 함께 가정 심방을 가게 되면 목회자가 의도하지 않은 엉뚱한 대화들이 시간을 많이 차지하고 초점을 흐트러뜨리는데, 목회자 부부가 주도하는 개인 가정 심방은 훨씬 집중력이 높고, 또 이전처럼 음식을 나누거나 오랜 시간을 사용하던 번거로움이 없어서 성도들이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한편 부산지역의 한 목회자는 혼자 식사하는 혼밥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목회자 부부와 같이 밥을 먹는 네 사람의 같밥모임을 만들어, 몇 개월 동안 꾸준히 부부 혹은 혼자 신앙생활하는 사람 둘을 묶어, 방역 지침에 따라 네 명이 함께 목회자가 대접하는 주중 저녁 식사를 통해 상담했을 때, 성도들의 대화의 깊이와 성도와의 교제, 그리고 예배의 분위기가 점점 더 친밀해지고 목회자와의 영적 소통이 원만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하였다. 목회자 부부가 직접 심방할 수 없는 경우에는 2명의 권사나 심방 특공대를 활용하여 교회, 가정, 식당에서 심방과 교제를 실시한다.

(4) 대면 심방의 대안들

때로 외로운 노인 성도들은 목회자들의 심방을 원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자녀들은 부모에 대한 염려로 공식적인 심방을 거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린 아이들이 있는 젊은 부부들의 경우에도 목회자의 심방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 이에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SNS나 영상 통화를 비롯한 창의적인 방법으로 대면 불가의 어려운 상황을 풀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우선 목회자들은 대면 심방을 거절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한결같이 공감하고 존중해 왔다. 그들을 안심시키고 건강을 지켜주기 위해 전화, 카카오톡, 심지어는 손편지로 신앙적인 안부를 전하고 기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교회에 따라 결석자들을 매주 전수 전화하고 연락하여 심방 기도를 실시하였다.

지방의 한 대형교회는 2021년 부활절 이후로 줌을 활용한 구역 심방과 소모임으로 성도 가정의 기도 제목을 나누고 합심 기도를 하게 되었다. 줌이 처음인 성도들도 이런 모임을 통해 신앙적 훈련과 교제를 하는 것에 대한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줌을 통해 성도들은 교회 미래에 대한 제안, 애로사항에 대한 요청을 하면서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가고 있는데, 이 교회의 L 담임 목사의 말처럼 어려울 때 뭐든 해보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새로운 시도들을 하고 있다.

비록 직접 얼굴을 보지 못하지만 형편에 따라 심방의 방식을 바꾸어줌으로써 감염병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을 존중하고, 동시에 위로를 전할 수 있었다. 어떤 목회자는 가정 심방 예배 대신 집 앞에서 마스크를 쓴 채 간단히 기도만 하지만 성도들은 여전히 감사한 마음으로 심방을 받았다.

(5) 동영상과 성경 쓰기를 통한 양육

또 다른 교회는 영상 모임을 통해 안부를 묻는 심방 그 이상으로 신앙 자료를 공유하고 교육하면서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도모하고 있다. 그런 교회들은 줌이나 유튜브 동영상을 활용하여 양육훈련, 단계별 제자 훈련을 계속하여 진행하고 있었다. 비록 현장의 모임만큼 많은 숫자가 참여할 수는 없어 이전보다 소수가 참여하지만, 유튜브 영상 녹화 덕분에 동시간에 참여하지 못한 성도들이 시간이 다르더라도 언제든지 원하는 시간에 참여할 수 있고, 다시 보고 듣고자 하는 분들의 반복 학습에 이런 교육의 방식이 훨씬 도움이 되었다.

또 다른 교회는 1주일에 성경 한 장을 나누어쓰고 교회 카톡방에 올려 서로 확인하는 사역을 한다. 목회자는 퀴즈를 출제하고 성경 해설 영상을 올리며, 성도들은 핵심구절을 쓰고 가족 단위의 감사일기를 기록함으로써, 목회자는 성경을 더 연구하게 되고, 성도들은 말씀을 반복적으로 익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6) 소그룹을 통한 상호 돌봄

비대면의 상황에서도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은 코로나 이전 수준의 소그룹 모임과 훈련을 진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비록 소그룹 모임의 형태가 비대면으로 달라졌으나 평소 소그룹의 상호 연결성이 지속된 덕분에 서로 안부를 묻고 성도들이 스스로 연약한 지체들을 돌보는 일을 자발적으로 감당하고 있었다. 특히 소그룹이 평소 자신의 연약함을 나누고 서로 공감하는 공동체로 훈련된 교회에서는, 비록 코로나 19 상황이 엄중하고 까다롭지만, 목회자의 피로도가 덜하고, 성도 상호간의 친밀감이나 소속감이 남다름을 볼 수 있다. 이런 교회일수록 어려운 상황에서도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의 만족도가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소그룹, 가족 단위의 교회 구역 연대감은 시대적으로 서로 만나기 어려울 때 더욱 빛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7) 코로나를 복음 전파의 기회로 삼음

전도에 중점을 둔 교회들은 코로나를 오히려 전도의 기회로 활용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런 교회의 목회자는 코로나가 모든 사람에게 더 많은 두려움과 고립과 고독감을 주기 때문에, 거꾸로 생각하면 불안한 영혼들을 돌보고 전도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임을 알고 더욱 적극적으로 전도에 매진하는 것이다. 비록 많은 사람이 서로와의 만남과 교제에서는 단절되었으나, 교회 성도들의 관심과 돌봄으로 훨씬 큰 열매를 맺는 시기라는 것을 인식하고 영혼 구원에 더 중점을 두는 것을 볼 수 있었다.

(8) 이웃 구제와 선교 헌금의 확대

가장 고무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이전부터 해 오던 구제와 선교가 더욱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을 위해 특별헌금을 하는 교회들이 많고, 어려운 가정들을 선별하여 장례비를 일부 혹은 전부 구체적으로 지원하는 교회들도 있었다. 코로나로 모두가 어렵지만 성도들의 자발적인 목적헌금으로 어려운 성도들과 이웃을 섬기는 일은 계속되었다. 아픈 이웃의 백내장 수술비를 제공하기도 하면서 오히려 코로나 시기에 이전보다 더 많이 돕고 선교비도 더 많이 드릴 수 있게 되었다는 교회들도 있었다.

 

2) 코로나 19이후 돌봄 사역의 요구와 전망

전문가들에 따르면 조만간 코로나 19는 반드시 종식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미 집단면역 단계에 들어갔고, 지난 59일에는 미국에서도 충분한 백신 보급으로 실내 마스크 착용에 대한 규제 완화가 곧 있을 것이라고 미 질병관리본부 Anthony Fauci 소장이 발표하였다.41) 그렇다면 교회 역시 비대면 예배와 모임으로부터 이전의 대면 예배와 모임으로의 전환을 준비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렇다면 비대면 시대를 견뎌낸 교회와 목회자들의 창의성은 이제 곧 목회 일상의 재적응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물론 비대면을 통한 돌봄은 앞으로도 보조적인 목회적 돌봄의 방법으로 사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혼자 생활하거나 먼 거리에 있는 가족들을 영상 매체로 대화하며 접촉하며 돌볼 수 있다는 사실은 코로나가 가져온 부차적인 선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비대면 돌봄이 대면을 통한 심층 돌봄을 대체할 수는 없다. 사람 돌봄은 단편 정보로 해결할 수 없는 정서적 복합성을 가졌고, 더구나 영적 돌봄은 또 다른 차원의 집중과 이해가 필요하므로 기본적으로 충분한 시간의 대면 만남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코로나 이후에 목회자는 자신을 분주하게 하는 많은 행사 중심의 사역을 재고하고, 더욱 순수한 복음 전파와 영혼 구원을 위하여 기도와 성경 해석과 설교 연구에 더 중점을 두는 것이 필요하다. 코로나 이후의 심방이나 상담 역시 성도 개개인의 이야기를 경청할 겨를 없는 형식적인 만남이나 행사가 아니라 개개인의 사정을 좀 더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공감의 깊이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어려움을 겪는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시대 상황을 막론하고 교회가 관심을 두고 계속해야 할 섬김과 돌봄의 행위이다. 이웃에 대한 물질적 구제만이 아니라 코로나로 발생한 정신적, 신앙적 고통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코로나 때문에 발생한 성도와 이웃들의 공포심, 죄책감, 분노, 소외감, 우울증을 어떻게 경청하고 공감할지 목회자는 마음으로 준비해야 한다. 영국의 뉴스 채널인 Sky News에 따르면 코로나는 다음 세대를 상실의 세대로 만들었고, 그 결과 공부도, 직장도, 가정도, 꿈도 희생당하는 세대가 되었다.42) 여기에 등장하는 Timothy는 코로나로 봉쇄된 세상에서 태어난 아기이다. 아이 엄마 Laura는 가장 어려운 시기에 태어난 아이에 대한 죄책감과 미안함, 분노와 슬픔을 함께 표현하고 있다. 상실된 세대를 구하기 위해 국가는 국가대로 임무가 있지만, 교회와 목회자는 감염의 위험만 아니라, 코로나 이후에도 죄책감과 절망을 느끼게 될 생존자들과 부모들, 희망을 잃은 청년들과 청소년들, 우울증이 더 심해질 수밖에 없는 노인층의 고통을 영적 시각으로 붙들어 주어야 한다.

영적 돌봄이란 혼란스런 현실 속에서 인간에 대한 신체적, 심리적 이해 이상으로 기독교 이야기를 규범으로 삼[]... 적어도 기독교 이야기를 일차적 해석의 틀로 삼는 돌봄이어야 한다.43) 목회자들이 공감을 통해 성도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내러티브와 인간의 내러티브 사이에 존재하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관계를발견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공동체를 통해 중개된 하나님의 이야기와 더불어 통합하도록도움으로써 강한 소속감을 가진 믿음 공동체의 일원이 되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의 이야기가성도들로 하여금 무엇이 삶에서 정말로 현실적이며 중요한 것인지이해하고 연결할 때 현재의 내러티브를 넘어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도록도울 수 있을 것이다.44)

갑작스런 고통을 겪을 때 고통받는 사람들은 왜 나에게?” 라고 질문하지만, 고통의 이유보다 중요한 것은 고통의 의미이다. 코로나 19의 영적 의미를 찾는 성도들과 이웃들에게 목회자는 정해진 답을 주기보다 함께 의미를 탐색하는 동반자의 사역을 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목회자는 개별적 돌봄 위주의 치유 관계가 돌봄의 모델로 고정되면 목회돌봄이 점차 공동체보다는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될 위험이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개별성에 지나치게 몰입하게 되면 신앙 공동체의 예배와도 분리될 수 있으므로, 개별적 의미를 탐색하는 개인 돌봄과 신앙 공동체의 신학적 연결성은 코로나 이후에도 계속해 가야 할 목회자의 중요한 실천신학적 관심사여야 할 것이다.45)

 

닫는 글

코로나로 인류 사회 전반이 재편되는 듯한 새로운 시대를 지나면서 목회자의 영적, 목회적 돌봄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비록 성도들을 매주일 만날 수 없는 특별한 시대에 어려운 목회를 하고 있으나, 그럴수록 목회자의 개별적이고 공동체적인 영혼 돌봄은 더욱 많이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목회적 돌봄의 핵심은 경청과 공감이다. 손실 혹은 상실 가운데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자신의 이야기를 존중하며 경청해 줄 수 있는 상담자이며, 더더욱 신앙적 관점에서 자신을 공감해줄 수 있는 목회자의 귀가 필요하다. 그레고리의 말처럼 목회자에게는 규율을 세우는 보편적 권위가 필요하지만 동시에 마음의 의사로서 어머니의 인자함을 갖추어야 한다. 무엇보다 자기 이익에 관한 한 비판적인 자기성찰과 혹평이 있어야만 양떼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목회자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석하고 가르치는 일에 중점을 둘 것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코로나 시대에 목회자는 순수한 보편적 복음의 진리를 더 깊이 연구하고 성도들을 가르침으로서 믿음의 가정들에 대한 참된 돌봄을 실천해야 한다. 비록 성도들이 겪는 고통에 개별적 이해와 공감이 필요하지만, 목회자에게 더 핵심적인 역할은 성경 텐스트에 더 큰 특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 전제하에서 목회자의 경청은 깊고 공감적이어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목회자가 인도하는 예배는 초월자를 경험하는 보편적인 영적 의식이면서 예배자들과 가족들의 개별적 고통을 담아내는 산 자들의 경배이어야 한다.

한편 목회자는 개개인의 침묵을 만들어내는 고통의 개별성과 다양성을 인식하고, 성도들을 주도적으로 찾아갈 수 있는 심방의 권한과 임무를 신중하게 수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감염병의 상황에서 일부 교인들이 두려움과 염려로 대면 심방을 거절할 때 그것 또한 존중하며 다른 방법을 찾아 도울 수 있는 길을 찾는 것도 목회자의 임무이다. Baxter의 말처럼 목회자는 잘 경청하고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윤리적 의무를 준수하되, 고통이나 트라우마로 의미생성 기능이 무너진 교인들이 서로 도와 회복탄력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돕고, 가족의 문제들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충분히 경청함으로써 영적 의미 생성을 도와야 한다.

실제 목회자들의 목소리에서는 어려울 때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성도들을 돕고 세워주고자 하는 열정과 문제를 해결하려는 창의력이 느껴졌다. 목회자들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불확실성이 큰 이런 시기가 긍휼과 섬김으로 회복되어감을 느낄 수 있다. 목회자가 함께 탐색하며 고통을 겪는 가족들과 함께 발견해가는 영적 의미는 슬픔과 트라우마를 이겨 낼 힘을 준다. 특히 미래를 잃고 죄책감을 괴로워하는 코로나 이후 세대를 위하여 목회자는 개별적 고통에 함께 참여하면서, 그리스도인들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와 하나님의 이야기를 통합적으로 풀어낼 수 있도록 격려함으로써 고통의 이유보다 더 중요한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돕는 사역을 계속해 가야 할 것이다.

◆ 미주

1) “The Mental & Emotional Health of Pastors and Their Congregants Amid COVID-19 - Barna Group,https://www.barna.com/research/mental-emotional-health-among-pastors/ 202154일 검색.

2) James Dittes, Pastoral Counseling: The Basics (Louisville: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9), 161.

3) St. Gregory the Great. The Rule for Pastors (Pastoral Care). (Wyatt North: Sudbury, MA, 2012), Book II, Ch. 6.

4) St. Gregory the Great. The Rule for Pastors, Book II, Ch. 1.

5) St. Gregory the Great. The Rule for Pastors, Book II, Ch. 6.

6) St. Gregory the Great. The Rule for Pastors, Book II, Ch. 6.

7) St. Gregory the Great. The Rule for Pastors, Book III, Ch. 40.

8) Vanderbilt 대학교의 신학자 Edward Farley 역시 목회자와 신학자들의 엄격한 자기 비평을 요청한다. 그리하여 자기 우상, 절대화된 자기 이익, 자기 만족 중심주의, 권력 구조의 참여등을 스스로 성찰하고, “자기-의식, 자기-비평, 그리고 자기-규율의 틀 안에서 주어진 상황을 이해하고 해석할 것을 요구한다. Edward Farley, “Interpreting Situations: An Inquiry into the Nature of Practical Theology,” in Formation and Reflection: The Promise of Practical Theology, eds., L. S. Mudge & J. N. Poling (Augsburg Fortress: Minneapolis, 2009), 14.

9) 시카고 대학교의 목회신학자 Don Browning이나 기독교 심리학자 Paul Pruyser 등은 일찍부터 신학이 빠진 목회적 돌봄과 상담에 대하여 일찍부터 경고하였다. 특히 Pruyser1973년에 쓴 그의 책 Pastor as a Diagnotician에서, “목회자들은... 자신과 선배들에 의해 오랫동안 발전해 온 그들만의 독특한 이론적, 실천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그들이 가진 신학적 유산과 신앙적 기초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Paul Pruyser, Pastor as a Diagnotician (Philadelphia: Westminster, 1973), 10.

10) Rodney Hunter, ed., Dictionary of Pastoral Care and Counseling (Abingdon: Nashville, 1990), 943.

11) Anthony Thiselton, 해석학의 새로운 지평, 최승락 역 (SFC: 서울, 2015), p. 740.

12) Thiselton, 해석학의 새로운 지평, p. 808.

13)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두란노: 서울, 2018), 128.

14) 하재성, “치유적 예배, 가능한가?” 개혁신학과 교회 제32(고려신학대학원:천안, 2013), pp. 171, 173.

15) 한진환, “하나님의 행위로서의 예배,”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제59차 정기논문발표회 (서울:한국복음주의신학회, 2012), p. 29.

16) Elain Ramshaw, Ritual and Pastoral Care (Fortress: Minneapolis, 1987), p. 20.

17) 하재성, “치유적 예배, 가능한가?”, p. 177.

18) Ramshaw, Ritual and Pastoral Care, p. 55.

19) 하재성, “치유적 예배, 가능한가?”, p. 179.

20) Ramshaw, Ritual and Pastoral Care, p. 22.

21) DPCC, 1342.

22) Stanley Hauerwas, God, Medicine, and Suffering (Grand Rapids, MI.: Eerdmans, 1990), p. 2.

23) Hauerwas, God, Medicine, and Suffering, p. 2.

24) Hauerwas, God, Medicine, and Suffering, p. 3.

25) Hauerwas, God, Medicine, and Suffering, p. 3.

26)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서울: 두란노, 2018), p. 325.

27)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p. 326.

28) 리차드 벡스터, 참된 목자, 고신석 역(프리셉트: 서울, 2011), p. 129.

29)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p. 329.

30)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p. 335.

31) 권석만, 현대이상심리학(학지사: 서울, 2003), 188.

32) “How to heal the 'mass trauma' of Covid-19,” https://www.bbc.com/future/article/20210203-after-the-covid-19-pandemic-how-will-we-heal. 2021. 4. 21 검색.

33) “Introduction to Family Therapy,” 15’18”. 202158일 검색.

34) George Rekers, Counseling Families (Word: Dallas, 1988), 19-20

35) 강문희 외, 가족상담 및 심리치료(신정: 서울,2006), p. 17.

36) Herbert Anderson & Edward Folley, 예배와 목회상담: 힘 있는 이야기, 위험한 의례, 안석모 역 (서울: 학지사, 2012), pp. 116-117.

37) “How to heal the 'mass trauma' of Covid-19,” https://www.bbc.com/future/article/20210203-after-the-covid-19-pandemic-how-will-we-heal. 2021. 4. 21 검색.

38) Anderson & Folley, 예배와 목회상담, 121.

39) https://www.kornferry.com/insights/briefings-magazine/issue-47. 202155일 검색.

40) James Dittes, Pastoral Counseling: the Basics (Westminster John Knox Press: Louisville, 1999), p. 58.

41) https://edition.cnn.com/2021/05/09/health/us-coronavirus-sunday/index.html. 2021510일 검색.

42) “Coronavirus: Why young people are a 'lost generation’”,

https://www.youtube.com/watch?v=dTfYxIj1YtA. 2021510일 검색.

43) Anderson & Folley, 예배와 목회상담, pp. 120-21.

44) Anderson & Folley, 예배와 목회상담, pp. 122-23.

45) Anderson & Folley, 예배와 목회상담, p.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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