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진 교수(미얀마개혁장로교 신학교 학장)
전호진 교수(미얀마개혁장로교 신학교 학장)

 

탈레반의 카불 점령으로 아프간 신자들을 위한 기도가 시급하다.

아래 사진은 어제저녁 알자지라 방송이 특집 방송한 것을 안방에서 촬영한 것이다. 탈레반은 의도적으로 수 십 분간 자기들이 대통령 궁을 점령한 것을 공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1. 왜 바이든은 아프간을 포기하였는가?

미국 대통령 조 바이든은 미국이 아프간을 포기한 것으로 비판을 받지만 단호하게 자기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나라를 지켜줄 가치가 없다는 입장이다.

20년 동안 미국은 2천 명 이상 사망자에 경제적으로 투자한 돈은 천문학적이다. 그러나 20년 만에 도로 묵을 각오하고 철수하고 있다.

우리 선교에 중대한 교훈을 준다. 자립 의지가 없는 교회를 계속 지원하는 것, 생각해볼 일이다. 월남과 유사하다. 미국이 월남에서 패배하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카불 주재 러시아 대사관은 공개적으로 아프간 대통령 가니는 4대의 자동차와 헬리콥터에 자루에 돈을 실었지만 다 못 주워 담아 거리에 버렸다고 한다.

오늘 뉴스에 카불 공항에서 미군 용기를 타려고 따라가는 수백 명의 무리들의 모습은 참담한 상황이다. 아프간 국민들은 종교와 지도자들을 잘못 만난 대가를 지불당하고 있다.

갈라디아 43절과 8절에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에게 종노릇 한대가를 지불하는 국가의 모델이라고 하면 너무 심한 표현인가?

 

2. 아프간 기독교 신자들의 미래는?

아프간의 첫 선교사는 예수님의 재자 도마라고 말한다. 도마가 인도 선교를 하면서 현재의 북부 아프간에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프간은 무서운 이슬람 국가가 되어 기독교가 가장 잔혹하게 박해를 받는 나라 중 하나이다.

기독교는 지하교회로 존재할 뿐이었다. 유일한 지상교회는 1920년대 교황청의 개입으로 이탈리아대사관 경내에 카톨릭 교회당을 세웠는데 외국인만 출입이 가능하였다.

1989년 소련군이 침공, 지하교회 루머를 들고 이 교회당 지하에 교회가 있는 것으로 의심되어 교회당 지하를 팠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2001년 전 탈레반 정권 때는 신자들을 탱크로 깔아 죽이는 잔인한 짓을 하였다. 수일 동안 탈레반 침공이 시작되자 300만의 아프간인들이 파키스탄으로 피난하였는데, 어제 알자지라 보도에 의하면 여자들 70%와 많은 아이들이 피난 갔다고 한다. 이제 남은 자들은 피난할 곳이 없다고 한다. 탈레반은 여자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교회와 서방의 많은 선교단체들이 완전한 선교자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NGO 명목으로 선교활동을 하여 기독교 신자가 최소 1,000명에서 한 통계는 8천 명 혹은 심지어 18,000명으로 추산한다.

어제 탈레반이 대통령 궁에서 저들의 활동을 공개한 것은 예전의 탈레반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사자가 결코 양이 될 수 없다. 이슬람원리주의 본질은 종말에 비무슬림은 개종하든지 죽든지 하라는 양자택일뿐이다.

이 말은 책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라 필자가 2006년 이란의 이슬람의 본부 콤 신학교를 방문, 부학장과의 인터뷰에서 들은 내용이다. 이슬람 신학교 방문은 위험한 모험이다.

그 부학장은 완곡한 표현으로 시아파 종말론은 기독교 신자들은 자기들의 메시아가 올 때, 예수님은 이슬람 메시아 수종자로, 기독교 신자들은 자동으로 시아파 신자가 된다고 하였다. 개종을 거부한 자는 다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내용은 고의로 숨긴 것이다.

2019년 폼패이오 미 국무장관은 전 세계 기독교신자의 80%가 종교의 부분적 자유 혹은 완전 자유가 없다고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아프칸 사태에서 기도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명령이다.

18:1-8의 불의한 재판관과 불쌍한 과부의 기도는 사회정의와 약자보호 관점에서 해석하지만 서구 한 개혁주의 주석가는 악한 재판관은 교회를 박해하는 악한 세상의 정치구조를, 불쌍한 과부는 박해받는 교회의 상징으로 해석한다. 의미있는 해석이다.

예수님이 8절에서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것은 박해받는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신앙을 보겠느냐로 해석한다.

성경에 박해받는 신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직접적인 본문은 히13:3,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위하여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 즉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라.“

이 본문에서 우리 자신도 갇힌 자 된 심정으로 기도하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자기의 복음 전파를 위하여 기도할 것을 많이 부탁하였다.

사복음서나 바울서신은 신자들은 고난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아프간 신자들의 미래는 너무나 암울하다. 우리는 하나의 거룩한 공교회(세계적)와 사도적 교회를 믿습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다. 함께 아프간의 신자와 교회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때이다.

 

 
저작권자 © 코람데오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