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곳곳에서 '한국적 게임'으로
욕망을 분출하는 이례적인 한류 신드롬

비관적인 현대 자본주의를 경쾌하게 고발하는
'오징어 게임' 변증법에 환호

세상은 무엇을 욕망하는가? 세상의 입장에서 분석
휴머니즘으로 자유와 연대의 조화를 도모하는 세상
복음 증거를 위한 비판적 의식

9월 17일에 넷플릭스에 개봉한 '오징어 게임' - 감독 황동혁 (이미지 제공: 넷플릭스)
9월 17일에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오징어 게임' - 감독 황동혁 (이미지 제공: 넷플릭스)

지금 '오징어 게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어쩌면 때 늦을 수 있겠다. 대부분의 해석들은 탁월했고,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설득력 있게 비판하는 글들도 많았다. 

오히려 때가 늦은 덕에 필자는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오징어 게임 신드롬'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징어 게임' 작품과 '오징어 게임 신드롬' 사이의 변증법적 현상이 눈에 띄었다. 변증법이란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원리로 하여 사물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는 논리를 의미한다. 작품과 신드롬은 게임을 공통분모로써 공유하지만 그 결과는 서로 대립된다. 

전 세계가 한류 마니아층을 너머 광범위하게 신드롬에 빠지는 현상은 종래의 한류 열풍에서 찾기 힘든 현상이다. 영화 '기생충'과 비슷한 주제를 담고 있지만 그 파급효과가 훨씬 크다. 세상은 무언가를 부단히 갈급해 왔던 것처럼 보인다. 잠재된 욕망의 마그마가 작품을 통해 지구촌 곳곳에서 분출되었다. 세상은 작품의 코스튬을 흉내내고 '딱지치기', '달고나 뽑기' 등 한국적인 게임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세상은 작품과 교감하고 있다.

C. S. 루이스는 "작품을 먼저 수용해야 하고, 그 다음에야 평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가할 거리가 아예 없다"고 말한다. 필자는 제대로 된 평가를 위해 수용적인 태도로 작금의 변증법적 현상을 분석해 보았다. 세상의 욕망을 보다 깊은 차원에서 이해하기 위해 이제부터 기독교의 입장이 아닌 최대한 세상의 입장에서 나열하는 신선한(?) 시도를 할 것이다. 이를 계기로 미래사역의 방향성에 대해 깊게 고민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 독자는 유의해 주시기 바란다.

프랑스 파리에 마련된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체험관 앞에서 대기 중인 프랑스 시민들. 언론 보도에 따르면 7시간동안 기다리는 시민도 있었다고 한다. 대기자들끼리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구촌이 '딱지치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뽑기' 등 한국적 게임에 매료되었다. (틱톡 영상 캡처)
프랑스 파리에 마련된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체험관 앞에서 대기 중인 프랑스 시민들. 언론 보도에 따르면 7시간동안 기다리는 시민도 있었다고 한다. 대기자들끼리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구촌이 '딱지치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달고나 뽑기' 등 한국적 게임에 매료되었다. (틱톡 영상 캡처)

● 변증법 ①: 서바이벌(survival) ↔ 휴머니즘(humanism)

빚더미 수렁에 깊이 빠진 참가자들이 거액의 상금을 타기 위해 어린이 게임에 참가한다. 게임에서 승리한 사람만 456억원의 상금을 얻을 수 있다. 그 과정에서 탈락자는 죽음을 당한다. 피가 낭자하고 공정한 듯 공정하지 않은 게임이 지속되는 가운데, 주인공 성기훈(이정재 분)은 끝까지 인간성을 지키려고 노력했고 결국 우승한다. 우승 후에도 그는 상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휴머니스트로서의 책임을 다한다.

'오징어 게임'을 관통하는 핵심 가치는 사람에 대한 믿음, 곧 휴머니즘이다. 기훈의 우승은 휴머니즘의 승리를 상징한다. 그는 딸과의 재회를 포기하고 인간성을 파괴하는 집단의 몰락을 위해 발걸음을 돌리며 작품은 마무리된다. 휴머니즘이 가장 고귀한 가치이다. 이를 파괴하는 존재는 악이다. 

여기서 작품과 신드롬의 변증법이 현상한다. 작품에서는 상금을 쟁취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상대가 희생되어야 한다. 하지만 신드롬은 순전히 놀이로써 게임에 참여한다. 생존을 위한 게임이 재미를 위한 게임으로 전환되었다. '오징어 게임'의 코스튬을 입고 게임에서 지면 죽는 시늉을 하지만 이 모든 것들로 인해 즐거워한다. 

'오징어 게임'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는 장면(상)과 이를 따라하는 장면. '오징어 게임'에서는 죽음을 면하기 위해 게임을 해야 한다. 하지만 시청자들에게 게임은 휴머니즘을 이끌어내는 순전한 놀이이다. (사진(하)출처: Stoke Twins 유튜브 캡처)
'오징어 게임'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는 장면(상)과 이를 패러디하는 장면(하). '오징어 게임'에서는 죽음을 면하기 위해 게임을 해야 한다. 하지만 시청자들에게는 휴머니즘을 이끌어내는 순전한 놀이로 전환되었다. (사진(하)출처: Stoke Twins 유튜브 캡처)

사람들은 게임의 룰을 통해 기본적인 신뢰 안에서 게임을 한다. 신뢰하지 않으면 게임을 재미있게 진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는 사람도 분내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어 한다. 자본의 노예로 살다가 망각하고 있었던 동심, 소망으로만 가득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재현된다.

게임이 휴머니즘의 아름다움을 증명한다. 룰이 있어도 서로 신뢰할 수 있고, 경쟁을 해도 서로 즐거울 수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경쟁에서 서로 짓밟는 이유는 자본에 눈이 멀어 인간성을 포기한 잘못된 생각과 신념 때문이다. 그리고 작품은 여기에 기독교의 책임이 적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개연성을 다소 포기하고서라도 이 메시지를 어떻게든 전하고 싶은 모양이다.

작품에서 지영(좌, 이유미 분)이 기독교인 참가자에게 유난히 반감을 보인다. 얼마 후 지영의 아버지가 목사인데 그녀의 어머니를 죽인 살인자였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지영은 그런 아버지를 죽였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와 대비되게 새벽(우, 정호연 분)을 살리기 위해 게임에서 일부러 패배하면서 가장 고상한 죽음을 맞이한다. 많은 시청자들이 눈물을 쏟은 장면이다.
작품에서 지영(좌, 이유미 분)이 기독교인 참가자에게 유난히 반감을 보인다. 얼마 후 지영은 자신의 아버지가 목사인데 어머니를 죽였고 지영은 그런 아버지를 죽였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목사인 아버지와 대비되게 새벽(우, 정호연 분)을 살리기 위해 게임에서 일부러 패배하면서 가장 고상한 죽음을 맞이한다. 많은 시청자들이 눈물을 쏟은 장면이다.

● 변증법 ②: 종교로부터의 자유 ↔ 종교를 위한 반자유

신프로이트학파 에리히 프롬(Erich Pinchas Fromm)에 의하면 종교개혁은 가톨릭의 권위로부터 자유를 이룩했지만 자본주의를 부추기면서 개인을 불안상태로 몰아넣었다. 종교개혁의 신은 사랑의 신이 아닌 폭군에 불과하다. 시민들은 예정론의 저주에 갇혀 자신의 운명을 모른다는 불안함을 극복하기 위해 예정의 당위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은 활동적이고 성실한 삶이다. 자본이 노동을 강제하는 것처럼 폭군의 신 또한 노동을 강제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와 이것을 장려한 종교개혁의 종교에는 자유가 없다. 자유를 빙자하여 개인을 경마장의 말[馬]로 만들었다. 이 생각들이 작품의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묘사에 투영되어 있다. 나만 살기 위해 신을 호출하는 이유, 목사가 아내를 살인한 이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지 않고 "예수 믿으세요"만 말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폭군을 믿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 중 기독교인으로 보이는 참가자가 이기적으로 기도하는 장면.
'오징어 게임' 중 기독교인으로 보이는 참가자가 이기적으로 기도하는 장면.

이렇게 인류는 자유를 위해 하나님을 제거했다. 이제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인'이 실현되었다. 하지만 개인은 인간을 더욱 고독하게 했고 정작 인간에게는 고독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결국 인간은 새롭게 의존할 종교적 동기를 요청하게 되었다. 나치즘과 사회주의와 같은 모든 대안들이 실패하자 보편윤리에 대한 저항과 문화적 혁명을 종교적 동기로 삼아 자유와 민주주의의 치마폭에서 연대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종교성을 포기하지 못하고 단지 종교의 역사적 형태와 정형화된 규범에 구속되지 않을 자유를 갈망했다. '반종교'가 아닌 '탈종교',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자화상이다. 

따라서 연대는 자유로부터의 도피이다. 작품에서 참가자들은 자유로부터 도피하여 오징어 게임에 자유롭게 참가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456억원을 쟁취하기 위해 서로 경쟁해야하는 또 다른 자본주의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 잠시 연대하지만 다음 게임에서 서로 적(敵)으로 마주한다. 휴머니스트 기훈도 다음 게임이었던 '구슬치기'에서 인간성을 잃는다. 이렇듯 자본주의 안에서 벌어지는 연대는 거짓이다. 적자생존에서 참된 연대는 존재할 수 없다. 연대는 필연적으로 개인을 억압한다. 억압당한 개인은 다시 자유를 욕망한다. 자유에 던져진 인간은 고독을 견디지 못해 다시 연대를 욕망한다. 이처럼 자유는 반드시 반자유적 요소와 얽혀 있다. 즉, 진정한 자유는 없다.

그들은 줄다리기에서 살기 위해 잠시동안 연대한다. 하지만 다음 게임에서 서로 적이 되어야 했다. 자본주의에서 연대는 거짓 연대이다. 
그들은 줄다리기에서 살기 위해 잠시동안 연대한다. 하지만 다음 게임에서 서로 적이 되어야 했다. 자본주의에서 연대는 거짓 연대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게임은 다르다. 인간은 게임을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그 자유는 자신을 게임의 룰과 팀원들간의 연대에 구속시키는 반자유를 위한 자유이다. 그러나 이것이 억압은 아니다. 즐겁기 때문이다. 게임 안에서는 반자유를 통해 자유를 느끼는 변증법적 현상이 일어난다. 자유와 반자유가 유일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은 게임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와 룰에 자신이 구속되더라도 자유를 이루는 방법은 마치 게임처럼 재미와 쾌락을 느끼는 것이다. 삶 자체가 게임이다. 이것이 '오징어 게임 신드롬'의 변증법적 메시지이다. 신드롬은 세상으로 하여금 '오징어 게임'을 통해 자유와 반자유의 조화의 메커니즘을 학습하도록 세계문화를 조성했다. 

● 변증법 ③: 자본을 위한 경쟁 ↔ 재미를 위한 경쟁

사회적 원자화를 코로나19가 가속화하면서 개인은 사회와 집단으로부터 더욱 유리되었다. 연대의 궁극적 원동력이었던 종교도 대안이 되지 못했다. 아니, 못하도록 통제를 당했다. 타종교와 달리 공동체가 본질적 요소인 교회가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오징어 게임 신드롬'은 팬데믹으로 인해 억압됬었던 연대의식을 깨웠다. 신드롬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국가도, 직장도, 친구도, 가족도, 심지어 교회도 고독함을 해결할 수 없다. 하지만 게임은 국가가 관여하지 않고, 자본에 구애받지 않으며, 친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가족끼리도 즐길 수 있으며, 종교의 지루함을 벗어날 수 있다. 게임은 어렸을 적에 많이 했을 정도로 인간 본성에 가깝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모일 것이다. 게임 안에서 우리는 온전한 신뢰가 가능하다. 이제 우리 어서 모여 재미있게 놀자!"

홍대 길거리에서 불특정 다수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즐기는 모습. 게임은 낯선 사람들과도 함께 어울리게 한다. (사진출처: 엔스크린 nscreen 유튜브 영상캡처)
홍대 길거리에서 불특정 다수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즐기는 모습. 게임은 낯선 사람들과도 함께 어울리게 한다. (사진출처: 엔스크린 nscreen 유튜브 영상캡처)

작품에서는 게임이 문제가 아니라 게임으로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말로 삼아 도박을 하는 것이 문제였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사회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자본주의라는 경마장의 말로 삼고 개인의 사리(私利)만 좇는 권력과 종교가 문제다.

신드롬은 소망한다. 어쩌면 자본주의의 순기능은 '게임'일 것이라고. 왜냐하면 경쟁을 할 수 없는 사회주의와 다르게 자본주의는 경쟁을 부추기고 승자와 패자가 발생한다는 면에서 게임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제 팀을 이룰 동료를 찾고 인생게임에 참가하면 된다. 더 이상 고독하지 않고 무료하지 않다. 승패도 상관 없다. 즐겁기 때문에. 

● 변증법 ④: 사회참여 ↔ 사회저항 

이제 '오징어 게임'의 마지막이다. 참가자들이 상금에 눈이 멀어 인간성을 잃었을 때, 주인공 기훈은 끝까지 휴머니즘을 잃지 않으려고 했고, 결국 우승한다. 사실 적자생존의 상황에서도 휴머니즘을 지키려는 참가자들은 더 있었다. 탈북소녀 강새벽(정호연 분), 살인자 목사 딸 지영(이유미 분), 외국인 노동자 알리 압둘(Tripathi Anupam 분) 등은 휴머니즘을 끝까지 지키다가 안타깝게 희생되었다.

휴머니즘은 이렇게 빛을 잃어가는 듯 했다. 하지만 종국에 휴머니즘이 승리한다. 돈과 힘이 아닌 사람을 끝까지 믿는 진심 하나로 승리한다. 이렇듯 휴머니즘은 본질상 승리할 수 없지만 결승전의 적수였던 조상우(박해수 분)의 마음을 녹인다. 그도 휴머니즘이 세상을 살릴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휴머니즘=다윗', '자본주의=골리앗'이라는 종교적 구도를 이룬다. 

"앙가주망(engagement)".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가 전개한 이 개념은 넓은 의미로 미래를 향하여 자신을 구속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정치나 사회, 자신과 관련되어 있는 관계망에 자진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자신의 선택에는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 '자기구속'에 친히 자신을 내던짐으로써 사회의 구속에 저항하여 자유를 출현시킨다. 역설적으로 자유는 인간이 구속되어 있는 환경에서만 출현할 수 있다. 

사람이 부당하게 죽자 홀로 저항하고 있는 기훈. 그의 앙가주망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었다.
사람이 부당하게 죽자 홀로 저항하고 있는 기훈. 그의 앙가주망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었다.

모두가 456억원 게임에 구속될 때 기훈의 앙가주망은 휴머니즘을 외쳤다. 기훈은 오징어 게임에 참여하면서도 오징어 게임에 저항했다. 기훈의 저항은 곧 자유의 출현이다. 기훈의 앙가주망은 함께 연대한 참가자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상우의 자결은 그 희망에 미래를 맡기는 상징적인 행위이다. 기훈은 오징어 게임의 호스트인 오일남(오영수 분)과의 마지막 게임에서 이기면서 사람에 대한 믿음을 확신한다. 이내 그 확신은 딸과의 재회를 포기하며 휴머니즘을 파괴하는 집단을 파괴할 자유를 출현시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휴머니즘은 쇠락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한 명이면 충분하다. 당신부터 시작하면 된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휴머니즘은 언젠가 승리한다. 자본주의를 대항하는 모든 사조들은 실패했고 앞으로도 실패할 수 있지만 휴머니즘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휴머니즘의 신은 이렇게 말한다. "휴머니스트 한 명으로 말미암아 내가 멸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자본주의에 진정으로 저항하는 것이며 이 저항을 통해서 자유가 실현된다. 자본주의에 참여하면서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것, 여기에 변증법적 메시지가 깃들어 있다. 인문학에 빠져있는 현대사회의 거울에는 객관적인 인간성이 무엇인지 탐구하고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사회에 저항함으로써 자유를 이루려는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기훈이 가족과 재회를 포기하고 비행기 앞에서 발걸음을 돌리는 모습. 그는 휴머니즘을 파괴하는 집단에 저항하기 위해 가족의 구속에 저항하여 또 한 번 자유를 실현한다. 
기훈이 가족과 재회를 포기하고 비행기 앞에서 발걸음을 돌리는 모습. 그는 휴머니즘을 파괴하는 집단에 저항하기 위해 가족의 구속에 저항하여 또 한 번 자유를 실현한다. 

● 세상은 무엇을 욕망하는가?

상기(上記)한 기술들은 '오징어 게임'과 '오징어 게임 신드롬' 사이에서 발생하는 변증법적 현상을 통해 세상이 욕망하는 것을 세상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이야기한 것들이다. 대부분 기독교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 명료하기 때문에 어떤 기독교인 평론가의 경우 "병적으로 악의적"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 글의 궁극적인 목적은 비판하는 데에 있지 않다. 역설적으로 그것은 너무 명료하기 때문이다. 이 글의 목적은 세상이 욕망하는 것을 구체화하고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한 사역을 고민하는 데에 있다. 

첫째, 세상은 인간성의 회복을 욕망한다. 문화혁명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자신들이 중심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가령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 주도하는 사회에서 자유를 느낄 수 없다. 페미니즘은 "남성 중심 사회"에 저항하는 것을 통해서 자유를 경험한다. 그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혜택을 이런 방식으로 누리기 때문에 그들의 연대, 그들의 게임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PC(Political Correctness)와 젠더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저항은 모두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한다.

이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이면을 간파했다. 오늘날 지적인 시민들은 진정한 연대와 자유를 실현하는 대안으로써 '인간성 회복'을 소망한다. 객관적 인간성이 회복되면 서로 신뢰하며 자발적으로 연대에 구속될 수 있다. 이것이 게임으로 상징되어 나타난 것이 '오징어 게임'이다.

성경적 대안은 명확하다.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은 스스로 인간성을 온전히 회복할 수 없다. 오직 예수 안에서만 가능하다. 성경이 다른 어떠한 종교나 철학보다 인간에 대하여 얼마나 신빙성 있고 명료하게 설명하는지 우리는 안다. 이런 측면에서 성경이 진정한 휴머니즘을 말한다. 세상은 인간 본성은 원래 아름답기 때문에 휴머니즘으로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성경은 본래 죄의 종인 인간이 자유와 연대가 조화를 이루는 진정한 휴머니즘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 증거하기 때문에 훨씬 더 깊은 영역으로 나아간다.

둘째, 세상은 도리어 종교의 회복을 욕망한다. 그들이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인간의 연대의식은 종교에 정초하기 때문에 인간은 본성적으로 유구한 역사와 내러티브를 담은 종교가 인간성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답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세상은 종교를 무너뜨렸다. 다시 종교를 찾을 때 그들은 종교를 재생시킬 능력이 없었다. 종교는 스스로 회복해야 했다. 그러나 작품에서는 기독교의 재생을 기대할 수 없도록 묘사한다. 거기서 기독교는 인간성을 버리고 이기적인 신앙을 가진 사이비로 나온다.

기훈의 손발이 묶여 있음에도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만 하는 전도자. 대사의 내용들이 정통기독교가 아닌 사이비에 가깝다.
기훈의 손발이 묶여 있음에도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만 하는 전도자. 대사의 내용들이 정통기독교가 아닌 사이비에 가깝다.

작품을 통해 교회가 반성할 부분이 있다면 우리는 이를 인정하는 겸손한 태도도 겸비해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진정한 인간성을 증거하는 점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로 결단한 성도들의 열매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물론 세상은 어떻게든 교회를 무너뜨리려 할 것이지만, 사람을 모으는 사역보다 사람을 회복시키는 사역에 한국교회가 더 힘써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셋째, 진정한 자유를 욕망한다. 우리는 위에서 자유는 반드시 반자유와 얽혀있음을 보았다. 세상은 자유와 반자유의 조화를 이루는 대안으로 게임을 제안했다. 그러나 게임의 한계는 명확하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게임에서는 휴머니즘이 쾌락과 거의 동의어이다. 쾌락은 역사의 지평 안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영원한 만족을 채울 수 없다. 더 많은 쾌락을 쌓기 위해 더 오래 살기를 갈구할 수밖에 없으며 죽음을 기피할 수밖에 없다. 일찍 죽을수록 누적된 쾌락이 적기 때문이다.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에 의하면 "죽을 수 없다는 사실 자체가 불안이다". 역설적으로 쾌락주의는 쾌락에 구속되어 자유를 이룰 수 없다.

이는 오일남의 마지막 장면에서 잘 나타난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게임을 하려는 의지, 삶은 짧다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장면, 재미를 오랜만에 경험한 것에 감격하며 세상을 떠난 장면에서 그렇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과 하나도 없는 사람의 공통점은 "삶이 재미가 없는 것"이라는 일남의 대사에는 양극화가 심화된 현대사회를 겨냥한 것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결국 양극화의 대안은 쾌락주의라는 셈이다. 

게임의 참가자였던 오일남이 오징어 게임의 호스트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장면. 일남은 기훈에게 자기가 죽기 직전에도 게임을 제안한다. 
게임의 참가자였던 오일남이 오징어 게임의 호스트이자 거대 자본가라는 사실이 밝혀진 장면. 일남은 기훈에게 자기가 죽기 직전에도 게임을 제안한다. 

● 결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이것을 네게 주노니" - 행 3:6

그리스도인의 특혜는 위와 비할 바가 못된다. 복음으로 인한 자유의 기쁨은 형언할 수가 없고, 그 자유가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회 공동체를 통해 억압받기는 커녕 더 풍성해진다. 율법에 구속되는 것이 자유를 억압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위한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통치를 사모하게 된다. 부활신앙으로 인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며, 따라서 어떠한 국가적 사회적 억압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혁명으로 저항하지 않고 썩어가는 밀알로 세상에 저항한다. 진정한 교회는 자발적인 사랑으로 물질을 나누며 고아와 과부를 돌본다. 성령을 통해 진정한 휴머니즘,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으로 성화 되어간다. 세상 철학은 모두 '오징어 게임'의 메시지를 답습하는 고로 그 갈급함을 해소할 수 없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 신드롬'의 욕망을 만족시키고도 남는 대안은 모두 예수 안에 있다. 

필자는 이렇게 부족함 없는 진리를 이미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작품의 기독교에 대한 과장된 비판을 비판으로 맞서기 전에 그들의 갈급함을 헤아리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마치 미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이 아닌 정말 그에게 필요한 것, 곧 일어나 걷는 것을 예수의 이름으로 베풀었듯이. 

존 칼빈은 "변론은 열매 없는 논쟁의 재료이다", "모든 교의는 교화를 위한 것이다"고 말했다. '오징어 게임'을 향한 기독교적 비판의 글들은 대부분 탁월하다. 그 비판이 열매 없는 논쟁의 재료가 되지 않으려면 그 목적이 복음 증거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교회의 대답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이다. 

한국교회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세상의 결핍을 헤아리며, 복음을 효과적으로 증거하는 미래사역의 전략을 잘 마련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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