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과 자유의 조화 어떻게?

세상을 구원한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 모두 휴머니스트

《지옥》, 하나님의 초월성 은폐 대신 내재성 심화

‘원칙 없음’을 비판하면서 ‘원칙 없음’으로 환원하는 《지옥》

칼빈에게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사랑과 동의어

세상의 눈물을 닦아줄 하나님의 사랑, 우리에게 있는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 감독 연상호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 감독 연상호

《지옥》이 사랑받는 대표적인 이유는 《오징어게임》과 마찬가지로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이념과 구조에 대한 깊은 고찰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두 작품 모두 시대를 향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오징어게임》은 주로 사회 구조와 체제에 이의를 제기하지만 《지옥》은 주로 가치와 신념, 인간의 본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오징어게임》의 고찰 대상은 주로 눈에 보이고 《지옥》의 고찰 대상은 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전자에 비해 후자의 작품을 이해하기에 다소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아마도 그래서 《오징어게임》은 5위를 지키고 있는 반면 《지옥》은 8위로 밀려난 것이 아닐까 예상한다(5일 기준). 그만큼 《지옥》은 복잡한 신학적, 철학적 담론들을 많이 제공한다.

우리는 기획기사 1편을 통하여 작품이 제기한 질문들을 다루었다. 작품이 기독교에 건넨 질문들은 성경과 복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제시할 수 있는 의문들이다. 앞서 1편을 통해서 지면상 3가지의 질문들만 도출했지만 사실 더 많은 질문들이 《지옥》에 담겨 있다. 그러면서 그 모든 질문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예정론에 대한 변증이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 속에서 세상의 욕망을 헤아려 대답할 필요가 있다(벧전 3:15). 흥미로운 점은 여기에 대한 성경적인 대답도 작품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Q: 기독교의 윤리는 예정론의 공포가 추동하는 윤리가 아닌가?

A: 기독교의 윤리는 예정과 자유가 조화를 이루는 유일한 형태이다.

《지옥》은 신의 ‘예정’ 자체를 부정하지 않은 듯한 장면들을 보여준다. 대신 작품에서는 예정과 자유의지 조화의 논쟁은 혼란만 야기한다는 것을 극단적인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 예정론이 비판을 받는 주된 이유는 단순히 예정론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한다는 것보다는 행위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지만 행위를 압박하는 결과를 낳는 예정론의 모순과 억압적 요소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의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예정론이 추동한 윤리는 산업혁명을 이룩하며 전세계가 종교개혁에 빚을 지며 살게 되었지만, 정작 현대인은 예정론을 비판하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 모순은 이상하지 않다.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산업화의 혜택에 감사함을 느끼면서도 앞으로의 경제발전과 산업화 시대정신의 요구에 의해 자신의 노동과 삶과 가치관이 이용되고 부정되는 것에 억압을 느끼는 것이다.

현대인이 요청하는 윤리는 “할 수 있으니까 해야 한다”와 같은 용기이지만, 그들에게 기독교와 근대철학은 “해야 하니까 할 수 있다”를 강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 해야하는가? 해야 하는 것을 누가 정했는가? 예정론은 종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 관한 것이다. 이것이 《지옥》에 투영되어 있는 현대인들의 번뇌이다.

세상의 관점에서 예정이 요청하는 율법순종은 인간에게 공포와 강박으로 다가온다. 복음을 영접하는 순간 죄의 결박으로부터 자유케 되었다고 믿지만 성도의 성화 과정은 늘 죄와 씨름하며 자기부인해야 하는 인생인 것이다. 단편적으로만 보면 속세와 단절했던 에피쿠로스 학파와 불교, 중세의 수도원 신앙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마틴 루터를 수도원 신앙을 수도원 밖으로 가져온 인물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렇게 억압되어 보이는 신앙은 현대인들에게 매력적일 수 없다.

예정과 자유가 조화를 이루는 방법은 자유방임 밖에 없을까? (이미지 제공: 넷플릭스)

그렇다면 예정이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가? 작품은 그 자유는 - 화살촉처럼 - 실천이성을 마비시키는 야만적인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죄에서 자유케 되었다는 대속 교리는 자유방임을 낳게 되는 것 아닌가? 결국 예정론은 자유억압과 자유방임이라는 양면성을 띤다. 송소현의 대사에서 전자를, 화살촉과 새진리회의 폭력성에서 후자를 볼 수 있다. 이것이 작품 《지옥》이 보여주는 심오한 통찰이다.

성경은 이와 달리 복음이 자유케 한다고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셨기 때문에 죄가 더이상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자유는 죄를 지을 수 없고 율법을 파기할 수 없다. 도리어 율법을 완성한다.

이처럼 복음은 예정과 자유를 조화시키는 유일한 형태이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에서 균형을 잃은 모습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설명하는 것은 세상 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필요한 작업이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예정이 성취하는 자유를 본격적으로 변증해야 한다. 첫 번째 질문의 구체적인 대답을 위해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Q2: 기독교는 인간의 종교적 본성이 초래한 야만적인 세상을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는가?

A2: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다. (feat. 민혜진 , 박정자)

자유주의를 채택하는 국가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군대처럼 필연적으로 자유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자유를 욕망하기 위해선 자유억압에 놓여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이 국가로부터, 사회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즉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경우가 한 가지 존재하는데, 그것은 - 화살촉과 이동욱처럼 - 자신이 신과 가까운 존재라는 예정의 확신이 있을 경우이다. 예정론은 이처럼 영지주의(신의 뜻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는 초대교회 이단)적으로 왜곡되기 쉽다.

따라서 신의 예정이 존재하는 한 인간의 자율성은 종교성과 동의어이며 이 종교성은 만인과 만인이 투쟁하는 자연상태, 즉 야만성에 지나지 않는다. 예정과 자유의지가 조화된다면 이러한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암투병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게 흡연하는 모습. 침대 위 벽에 역대상 4:10절이 걸려있다. (이미지 제공: 넷플릭스)
암투병에도 불구하고 태연하게 흡연하는 모습. 침대 위 벽에 역대상 4:10절이 걸려있다. (이미지 제공: 넷플릭스)

하지만 작품에서는 예정과 자유의 이상적인 조화를 직접적으로 소개한다. 그것은 민혜진의 어머니(이하 모)이다. 민혜진 모는 민혜진 집에서 침대 위에서 태연하게 흡연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민혜진 모는 말기암 선고를 받고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다. 민혜진 모도 사실상 ‘고지’를 받은 것이다.

민혜진 모의 모습은 지옥사자들에게 고지를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다르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민혜진 모가 머물던 방에는 역대상 4장 10절이 벽에 걸려있다. 그녀가 기독교인이라는 설정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민혜진의 가족은 기독교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가정이라는 점에는 틀림 없다. 왜 대상 4:10절일까? 아마 작품에서 주되게 다루고 있는 초자연적 재해라는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된”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델을 그려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작품에서는 고지를 받은 사람들이 보이는 두 가지의 모습을 대조한다. 지옥사자들로부터 고지를 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공포에 떨지만 기독교인으로 보이는 민혜진 모는 자신의 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온전한 정신으로 삶을 마감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모습을 보인다.

박정자도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박정자도 자신의 자녀들에게 그동안 제대로 해준 것이 없지만 시연 생중계를 조건으로 자녀들에게 처음으로 베풀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 한다. 1편에서 언급했듯이 박정자도 작품에서는 기독교인으로 그려낸다. 이처럼 작품은 그리스도인이 삶을 마주하는 태도를 그려낸다. 그것은 자신의 불행에도 불구하고 범사에 감사를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은 예정론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와 달리 성도들로 하여금 공포과 강박이 아닌 삶의 모든 순간에 감사하는 모습을 자아낸다. 하지만 《지옥》에서는 세상이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보여준다. 세상이 볼 때 기독교인들은 화살촉처럼 세상에, 특히 비기독교인들의 사회를 향해 항상 불만을 품고 있는 듯 보인다. 작품은 이것을 극대화하여 종교에 의한 야만성으로 그려낸다.

따라서 기독교가 종교적 야만성을 되돌리는 방법은 범사 감사하는 삶이다. 기독교가 단순히 종교가 아닌 이유는 여기서도 설명이 가능하다. 종교는 화살촉처럼 신의 예정에 심취해 영지주의의 형태로 물질세계를 멸시하고 신에게만 편승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언약관계 안에서 형성되는 사랑과 신뢰가 범사에 감사하는 휴머니즘적인 모습으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이제 첫 번째 질문의 대답도 가능하다. 하나님의 예정은 공포가 아닌 휴머니즘의 원천이다. 역설적으로 이 작품은 기독교를, 정확하게는 기독교에 대한 기대와 요청을 드라마적 언어로 최대한 구현해 내려고 한 작품이다.

연상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휴머니즘이라는 단어에 의문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코리아 유튜브 채널)
연상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휴머니즘이라는 단어에 의문을 제시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코리아 유튜브 채널)

 

Q3: 기독교와 휴머니즘은 조화를 이룰 수 없는가?

A3: 기독교는 르네상스 휴머니즘과 조화를 이룬다. 하지만…

따라서 기독교와 휴머니즘은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여기서 휴머니즘은 계몽주의 시대의 세속적 휴머니즘과 구별되는 르네상스 휴머니즘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휴머니즘을 신본주의에 대항하는 ‘인본주의’, 종교개혁과 깊은 관계가 있는 르네상스 휴머니즘은 ‘인문주의'라고 일컫는다.

인문주의는 참된 인간의 원형을 발견하기 위해 고전을 연구하는 운동을 말한다. 토마스 모어, 에라스무스, 또한 종교개혁가인 마틴 루터와 울리히 츠빙글리, 그리고 예정론으로 잘 알려진 존 칼빈 모두 르네상스 인문주의에 영향을 받은 휴머니스트들이다.

하지만 작품 마지막화에서 택시기사의 대사를 통해 인본주의적 휴머니즘을 사회적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방편으로 제시한다. 종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차선으로 등장한 것이다. 작품은 기독교의 휴머니즘에 긍정하면서 왜 결론을 세속적 휴머니즘의 승리로 그려냈을까?

여기서 박정자와 민혜진 모로 대표되는 기독교의 휴머니즘, 그리고 민혜진을 위시한 소도 집단과 신생아의 부부로 대표되는 세속적 휴머니즘 사이에서의 긴장이 일어난다. 전자는 힘을 발휘하지 못한 반면 후자는 세상을 구했다. 기독교의 윤리를 지향하지만 현실에 적용되기에는 어렵다는 관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현실주의 윤리와 닮아있다.

기독교인으로 묘사되는 박정자와 민혜진 모는 세상을 구하는 데에 기여하지 못했지만 신생아의 부부는 아이 대신 시연을 당하면서 세상을 자연상태로부터 구출해낸다. 여기서 아이의 엄마인 송소현은 아이가 시연 당하게 되면 끝까지 옆에 있을 것을 결단한다. (이미지 제공: 넷플릭스)
기독교인으로 묘사되는 박정자와 민혜진 모는 세상을 구하는 데에 기여하지 못했지만 신생아의 부부는 아이 대신 시연을 당하면서 세상을 자연상태로부터 구출해낸다. 여기서 아이의 엄마인 송소현은 아이가 시연 당하게 되면 끝까지 옆에 있을 것을 결단한다. (이미지 제공: 넷플릭스)

현실주의의 관점에서 기독교의 휴머니즘은 세상의 멸시와 핍박으로 항상 희생되기 때문에 세상에 기독교의 윤리를 모두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니버에 의하면, 세상에 기독교의 윤리를 조금이라도 드러내고 싶다면 차라리 솔직한 이원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낫다. 이처럼 현실주의에 입각한다면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살아야 할 당위가 사라진다. 그래서 작품에서 종교의 품을 벗어난 세속적 휴머니즘, 즉 인본주의가 세상을 구한 것으로 묘사한 것은 현실을 그려낸 것이다.

기독교의 휴머니즘은 정말 빛을 발할 수 없을까? 이 지점에서 《지옥》은 계몽주의적 휴머니즘과 르네상스 휴머니즘, 즉 인본주의와 인문주의의 접점을 꾀하고 있다. ‘어쩌면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행할 능력이 내재된 것이 아니겠는가’라는 것이다. 작품 3화에서 정진수가 한 말과 매우 유사하며, 토마스 아퀴나스와 임마누엘 칸트의 이론과도 유사하다.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담론은 자유억압과 방임이라는 양면성을 낳고, 이 둘이 부딪혀 혼란만 야기하기 때문에 초월성은 은폐되어야 한다. 대신 하나님의 내재성이 세상을 구원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초월성이 사라지면 기독교라고 할 수 있을까? 작품은 그런 기독교를 원하는 듯 보인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거리가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 민혜진 모는 하나님의 내재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택시기사의 대사에서 작품의 불가지론적 견해가 명확히 드러난다. 신의 존재 여부와 상관 없이 인간의 세상은 인간이 알아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지 제공: 넷플릭스)
작품은 택시기사의 대사를 통해 불가지론에 입각한 신의 내재성에 호소한다. (이미지 제공: 넷플릭스)

 

세상의 욕망: 하나님의 초월성으로부터의 해방

칸트에게는 하나님의 초월성이 도덕적 세계의 조건으로써만 작용한다. 이것이 칸트가 기독교를 철학적으로 변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그리고 그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설명할 수 없다.

1편에서 언급했던 슬라보예 지젝의 무신론적 신학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는 마르크스와 헤겔의 이론을 접목시켜 기독교를 관념론적으로 변증한 학자이다. 그의 이론대로 그리스도인이 살아간다면 그리스도인은 굳이 말씀을 붙잡으며 성령을 의지하며 예수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초월적 타자로서 존재한다면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인간에게 요구되는 율법과 인간의 자율성을 조화시키는 것이 철학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율법의 타율성이 인간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고 조화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복음의 자유함을 세상에게 설명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그리고 이것이 작품이 기독교에게 던지는 질문들의 궁극적인 대답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대답은 세상보다 정작 우리 자신에게 더욱 필요한 대답이 될 것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타율성과 자율성의 조화를 다루기에 앞서 성경이 제시하는 타율성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는가? 예수께서는 율법을 단 하나의 새로운 계명, ‘사랑’으로 압축하셨다. 성경의 탁월함은 사랑을 분석할 때 드러난다. 사랑은 철학이 할 수 없었던 타율성과 자율성이 조화를 이루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성도들 간의 언약관계는 결혼과 같다. 부부에게 발생하는 대표적인 윤리는 ‘사랑’이다. 사랑하면 상대방의 요청을 들어주고 싶은 것처럼, 하나님의 율법은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장려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의 자유는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향하기 때문이다.

그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 또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에서 타율성과 자율성은 총체적 사랑을 이룬다.

사랑은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났지만 율법을 이룬다. 율법의 정죄함으로부터 벗어나면서도 내 자유의지가 율법을 지향한다. 칸트에게 최고선은 도덕세계와 자연세계의 합치이다. 사랑은 결국 칸트가 그렇게 바랬던, 아니 어쩌면 《지옥》과 더불어 모든 사람이 바라고 있는 '합목적적 세계'를 이룬다. 

원칙이 없다면 세상은 다시 혼란에 빠진다. 초월적 하나님이 타자로서 존재해야 세상이 최소한의 원칙으로 운용될 수 있다. 칼빈이 제시한 율법의 세 가지 용법 중 제2용법, 죄의 억제에 해당한다.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원칙이 없다면 세상은 다시 혼란에 빠진다. 초월적 하나님이 타자로서 존재해야 세상이 최소한의 원칙으로 운용될 수 있다. 칼빈이 제시한 율법의 세 가지 용법 중 제2용법, 죄의 억제에 해당한다.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세속적 휴머니즘의 사랑이 궁극적인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는 - 작품 전체를 꿰뚫고 있는 키워드인 - ‘원칙 없는’ 사랑은 세상을 혼란에 빠트릴 것이기 때문이다. 타율성이 사라지고 인간의 자율성만 남게 된다면 건강한 사랑과 왜곡된 사랑을 구별할 기준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은 하나님의 법에 정초해야 한다. 그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짊어지는 희생을 요구하지만(마 16:24)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해산의 고통을 떠안듯, 사랑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랑은 십자가가 가장 쉬운 멍에라는 역설을 가능하게 한다(마 11:28-30).

칼빈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절제하며 검소한 삶을 살았다. 때문에 예정론을 후대가 어떻게 다루었든지, 예정론의 창시자로 알려진 칼빈의 사상을 앙드레 비엘레(Andre Bieler)가 ‘사회적 휴머니즘’이라고 부른 것은 매우 적절하다.

칼빈은 박정자와 민혜진 모와 달리 세상의 그림자가 되어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사회적 휴머니즘은 세상을 종교의 야만성으로부터 구원했다. 그의 신앙과 신학은 세상을 윤택하게 했고 우리 세대가 그 혜택을 누리게 됐다. 칼빈에게 하나님의 예정은 하나님의 사랑과 동의어였다.

사랑은 가장 신적이면서 가장 인간적이다.
사랑은 가장 신적이면서 가장 인간적이다.

 

인격적인 하나님의 부재

현대인들은 사랑을 필요로 한다. 미디어와 알고리즘의 영향으로 현대인들은 더욱 원자화가 되어 홀로 남겨졌다. 특히 세대와 성별과 정치적 성향들 사이에서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며 더욱 고립감을 느끼는 시대이다.

세상은 그저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살고싶어 한다. 그래서 세상은 교회에게 휴머니즘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의 휴머니즘이 진정으로 회복되기를 바라는 은밀한 욕망이 작품 《지옥》에 투영되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성경적인 것이 가장 인간적인 것이다. 작품은 기독교의 휴머니즘이 힘을 못쓰는 현실을 그려냈지만, 우리는 칼빈과 같이 교회가 성경적인 휴머니즘을 실천할 때 세상을 혼란과 야만으로부터 구원했던 역사들을 알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윤택하게 하는 데에 빛과 소금으로 쓰일 것이다. 사랑이 곧 메시야라는 《지옥》의 선명한 메시지는 사랑의 본질이신 삼위 하나님을 의뢰하게 한다.

어쩌면 작금의 기독교에 종교성이 짙어진 이유에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지속되고 있지 못하다는 방증이 아닐까. 우리는 화살촉처럼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사람들을 견제하는 데에 몰두하다가 어느새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유일한 계명인 사랑이 소멸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하나님과 날마다 풍성한 교제를 누리며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점검해야 할 시기인 것은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는 확신이 하나님을 방해하는 것이 될 수 있는 위험에 빠지기 쉬운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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