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기독교에 대한 질문들을 집대성한 작품

세상이 욕망하는 휴머니즘적 메시야상(像) 그려내

이상적인 세계관으로 불가지론적 세계관 제시

그러면서도 은밀하게 기독교의 끈을 놓치 않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 연상호 감독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 연상호 감독

“헬조선”이라는 신조어가 한때 유행이었다. 헬조선이란 지옥을 뜻하는 “hell”과 대한민국을 비관적으로 이르는 “조선”의 합성어로 열심히 노력해도 살기가 어려운 한국 사회를 부정적으로 이르는 용어이다. 대한민국은 시대착오적인 민족성과 21세기 현대문명이 만나는 혼란의 장이며 이것을 상징적으로 이르는 용어가 ‘헬조선’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착오’는 곧 지옥이다. ‘시대’는 본래 실증적 용어였으나 이제는 형이상학적 용어로 전환되었다. 현대인들은 각기 다른 시대에 살고 있다. 여당과 야당이 사는 시대가 각 다르고, 기성세대와 신세대, 남성과 여성이 사는 시대가 다르다. 우리는 만인이 서로 다른 시대를 향유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서로 다른 시대적 이념과 사상을 잣대로 서로를 시대착오적이라며 비판한다. 의미가 많은 것을 넘어서 의미의 포화상태에 이른 이 세상이 마치 지옥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현대인들의 불만이다. 하나님 나라만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옥도 현대인들에겐 ‘이미’, 그리고 ‘아직’과 같다.

이런 수 많은 의미들을 통합할 수 있는 메시야같은 존재가 나타나면 이 세상은 안녕을 되찾을 수 있을까? 메시야의 종교라고 표현할 수 있는 기독교는 그러한 시대적 책임을 갖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는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데에 기여하는 과오를 저지른 몇몇의 역사가 있다. 원칙이 있어야하는 기독교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세상은 비판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에 나타나는 ‘원칙 없는 신’은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원칙 없는 세상’의 자화상이 아닐까? 《지옥》은 불가지론적 세계관의 욕망을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지옥》에서는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가 거의 유일한 해결책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불만을 표출한 것 같다. 종교는 시대착오적인 말과 행동만 반복하며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는 데에 기여한다. 기독교가 무엇을 혼란스럽게 했을까?

교회를 다니는 사람으로 알려진 연상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종교는 믿음보다 질문”이라고 밝혔다. 《지옥》은 매우 명확하게 기독교에 대한 질문들로 이루어져있다. 기독교는 지옥행 ‘고지’를 받고 《지옥》이라는 ‘새진리회’로부터 심문을 받고 있다. 기독교는 지옥사자들의 ‘시연’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지옥》은 시연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까지 나름대로 제시한다. 이제 《지옥》이 기독교에게 묻는 질문들을 나열하고자 한다.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 독자는 유의하시기 바란다.

서울 한복판에서 시연 중인 지옥사자들 (출처: 넷플릭스)
서울 한복판에서 시연 중인 지옥사자들 (출처: 넷플릭스)

질문 ①: 기독교의 윤리는 예정론의 공포가 추동하는 윤리가 아닌가?

난데 없이 서울 한복판에 지옥사자들이 등장하여 한 남성을 잔인하게 도륙하고 태워 죽인다. 이 과정을 ‘시연'이라고 한다. 시연을 당하는 사람들은 모두 천사로부터 언제 지옥에 가는지 ‘고지’를 받은 사람들이다. 극 중에서 신흥종교 새진리회의 의장인 정진수(유아인 분)는 이 모든 초자연적 재해들은 인간이 더욱 정의롭기 원하는 신의 ‘의도’라고 장장 10여년동안 대중들에게 설교해 왔다. 그는 공포만이 인간을 정의롭게 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범죄하면 지옥에 갈 수도 있다는 공포이다.

여기에서 진경훈(양익준 분) 형사가 정진수에게 이렇게 되묻는다. “말씀대로라면 그 신은 인간의 자율성을 전혀 믿지 않는가 보네요” 여기에 정진수는 “인간이 만든 법이 정말 정의로울까” 의문을 던지며 과거에 진경훈의 아내를 살해한 살인자가 경미한 처벌을 받고 출소한 것을 들어 인간의 전적타락을 논증한다. 그리고 이 전적타락을 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공포’라는 것이 새진리회의 핵심 교리이다.

문제는 새진리회가 원죄에 의한 전적타락 교리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진수는 연필 한 자루도 훔쳐본 적이 없는 선량한 삶을 살았으나 지옥행 고지를 받았다. 만약 인간에게 원죄가 있어 신이 지옥행 고지를 내린 것이라면 그 신은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도록 내버려 두고서는 구원할 자를 인간의 행위와 상관 없이 취사선택하는 원칙 없는 신이 된다.

신자라도 무조건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여, 주여” 할 때 주님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신생아도 예외는 아니다. 신생아는 죄덩어리일 뿐 사랑 받을 어떠한 자격도 없다는 것을 송소현(원진아 분)의 모습에서 알 수 있다. 원죄야말로 ‘고지’가 아닌가. 결과적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지옥행 고지가 내려졌다. 그렇다면 삶에서 의미는 사라지고 세상은 큰 혼란에 빠진다. 여기서 종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바로 지옥에 대한 공포로 이 세상의 죄악을 억제시키는 것 밖에 없다. 작품에서는 이러한 신은 “인간을 위한 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이 낳은 아이가 죄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자책하는 소현 (출처: 넷플릭스)
자신이 낳은 아이가 죄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자책하는 소현 (출처: 넷플릭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예정론이 “전대미문의 개인적인 내적 고립감”을 낳았다고 설명한다. 자신의 구원을 부모도, 형제도, 교회도 도와주지 못한다. 심지어 하나님도 도와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역시 선택된 자들을 위해서 속죄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고립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선택된 자로 여기는 확신과 이를 증명하기 위한 객관적인 근거로써 노동윤리가 요구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으로 하나님의 예정이 증명되어야 했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들은 금욕적 태도를 바탕으로 직업 생활에서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고자 했다. 만약 자신의 삶이 거룩하지 못하다면 자신의 예정을 의심하게 되는 불안과 공포에 직면해야 했다. 베버는 예정론을 “신에 대한 믿음의 배타성의 가장 극단적 형태”라고 설명한다. 베버는 적어도 칼빈은 예정의 여부를 알려는 시도는 하나님의 비밀에 간섭하려는 교만한 시도라고 비판했지만 그의 제자인 베자(Beza)와 청교도들은 여기에서 머물 수 없었다고 부연한다.

작품 《지옥》은 질문한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율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예정론이 맞다면 인간의 자율은 포기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두 가지가 조화를 이룰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 자율은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공포 속의 몸부림에 불과하지 않는가?

정진수는 고지를 받고 이러한 끔찍한 공포 속에서 20년을 살았다. 그 공포가 더 선량한 삶의 동인이 된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세상이 원칙 없는 신의 실체를 알고 무의미의 혼란에 빠지는 것보다 최소한의 원칙 안에서 운용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정진수는 신의 '의도'라는 이름으로 삶의 의미들을 양산했다. 신의 판단에 관여할 수 없는 종교는 ‘눈에 보여지는 행위’로 죄와 구원의 열매를 판단함으로써 삶의 의미들을 주조할 수밖에 없다. 마치 거룩한 삶으로 구원의 열매를 증명해야 했던 프로테스탄트들처럼.

선량했던 정진수는 고지를 받고 20년동안 공포 속에 살면서 자신이 느꼈던 공포를 세상에 선사하고자 한다. (출처: 넷플릭스)
선량했던 정진수는 고지를 받고 20년동안 공포 속에 살면서 자신이 느꼈던 공포를 세상에 선사하고자 한다. (출처: 넷플릭스)

 

질문 ②: 기독교는 인간의 종교적 본성이 초래한 야만적인 세상을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는가?

앞서 베버는 고립감을 극복하기 위해 프로테스탄트가 취한 두 가지 행동으로 ‘구원의 확신’과 ‘직업윤리’를 들었다. 전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후자는 눈에 보인다. 이 두 가지가 만날 때 끔찍한 결과가 발생한다. 사람은 신의 뜻이라는 확신이 들면 세상은 한낱 배경으로 전락하고 눈에 보이는 윤리적 생활에만 주목한다. 모두 신 앞에 똑같은 원죄를 지니고 있는 죄인이지만 보여지는 부분, 즉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서 신의 뜻에 저촉되는 비윤리적인 사람이 정죄의 대상이 된다. 행위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지만 행위로 나타나는 죄만 정죄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자신의 죄가 수면 위에 드러나지 않으면 수면 위로 드러나는 죄를 범한 사람을 비판할 권리를 자연스럽게 가진다. 원죄교리는 이 세상에 의미를 가져다 주지 못하고 대신 혼란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원죄를 은폐하고 사람을 행위로 판단하는 이와 같은 현상은 불가피하다.

이처럼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구조”는 예정하는 신, 《지옥》의 표현대로라면 ‘원칙 없는 신’이 존재하는 한 세상의 종말을 지연시킬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이다. 예정론이 제공하는 “공포와 카타르시스가 추동하는 시스템”이 종교를 존재하게 한다. 이런 현상은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의 합리성으로 끌어내렸을 때 발생한다. 역설적으로 종교성은 종교가 가장 합리적일 때 발생한다.

광신도 집단 '화살촉'이 민혜진을 해하려 하는 모습. (출처: 넷플릭스)
광신도 집단 '화살촉'이 민혜진을 해하려 하는 모습. (출처: 넷플릭스)

새진리회가 제공한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구조”는 토마스 홉스가 언급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과 유사하다. 홉스는 이를 “자연상태”라고 말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생존욕구를 타고났고, 힘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상태에 들어간다. 이것이 격화되면 전쟁이 벌어진다. “인간은, 그들 모두를 지배하는 공통된 힘이 없이 생활하는 동안에는, 그들은 투쟁이라고 불리는 상태에 있는 것이며, 그러한 투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인 것이다.”

작품 《지옥》에서는 신이 세상에 개입하면서 사회를 지배하는 모든 힘이 무력화 된 모습을 묘사한다. 언론도, 공권력도 모두 새진리회로 넘어갔다. 행정부가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들은 지옥으로부터 생존하기 위해 신의 의도에 굴종한다. 하지만 고지를 받은 사람은 그때부터 지옥과 같은 삶이 시작된다. 광신도 집단인 ‘화살촉’은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여 신의 의도에 대항하는 사람은 모조리 처단한다. 모두 생존욕구로부터 비롯된 자연상태이다. 이로써 전체 범죄율이 새진리회 이전과 이후가 큰 차이가 없는 아이러니한 결과가 나타난다. 결국 화살촉을 비롯한 새진리회를 지지하는 세력과 소도를 지지하는 세력의 투쟁으로 격화되었다. 이처럼 종교는 평화에 이바지하기는 커녕 야만적인 자연상태를 부추긴다. 설상가상으로 미디어라는 현대문명이 자연상태를 더욱 격화시키고 종말은 앞당겨진다.

이런 세상은 마치 지옥처럼 느껴진다. 이것이 작품 《지옥》의 제목이 상징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주장했다. 박정자(김신록 분)가 잔인하게 도륙되는 과정을 전국민이 생중계를 통해 관람하고 그 장소를 성지로 삼는 야만적인 일이 지옥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이런 세계에서 인간의 자율성은 야만을 낳는 ‘종교성’과 다른 말이 아니다. 따라서 진경훈의 말처럼 “그 신은 인간의 자율성을 믿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이것이 작품이 생각하는 원죄론의 결론이다.

작품은 이러한 상황이 우리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고 시사한다. 총칼만 들지 않았을 뿐 우리 사회의 화살촉은 모든 역사에 어디든 존재하며, 교리와 이념의 잣대로 같은 공동체 내부에서도 만인의 만인에 대한 갈등과 비난이 빈번히 발생한다. 박정자처럼 생중계하지 않을 뿐 억울하게 죄인으로 공공연히 낙인 찍히는 일도 종교 내외부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종교가 보편화 되었으나 범죄율이 월등히 줄어든 것도 아니다. 이슬람교의 어떤 교리는 범죄 자체이기도 하다. 종교성은 이처럼 종교인에게만 내재된 것이 아닌 모든 인간의 자율성에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작품은 기독교에게 질문한다.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종교성은 그 본성상 야만적일 수밖에 없다면, 종교성이 초래한 야만적인 사회를 기독교가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가?

어린 딸이 자신의 아버지의 죄목을 대중에게 고백하고 있다. (출처: 넷플릭스)
어린 딸이 자신의 아버지의 죄목을 대중에게 고백하고 있다. (출처: 넷플릭스)

 

질문 ③: 기독교와 휴머니즘은 조화를 이룰 수 없는가?

홉스에 의하면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회계약과 강력한 군주가 필요한데, 《지옥》의 세계관에서는 무의미하다. 신의 개입으로 인해 모든 의미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신의 뜻에 저촉되면 계약파기는 당연하고,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군주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면 야만적인 현대사회를 회복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이동욱(김도윤 분)은 과거 화살촉의 행동대장으로서 누구보다도 새진리회를 열성적으로 믿었던 신자였다. 하지만 3년 전에 천사로부터 지옥행 고지를 받고 새진리회에 대한 모든 신앙을 잃게 된다. 그렇게 새진리회에 원한을 품으며 살다가 우연히 고지를 받은 신생아 가족이 자신의 집에 머물게 된다. 소도 대표인 민혜진(김현주 분)과 신생아의 가족들은 신생아의 시연을 생중계하여 대중에게 새진리회의 거짓을 증명할 계획이었다. 왜냐하면 이해할 수 있는 죄를 범한 자들에게 내려진다는 고지 교리가 사실이라면 신생아에게 고지가 내려지지 않았어야 하기 때문이다.

운명의 장난처럼 그 신생아의 시연 일시는 이동욱의 시연 일시의 5분 전이다. 이동욱은 이런 신기한 우연에 의구심을 갖고 새진리회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한 후 신의 의도를 묻는다. 그러자 새진리회 2대 의장 김정칠(이동희 분)은 이렇게 말한다. “신은 실수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죄를 범한 사람에게만 내리는 고지를 아무 죄가 없는 신생아에게 내렸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세상은 신이 원칙이 없다는 사실에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따라서 신은 이동욱을 선택하여 자신의 실수를 덮으려고 한다. 그리고 세상을 혼란으로부터 구출해 내려고 한다.” 이 모든 설명들은 즉흥적으로 주조된 것이다. 이를 들은 이동욱은 자신이 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라는 사실에 감격하고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민혜진과 신생아의 가족을 모두 죽일 계획을 한다.

이동욱의 습격에 의해 생중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신생아를 안고 간신히 몸을 피한 송소현은 시연 시간이 다가오자 주민들에게 신생아의 시연 소식을 알린다. 곧이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지옥사자들이 등장한다. 신생아를 공격하기 위해 달려들자 소현은 몸을 날려 신생아를 보호한다. 그의 남편인 배영재(박정민 분)가 뒤늦게 달려와 소현과 함께 신생아를 껴안는다. 이윽고 지옥사자가 시연을 하고 물러간다. 그 결과 영재와 소현의 시체만 남겨지고 시연을 당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신생아는 목숨을 건졌다. 당황해 하던 동욱이 신생아를 죽이려고 하자 지옥사자가 달려들어 동욱을 무참히 시연한다. 이렇게 해서 새진리회의 거짓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새진리회는 해산하게 된다.

자신의 아이의 시연 사실을 주민들에게 알리는 소현 (출처: 넷플릭스)
자신의 아이의 시연 사실을 주민들에게 알리는 소현 (출처: 넷플릭스)

모두가 원죄에 의해 죄에 빠지게 된 것은 신의 실수와 같다. 따라서 신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존재인 예수를 메시야로 선택해서 세상에 보냈고 예수는 죽음을 당했다. 이로써 신의 실수가 덮어졌다. 이처럼 당신의 영광만을 위한 신이 인간을 위한 신이 될 수 있는지 작품은 묻고 있다. 그러나 정작 세상을 구한 메시야같은 존재가 따로 있으니 다름 아닌 사랑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인간이다. 인간에겐 이러한 숭고한 휴머니즘이 있다.

이 메시지는 박정자가 부활하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 작품이 단순히 ‘반’(反)기독교적인 작품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정자는 2화에서 자신의 자녀들이 무사히 비행기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렇게 말한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물론 육신의 아버지를 찾는 것일 수도 있지만 작품의 특성상 그렇게 보기 어렵다. ‘아버지’라는 종교적 용어는 기독교에서만 사용하는 용어이다.

기독교인인 박정자는 자신의 자녀만큼은 더 나은 환경에서 살도록 하기 위해 새진리회로부터 30억을 받는 조건으로 자신은 만인이 보는 앞에서 수치스럽게 시연을 당한다. 끝까지 자녀만 생각하다가 죽은 박정자는 수 년 후에 부활한다. 만인이 보는 앞에서 십자가 위에서 수치를 당하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투영된다. 작품은 시연을 면하고 세상을 구하는 방법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그것은 종교보다 더 메시야 같은 휴머니즘, 사랑에 의한 숭고한 ‘희생’이다. 박정자는 감독이 생각하는 참된 기독교인의 모델이다.

시연을 기다리는 박정자. 많은 사람들이 뒤에서 지켜보는 모습이 보인다. (출처: 넷플릭스)
시연을 기다리는 박정자. 많은 사람들이 뒤에서 지켜보는 모습이 보인다. (출처: 넷플릭스)

어쩌면 작품은 기독교가 진심으로 회복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을 수도 있다. 김정칠이 민혜진에게 보낸 서류의 제목인 ‘미래종교’ 하단에 영어로 ‘Future Church’라고 번역되어 있는 것을 보면 짐작이 가능하다. 작품은 기독교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서 내려오지 않고 그 자리에 있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만 종교가 운용된다면 위와 같은 잔인한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정작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인간에게 있으니 그것은 사랑이다. 신생아의 부모였던 배영재와 송소현, 그리고 박정자는 타인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랑과 희생을 감당함으로 세상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했다. 이처럼 인간은 신의 개입 없이 사랑을 이루어낼 수 있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택시기사의 대사가 작품을 관통하는 사상을 명확하게 설명한다 “신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여기는 인간들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인간 세상은 인간이 알아서 해야 한다” 기독교는 이와 같은 사상과 어울릴 수 있을까?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소개한 슬라보예 지젝에 따르면 가능하다. 십자가 사건은 신이 자신의 초월성을 희생하는 사건이다. 이제 초월성은 사라지고 물질세계만 남았다. 대신 예수는 성령을 신자들에게 선사했다. 따라서 인간은 목적론 없는 무한한 자유를 선하게 누리며 살 수 있게 된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성령이 신자들의 정신에 내재하게 되었으므로 하늘의 신과 상관 없이 무한한 자유를 선하게 사용하는 숭고한 휴머니즘이 가능하다.

따라서 작품의 마지막 질문은 이렇다. 이러한 기독교가 정통 기독교가 가르치는 바가 아닌가? 아니라면 정통 기독교는 휴머니즘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 기독교와 휴머니즘은 도저히 조화를 이룰 수 없는가? <계속>

시연이 예정되어 있던 신생아가 시연을 면하자 주민들이 나와 아기를 보호해주는 모습 (출처: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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