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루아흐와 네페쉬, 반면 동물은 네페쉬만
루아흐는 하늘의 것, 네페쉬는 땅의 것
동물학대, 동물애착 모두 하나님 없이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죄성
땅의 것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갈등 유발
동물이 축복이 되려면 하나님 나라를 사모해야

● 루아흐와 네페쉬

그렇다면 성경적으로 동물 사후 혼의 행방에 대해서 어떻게 보아야 할까? 성경은 이에 대해 모호한 답변을 제시하지 않는다. 성경에는 동물 혼의 불멸성을 적극적으로 지지할만한 구절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친다.

성경에 따르면 적어도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이전 것이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않는다(65:17). 이생에서 함께한 동물들의 혼이 불멸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 부활한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성경은 인간에게는 새 창조에 부활하여 함께한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65:18; 37:7-8; 고전 15; 살전 4:14).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동물들의 호흡을 거두시면 동물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간다고 고백한다(104:29). 전도서 3:21절에서는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땅으로 내려갈지 누가 아냐며 의문을 표하고 있다. 전체성경이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간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사실과, 전도서 3장에서 짐승과 동일한 처지에 놓인 인간의 허무함을 저자가 강조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 구절에서는 오히려 짐승의 혼은 땅으로 내려갈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또한 전도서 12:7절에서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번역 된 루아흐를 말한다. 루아흐는 이성적인 존재에게만 사용되는 용어이다.

많은 동물신학 지지자들은 대표적으로 창세기 2장과 노아언약(창 9장)을 빌어, 사람과 동물 모두 네페쉬’()가 내재된 존재이니 동물도 영혼불멸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네페쉬는 이성적인 존재 뿐만 아니라 호흡하는 모든 생물 또는 그 생명력과 혼력을 지칭할 때 주로 사용된다.

루아흐()와 네페쉬()는 사람의 영혼을 가리킬 때 교호적으로 사용된다. 사람의 영혼을 지칭할 때 의미상의 큰 차이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반면에 루아흐와 네페쉬 사이에는 미세한 차이가 있는데, 루아흐는 영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반면, 네페쉬는 지상의 것과 연관되는 성격을 갖고 있다. 따라서 네페쉬인 동물들은 루아흐적인 요소가 결여되었기 때문에, 동물이 죽어서 그 영혼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귀결될 수 없다.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다라는 관용적인 문장은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했다. 따라서 성경에 의하면 동물에게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대하기 어렵다.

인간의 구성 요소를 영, 혼, 육으로 보는 삼분설과 다르다. 인간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한 부분으로 영과 혼이 교호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반면 동물에게는 지상의 것인 혼만 갖고 있다.

 

● 왜곡된 사랑, 인간의 죄성

기독교 대문호인 C. S. 루이스는 반려견에 대한 관계를 사랑의 왜곡된 발현으로 설명한다. 루이스에 의하면 사랑에는 주고자하는 선물의 사랑과 남에게 사랑 받고자하는 필요의 사랑 두 측면이 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의 배우자나 자식이 점점 자신을 필요하지 않게 되었을 때, 남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은 그 욕망을 다른 타자로부터 채우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그 적격인 대체물이 바로 동물이다. 그 반려동물을 아기와 같이 영원토록 보살펴 줌으로써 반려동물이 죽는 날까지 자신을 필요하게 만든다. 결국 이렇게 반려동물에게 과도하게 애정을 쏟는 모습에 루이스는 반려견을 나약한 젖먹이 아기처럼 만들어 버려 반려견의 진정한 안녕을 해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렇게 지배를 통해 발현되는 왜곡된 사랑은 모든 인간의 대표적인 병리이자 죄성이다. 타자와 결합하고자 하는 욕구해소를 통해 자신의 소외됨을 극복했다고 믿지만, 이내에 타자가 없이는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지 못하는 소외의 길로 다시 환원된다.

타자를 곁에 두고자 하는 욕구는 극단적으로 폭정과 굴종으로 나타난다. 둘 다 타자를 필요로 한다

동물신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과거에는 동물에 대한 잔혹함이 현대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동물을 지배함으로써 인간의 소외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존욕구에서 발현되는 일이다. 동물신학자들은 이를 맹렬히 비판했지만,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소외를 극복하고자 한다. 그것은 동물들을 인간과 똑같이 대우하거나, 동물에게 굴종하는 방식이다.

C. S. 루이스 (Clive Staples Lewis, 1898년 11월 29일 ~ 1963년 11월 22일)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인 동물을 같은 선상에 놓는 것은 사실상 동물에게 굴종하는 행위와 같다. 이것이 동물을 위하는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인간의 내면을 감찰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동물권과 동물신학을 주장하는 것은 모두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일이다. C. S. 루이스가 잘 지적한 것처럼 동물에게 굴종함으로써 동물로부터 자신의 의존욕구를 영원히 해소하기 위한, 또 다른 지배욕구인 것이다.

본사에 제보된 사례에 의하면 교회 마당에서 길강아지에게 먹이를 주냐 마냐의 문제로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이 사례의 당사자들의 갈등이 극단적인 형태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만일 이 갈등이 극단적인 형태로 일어난다면 양자 중 어느 하나 온전한 상태로 볼 수 없다. 양자 모두 죄성에 의한 타자를 통한 의존욕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먹이를 주지 않는 것의 극단적인 형태는 인간의 우월함을 극대화하여 동물을 지배함으로써 소외를 극복하려는 시도이며, 먹이를 주는 것의 극단적인 형태는 그 동물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가 됨으로써 사실상 동물에게 굴종하는 행위를 통해 소외를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이때 하나님 안에서의 정체성이 소외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한다. 따라서 동물에 의해 쉽게 갈등이 일어나며 휘둘릴 때, 말씀 안에서 진정한 자신을 회복한 상태인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 이 땅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기 

물론 반려동물을 잃는 슬픔은 가족을 잃는 슬픔과 맞먹는다. 만일 성도들이 반려동물을 잃어 슬픔에 잠겨 있다면, 성육신적인 태도를 함양하여 이를 위로해 줄 필요가 있다. 그들의 슬픔을 충분히 공감한 후에, 때가 되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꼭 나눌 필요가 있다. 하나님 나라에는 이전 것이 모두 사라질 될 것이고, 이생에서 반려동물과 누렸던 기쁨보다 훨씬 더 큰 기쁨과 행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반려동물 뿐만 아니라 이 땅에 미련을 남기는 모든 것들은 우상이며, 말씀으로 다루어져야 하는 것임에 틀림 없다.

따라서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깊이 거할 때, 반려동물도 우리에게 우상이 아니라 축복이 될 것이다. 반려동물을 통해서도 선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는 육식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동물에 대한 균형잡힌 윤리를 갖추기 위해서, 동물에게 향했던 이목을 모두 하나님께 집중하고 더욱 그분을 사랑하기 위해 힘쓰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 사: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 사:6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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