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예배음악, 신학적 체계 필요
세속음악 곡조를 찬양에 그대로 사용하는 문제
성경적인 지식이 결여된 가사의 문제
영적으로 고립된 젊은 세대를 방조한 결과

신요한 전도사. 서경대학교 실용음악과를 졸업했으며 다수의 대중음악 활동과 예배사역의 경험을 겸비하였다. 현재는 판교 열린하늘문교회 중등부 담당 교역자로 사역하고 있으며, 코람데오닷컴의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신요한 전도사. 서경대학교 실용음악과 졸업, 판교 열린하늘문교회 중등부 담당 교역자, 코람데오닷컴 객원기자

필자는 현대 교회음악, 이를테면 일렉기타, 드럼, 베이스, 신디사이저를 동반한 현대음악을 교회의 예배음악으로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레고리안이나 클래식과 같은 고전음악만을 예배음악으로 고집하는 것이 제의의 형식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또 다른 가톨릭화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다. 물론 현대음악의 장르를 선택하는 일에는 섬세한 논의가 필요하나 본고에서는 논외이니 추후에 다루도록 하자.

문제는 그러한 현대악기들을 사용할 때의 신학적 근거이다. 현대음악은 클래식 음악과는 또 다른, 현대인들의 예배를 돕는 데에 용이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대중음악의 화성을 착안해 복음으로 성화시키기 위한 것이 목적이 될 때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 , 대중이 더 이상 유흥업소나 미디어를 통해서만 음악을 즐기는 것으로부터 돌이켜 거룩한 전에서 노래하기를 위한 것이다. 이것이 개혁교회의 시편 찬송 작곡가들의 사명이었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 맞는 시편 찬송 작곡가들과 같은 신학적 음악가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대개 전통적인 제의의 형태에서는 신학적 논의가 활발한 반면 현대적인 제의의 형태에서는 그런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지 않아 보인다. 그 결과 성도들을 세속적 음악에서 구출하는 것은커녕 교회음악이 세속화되고 있는 모습이 많아지고 있다.

 

1. 음악의 문제

최근 나비워십이라는 찬양사역단체가 내 마음을 가득 채운이라는 곡을 편곡해서 예배에 사용하였다. 편곡된 그 곡의 전주가 흐르자 익숙한 화성과 멜로디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흘러나왔다. 바로 80년대의 빌보드 차트를 휩쓴, 내로라한 세계적인 세션맨들로 이루어진, 모든 뮤지션들의 우상인 토토”(Toto)“Pamela”라는 곡의 전주였다.

토토의 7-80년대의 곡들은 많은 후배 뮤지션들에게 오늘날까지도 수 십만번 이상 카피되고 연주되었다. 아니, 수 백만번, 어쩌면 더, 이렇게 수치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뮤지션들에게 토토의 명성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과장해서 표현하면 뮤지션들에게 토토는 음악에 있어서 경전(經典)이다. 그만큼 토토의 음악을 카피하고 연주하는 일은 성역에 가깝다. 따라서 모든 뮤지션들에게 토토가 연주되는 일은 예민한 일이다.

나비워십, "내 마음을 가득 채운" (이미지 출처: 나비워십 유튜브)

그런데 그 일이 예배에 일어났다. “Pamela”는 여성에게 구애하는 가사로 이루어진 곡이다. 여성에게 구애하는 멜로디가 예배시간에 흘러나왔다. 이 곡을 아는 사람에게는 예배 중에 여자에게 구애하는 가사가 생각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연주를 잘 하는지, 원곡을 훼손하지 않는지, 하나님께 향해야 할 뮤지션들의 눈과 귀를 빼앗겼다. 마치 설교자가 의사 앞에서 의학을 논할 때 의사인 성도가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성도들로 하여금 설교자가 제발 성경만 이야기 했으면 좋겠다는 호소가 나오듯이, 경건한 뮤지션들에게는 찬양도 찬양다웠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나비워십의 편곡자가 일반 대중이 상대적으로 “Pamela”를 알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예배음악에 차용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에 예배 중 찬양의 전주에 BTS(방탄소년단)“Butter”“Dynamite”의 멜로디가 나왔다고 상상해보자. 성도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물론 어떤 곡을 레퍼런스 삼아 그 곡의 분위기와 코드진행을 접목할 수 있지만, 이러한 편곡은 편곡이 아닌 '삽입'에 가깝다. 만일 영리 목적으로 음원을 냈다면 표절시비를 피하기 어렵다. 음악적 실력을 겸비한 편곡자였다면 어떤 음악을 "그대로" 따와서 전주에 삽입하는 일을 감행하는 용감함(?)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비슷한 편곡의 문제가 나비워십의 살아계신 주에도 나타난다. 여기에는 러브홀릭스“Butterfly”의 전주가 삽입되었다. 오륜교회 찬양팀인 하이프레이즈가 작년 다니엘기도회에서 연주한 행군의 나팔 소리에의 전주/간주에는 신해철을 위시한 메탈 밴드 "NEXT"“Lazenca, Save Us”의 리프가 연상되기도 했다.

예배에 사용하는 현대음악 편곡에는 가사의 음절 하나하나에 코드를 붙일 때 신중해야 하고, 예배하는 성도들에게 어떤 지장을 줄지도 고민해야 한다. 편곡할 때 전주와 간주를 구성할 때에는 명확한 음악적 상관성과 신학적 의도가 있어야 한다. 멋있고 화려한 편곡을 하기 전에는 이 편곡이 성도들의 예배와 성경적 지식을 돕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지 충분한 신학적 점검이 이루어져야 한다.

ⓒToto 
ⓒToto 

 

2. 가사의 문제

현대 예배음악의 가사에 문제가 많다는 사실은 어제 오늘 다루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꽤 오래 전부터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신학적인 지도와 가이드라인이 적절히 제시된 일을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양극단의 주장만 눈에 띈다. 신학적 근거가 빈약한 채 현대 예배음악의 모든 형태를 무분별히 수용하거나, 현대 예배음악의 모든 형태를 반대하고 고전음악, 또는 연주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목소리만 들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시대적 사명을 반영한 균형잡힌 시각에서 적절한 신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현대 예배찬양의 제의적 형태를 제시하는 경우를 보기 어렵다.

성경적으로 찬양은 먼저 가르치는 목적이 있다. 시편의 절반은 조직신학의 내용을 담고 있다. 찬양은 또한 감정을 자극하기 때문에 찬양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르치는 일은 매우 효과적이지만, 가사가 적절치 못할 경우 주관적인 감정에만 호소하게 되는 위험도 크다.

로빈 패리(Robin Parry)가 빈야드(Vineyard)에서 1999-2004년에 발표한 28개의 앨범을 조사한 결과, 삼위 하나님을 포함한 찬양은 1.4%에 불과했고 절반 이상은 “You Lord”(주님)만 언급되고 있었다. 도대체 “Lord”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대부분의 찬양에서 그 “Lord”에 대한 지식은 빠져 있었다.

한국 예배음악에서 가장 대표적인 경우를 꼽는다면, 젊은 세대에서 인기가 많은 위러브”(Welove)공감하시네라는 곡이 있다. 이 곡의 가사에는 주님대신 사람의 이름을 넣어도 자연스러울 정도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지식이 결여되어 있다.

이 곡의 가사는 찬양의 대상을 설정할 때 마치 내 주관적 감정에 공감할 때에만 찬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듯한 뉘앙스를 보인다. 일종의 과정신학과 실존주의 신학의 냄새를 풍긴다. 다윗과 욥의 고통에 침묵했던, 심지어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외면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더 나아가 이 곡의 가사는 하나님의 신적 행위를 필연화 한다는 오류도 있다. 하나님은 내 감정에 공감하지 않으실 수 있다.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과 같은 감정을 갖는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니다. 개역개정 성경에서도 공감이라는 표현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전통적 신조나 교리문답에서도 공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는다. 도리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책망하시기도 하며 심판을 하시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들이 겸비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찾기를 원하신다. “공감하시는 하나님은 어디로부터 온 지식인가?

위러브의 박은총 대표 ⓒ위러브
위러브의 박은총 대표 ⓒ위러브

위러브의 시간을 뚫고라는 곡도 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 먼저, 만물에 편재하신 하나님이 시간을 뚫는다는 것이 성경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성경에서 개념을 도출했다기 보다 '시간'이라는 테마가 주는 신비감을 연상시키려 했던 의도가 두드러진다.

또한 가사에서 자신의 편안 버리고라고 언급되는데, 하나님이 본래 편하게, 안락하게 계시는 하나님처럼 묘사되는 듯하다. 하지만 성경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열심을 낸다고 말씀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우리 없는 하늘 원치 않아라는 표현은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불러 일으킨다. 독일 루터교 신학자 에베하르드 융엘(Eberhard Jüngel)의 삼위일체 신학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융엘은 삼위일체를 관계성 안에서만 해석한다. 각 위격은 신적 본질을 내재하고 있지 않다. 삼위의 관계가 있어야만 하나님이 될 수 있다. 이걸 생성”(becoming)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이 마치 아메바처럼 생성 중에 있다”. 그리고 이 생성되는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 관계성 안에서만 생성될 수 있어서 피조세계와의 관계가 있어야만 하나님이 될 수 있다. 피조세계 없는 하나님은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실 수”(I am who I am) 없다. 융엘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우리 없이 자신에게로 오기를 원치 않으신다위러브의 "시간을 뚫고"는 융엘의 신학을 그대로 따온 듯하다. 

건강한 신학의 부재로 인한 신앙의 이데올로기화는 찬양의 대상을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내 주관에 근거하거나 세상이 요구하는 대상으로 이끈다. 물론 개인적으로 젊은 세대로 이루어진 위러브라는 팀이 이렇게 신학적으로 깊이 생각하고 이 곡을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이러한 신학적인 부분을 잘 몰랐을 수도 있다. 그래서 찬양을 만들 때는 성경의 하나님이 선포되며 그분의 영광만을 높여드리는 가사를 통해 교리적인 지식이 잘 전달될 수 있도록 목회자의 지도를 필요로 한다. 찬양사역을 섬기기 위해선 보컬이든, 악기든, 엔지니어든, 모든 파트를 망라하고, 모두가 레위 지파로서 충분한 성경적 지식을 갖추는 훈련을 거쳐야 한다.

음악이 주는 영향력은 상상 이상으로 크기 때문에 음악에 민감한 젊은이들의 신앙을 돕기 위해서는 예배음악에서의 성경적/신학적 지도가 긴급하다. 젊은이들과 한국교회가 처한 이러한 영적 고립감을 헤아린다면 현대 예배음악의 신학적 체계를 구성하는 일에 신학자들이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Bethel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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