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을 주도한 개혁교회, 오늘날은?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닌 영향을 주는 교회음악이 되어야
구약 성전의 연주자는 모두 레위인
문화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레위인 양성

필자는 몇 주 전, 건전한 신학에서 벗어나 음악을 무분별하게 예배에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 지적했다(관련기사: [기획기사] <현대 교회음악, 이대로 괜찮은가?>). 반대로 본고는 예배음악의 전통적 형식만 취할 때 발생하는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 정형화 된 예배음악의 한계

고신총회는 국내 주요 장로교 교단들 중 가장 보수적이기로 유명하다. 특히 예배에 드럼을 연주하는 것을 가장 늦게 수용한 교단이라는 "웃픈"(웃기고 슬픈) 소문으로 유명하다. 이제 고신총회도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고 있지만, 한편으로 "개혁교회"의 이상을 추구하는 일부 교회들은 여전히 예배음악에서도 전통적인 형식만을 고수하고 있다. 

개혁교회는 전통적으로 시편찬송만을 사용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시편찬송은 가장 성경적인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이러한 개혁교회의 정신을 오늘날 적용하기 위해 고전적 곡조와 연주만을 취하는 것이 개혁교회의 정신에 걸맞을지는 재고해야 한다. 제의 형식을 시대와 전혀 타협하지 않는 것은 율법주의나 재가톨릭화의 염려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1539년에 발행된 존 칼빈(John Calvin)의 시편찬송 초판 표지
1539년에 발행된 존 칼빈(John Calvin)의 시편찬송 초판 표지

 

● 개혁교회 음악의 역사

개혁교회 찬송을 위하여 시편 음악을 작곡했던 사람들은 스콜라철학에 의해 구축되고 로마가톨릭에 종속되었던 교회 전통음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이루고 자유로운 음악 세계 안에서 자유로운 선율을 용감하게 택한 영웅들이었다.

이들이 이렇게 한 주된 이유는 당시 시민들의 음악으로부터 리듬과 화성을 착안해 기독교적으로 성화시켜 다시 되돌려주기 위함이었다. 제네바의 시편 음악 작곡가들은 시민들이 더 이상 유흥시설이나 거리에서 노래하지 않고 거룩한 성전에서 노래하기를 원했다. 또한 시민들의 음악에 대한 진지함이 상스러운 문화를 향한 열정을 이기고 거룩한 열정으로 회귀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음악의 형태를 모든 시민들을 위해 단순화하는 작업을 시행했다. 마침내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어른들의 목소리를 압도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찬양의 중재를 맡은 성가대가 필요하지 않았다. 개혁교회는 당시 대중음악을 주도했다.

21세기를 향유하는 교회는 영혼들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로부터 구출해야 하는 사명을 갖고 있다. 종교적 제의만을 위한 예술을 구축하여 예술의 모양과 형태를 종교적으로 종속시키는 로마가톨릭의 전철에서 돌이켜야 한다. 영혼들이 더 이상 세속적인 가요로 음악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에서 음악을 즐기도록 이끌어야 한다.

 

● 세상에 영향을 준 교회음악 선례

이러한 경우가 종교개혁 이후 한 가지 있다면 바로 ‘블랙가스펠’(Black Gospel)라는 음악 장르이다. 어떤 사람은 현대에 이 장르가 은사주의 진영에서 두드러지게 사용된다는 근거로 이를 배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흑인이 복음을 영접한 역사에는 블랙가스펠의 역할이 컸다. 노예에서 갓 해방하여 대부분 문맹이었던 흑인들에게 복음을 가르치기 위해 인도자가 앞 소절을 부르면 다음 마디에서 따라부르는 "콜 앤 리스폰스(Call & Response)" 형태가 블랙가스펠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블랙가스펠은 현대음악의 한 장르로써 당당히 자리매김했다. 최근엔 블랙가스펠 아티스트이자 목사인 커크 프랭클린(Kirk Franklin)의 "Love Theory"라는 곡이 그래미에서 수상할 정도로 블랙가스펠은 영향력을 전세계적으로 행사하고 있다.

한국적 상황에서 공예배에 블락가스펠의 순전한 형태를 사용하기에 무리가 있다. 하지만 본래 개혁교회의 시편음악가들이 대중음악을 주도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현대 교회음악의 영향력을 개혁교회의 전통으로부터의 이탈로만 보는 것도 무리가 있다.

2013년에 개봉한 영화 『블랙가스펠』(감독: hisMT Ministry)의 한 장면. 흑인교회 블랙가스펠 음악가들은 예배와 음악에 진심인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그들의 화려한 음악적 기술에 가려진 역사를 보지 못한다. 더러는 단지 예배음악이 이렇게 화려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블랙가스펠을 '교회음악'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생각하는 이분법적 사고의 오류이다. 성도의 거룩한 영혼의 음악만이 예배음악이 될 수 있다. 
2013년에 개봉한 영화 『블랙가스펠』(감독: hisMT Ministry)의 한 장면. 흑인교회 블랙가스펠 음악가들은 예배와 음악에 진심인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그들의 화려한 음악적 기술에 가려진 역사를 보지 못한다. 더러는 단지 예배음악이 이렇게 화려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블랙가스펠을 '교회음악'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생각하는 이분법적 사고의 오류이다. 성도의 거룩한 영혼의 음악만이 예배음악이 될 수 있다. 

한국에도 서양음악이 정착하는 데에 교회음악이 일조했다. 초기 한국선교 과정에서 서양음악에 익숙치 않았던 한국인들은 서양곡조를 한국식으로 변형해서 불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기 전에는 조선민요 가락에 가사만 찬송으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초기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교인들은 서양음악을 점점 습득하면서 한반도에 서양음악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이러한 과정을 거쳤는데, 고전음악만을 공예배에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것 아닐까?

 

● 양극화의 불씨

당시 게일(J. S. Gale)과 같은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이 서양음악을 '교회음악'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우려했다. 당시 한국인들은 서양음악만이 예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적인 가락은 세속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예배에 울려퍼지는 서양음악에 의해 감동을 받는다는 개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서양음악은 예배를 진행하도록 하는 형식일 뿐이었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찬송가를 부르지 않았다. 서양음악은 단지 교회에서만 부르는 음악이었다.

게일이 볼 때 서양음악은 한국인들에게 마음 깊숙이 전달될 수 없었다. 게일은 한국인들이 마음으로 감동하여 전심으로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게일은 한국적 가락으로 만든 찬송가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그는 『A Few Words on Literature - The Korean Repository 1895』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문화에서 필요한 것은 지적 추상성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무엇이다. 우리들은 그들을 위해 음악을 써서 그들이 돌아와 바울처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주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노래로 폭발하게 할 수는 없는가! 공자는 예절과 관습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음악처럼 좋은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한 나라의 음악을 들으면 그 나라의 법과 통치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공자가 전혀 꿈꾸지 못한 방법으로 이 말이 진실인가를 실험하여 그들의 예절과 관습이 기독교화 되고 그들의 마음에 하늘나라의 법과 통치에 관한 지식이 싹트게 할 수는 없겠는가. ... 나는 여러 차례 내 백성들에게 맞는 것을 써보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래서 내가 말한 것이 실패했다고 증언할 수 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한국인의 윈칙에 입각한 단순하고 정직한 문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것이다."

하지만 게일의 이러한 노력은 결실을 이루지 못한다.

『신뎡찬숑가』(1931)를 편찬할 당시, 민요 가락으로 만든 찬송가를 삽입할 것인가에 대해 논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한국인 편집위원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한국적 가락으로 만든 모든 찬송가가 탈락되었다. 이렇게 한국의 찬송가에는 - 명확성, 강세, 경어 등의 번역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 서양의 곡조를 번역한 곡만 정착하게 되었고 한국적 곡조는 기피되었다.

한국인들에게 '서양음악'과 '민요'는 단지 '교회음악'과 '세속음악'으로 이해되었다. 한국교회는 꽤 오랫동안 마음에 감동이 오지 않는 가락으로 교회에서 찬송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신뎡찬숑가』(1931)
『신뎡찬숑가』(1931)

'교회음악' 대(對) '세속음악'이라는 오랜 이분법적인 개념이 현대에도 고스란히 내려와 우리도 양극화의 기로에 서있게 되었다. 고전적 서양음악만을 예배음악으로 인정하는 진영은 대중적인 음악 형태가 예배에 사용될 수 없는 세속적인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예배음악을 정형화하여 제의만을 위한 형태로써 예술의 기독교적 유용성을 억제하였다. 하지만 반대로 다른 진영은 - 지난 기사에서 다루었듯이 - 성도의 예배와 신학을 고려하지 않고 대중적 장르를 무분별하게 사용하여 성도들에게 혼란을 야기했다.

이러한 양극화는 - 시편음악가들과 초기 한국 선교사들이 본보였던 - 성도들을 위한 예배음악 형태를 구축하기 위한 공교회적 작업이 현대에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이 발생한 가장 큰 이유는 시편음악가들과 같은 '신학적 음악가'들이 교회음악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이는 16세기 개혁교회와 초기 한국교회 선교사들이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이다.

 

● 신학적 음악가, 레위인의 필요성

현재 교회음악에는 - 적어도 한국교회에는 - 신학이 도태된 음악가들만 남아있다. 신학적 음악가들이 교회음악에서 이탈한 이유는 로마가톨릭에 저항한 프로테스탄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즉 음악을 정형화된 제의의 형태로 종속시키려는 교회로부터의 해방이다. 저명한 크리스천 뮤지션들이 공예배음악을 적극적으로 섬기는 모습을 찾기 어려운 이유다. 그들이 CCM 앨범이나 음원으로 참여하더라도 그 음악들이 공예배에 적합한 경우도 드물다. 

연주자를 고용하는 한국교회 대부분은 연주자에게 사례비를 제공하고 섭외하여 기계적인 반주 역할만 수행하도록 한다. 조금 더 나아가더라도 기존의 찬양을 편곡하는 수준에 머문다. 사실 고전 찬송가나 시편찬송의 편곡까지 나아가는 것도 굉장한 진보라고 할 수 있다. 어노인팅의 찬송가 앨범도 이러한 작업의 일환이다. 덕분에 고전 찬송가의 선율과 성경적인 가사를 젊은이들이 더욱 친숙하게 느끼게 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어노인팅 찬송가 3집. 찬송가 원곡의 화성을 존중하면서 현대적인 멜로디와 화성을 적절히 응용했다. 대중적이지만 원곡과 이질감 없이 편곡되어 완성도 있는 앨범으로 평가받는다.
어노인팅 찬송가 3집. 찬송가 원곡의 화성을 존중하면서 현대적인 멜로디와 화성을 적절히 응용했다. 대중적이지만 원곡과 이질감 없이 편곡되어 완성도 있는 앨범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우리에게는 개혁교회 시편찬송의 정신을 계승하여 대중적 찬양을 제공할 수 있는 신학적 음악가가 필요하다. 구약에서 성전의 연주자들도 모두 말씀으로 잘 훈련된 레위인들이었듯이, 우리에도 레위인 음악가가 필요하다.

우리는 개혁교회의 전통이 오히려 세상문화를 주도했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음악에 귀를 쫑긋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세속과 구별되어야 하며 성도들의 예배를 방해하지 않을 선율과 화성이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첨예한 작업이 요구된다. 따라서 개혁교회의 시편음악가들처럼 신학과 음악에 정통한 신학적 음악가만이 이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어쩌면 실천신학보다 더 난해하고 첨예한 조직신학은 없을 것이다.

문화사역이 중요한 시대이다. 문화사역에 있어서 교회가 가장 힘써야 하는 것은 컨텐츠가 아니라 문화사역을 섬기는 참된 레위인을 양성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아브라함 카이퍼, 『칼빈주의 강연』

이민지, 『한국인의 찬송가 수용과 선교사들의 대응』

홍정수, 『찬송가의 초기 정착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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