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역에 치중할수록 형이상학 배제 위험
메시지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현대인
문화사역이 중요해질수록 본질 더욱 중요해져
목회자, 문화보다 말씀과 더 씨름해야 할 때
문화사역은 문화사역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위해 필요

신요한 전도사. 서경대학교 실용음악과 졸업, 前 Majesty Ministry 예배사역 전임 세션, 現 판교 열린하늘문교회 중등부 담당 교역자, 코람데오닷컴 객원기자
신요한 전도사. 서경대학교 실용음악과 졸업, 前 Majesty Ministry 예배사역 전임 세션, 現 판교 열린하늘문교회 중등부 담당 교역자, 코람데오닷컴 객원기자

- <문화사역, 이대로 괜찮은가?> (Ⅰ)

● 비대면 시대의 교회, 문화개신교운동을 피하려면?

우리는 앞서 1편에서 문화사역은 리츨학파의 문화개신교운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문화개신교운동은 가치판단 신학의 매커니즘으로 이루어지며, 그 핵심은 형이상학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비대면 시대에서 한국교회의 사역 제반을 보면 영상·소셜·메타버스 미디어 문화의 중요성을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세상 문화도 하나님께서 형성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인간이 형성한 세속 문화도 부분적으로 선하게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문화사역을 발전시킬수록 형이상학이 배제된다는 것이다. 형이상학이 배제되면 복음의 정수가 소외될 위험에 처한다. 복음은 - 비록 역사적이며 실제적이지만 - 본질적으로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이다.

왜 이런 사역이 필요한가를 질문해 보면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리츨을 통해 쉽게 추론할 수 있다. 바로 복음의 메시지 그 자체로 복음을 수용하기 어려운 시대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요소들을 통해 가치판단을 야기시켜야 한다. 즉 영상이 세련되어야 메시지를 듣는다. 시청각으로 감정을 자극시키면 진리를 거스르는 메시지에도 설득되기 쉽다.

이 과정에서 형이상학이 배제된다. 다시 말해 사고를 유발하지 않는다. 감정만 자극될 뿐이다. 이것이 ‘가치판단’이다. 많은 성도들이 유튜브 알고리즘에 매몰되어 이단과 자유주의 신학을 분별하지 못하게 된 오늘날의 현상이 이 문제를 잘 나타내고 있다. 형이상학적인 분별을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취해야 하는 전략은 무엇인가? 유튜브 영상을 세련되게 만드는 것이 대안이라면 우리는 가치판단 신학을 답습하는 것에 불과하다. 인간의 가치판단은 어느 교회가 영상을 현대에 맞게 세련되게 만드는지, 어느 교회가 유튜브와 소셜미디어를 잘 활용하는지에 따라 교회 또는 메신저를 선택한다. 미디어 사역을 고민할 때 교회들끼리 서로의 영상과 컨텐츠를 참고하는 것은 가치판단에 충실할 때 일어난다. 이제는 사람들이 교리가 아닌 이미지로 이단을 구별하기도 한다. 가치판단이 메시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 것이다.

오륜교회 예배당. 대형 LED 스크린이 벽의 일부만 차지하던 과거와 달리, 벽면 모두를 차지하는 초대형 LED 스크린으로 교체한 현재 모습이다. 과거에도 스크린이 크고 성능이 좋은 것으로 오륜교회가 유명했는데, 사이즈가 훨씬 커지면서 오륜교회 성도들에게서도 예배당이 아닌 콘서트장에 온 것 같다는 증언들이 나오고 있다. ©오륜교회
오륜교회 예배당. 대형 LED 스크린이 벽의 일부만 차지하던 과거와 달리, 벽면 모두를 차지하는 초대형 LED 스크린으로 교체한 현재 모습이다. 과거에도 스크린이 크고 성능이 좋은 것으로 오륜교회가 유명했는데, 사이즈가 훨씬 커지면서 오륜교회 성도들에게서도 예배당이 아닌 콘서트장에 온 것 같다는 증언들이 나오고 있다. ©오륜교회

이런 방법으로 사람들이 설득되었다면, 엄밀하게 볼 때 이것은 진정한 부르심을 받은 영혼이 회심하여 하나님 나라 확장의 열매라고 보기엔 어렵다. 물론 문화사역이 회심의 계기를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문화사역의 중요성이 대두될수록 조심해야 하는 것은 청중의 시선이 자신의 죄인됨으로 향하게 하는 것보다 문화적 코드로 향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독자들은 책의 표지를 기준으로 읽을 책을 결정하는가?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목차와 저자의 이력을 확인하고, 추천사를 통해 보증을 얻고, 메시지의 줄거리를 파악한 후 읽을 책을 결정한다. 하지만 우리는 영상을 제작할 때 유독 편집을 강조한다. 편집이 매끄러워야 사람들이 보기 때문이다. 편집은 중요하다. 하지만 화려한 편집은 영상에 시선이 머물도록 만들 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상의 목적이 십자가로, 교회로 영혼을 이끄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 예배당에서는 화려한 영상으로 느꼈던 자극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교회는 그보다 더한 감동을 전하기 위해 화려한 조명과 음악, 자막과 영상, 디자인과 인테리어에 신경을 더 써야할 수밖에 없다. 목회자가 이만큼 비본질에 많은 신경을 쓸수록 본질적인 요소에 해이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목회자는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메시지를 준비하는 시간에 투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직무유기이다.

이제 문화사역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그럴수록, 다소 모순적이지만, 청중들로 하여금 미디어에 대한 가치판단에 의존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이 모순을 극복하는 길은 복음의 메시지에 가장 많은 의지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청자로 하여금 가까운 교회에 잘 정착하도록 돕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성도들을 알고리즘의 감옥에서 벗어나게 해야한다.

 

● 문화사역의 본질

역설적으로 문화사역은 문화사역이 필요 없도록 하기 위해 필요하다. 이는 병원의 존재 목적과 같다. 환자가 없는 세상을 위해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이 존재하는 것처럼, 또한 병든 자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하지만 앞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엔 병든 자가 없는 것처럼, 모든 사역에 있어서 이런 종말론적인 본질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이를테면 유튜브 채널 “잘잘법: 잘 믿고 잘 사는 법”은 굉장히 많은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 출연한 메신저들 중 일부는 교리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메시지에도 그런 문제가 종종 발견된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인식하는 사람들은 적다. 왜 그럴까? 너무 사소해서 그럴까? 시청자가 형이상학적인 개념과 사고가 숙달되지 않았다면 세련된 영상미와 메신저들의 부드러운 성품(ethos)에 가려진 메시지를 분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유튜브 채널에 의존한다면, 잘 믿고 잘 사는 근거가 기독교인 것은 기독교를 궁극의 선으로 가치판단함으로써 나오는 현상, 즉 “잘 믿게 되고 잘 살게 되는 현상”에 대한 기대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러한 매커니즘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없다.

유튜브 채널 “잘잘법: 잘 믿고 잘 사는 법”
유튜브 채널 “잘잘법: 잘 믿고 잘 사는 법”

비록 컨텐츠의 제작자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문화사역의 매커니즘이 형이상학을 배제하기 때문에 자신의 영적 결핍을 영이 아닌 시청각을 사로잡는 영상으로 채우게 된다. 그러면 온전한 신앙으로 성장하기 어렵다. 더 나은 퀄리티의 영상과 메신저를 찾기 위해 알고리즘을 항상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온전한 신앙은 은혜의 방편 즉 말씀과 기도와 성례를 통해 자신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영상·소셜·메타버스를 통한 문화사역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은혜의 방편이 있는 곳으로 성도들을 인도하는 것이 방향성이 되어야 한다.

유튜브와 소셜미디어를 활용한 문화사역은 필요하다. 이것이 회심의 계기가 된 성도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은 교계에서 문화사역 컨텐츠, 마케팅 경쟁이 일어난다면 리츨학파의 오류와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컨텐츠가 중요해진만큼 복음은 더 중요해졌다. 이 긴장과 깊이를 느끼는 교회와 사역자들이 절실히 필요할 때이다. 어두운 때에 항상 일하셨던 하나님의 방법대로 일어나는 진정한 부흥에 갈급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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