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헌옥 목사
천헌옥 목사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원장 김영주)이 엠브레인 퍼블릭에 의뢰해 실시한 ‘2021 주요 사회 현안에 대한 개신교인 인식조사에서 정치성향에 대한 질문에 대해 자신을 중도라고 답한 비율이 전체 47.3%로 답했다고 조사됐다.

이에 반해 진보라고 답한 개신교인은 30.4%였으며, 22.3%만이 보수라고 답했다. 지난 20207월 조사와 비교해보면, '중도' 응답이 7.5%포인트 증가한 반면, 같은 기간 '보수' 답변은 6.5%포인트 감소했으며, '진보'1%포인트 줄어들었다. 진보층 변동이 거의 없는 만큼 보수층이 중도로 이동한 것으로 풀이된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진보와 보수가 균등하게 나왔으니 좋은 것이 아닌가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가 보수보다 8% 정도 많은 것도 그렇지만 중도라고 표한 47.3%는 더욱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는 결코 진보가 될 수 없다. 어떤 목사는 진정한 보수는 진보가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한다. 잘못된 말이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주관해 실시한 '2021 주요 사회 현안에 대한 개신교인 인식조사'에 따르면, 정치 성향에 관한 질문에 '중도'라고 답한 비율이 전체의 47.3%였다. 자신을 '진보'라고 본 개신교인은 30.4%였으며, 22.3%는 '보수'라고 답했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주관해 실시한 '2021 주요 사회 현안에 대한 개신교인 인식조사'에 따르면, 정치 성향에 관한 질문에 '중도'라고 답한 비율이 전체의 47.3%였다. 자신을 '진보'라고 본 개신교인은 30.4%였으며, 22.3%는 '보수'라고 답했다.

그것은 철학의 역사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철학은 한마디로 사람의 논리적 생각이다. 에덴동산에 찾아온 사탄은 하와에게 네 생각을 말해보라고 종용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않은 말까지 변개하거나 바꾸어서 말하게 되고 결국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의 금지한 법을 어기고 타락하게 된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우위에 두고 살기 시작한다. 그래서 가인은 아벨을 쳐 죽이고 묻어버린다. 아벨만 없으면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를 받으실 것이라는 생각이 자신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바벨탑 사건 때는 어떠했는가? 11:4절에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탑을 높이 쌓음으로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생각은 당시 살았던 모든 사람들을 설득하기에 충분하였다.

사람을 설득하는 철학(사람의 생각)은 주전 5-600년 경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두드러지게 세상에 출현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인 양 받아들여졌다. 플라톤의 인간 본성의 정의는 후일 유물론의 기초를 놓았다.

세상을 지배해 온 기독교가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져 내부적으로 썩고 부패하게 되는 것과 르네상스가 맞물리고 종교개혁과 함께 왕권통치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꿈을 꾸던 시절 칸트와 헤겔이 등장한다. 그들은 초기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버금가는 철학자로 이성 중심과 유물론의 길을 여는 선구자가 되었다.

진보는 헤겔의 제자에게서 뚜렷이 획을 그었다. 헤겔의 제자 슈트라우스는 예수의 생애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는 당시까지의 예수의 생애에 대한 해석인 초자연적 해석, 자연주의적, 합리주의적 해석을 배척하고 신화적 해석으로 복음서에는 거의 사실성이 없고 기적이나 메시아 이야기는 '기독교'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신화'라고 치부해 버렸다.

이런 범신론적 해석은 헤겔 철학의 귀결이었고 이로 말미암아 헤겔의 제자들은 두 편으로 나뉘게 된다. 한 편은 기존 신학을 고수하는 보수파였고 다른 한 편은 슈트라우스의 이론을 따르는 진보파 즉 좌파였다. 헤겔 좌파에는 슈트라우스를 위시하여 바우어, 포이어바흐, 슈티르너, 맑스 등이 속하였는데 맑스와 엥겔스에 이르면 무신론으로까지 전개된다.

맑스와 엥겔스의 제자였던 레닌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하고 공산주의 적은 기독교라고 규정하면서 기독교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공산주의는 결국은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다.

19세기에 들어 이탈리아 공산당원인 안토니오 그람시는 단번에 정부를 때려잡고 모든 것을 갈아엎는 원샷의 기동전보다는 사회전반에 진지를 구축하고 사회문화 전반과 싸움을 벌이는 사상의 참호전(전지전)을 벌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에게 사회주의의 최대의 적은 교회였다.

교회를 깨트리기 위해서 그는 조용한 혁명의 11가지 과제를 제시하였다. 그중 하나가 인종차별 철폐였는데 그것이 진화하여 모든 차별철폐에 동원되었으며 오늘날 동성애자를 위한 성소수자 인권법이라는 것이 여기서 뿌리를 두고 있다. 성소수자인권법은 단어가 노골적이어서 그런지 직접적인 단어를 숨기고 그냥 인권법이라고도 하며 평등법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는 명백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는 것이고 교회를 파괴하기 위한 하나의 전술일 뿐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기독교회 교인들이 진보에 기울어졌다는 것은 뭔가가 잘못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한국 정치권의 진보, 좌파는 역사적 진보 좌파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들이 무슨 법을 만들려고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발의한 평등법안(21,8,9), 민주당 이상민 의원이 발의한 평등법안(21,6,16), 민주당 권인숙 의원이 발의한 평등법안(21,8,31), 정의당 권인숙 의원이 발의한 차별금지법안(20,6,29), 민주당 남인순, 정춘숙 의원이 발의한 건강가정기본법, 정부가 발의한 인권정책기본법안(21,12,30) 6개의 악법이 대선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이 속한 여당은 180여 석을 가지고 있기에 마음을 먹으면 무엇이든 입법을 할 수 있다. 지금은 선거철이라서 잠잠하지만 이기든 지든 대선이 끝나면 국회에 발의된 6대 악법은 기지개를 켜고 나올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고 지켜야 하는 기독교는 그것을 깨트리려 하는 자들과 함께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는 철학에 대한 역사적 인식의 부족함 때문이 아닐까?

목사가 성경 중심의 설교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정치를 말하거나 다른 말을 섞으면 그것은 설교가 아니라면서 교인들을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었기 때문은 아닌가? 목사를 길러내는 신학교육에서 신학과는 적대적 관계에 있는 철학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조금만 그 역사를 더듬어만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는 이런 사실을 간과해 버리는 안경 쓴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었기에 목사가 진보를 따르고 교인들이 진보에 더 많이 줄을 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교회는 철학의 역사를 배우고 교회를 파괴하는 사탄이 사람의 생각을 어떻게 지배해 왔는지 저들의 간계를 간파하여 사탄의 전략에 농락당하지 않도록 대비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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