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헌옥 목사
천헌옥 목사

필자는 초,,고를 경남 고성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음성을 듣고 자랐다. 4·19 혁명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 멀지 않은 도시 마산에서 이주열 학생 머리에 최루탄이 박혀 바다에 떠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한참 후에나 들을 수 있었다.

1이던가 박정희 장군이 혁명(후일 군사 정변으로 정리)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는 농촌에 살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는 먼 나라의 이야기로 들렸고 우리와는 별 상관없는 이야기로 흘려들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4.19, 5.16에 대해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박정희 군사 통치시절에는 화폐개혁 등 여러 가지 변화를 겪었지만 말하고자 하는 국기 경례문제는 그리 큰 주목을 끌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중학생 시절까지는 국기에 대한 주목으로 오른손을 가슴에 얹는 것으로 하였고 국기에 대한 경례가 되면서도 명칭만 바뀐 줄 알았을 뿐이지 큰 의미 없이 지나왔을 뿐이기 때문이었다.

197210월에 유신헌법이 선포되면서 국기 경례문제가 강화되고 강요되면서 문제는 심각하게 우리 신앙인들, 특히 고신의 신앙을 가진 우리들에게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배례와 주목, 그리고 최종적으로 경례로 바뀌기까지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기에 대한 배례는 일제 시절에 신사참배와 함께 조선인을 황국신민화시키는 작업의 하나로 시행되었다. 신사참배는 1919년 말에는 조선 땅에 36개의 신사(神社)46개의 신사(紳祠)를 세웠고 1918년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이라 부르는 거대한 신사를 착공하여 8년 만인 19256월에 완공하였는데 이를 기화로 조선 총독부는 법으로 "모든 종교는 최고의 신()인 천황 아래서만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고 선언하면서 신사참배를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기독교를 비롯한 전문학교 학생들이 반대하자 다소 자유롭게 하도록 규정을 완화하였다가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본은 관공서를 비롯한 학교 학생들에게 의무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국기에 대한 배례도 신사참배 못지않게 강요되었다. 배례라는 말은 머리를 숙여 절하는 의미를 가진 그대로 국기에 대하여 90도로 머리를 숙여 절하는 예식이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함으로 투옥당하여 해방을 맞이한 고신의 선조들에게 배례는 신사참배와 맞먹는 우상숭배로 인식되기에 충분하였다. 그래서 해방되면 그런 우상숭배 강요는 사라질 줄로 알았던 한국교회는 제일 먼저 국기 배례문제를 해결하여야 했다. 왜냐하면 일장기 앞에서 국기배례를 하는 대신 그 자리에 태극기가 바뀌어 걸려 여전히 국기배례가 시행되었기 때문이었다.

독립운동가들에게 태극기는 나라 자체고 생명을 걸고 지킬 만큼의 존재였다. 그리고 3.1운동을 하면서 숨어서 태극기를 만들던 조선인들에게는 나라 그 자체였다. 해방 이후 그런 정신이 자연스레 국기배례로 이어졌다. 그것을 거부하면 마치 반역자나 다름없이 여겨졌다.

여기에다 조선은 남북으로 나뉘어 이념 대결을 하면서 국론을 한데로 모으는 역할의 구심점으로 태극기는 일제와 싸워 이긴 조선인의 상징일 뿐 아니라 반공교육의 현장일 수밖에 없었다. 국기배례를 반대하는 자는 공산주의자와 동일시되었고 학교에서는 국기배례가 자유 대한을 지지한다는 표상이었고 국기를 사랑하는 것이 곧 나라를 사랑하는 증표로 인식되었다.

그리하여 신사참배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출옥 성도들에게 이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당시는 미군정 시절이었다. 자녀가 없었던 한상동 목사는 체감하지 못했지만, 당시 손양원 목사는 부산 금정중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이 있어 이를 재빨리 알아차리고 국기배례를 거부하라고 지도하였다. 안동서부교회의 이원영 목사는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고 딸 이정순은 안동여자중학교에서 대구 신명학교로 전학까지 하였다.

당시 국기배례문제는 안동지역 신문 등에서 기사화되면서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1947. 3. 20. 서울석간, '민의 무시한 교장 - 안동농림교 불상사 발생'
1947. 3. 20. 부녀일보, '안동농림교 소동 - 교장 배척코자 교원 총사직'
1947. 3. 21. 부녀일보, '안동농림학교 소동 해결?'
1947. 5. 09. 독립신보, '안동농림중학서도 다수 학생을 퇴학'
1947. 9. 13. 영남일보, '150명 퇴학 처분 - 학무국서 진상 조사 착수'
1947. 9. 19. 영남일보, '안동농림생 퇴학 처분 - 경과 진상을 발표'
1947. 10. 2. 영남일보, '안동농림교 사건 복교 편입?'
1947. 10. 14. 부녀일보, '민주 학원 건설 위하야 전제적 교장 파면하라

- 안동농교 퇴학처분 거부 투위 성명'
1947. 10. 24. 부녀일보, '150명 퇴학 처분한 안동농교 사건 미해결'
1947. 10. 24. 영남일보, '안동 농림교 사건 - 해결은 생도 측 자숙에서'

1948815일 대한민국이 건국을 하였지만 1949428일 경기도 파주 조리면 죽원리교회(현 대원교회) 주일학교에 출석하는 초등학생 수십 명이 국기배례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이 학교 교장이 기독교인 학생 42명을 퇴학 처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동아일보에는 이와 관련한 기사로 정부 당국의 입장을 소개하는 정도였지만 중앙지에서 국기배례문제가 수면위로 올라왔다.

이 문제는 제35회 장로교 총회(1949419~23)에서 거론되었다. 경남노회·군산노회는 '국기 경례 방식 변경'에 대한 헌의 안을 냈고, 죽원리교회 최중해 목사는 봉일천국민학교 국기배례 거부 사건에 대해 보고했으며, 총회는 '국기에 대한 주목례 변경 문제'를 손양원 목사에게 맡겨 정부 당국과 교섭하는 것으로 결의했다.

한국기독교연합회는 1949511일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국기배례를 '주목례'로 하자는 진정서를 제출해 찬성 회신을 받았다. 한국기독교연합회는 국기가 우상이 아닌 것은 인정하지만 우상화할 우려가 있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듬해인 19503월 대한예수교장로회는 국기배례를 '주목례'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는 '경애하옵는 이 대통령 각하' 제하의 공개 청원서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제출하게 된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일제의 '일장기 배례'와 유사한 형태의 '국기배례' 의식은 기독교적 규범과 신앙 양심으로는 수용하기 어려운 '우상숭배'로 인식돼, 당시 친기독교적 성격을 띤 이승만 정부(국회도 포함하여)'배례(拜禮)''주목례(注目禮)'로 전환하는 역사적 변화를 이끌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도 여러 가지 문제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필자는 주목례를 실시한 학교에 다녔기에 별문제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경례로 바뀐 상황에서 학습과 세례를 집례했던 고성성내교회 정재영 목사는 이 문제에 대해 고신정신이 살아있는 대쪽 같은 분이셨고 그 후 이사로 인해 마산 제2문창교회로 교회를 옮긴 후 입대하기 전까지의 신앙을 지도해 주셨던 손명복 목사 역사 출옥 성도답게 단호한 입장을 보이셨기에 자연히 경례에 대한 거부가 나의 신앙이 되었다.

경례는 배례의 변형일 뿐 그 본질은 변한 게 아니라는 인식이 강하였으며 인격체가 아닌 어떤 물체에 경례를 하는 것은 우상숭배나 다름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학교에서 아침 조례 시간에 교장 선생님께 대하여 경례하면 일제히 손을 모자 창에 붙이는 경례를 하였는데 그래놓고 국기에 대하여 경례하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는 두 분 목사님의 지도에서 확고한 신념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그 후 군복무 기간에서도 경례는 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장신에 속하였던 나는 언제나 맨 뒤에 서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경례하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하여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부대원이나 중대장, 혹은 부대장도 국기를 주목하였기 때문에 나를 보지 못했고 또 설혹 나를 적발하여 영창에 집어넣는다 해도 그것을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감옥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오히려 영광이라고 생각했기에 아주 떳떳하게 경례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다가 제대하고 고려신학대학에 입학하던 해인 19739월에 김해여고 국기경례 거부 사태로 6명의 학생들이 퇴학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972년 유신헌법이 공표되고 이어 국기에 대한 맹세문이 경례를 하는 학생들에게 낭독되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이는 어떤 면에서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그것을 국가주의와 독재 집권 연장의 도구의 하나로 이용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국가에 충성하려는 학교장들과 일부 교사들은 경례를 거부하는 학생들을 종교의 자유로 보아주지 않고 국가에 반하는 행동을 한 것으로만 생각하였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퇴학 처분을 내린 것이다.

그 당시 한국교회는 신사참배를 회개하지 않았던 때이라 이 문제는 오롯이 고신만의 문제로 치부되었다. 대부분의 교회가 유신독재에 그리고 국가주의로 가는 것에 대해 침묵하였기 때문이다.

고신총회는 학생들을 도와 <헌법이 보장한 양심과 종교의 자유를 침해당했다>면서 제적 처분 취소소송을 냈지만 3년여의 재판 끝에 대법원은 학교의 손을 들어주면서 이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총회는 신학적 입장을 정리하기로 했지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고 결국은 각자의 신앙양심에 맡기는 것으로 결론 낸 것이 모두였다.

필자는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옥중 성도에게 신앙교육을 받은 양심으로서는 국기에 대해 경례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고 앞으로도 거부할 수밖에 없다. 살아있는 인격체에 대해 경례를 하는 그 경례를 비인격체인 국기에 대하여 경례를 하는 것이 아직도 양심에 허락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주목으로도 충분한데 기어이 경례로 바꾼 그 저의가 의심스럽기도 하기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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