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사회적 거리 두기와 함께 생겨난
모든 마음의 거리 두기, 영적인 거리 두기를
털어내는 결단이 필요

최광희 / 행복한교회 담임목사, 총신대학교(B.A.)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div)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Th.D.)
최광희 / 행복한교회 담임목사, 총신대학교(B.A.)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M.div)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Th.D.)

COVID-19, 2019년 말에 중국 우환에서 발병하기 시작하여 2020년 봄, 전 세계적으로 대유행하던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에서 이제 우리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COVID-19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치료하면 되는 여러 질병 가운데 하나로 약해졌습니다.

2022415, 김부겸 국무총리는 18일부터 사회적 거리 두기 조치를 해제한다고 밝혔습니다. 이제 모든 사적인 모임에서 인원 제한과 영업시간 제한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아직 마스크 착용 의무는 유지하고 있지만 2주 후에는 실외 마스크 착용 해제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25일부터는 코로나192급 감염병으로 하향 조정됩니다. 그렇게 되면 4주 경과 후 5월 말부터는 확진자가 격리하지 않아도 되고 병원에서 대면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번 발표를 통해서 달라진 가장 중요한 사실은 종교 시설의 모임 인원 제한이 해제되고 25일부터 식사도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교회에서 예배는 물론이고 각종 소모임, 그리고 수련회까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한때 공무원들이 교회가 방역지침을 잘 지키는지 예배시간에 조사하고 다니던 모습은 마치 5공 시절에 경찰관이 지나가는 젊은 여성을 붙들고 치마 길이를 단속하던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추억으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부에서 2년 넘게 지속하던 사회적 거리 두기 조치를 해제한다고 발표함으로 모든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동안 우리가 사회적(물리적)으로 거리 두기를 하면서 마음으로도, 열정으로도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긴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의 느슨해진 마음의 거리 두기를 어떻게 다시 회복할 것인가 하는 것이 더 큰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21개월 전에 등장한 표현이지만 거리 두기의 원조는 따로 있습니다. 고난주간의 묵상 가운데 예수님이 체포되시는 장면에서 보면 사회적 거리 두기의 원조는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을 체포한 군병들이 예수님을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데리고 갈 때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처럼 아예 도망가버리지는 않았지만, 예수님과 운명을 함께 하겠다고 나서지도 못한 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 정도로 거리를 유지하면서 가야바의 집까지 따라간 것은 베드로에게 의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베드로는 그 정도 거리 두기가 정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생각과는 달리 그 정도의 거리 두기는 사소한 시험만 와도 믿음을 포기하는 위험한 거리였음이 금방 밝혀졌습니다. 어떤 군병이 와서 베드로를 체포하기 위해 신문(訊問)한 것도 아니고 그저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당신이 예수와 일당이 아니냐고 말할 때 무슨 소리냐고 부인했던 것입니다. 앞문으로 가는 베드로를 향해 다른 여종이 베드로를 알아보고 이 사람이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할 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알지도 못한다고 부인했습니다. 결국에는, 또 다른 사람이 베드로가 예수와 일당이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저주하고 맹세하며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어젯밤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새벽닭이 울었습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처음 시작될 때 많은 성도들이 예배의 모임이 제한받는 것에 마음 아파했습니다. 교회는 모든 것이 모임으로 시작되고 진행되는데 모임이 제한받자 슬퍼했고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활도 기간이 길어지면서 서서히 적응했고 이제는 그런 생활이 익숙해졌습니다. 주일 성수와 신앙생활이란 예배 참석만이 다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영상예배에 한 시간만 접속하면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에 대해 오히려 편리하게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물리적 거리 두기는 금방 마음의 거리 두기로 이어지고 급기야 영적인 거리 두기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도 처음에 그 정도 거리 두기는 괜찮은 줄 알았을 뿐, 그 결과로 세 번 부인(否認) 및 예수님을 향한 저주와 맹세를 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국가적으로 거리 두기를 끝낸 이 시점에 성도들도 영적인 거리 두기를 완전히 끝내야 새벽닭 울음소리와 함께 심히 통곡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가까이 오실 때 고개를 들고 주를 맞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 부활주일에 고개를 들고 부활의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사회적 거리 두기와 함께 생겨난 모든 마음의 거리 두기, 영적인 거리 두기를 털어내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번 부활주일에 우리는 서로 이런 인사를 하면 좋겠습니다. “거리 두기는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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