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남자와 여자를 서로에게 적절한 돕는 이로 하나님이 만들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이루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서로 돕는 한 몸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서로 돕는 삶, 서로를 지켜주는 삶, 그래서 선악과를 먹지 않고, 남의 먹을 것을 지켜주는 삶이 선한 세상의 실체이다. 그런데 이것이 파괴되는 사건이 생긴다.

 

1. 벌거벗음과 뱀의 간교함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창2:25절에 나오는 벌거벗었다는 표현과 창3:1절에 뱀에 대한 소개에서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는 문장에서 간교하다는 말은 발음이 유사하고 자음이 같다. 벌거벗은 이란 표현은 עֲרוּמִּ֔ים 이고, 간교하다는 말은 עָר֔וּם 이다. 아루밈과 아룸이다. 둘 다 형용사이다. 부끄러운에 해당하는 형용사는 복수형이고, 간교한에 해당하는 형용사는 단수형이다. 발음이 유사함을 통해서 두 단어 사이에 깊은 연관성을 듣는 청자들이 가지게 된다.

 

벌거벗었지만 부끄럽지 않다고 부정적인 서술을 하였다. 이는 벌거벗음으로 인해 부끄러워진 상태를 전제하고 기록한 표현이다. "부모를 떠나" 라는 표현과 함께 기록된 시점의 현실에서 에덴의 상태를 말한다. 벌거벗은 것이 문제가 되어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리고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일까지 생긴다. 벌거벗은 것이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 기록된 것이다.

 

2. 뱀의 간교함은 무엇인가?

벌거벗음이 문제가 된 것은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이다. 왜 사람이 선악과를 먹었는가?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창3장의 의도이다. 선악과를 먹은 것이 인간의 자발적인 충동인가? 아니면 어떤 다른 것의 충동이 있었는가? 뱀의 충동이 있었다. 3장은 뱀의 소개로부터 시작한다. 뱀은 하나님이 만든 짐승들 중에 가장 간교하다. 간교하다는 번역은 해당 대상인 뱀이 결국 악한 일을 이룬다는 측면에서 부정적인 인상을 주게 된다. 만약에 좋은 대상이라면 슬기롭다 혹은 지혜롭다 등으로 번역이 가능한 단어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들 짐승 중에 가장 간교함으로 시작한 단락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인가? 결국 사람으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어도 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에덴에 두면서 주어진 과제 경작하며 지켜야 할 것을 파괴한 것이다.

 

뱀은 여자에게 접근하여 동산의 모든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는지를 묻는다. 모든 실과를 자유롭게 먹도록 한 사실과 너무 다르다. 여자는 동산의 실과를 먹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는다 라고 답변을 한다. 여기서 만지지도 말라는 말은 하나님이 말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두고 부정과 긍정의 입장이 나누어진다.

 

부정적으로 보는 입장은 하나님의 말씀에 일점일획도 첨언을 하거나 빼서는 안 되는 데 덧붙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이 지나치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는 생각을 반영한다고 본다. 그러나 반대로 긍정적인 입장에서는 먹지 않기 위해서는 만지지도 않아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실천 강령을 스스로 정한 것이라고 본다. 명령 혹은 율법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방식과 다짐을 반영하는 좋은 태도라고 본다. 어느 쪽으로 보아야 하는지는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는 않는다. 뱀이 공격하는 핵심은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이다.

 

먹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먹으면 죽는 것이 있다. 뱀은 바로 이 지점에서 공격한다. 먹는 것은 살기 위해서이다. 결코 죽지 않는다. 먹는 것은 다 유익하다. 뱀은 하나님이 먹지 않도록 금하신 것이 가진 특별한 효능을 제시한다. 즉 하나님만의 음식인 것처럼 말한다.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된다. 그래서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신다. 정리하면 동산 중앙의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 실과를 먹으면 신적 존재가 되어 선악 판단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음으로 사람에게 일어날 변화를 제시한다. 먹는 과실의 이름에 담긴 의미를 오롯이 먹는 자에게 유효하게 된다고 격려한 뱀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었으니 당연히 선악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한 것이다. 당연해 보이는 논리적 귀결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이 고려되지 않고 있다.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는가? 왜 다른 실과들은 다 먹어도 되는데, 이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고 하나님이 금하시면서 명령하시고 죽음의 형벌을 부가하신 이유를 하나님의 이기적인 태도가 숨어있음을 항변한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항변이다. 죽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확 잘라버리고 하나님의 의도를 짓밟고 먹는 인간에게 펼쳐지는 세계를 제시한다. 하나님이 만드신 동산에서 사람만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전개하도록 격려한 것이 뱀의 간교함의 실체이다.

 

실제로 여자가 그 나무 즉 선악과를 바라보았을 때 반응을 적고 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고 한다.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것은 에덴의 모든 실과가 그러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참고 창2:9). 그러나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는 것은 뱀의 말과 직접 연결이 된다. 뱀의 말에 의하면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는데, 선악을 알게 된다고 한다. 뱀은 먹어야 선악을 알게 된다고 여인을 설득했고 그 설득의 결과 선악과를 보니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

 

3. 선악을 아는 방식의 차이

뱀이 말은 먹어야 선악을 안다고 격려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타락의 결과는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로서 인간의 역할을 하나님도 인정하신다(3:22). 그런데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알게 된 선과 악의 지식이 과연 정상적인가? 이것이 의문이다. 선악과를 먹음으로 알게 된 선과 악의 지식이 사람을 에덴에 머물게 했는가? 선과 악의 지식을 가지고 어떤 결과들을 인간이 만들어 내게 되었는가? 짐승의 희생과 형제 살인과 힘과 권력에 의한 지배와 살인과 희생을 정당화하는 세상을 만들지 않았는가?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은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되었다는 말이고 그 결과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선악의 실체와 대립하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선악의 주체가 되는 것과 뱀의 간교함에 이끌린 결과 사람이 주체가 된 선악은 어떻게 다른가?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될 때,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 선이 되고 만족을 주지 않는 것이 악이 된다. 사람이 기준이다. 인간 자신의 시선이 기준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다스리는 일을 한다. 다스림의 구체적인 내용은 경작하고 지키는 것이다. 지키는 것의 핵심이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은 남의 먹을 것을 지키는 삶이다. 서로 돕는 인간들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인간됨이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음으로 알게 되는 선악은 다른 세상이다. 내가 필요하면 다른 사람의 먹을 것도 먹을 수 있는 세상이다. 즉 약탈과 도적질이 가능한 세상이 된 것이다. 이런 행동의 근거는 내가 필요하고 내가 좋기 때문이다. 힘과 권력만 있으면 그것을 만족하기 위해서 어떤 일도 할 수 있고 그것은 선이 되는 세상이 전개된 것이다. 인간이 선악의 기준이 되는 세상의 현실이다.

 

우리는 선악과를 따 먹은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선악과가 다른 사람의 먹을 것이란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뱀의 간교함은 단순하다. 왜 다른 사람이 먹도록 두는가? 네가 먹을 수 있는데. 네가 손만 뻗으면 네 것이 되는데 왜 그것을 남이 먹도록 두는가? 어리석은 일이다. 네가 먹어라. 남의 떡이 얼마나 맛있는 줄 아는가?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먹을 것에 자신의 명령을 걸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돕는 삶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신앙적 결단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그리고 서로 돕는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선악의 기준이 되고 주체가 될 때는 어떠한가? 말한 대로 하나님은 사람이 서로의 삶을 잘 돕고, 같이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남의 먹을 것을 지키는 삶이 하나님의 형상다운 진정한 인간의 품위를 지키는 삶이다. 경작하여 일하지만, 나의 노력과 수고에는 다른 사람의 몫이 들어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서로 수고하는 삶을 사는 서로 돕고 살면서 서로를 귀하게 여기는 세상이다.

 

뱀의 간교함은 선악과를 먹도록 했다. 선악을 아는 일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이다. 남의 양식을 건드리면서 만족하는 세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선악은 다르다. 남의 음식을 존중하는 세상이다. 율법은 배고픈 사람이 과수원에 들어가서 먹고 나오는 것은 무죄하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들고나오면 도적질이 된다. 그리고 추수할 때는 항상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고, 귀퉁이를 남겨놓아야 한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가난한 이웃과 나그네와 레위인을 잊지 않아야 한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선언함으로 안식일 율법마저도 배고픈 사람을 위해 있다고 선언하신다. 다윗과 그의 소년들이 배고플 때 제사장의 진설병을 먹어도 된 일은 안식일에 벼 이삭을 비벼 먹어도 된다는 것으로 발전한다. 우리의 수고에는 남의 양식이 들어있다. 이것을 지켜내는 것이 선이다. 그리고 이것을 파괴하는 것이 악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악 개념이다. 그러나 뱀은 다르다. 네가 먹고 싶으면 남의 것이라도 먹어라. 왜 남의 것을 그대로 두는가?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욕심을 부추기는 뱀의 지혜는 인간을 파멸로 몰고 있다.

 

이제 부끄러움의 문제로 나가자.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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