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이세령 목사(복음자리교회 담임)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사람은 벌거벗음을 알게 되고 이를 치마로 가렸다. 벌거벗음을 알고 부끄러워하는 것은 선악을 아는 상태이다. 그런데 벌거벗음(ערומים)과 사탄의 간교함(ערום)과 연결된다. 벌거벗음을 알았다는 것은 결국 사탄의 간교함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타락의 결과는 하나님처럼 선악을 판단하는 일에 주체자가 된 것이지만 결국 사탄의 간교함에 이른 것이다. 사탄의 시각으로 선악을 아는 것이 바로 벌거벗음을 아는 것으로 드러난다. 사탄의 간교함으로 인간은 죽음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이 없는가? 하나님이 사람을 찾아오신다.

 

1. 바람이 불 때: 에덴의 주인이신 하나님

선악과를 먹은 사건은 사람의 벌거벗음이 사탄의 간교함에 이른 사건이다. 에덴의 질서가 깨어지고 사탄의 간교함이 지배함이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에덴을 경작하고 지키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뱀과 사탄의 생각대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할까? 과연 에덴에 뱀의 영역으로 전락하도록 하나님이 그대로 두시는가? 하나님이 에덴의 주인 됨을 말하는 사건이 생긴다.

그날은 여자가 선악과를 먹고 남자에게도 주어 먹게 한 날이다. 그리고 벌거벗음이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하고(뱀의 간교함)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한 날이다. 그날에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영이다.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는 문맥이 결정한다. 과연 바람이 분 것인지 영이 등장을 한 것인지 보자.

비슷한 본문이 창1:2절이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를 운행하였다. 여기서 하나님의 신이 하나님의 영이다. 그런데 왜 영이 등장하는가? 창조의 6일이 진행되기 전 상태에서 창조가 어떻게 진행될 것을 알리는 것이 창1:2절의 역할이다. 창조의 6일은 혼돈과 공허를 넘어 사람이 거주하도록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첫 3일은 분리로 혼돈을 극복하고, 후반부 3일은 채움을 통해 공허를 극복했다. 그리고 흑암과 물의 상태이다. 이것은 사람과 모든 피조 세계가 거할 수 없는 상태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영이 등장하여 순회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은 혼돈하고 공허한 땅, 그리고 흑암과 물의 상태에서 그 창조될 세상의 주인으로 그 세상을 품고 있다. 운행한다는 말은 모세의 노래로 유명한 신32장에서 독수리가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11)의 구절에 너플거리다와 같다. 자기 새끼를 품는 어미 새의 모습이다. 다른 어떤 위험에서 새끼의 보호자로 등장한다. 새끼의 주인이며 보호자란 선언이다.

마찬가지로 창1:2절에서 영이 운행한다는 표현은 땅과 흑암과 물의 주인 됨을 선포한다. 그리고 영의 등장은 영역의 주인 됨을 선포하는 동시에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음을 예견한다. 영은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 그래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보여준다. 창조의 6일의 창조를 하나님이 하실 것을 미리 등장하여 방향을 제시한다. 1:2절을 창조의 6일의 프로그램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1:2절을 바람보다는 영으로 번역한다.

3:8절에서도 영이 등장한다. 여기서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하나님이 자기 사람들을 찾으시는 배경으로 바람이 부는 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바람이 등장하는가? 영의 등장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에덴에 불순종과 죄가 들어와서 뱀이 실제로 주인 됨을 주장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때 에덴에 영이 등장한다. 영의 등장은 그곳의 실제적인 주인 됨을 주장하는 표시이다.

많은 서구어는 "날의 서늘함으로" 번역한다. 서늘함이 바람의 효과로 보면 개정 개역이 "바람이 불 때"로 번역한 것과 유사하다. 그런데 왜 바람이 부는가? 왜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시는데 바람이 부는가? 서부영화의 총질 대결 장면 전에 한 장면인가? 바람이 부는 자연적 환경에 대한 묘사가 가능하다. 그런데 표현 하나하나가 엄청난 무게감을 주는 상황이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뭐를 하겠다는 것인가? 하나님이 거니시는 것과 무슨 상관인가?

바람보다는 영이 있는 것이다. 그날 즉 선악과를 먹은 날, 뱀이 승리했다고 여기는 그날에 영이 등장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동산을 거니신다. 영이 등장함으로 창1:2절과 같이 이곳은 내가 다스리는 영역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조치를 하실 것을 예견하게 만든다. 뱀이 지배권을 행사하려고 하는 현장에 하나님이 주인임을 선언하면서 주인으로서 어떤 조치를 하실 것을 예견하게 만든다. 실제로 이후의 내용은 선악과를 먹을 책임을 추궁하고 이에 대한 저주를 선언하시는 과정이 생긴다. 그래서 에덴에서 추방함으로 생명나무를 지키고 에덴을 보호한다. 에덴에 죄에 의해서 오염된 현실을 방치하지 않고 고치시고 지켜낸다.

8:1절은 노아 홍수위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모든 호흡하는 것들이 다 죽은 상태에서 일어난 일을 말한다. 하나님이 노아와 방주의 모든 것을 기억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람을 불게 해서 물이 줄어들었다. 바람을 땅 위를 건너가게 했다가 직역에 가깝다. 물이 모든 생명을 삼켜버린 상태는 마치 창1:2절의 상태와 다른 바가 없다. 창조의 6일의 질서가 다시 혼돈과 공허로 돌아간 상태이다. 흑암이 수면 위에 있는 상태이다. 이때 하나님이 영을 땅 위를 횡단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영이 등장하면 그곳에 변화가 일어난다. 홍수로 뒤덮인 하나님의 심판 현장이 노아와 방주만을 남겨놓은 상태이다. 그러나 이 상태에서 하나님이 영을 보냄으로 이 현실도 하나님의 다스림의 자리라는 선언과 동시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으로 되돌리는 역사가 시작될 것을 예견한다.

이후 다양한 역사 현장에 영이 등장한다. 홍해를 가르는 장면에서 동풍이 분다(14:21). 동쪽 바람이다. 바람은 역시 영이다. 이것을 모세가 노래하면서 정리할 때 주께서 바람을 일으키시매(15:10)로 표현한다. 바람 혹은 영이 일어나 홍해라는 현장의 주인 됨을 선언하고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출하시는 일을 하신다. 물이 한곳으로 모이도록 한 창조의 영과 다를 바가 없는 영의 역사이다. 사사들에게 임한 영과 이사야 선지자가 제시하는 다윗의 씨에게 임할 영과 여호와의 종에게 임한 영 등은 전쟁과 포로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다윗의 언약을 성취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구속의 역사를 담보하는 역할이다. 결국 예수님에게도 영이 임하였고, 오순절에 교회에게 임하였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에게 임하는 나라를 교회를 통해 세워가신다는 증거이다.

이제 에덴동산으로 돌아오자. 뱀의 간교함이 득세한 에덴에 영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여전히 에덴의 주인이라는 선언이다. 그리고 주인으로서 하나님께서 질서가 깨어진 일, 선악과를 지키지 못한 일에 대한 책임 추궁과 심판을 하시면서 에덴을 정화하고 생명나무를 지키시는 일을 하신다는 의지가 표명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역에 주인으로서 에덴을 거니신다. 그리고 이것을 피해서 숨은 사람들을 찾으신다. 아담을 부르신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땅의 주인이 경작하고 지키도록 둔 동산에서 자기의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찾고 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피하여 숨는다. 숨는 삶은 그 자리에 적합한 모습이 아닌 자신들임을 보여준다. 벌거벗음이 부끄럽기에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리고 찾는 하나님을 피하여 숨는 현실이다. 가리고 숨은 자들을 불러서 저들의 삶을 회복하는 길로 인도하신다.

 

2. 책망과 회복의 단락에 대한 구조적인 이해

지난번 글에 창3:9-19절에 대한 구조분석을 소개하였다. 다시 불러 정리한다.

A. 남자의 죄를 추궁하시는 하나님(9-11)

      B. 여자의 죄의 책임 (12)

           C. 뱀의 책임 (13)

           C’. 뱀에 대한 형벌(14-15)

    B’ 여자에 대한 형벌(16)

A’ 남자에 대한 형벌(17-19)

(이 구조분석은 R. Ouro, the garden of eden account: the chiastic structure of genesis 2-3, Andrew Univ. Sem. Studies, vol 40.2 pp.236-7, 2002를 참조하였다).

 

AA'는 남자에 대한 책임추궁과 형벌 혹은 저주이다. 그리고 BB'는 여자에 대한 책임추궁과 형벌이다. CC'는 뱀에 대한 책임추궁과 형벌이다. 이 단락이 가진 전체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영이 있는 에덴임을 선언하고 그곳에 주인 됨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이다. 뱀의 간교함으로 전락한 인간의 상태(벌거벗음과 부끄러움)를 다시 하나님의 편으로 이끄는 과정이다.

먼저 남자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 남자는 내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벗었기에 두려워하여 숨었다고 답변한다. 이때 하나님은 네가 벗은 것이 왜 문제가 되냐고 질문하신다. 벗은 것을 알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네가 먹지 말아야 그 나무(선악과나무) 열매를 먹었음을 지적하신다. 그것 외에는 아담의 벌거벗음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자 남자는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한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도록 한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주어서 먹었다고 말한다. 먹게 된 것, 벌거벗음이 비정상인 상태로 전락한 것에는 하나님이 주신 여자가 문제를 일으켰다고 항변한다. A'에서 하나님은 남자가 땅이 너로 인해서 저주를 받는데, 가시와 엉겅퀴를 낼 것이다. 그리고 그 가시와 엉겅퀴를 제거하기 위해서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거리로 먹을 수 있게 된다. 가시와 엉겅퀴라는 땀을 흘리는 고생과 수고를 통한 열매를 먹도록 하신다. 죄가 있는 세상, 가릴 것을 가려야 하는 세상, 에덴 밖의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이 주어진다. 단지 수고의 땀을 흘려야 고생의 떡을 먹게 된다.

수고의 땀을 흘리지 않는 삶은 인간의 현실을 외면한 삶의 방식이다. 수고와 땀, 고생과 눈물의 떡을 먹으면서 사람들은 역시 지켜야 할 삶의 길을 걸어야 한다. 남자의 땀 흘리는 수고와 여자의 생산하는 고통은 지켜야 할 생명과 삶을 위해 살아야 할 이유를 제공한다. 편한 삶, 풍족한 삶만을 추구하는 것은 에덴 밖에서 사는 사람들의 정상적인 모습이 아니다. 땀 흘리는 수고와 아이를 낳은 큰 고통은 선악과를 먹은 결과이다. 남의 먹거리를 탐낸 결과이다. 고통과 수고는 우리에게 자신의 삶이 나만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가족과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흙으로 돌아간다. 땅에서 남기거나 가지고 가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같이 먹기 위해서 수고하고 이웃의 삶을 지키는 일에 힘쓰면서 살다가 흙으로 돌아간다. 수고하고 지키는 삶에 우리의 새로운 생명의 길이 열린다.

두 번째는 여자에게 물으신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이렇게"가 가르치는 것은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일관성 있게 선악과를 먹은 문제를 추궁하신다. 여자는 뱀이 나를 꾀었기에 내가 먹었다고 했다. 여자는 뱀이 나를 속였다고 말한다.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알게 된 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벌거벗은 현실을 부끄러워하면서 가리는 현실을 속았다고 이해했다. 하나님과 같이 선악의 판단자가 되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이 주인인 에덴에 살기를 감당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시야를 숨을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속은 것이라고 본다.

하나님은 단락 B'에서 여자에게 형벌을 내리신다.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시고, 남편과의 갈등을 가져야 한다고 선언하신다. 임신하는 고통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창조 의지를 보존하심이다. 단지 고통을 크게 더하였다. 이 말은 원래 아이를 낳는 일이 고통이 있다. 그런데 아이를 낳는 일에 고통을 부각시키심이다. 그리고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서로 다스리고 지배하려는 갈등이 있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아담이 여자의 말을 듣고 따름으로 함께 선악과를 먹은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는 일에 갈등이 있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에 갈등을 가짐으로 그 집이 뱀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 자리에 있게 된다.

아이를 낳는 고통의 더함이 온 것도 선악과를 따 먹은 결과이다. 남의 먹거리를 먹은 결과, 지킬 것을 지키지 못하는 삶이 주는 결과를 다음 세대를 얻는 복의 순간에 각인시켜 놓았다. 생명을 가진 인간은 홀로 살지 못한다. 남을 위해 함께 돕고 사는 인생이다. 다른 사람의 먹거리를 지키고,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때론 갈등을 치루어야 한다. 탐욕과 욕심,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 삶의 일치를 가져서는 안 된다. 거기서 생명의 길이 열리게 된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는 세상으로 다시금 돌아가는 길이 열린다.

다음에 뱀에 대한 책임추궁과 형벌을 계속 살핀다. 소위 원시 복음을 본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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