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시대, 여성의 과도한 참여와 주장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복음 방해
오늘은 여성안수금지가 교회 침체... 복음전파의 걸림돌

한성국 목사/ 고신대학 신학과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평화교회(부산동부노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한성국 목사/ 고신대학 신학과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평화교회(부산동부노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목차

1. 여성안수금지이젠 바뀌어야 한다

2. 성경해석에서 기억해야 할 세 가지 사실 

3.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에 대해

4. 초기 기독교 시대 여성 참여.

5. 여성을 향한 예수의 말씀과 행동.

6. 오늘 교회는 여성에 대한 성경을 ‘새롭게’ 읽어야 한다.

7. 여성안수는 성령의 역사를 따르는 우리 시대의 순종이다.


5. 여성에 대한 예수의 말씀과 행동.

 

5.1. 예수는 여성을 언제나 긍정적으로 대하신다.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에는 여성비하나 차별이 전혀 없다. 2000년 전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놀랍다. 그분은 여성들을 치료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야이로의 딸을 고치고(5:22)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하신다.(1:30)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며(7:11-17) 꼬부라져 18년 동안 살아가던 여인을 안식일에 고치신다.(13:10-13) 그분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성의 편이 되시며(8:2-11) 남편이 다섯 있다고 비난받는 사마리아 여인을 우물가에서 대화하신 후 복음의 증언자로 만드신다.(4) 그분은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를 사랑하셨으며(11:5) 열두 해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치시면서 자신의 옷깃을 붙잡은 믿음을 칭찬하신다.(5:25-34) 하나님나라를 가르치는 그의 비유에는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아 기뻐하는 여인(15:8-10)과 밀가루에 누룩을 넣어 요리하는 여인(13:21)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분은 차라리 개라도 되리라는 수로보니게 여자의 간절함을 믿음의 모범으로 칭찬하신다.(7:24-30) “이 여자는 복음서에서 예수와 논쟁을 해서 이긴 유일한 사람이다.”(톨버트) 이처럼 주님은 여성들을 스스럼없이 만나셨고 여성들 또한 그분을 기쁘게 영접했다. 이것은 당시 사회상황과 율법 기준에 비추어 볼 때 놀라운 일이었다.

또 주님은 남성 우월주의를 비판하신다. 당시 남성들은 이혼증서와 같은 율법규례를 이용하여 여성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그분은 무슨 이유가 있으면 - 그들은 온갖 이유를 붙여 아내를 버렸다 -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습니까”(10:1-12)라는 바리새인의 질문에, 음행의 연고 외에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못 박는다. 그런 다음 남성들을 향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5:27-32)고 선언하신다. 지금껏 이 계명은 일방적으로 여성들에게만 적용하여 정죄 대상은 대부분 여성들이었다.(요한8장을 보라. 그들은 돌로 여자를 치려하면서 간음한 남자에겐 관심이 없다.) 주님은 그 계명을 남성들에게 적용하신다. 이것은 간음(7계명)의 해석과 적용에서 놀라운 전환이다. 여성은 한갓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이다.

 

5.2. 특히 누가복음은 여성이야기를 중요한 주제로 다룬다.

누가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예수와 여성의 만남에 대한 많은 자료를 보여준다. 탄생기록에 등장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라.(누가1-2) 마태와 견줄 때 누가의 예수 탄생기록의 특징은 분명하다. 마태복음에는 메시아탄생을 알리는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고 헤롯의 박해와 이집트로 피난하는 아기 예수를 이끄는 사람도 요셉이다. 반면에 누가의 탄생기록에 보면 천사는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에게 나타나며 마리아는 처녀잉태라는 위험을 받아들인 용기 있는 사람이다. 특히 장차 태어날 아기 메시아를 통해 이룰 세상을 노래한 마리아 찬가’(1:46-55)는 놀랍다. 그 노래는 낮은 자가 높아지고 높은 자가 낮아지는하나님나라의 혁명적 전망을 드러낸다.

누가복음에는 아기 예수를 만난 두 사람을 소개하고 있는데 시므온(2:25-35)과 안나다. 안나는 여성 선지자인데, 혼인하여 겨우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84년을 과부로서 살았다. 신실한 기다림의 사람인 바로 그가 메시아를 만났다.(2:36-38)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청받아 방문하신 예수를 찾아가 향유를 부어드린 여자의 이야기도 보라.(7:36-50) 이 여자의 평판을 잘 알고 있는 시몬은 여자의 봉사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예수의 태도에 불만을 표시한다. 그러자 예수는 시몬과 여자의 행동을 비교하면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신다. “이 여자를 보는가!” 주님은 놀랍게도 이 여자를 바리새인을 비롯한 그곳 사람들이 따라야 할 신앙의 모범으로 세우신다.

하나님나라 운동에 물질로 참여한 여러 여성들과 그 이름들을 보라.(8:1-3)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의 이야기(10:38-42)에서 예수는 그가 참으로 좋은 것을 선택했다며 마리아를 칭찬하신다. 마리아는 너희는 먼저 하나님나라를 구하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가장 필요한 일 하나(하나님나라)’를 선택하고 그것을 놓치지 않은 훌륭한 여성이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가 이런 자세를 갖고 살기를 바라신다. 주님은 안식일에 등 굽은 여자를 고치시면서 그를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선언하신다.(13:10-17) 그들에게 아브라함의 아들이란 말은 있어도 아브라함의 (!)’이란 말은 없었다. 이를 듣고,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했다.” 아브라함의 딸을 말씀하시는 주님을 보며 우리 또한 기쁘지 않은가!

 

5.3. 마가14:1-9은 여성을 대하는 예수 태도의 절정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놀라운 선언을 보라. 이 여자가 무엇을 했단 말인가? 무엇이 그토록 중요하단 말인가?

예나 오늘이나 십자가의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걸림돌이다. 바울의 말처럼 그것은 거리끼는 것, 미련한 것(고전1:23), 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은 그 무엇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십자가는 반드시 가야 할 길이며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나님나라가 임할 수 있음을 수없이 말했건만 제자들은 그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그들은 이 사실에 대해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묻기도 무서워했다.’(9:45) 게다가 그 길을 가시려는 주님을 가로막으려는 사탄의 행동까지 한다.(16:22)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그날, 이 무지와 두려움의 현장에 이 여자가 찾아왔다. 그는 준비한 향유를 말없이 주님께 부어드린다. 그 행동은 한마디로 십자가의 죽음을 공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예수, 온 세상의 생명이신 그리스도여! 충만한 부활로 되살아나실 주님이시여! 당신의 십자가는 바로 생명을 여는 길이며,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 어떤 것과 견줄 수 없는 값진 죽음이니, 이 값비싼 향유는 바로 그 상징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의 마음을 압니다. 당신의 죽음의 의미, 그 가치를 압니다. 결코 망설이지 마시고 당신의 길을 가소서. 한 치 흐트러짐 없이 굳세게 가소서.” 하여, 이 여인은 지금 그곳에서 예수(하나님)의 중심을 아는 단 한 사람이었다. 그 일은 그들이 평가하듯 헛된 낭비가 아니라 선한 일, 옳은 일, 정녕 아름다운 일’(NIV)이었다. 주님도 이렇게 화답하신다. “그가 내게 좋은(kalos) 일을 했다.”

(겟세마네 기도가 말해주듯) 십자가 사건은 주님에게 참으로 힘들고 외로운 일이었다. 그 상황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며칠 앞둔 지금, 시몬의 집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주님을 감동시켰다. “! 아름다운 사람아! 나는 그대의 마음을 안다. 그대는 나의 죽음을 예비하고 있구나. 나의 죽음을 드러내고 있구나. 집안 가득 퍼진 이 향기처럼 그대는 내 죽음의 뜻, 그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구나! 십자가의 길은 하나님의 길, 생명을 여는 길인데도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구나!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길, 그래서 어리석은 것, 미련한 것, 두려운 일로 취급받는구나! 그러나 오, 그대 사랑스런 사람아.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의 의미를 아는구나! 그래서 그 죽음의 고귀함을 드러내려고 그토록 값비싼 향유를 준비했구나. 그대는 이 일을 위해 힘을 다하여’(8) 내 몸에 향유를 부었구나. , 아름다운 사람아! 참 귀하구나! 나 또한 그대의 행동을 통해 다시 깨닫는구나. 아버지께서 나로 이 길을 가게 하시는 것을! 하나님께서 이 길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여기 내 마음 알아주는 벗 하나 있으니, 내 걸음 더 굳게 정하고 끝까지 걸어가리라.”

당시 여성의 행동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진술은 법정에서 채택할 가치조차 없었다. 그들의 서원도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고 남편과 아버지의 승낙이 있어야 효력이 있었다.(민수기30) 하지만 주님은 우리로 여성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신다. "내 이름이 전파되는 곳에 이 아름다운 여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여성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자리에서 복음의 중심에 다가간 유일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이 여자가 행한 일을 통해 십자가를 (잊을 것이 아니라) 깊이 마음에 새기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기꺼이 맞이하며, (수치스런 것이 아니라) 고귀한 것으로 알며, (숨길 것이 아니라) 공적으로 드러내야 함을 깨닫는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라하여, 이 여성을 향한 이 같은 주님의 선언을 보면서도 여성들이 교회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6. 오늘 교회는 여성에 대한 성경을 새롭게읽어야 한다.

 

6.1. 새롭게 읽기의 예(1) 장애인 목사안수에 대해.

나는 이 글을 준비하면서 제38회 총회(1988)의 다음과 같은 결의를 읽었다. “장애자 목사안수제한을 해제하고 목사 안수하기로 하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결의는 지금까지 교회가 장애인에게 목사안수를 제한했다는 말이다. 그 결의 또한 성경의 근거가 있었을 것이니, 그것은 아마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와서 그의 하나님께 음식을 드리지 못한다”(21:21-23)였을 것이다. 여기서 이란 성경에 따르면 시각장애인, 발 부러진 사람, 손 부러진 자 등과 같은 장애를 말하며, 이를 근거로 장애인에게 목사안수를 제한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애인에게 목사로 안수할 없다는 것은 명백한 장애인차별이다. 그런데도 그때까지 교회는 성경에 근거한다며 장애인차별을 정당하게 여겼다. 문자(숭배)주의의 오류다.

그럼 교회는 어떻게 해서 이런 문자주의를 극복하고 장애인에게도 목사안수가 가능하다고 결정했을까? 물론 진지한 성경연구를 통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더 실제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진보 때문이었다. 곧 장애인 인권에 대한 의식이 진보했고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우리로 옛날의 잘못된 결의를 바로잡게 했다. 그와 함께 지금껏 잘못 이해하고 머물러있던 성경이해를 넘어서게 했다. ‘성경을 읽는 독자(시대)’가 성경을 새롭게’(바르게) 읽도록 자극했던 것이다.

사실 성경은 처음부터 장애인의 목사안수를 제한한 적이 없었으니, 우리는 시대의 변화를 통해 그 사실(진리)을 뒤늦게 깨달았던 것이다.

 

6.2. 새롭게 읽기의 예(2) 노예제도에 대해.

기독교의 역사에서는 이 같은 문자주의해석으로 그릇된 교리를 만들어 복음에 어긋나게 행동한 사례들이 꽤 있다. (성경의 문자를 가볍게 여기자는 말은 아니다. 파스칼의 말처럼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취하거나, 모든 것을 영적으로 취하는”(팡세:486) 두 극단을 벗어나자는 말이다)

그 가운데서 노예제도에 대해 잠깐 살펴보자.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일은 명백한 범죄이다. 창조와 구원의 보편성에서 볼 때 차별, 그것도 폭력과 인신매매를 일삼는 노예제도는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될 제도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고,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하지만 당시 사회는 어떤 사람이 노예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전쟁포로라는 이유로, 빚에 팔렸다는 이유로, 흑인이라는 이유로 그 일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행동했고 성경을 빌어 그 제도를 정당화했다.

그들이 즐겨 들먹였던 성경을 보라. “(종이든 자유인이든)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전7:20-22)는 말을 통해,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려는 투쟁을 잠재웠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벧전2:18)는 말씀을 빌어, 노예들에게 주인에게 받는 부당한 대우도 감수하는 것이 성경의 원리라고 강변했다. 설교자들은 아브라함부터 신약시대까지 노예제도는 이어졌고 성경은 이 제도에 대해 어떤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으니 이 제도는 성경의 원리라고 강변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저주받는 노아의 아들 함이 바로 흑인 노예라는 기이한 논리까지 등장했다.(창세기9, 이것은 그들이 다른 어떤 것보다 즐겨 의존하던 성경텍스트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누구도 이런 주장을 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노예를 부리는 것은 성경에 명백히 어긋난 일임을 안다. 왜 우리의 주장이 이렇게 바뀌었을까? 성경을 깊이 연구한 결과일까? 물론 기독교 역사에서 그런 노력을 꾸준히 이어왔다. 그러나 더 중요한 힘은 시대의 변화, 곧 인간 평등이란 진보적 사상이 성경을 다시 읽게 했던 것이다. ‘성경을 읽는 독자(시대)’가 성경을 새롭게’(바르게) 읽도록 자극했던 것이다.

 

6.3. 여성안수는 우리 시대 복음 선포를 위한 길이다.

사람들은 여성안수를 금하는 것이 성경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주장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성경 몇 구절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주장이다. 파스칼의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어떤 진리를 따르고 있으며, 그럴수록 더 위험스럽게 잘못을 저지른다. 그들의 잘못은 어떤 허위를 따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진리를 따르지 않은 데 있다.”(팡세:455), 대립하는 구절에 눈감거나, 성경이 기록된 상황을 외면하거나, 우리 시대 복음전파의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텍스트를 정확히 이해하려고 힘쓰자. 많은 성경텍스트는 모순(대립)하는 텍스트를 갖고 있고, 그 텍스트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 나름대로 하나님나라 실현을 위한 몸짓이었음을 깨닫는다. 성경텍스트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의미, 곧 우리 시대의 복음 과제와 씨름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오늘 성경텍스트가 우리 시대에 던지는 복음의 과제, 우리 시대의 독자지평, 곧 여성에 대한 시대의 요구를 보라. 오늘 우리 사회 어느 곳도 여성차별을 용납하지 않는다. 작은 차별요소라도 있는지 살피고 그것을 넘어서려고 한다. 그것은 사회의 진보이고,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3:28)라는 하나님의 복음이 지향하는 바다. 이런 의식을 갖고 자란 세대가 교회의 일원이고 우리가 복음으로 만나야 할 사람들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여전히 교회가 법으로 여성안수를 거부하며 여성은 교회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태도일까? 새롭게 자라나는 여성들은(남성들도) 이런 주장에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안수거부는 여성에 대한 존재론적 차별이다. 오늘 예수의 복음을 이야기하는 우리에게 이런 차별이 과연 가능한 논리일까? 만약 교회가 이것을 계속 고집한다면 사람들이 복음으로 들어오기는 고사하고 현재 교회에 있는 사람들마저 복음을 외면할 것이다.

 

 

7. 여성안수는 성령의 역사를 따르는 우리 시대의 순종이다.

 

어떤 이들은 복음이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교회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로마12:2) 하지만 여성안수제도는 시류에 영합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을 바르게 읽고 그것을 시대에 맞게 새롭게 실천하려는 노력이다. , 바울시대에는 여성의 과도한 참여와 주장이 교회를 어지럽히고 복음을 방해했다면 오늘은 여성안수금지가 교회를 침체하게 하고 복음전파의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기억하자. 바울시대에는 일부 여성들의 무질서와 지나침이 사람들로 교회와 복음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면, 오늘에는 여성들의 수동성(여성안수금지)을 강요하는 제도가 복음전파를 가로막는 요소로 작용함을 명심하자.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그때와 전혀 다른 상황에서 복음에 참여하고있다.

여성안수제도는 오늘 교회가 반드시 제정해야 할 제도이다. 이를 통해 여성들이 교회 활동에 책임감 있는 주체로 참여하여 교회는 활력을 얻고, 복음전파의 문은 새롭게 열릴 것이다.

모든 남자와 여자에게 임하리라한 성령이(2:18) 고린도교회에 임했듯이, 오늘도 성령은 남녀 모두에게 차별 없이 임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성령)를 입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교회 지도력을 허용하는 것은 복음의 원리이다. 그들은 교회의 지도자로서 능히 그 임무를 감당할 수 있다.

 

※나의 주장은 전적인 기고자의 주장임으로 본사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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