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안수금지, 이젠 바뀌어야

한성국 목사/ 고신대학 신학과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평화교회(부산동부노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한성국 목사/ 고신대학 신학과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평화교회(부산동부노회)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목차

1. 여성안수금지, 이젠 바뀌어야 한다. 
2. 성경해석에서 기억해야 할 세 가지 사실 
3.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에 대해. 
4. 초기 기독교 시대 여성 참여.
5. 여성을 향한 예수의 말씀과 행동.
6. 오늘 교회는 여성에 대한 성경을 ‘새롭게’ 읽어야 한다.
7. 여성안수는 성령의 역사를 따르는 우리 시대의 순종이다.

 

1. 여성안수금지, 이젠 바뀌어야 한다

 

2017년 예장 고신교단은 충격적인 소식을 접한다. 교단과 오랫동안 자매 관계를 맺어온 화란개혁파(일명 해방파)가 목사와 장로에 대한 여성안수를 결의했기 때문이다. 그 후 해방파교회는 고신교단을 비롯한 몇몇 세계 보수 교단들의 항의와 수정 요구에도 2020년 총회에서 여성안수제도를 정식으로 결의한다. 해방파교회와 고신교단은 오랜 시간 교류하면서 신앙의 역사를 함께 만들어 왔다. 고려신학대학원이 지금의 규모가 되기 전, 화란교회는 재정으로 고신교회를 지원했고 신학사상을 교류하면서 서로의 우의를 다졌다. 한국학생들을 화란으로 불러 장학생으로 공부하게 했으며, 화란에서 한국으로 교수들을 파송하여 강의하게 했다. 이것은 신학의 굳건한 일치를 의미했다. 그런 해방파교회가 여성안수를 결의한 것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은 목사, 장로의 자격을 남자 세례교인으로 무흠하게 7년을 경과한 자(교회정치 제401/ 651)”로 규정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여성안수에 대한 허용과 반대의 입장 모두 성경을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는다. 앞서 화란 해방파교회 또한 여성안수는 성경의 원리로 봤을 때 정당하며, 수년간의 토론과 논의 끝에 쟁점이 되는 성경본문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는 여성안수를 금하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여성안수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 글도 성경을 근거로 해당 교회헌법의 의미를 살피려 한다.

이 글은 성경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기억해야 할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밝히고 출발하려 한다. 첫째, 어떤 말씀에는 그와 대립하는 말씀이 있다. 따라서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립하는 말씀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둘째, 대립하는 말씀이 어떤 상황에서 기록한 것인지 각각의 맥락을 살펴보아야 한다. 신학·사회문화적 배경, 언어의 맥락 등을 잘 살펴서 말씀의 실제 의미에 다가가도록 애써야 한다. 셋째, 성경을 읽는 목적이 하나님 나라 선포임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연구는 자기 교리의 정당성이나 완결성을 추구하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 성취에 얼마나 긍정적으로 이바지하는가에 있다.

 

2. 성경해석에서 기억해야 할 세 가지 사실

 

2.1. 첫째, 많은 성경(진리)에는 그와 대립하는 말씀이 있다.

상반되는 두 논리.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모든 것이 이단이 된다. 나아가 각각의 진리가 끝날 때마다 반대되는 진리를 상기해야 한다.”(팡세:460) 파스칼의 말처럼 쟁점이 되는 어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립하는 말씀을 살펴야 한다.

 

잘 아는 몇 구절을 보자.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그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다”(4:2-3)고 말하지만, 야고보는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2:21)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나팔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하며 소고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하는”(150:3-5) 일이라고 말하지만, 정반대로 예언자는 예배하는 자들을 향해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쳐라, 네 비파 소리도 내(하나님)가 듣지 아니하리라”(5:23)고 외친다.

예수는 구원의 길을 가르치시면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11:28-30)고 말씀하시지만, 동시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7:13-14)고 선언하신다.

바울은 다함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기에 이 세상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9)며 구원을 굳게 확신하지만, 동시에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2:12)고 말한다.

시인은 하나님이 언제나 내 곁에 계심을 믿기에 여호와는 내 편”(118:6-7)이라고 고백하지만, 예언자는 하나님의 입을 통해 나는 네(이스라엘) 대적이라”(21:13)며 시인의 고백과 정반대되는 말을 한다.

이사야는 토기장이가 진흙을 다루듯 우리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말했다면(45:9; 9:19-23), 예레미야는 같은 토기장이 이야기를 사용하여 구원은 하나님의 뜻에 인간이 어떻게 응답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선언한다.(18:1-10)

시인은 신앙이란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굳게 믿고 여호와 앞에 잠잠히 참고 기다리는”(37:7) 것이라고 말했지만, 다말은 자신에게 부여된 율법의 권리(Levirate)가 외면 받는 현실을 참고 기다리기보다는 분연히 일어나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하여 옳음(tsedaqah)을 관철하며,(38) 이로 인해 위대한 신앙의 사람으로 칭송받는다.(4:12)

사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예를 수없이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이같이 대립하는 구절을 살피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며, 이것은 자기 논리란 좁은 울타리를 넘어서기 위한 중요한 시작이다. 물론 모순(대립) 그 자체가 진리의 표지란 말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듯 모순은 진리의 반대 표지가 아닐 뿐더러 이런 모순이야말로 진리를 풍성하게 드러내는 자리임을 기억하자. “내가 신앙을 갖는 일에 가장 멀어지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던 이 모든 상반된 것들이 나를 가장 빨리 참 신앙으로 이끌었다.”(팡세:248)

 

2.2. 둘째, 상반된 구절들을 문맥에서 살펴봐야 한다.

대립하는 성경은 그 자체로 두어서는 안 되며 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문맥을 살펴보아야 한다. “말들을 다르게 배열하면 다른 뜻을 나타내고 뜻을 다르게 배열하면 다른 결과를 불러일으킨다.”(팡세:944) 언어는 인간의 삶을 반영하기 때문에 그 언어가 등장하는 집단의 생활방식과 행동양식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의 낱말은 오직 문장의 맥락 속에서 의미를 지닌다. 겉으로 비슷하고 어쩌면 동일하기까지 보이는 단어, 문장, 구절들도 상이한 총체에 통합될 때에는 전혀 다른 뜻을 지닐 수 있다.”(비트겐슈타인)

 

앞에서 본 구절들을 다시 살펴보자.

유대인의 그릇된 율법 행위 사상과 맞서야 했던 바울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강조해야 했다면, 그 믿음의 원칙이 화석화된 상황을 본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주장한다.(4:2-3/2:21)

시인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밋밋한 강론이 아닌 갖가지 음악이 어우러진 축제임을 강조했다면, 아모스는 의식(儀式)에 집착한 채 정작 하나님의 뜻에는 무관심한 형식적 예배를 비판한다.(150:3-5/5:23)

예수는 하나님나라란 율법이란 무거운 짐을 떠안기는 서기관들의 교훈과 달리 쉽고 가벼운 복음이지만, 동시에 좁은 문으로 들어서 험한 길을 걸으며 외로움을 견디는 삶이라고 말씀하신다.(11:28-30/7:13-14)

바울은 구원이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은혜) 안에 있음을 믿는 굳센 확신이면서도, 그 구원이 타성에 젖지 않는 뜨겁고 진지한 삶이어야 함을 강조한다.(8:39/2:12)

시인은 여호와가 내 편이심을 믿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라고 말했다면, 예언자는 하나님의 뜻을 외면한 채 안일에 빠진 유다 왕가에게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의 대적임을 알려주어야 했다.(118:6-7/21:13)

이사야가 현실에 절망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의심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우리의 구원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것임을 강조했다면, 예레미야는 그릇된 선택사상에 빠져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주권은 반드시 인간의 실천(참여)을 통해 역사한다고 강조한다. 곧 하나님은 인간의 참여(회개)에 따라 구원(심판)에 대한 자신의 뜻을 기꺼이 바꾸시는 분이시다.(45:9/18:1-10)

시인은 하나님의 뜻을 믿는 사람은 불의한 현실에 불평하기보다 고요히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다면, 다말에게 신앙이란 차단된 현실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이 부여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온 몸을 던지는 투쟁임을 보여준다. 다말은 그야말로 하나님나라를 향해 침입한사람이었느니(16:16), 하나님은 그런 다말의 주체적인 행동을 높이보시고 그의 자녀를 통해 메시아의 계보를 이어가신다.(1:3) 이처럼 신앙이란 고요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면서, 동시에 위험을 무릅쓴 투쟁이기도 하다.(시편37/38)

 

2.3. 셋째, 대립하는 구절들을 복음전파의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바울의 말처럼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동은 오직 복음에 참여하는 데 있다.’(고전9:23) 성경해석은 백과사전적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변혁하는 능력에 있다. 성경해석이란 성경텍스트 안에 들어있는 의미를 새로운 독자들에게서 현실화하는 작업이다.”(티슬턴) 사실 모든 성경의 저자들은 각자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과 씨름했으니, 이 같은 복음실천이야말로 성경해석의 목표다.

그런 뜻에서 말씀의 모순(대립)은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펼쳐진 복음실천의 모습이다. “성경의 불일치와 비일관성은 더 깊은 진리를 가리키기 위해 하나님이 의도한 것이다. 불일치와 비일관성은 문제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문이 얼마나 심오한지 알려주는 신호이다.”(바턴) 둘은 문자로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동일한 하나님의 진리로서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복음 선포에 성실했음을 드러내는 표이다.

이제 이런 관점에서 여성 안수 문제에서 쟁점 되는 바울의 유명한 구절들을 살펴보자.(계속)

 

※나의 주장은 전적인 기고자의 주장임으로 본사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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