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순종을 중심으로-

최갑종(Evangelia University 신약학 교수)
최갑종(Evangelia University 신약학 교수)

1. 들어가는 말

지난 1, 2(2021-2022) 동안 정통 개혁신학을 가르치는 국내 조직신학 및 교회사 교수들 사이에 그리스도의 순종 교리를 둘러싸고 열띤 논쟁이 있었다. 어떤 교수는 그리스도의 순종을 수동적 순종’(‘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희생적 죽음을 담당한 순종’)능동적 순종’(‘그리스도께서 전 생애를 걸쳐 우리 대신 모든 율법을 지킨 순종’)으로 구분하고, 둘 다 가르치는 것이 성경과 전통적인 개혁신학, 특별히 이신칭의와 속죄 교리를 파수하는 것임을 주장하였다. 반면에 어떤 교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는 성경이 말하지 않는 잘못된 것이며, 오직 그리스도께서 택한 백성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당한 수동적 순종만을 가르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이신칭의와 속죄 교리 가르침에 일치하는 정통 개혁신학임을 주장하였다. 예를 들면, 전 총신대학원 조직신학 서철원 교수는 2021216-17에 있었던 예장합동총회 이단 사이비 대책조사 연구 위원회 세미나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관련된 문제점들이란 주제 아래,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일종의 이단적임을 주장하였다.

반면에 칼빈대 조직신학 유창형 교수는 2021321리폼드 뉴스에 개재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의 전가에 대한 논쟁이란 글에서 종교개혁자 캘빈은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만이 아니라, 능동적 순종도 가르쳤다고 주장하였고, 20211116~18일에 합동 신대원에서,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의 전가라는 주제로 개최된 제33회 정암(박윤선) 신학 강좌에서, 합동 신대원 조직신학 김병훈, 이승구 교수와 역사 신학 박상봉 교수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에 의한 의만이 아닌 능동적 순종을 통한 의의 전가를 다 받아들이는 것이 종교개혁자들과 전통적인 개혁신학 입장임을 재차 강조하였다. 고신대 조직신학 우병훈 교수 역시 20223갱신과 부흥29호에 개재한, “교회사 속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는 교부들, 종교개혁자들과 개혁신학자들이 가르쳐온 전통적 교리임을 주장하였고, 전 합동 신대원과 국제신대원 조직신학 김재성 교수 역시 2022614일부터 916일까지바른 신앙에 개재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에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는 성경과 전통적인 개혁신학자들이 가르쳐온 교리임을 재차 강조하였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능동적, 수동적 순종을 둘러싸고 개혁신학자들 사이에 의견을 달리하자, 20219월에 개최된 106회 합동총회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은 성경적 근거가 없다라고 결의하였다. 말하자면 이신칭의와 속죄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 사건을 통한 수동적 순종에만 근거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난 9월에 개최한 107차 총회에서 106차 총회의 결정을 유지하면서,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교리와 관련된 논쟁을 신학부에 넘겨 연구할 것을 의결하였다. 반면에 지난 9월에 개최된 72차 고신총회는 합동총회와는 전혀 다른 결정을 하였다. 합동총회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결의한 것과 달리, 고신총회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과 함께 성경의 가르침과 신조와 정통 개혁신학에 속한다는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의 보고를 총회 입장으로 받았다.

이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합동 교단의 총회 결정은,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순종을 십자가에서의 수동적 순종에 집중하는 장점이 있긴 하지만, 복음서가 제시하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의 다양한 능동적 메시아 사역을 그의 순종으로 제외시킬 수 있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반면에 고신교단의 총회 결정은 그리스도의 전체 사역을 두 가지 관점인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십자가 이전의 율법에 대한 능동적 순종과 십자가에서의 수동적 순종으로 구분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 순종으로부터 율법에 대한 능동적 순종을 배제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단점도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필자는 지난날 기독교 교리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바울서신, 특히 바울의 대표적인 서신으로 볼 수 있는 로마서가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자 루터는 그의 로마서 주석 서문에서, “이 편지는 실로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참으로 가장 순수한 복음이다. 로마서는 모든 크리스천이 마땅히 마음으로 모두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 영혼의 양식으로 묵상하여야 할 만큼 가치를 지니고 있다”(Luther's Works, vol. 35, 1960, p. 365), 캘빈 역시 그의 로마서 주석 서문에서 누구든지 이 편지의 지식을 획득하는 자는 성경 전체의 가장 은밀한 보물들을 접할 수 있는 문을 가지게 된다”(Calvin, The Epistle of Paul the Apostle to the Romans and to the Thessalonians, Edinburg: T & T Clark, 1961, p. 2)라고 말하면서 로마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제시하는 주요 내용은 필자가 최근에 초고를 완성한 로마서 주석 원고에서 가져왔다. 물론 이 글에서는 가독성의 편의를 위해 주석 원고에 있는 원문 분석과 뒷받침하는 참고문헌은 거의 생략한다. 아울러 이 글이 필자의 학교 입장을 대변하거나, 혹은 필자의 글이 모든 점에서 옳다는 식의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님을 미리 밝힌다. 이 땅의 그 어떤 성경 주석도 완벽할 수 없는 것처럼, 필자의 주석도 예외가 아니다. 필자의 글도 얼마든지 잘못 이해하였을 수도 있다. 따라서 누구든지 성경 주석에 근거하여 필자의 글에 대한 잘못을 지적하면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도 미리 알려둔다. 바라기는 이 글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연구하여,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와 보고서가 만들어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울러 필자는 이 글을 통해 현금의 논란 문제에 대한 이해는 물론, 지난 6년 동안 로마서 주석을 준비하면서 발견한 주요 메시지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을 가졌다. 그래서 글이 좀 길어졌다는 점에 대해 심심한 양해를 구한다.

 

2. 로마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순종

로마서를 보면 순종어휘는 그렇게 많지 않다. 명사 어휘가 7(1:5; 5:19; 6:16x2; 15:18; 16:19, 26), 동사 어휘가 4(6:12, 16, 17; 10:16)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주로 신자의 순종 행위와 관련하여 사용될 뿐, 그리스도와 관련해서는 단 한 번인 5:19한 사람[아담]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그리스도]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의 경우이다. 그러므로 로마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한 교훈을 알기 위해서는 그 본문이 속해 있는 로마서 전체의 흐름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마서 전체를 구성(plot)면에서 보면, 크게 서언(1:1-17), 몸체(1:18-15:13), 결언(15:14-16:27)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편지의 몸체(1:18-15:13)는 로마서의 주제인 하나님의 의의 복음 자체를 설명하는 직설법 내러티브(1:18-11:36)와 그 복음의 구체적인 적용을 말하는 명령법 내러티브(12:1-15:13)로 양분되고 있다. 그리고 편지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몸체는 독자들에게 익숙한 구약의 창조와 타락, 출애굽 사건과 이스라엘의 구속, 가나안 땅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 율법 수여,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 심판, 그리고 바벨론에게 멸망, 선지자들을 통해 메시아의 보내심과 그를 통한 이스라엘과 많은 민족의 구원 약속, 새 언약, 영원한 언약 등의 내러티브를 반영하는 5개의 내러티브로 구성되어 있다: 1) 창조와 타락 그리고 심판 이야기(1:18-3:20), 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구속한 하나님의 구속 이야기(3:21-5:21), 3)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적용 이야기(6:1-8:39), 4)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의 이야기(9:1-11:36), 5) 이 세상에서 하나님 백성의 삶의 이야기(12:1-15:13).

 

2.1. 로마서 서언(1:1-17)

바울은 로마서 1:1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어 1:2-4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한다. 그는 복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만 한정시키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 그가 육신으로 다윗의 혈통으로 출생한 것,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 전체를 복음으로 규정한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전체를 선포하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가복음이 전체의 표제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한 다음, 예수님의 출생, 세례, 시험, 제자 선택, 여러 이적과 치유 사역, 여러 비유와 설교, 유대 종교지도자들과의 갈등, 수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승천 등을 말하고 있는 사실과 일치한다. 이처럼 복음이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포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포괄한다면, 그리고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가 그의 능동적 순종인 동시에 또한 그의 수동적 순종이라면,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만이 아닌, 그의 능동적 순종도 우리의 의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복음서 저자가 복음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바울도 복음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고전 15:3-4).

그런데 바울은 이 복음을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준비하시고, 이루셨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복음”(1:1)이라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다윗의 혈통을 통해 이 땅에 보내시고, 그에게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감당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복음이 하나님이 주도한 사역이라는 점은, 바울이 주제 구절인 1:16-17에서,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사실에서도 확인이 된다. 바울은 나중에 주제 구절의 해설 문단으로 볼 수 있는 3:21-26에서 복음이 하나님께서 주도한 사역임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복음과 관련하여 그리스도께서 수동적 역할만을 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복음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복음을 하나님 아들의 복음”(1:9), “그리스도의 복음”(15:19)이라 말한다. 즉 복음은 그 기원 면에서 하나님의 능동적 사역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또한 그리스도의 능동적 사역이라는 것이다. 이점 역시 복음서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종종 아버지가 자신을 보내시고, 자신은 아버지가 맡긴 사역을 한다고 하시면서 아버지의 능동성과 자신의 수동성을 말하지만(, 6:38), 동시에 종종 자신을 문장의 주어로 삼아 내가...이다”(, 14:6),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10:45)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능동적 사역을 또한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복음, 곧 그리스도의 생애 전체가, 곧 그의 성육, 메시아 사역,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의 능동적 사역인 동시에, 또한 그리스도의 능동적 사역이기도 하다. 두 복음, 그리스도의 두 생애나 두 순종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한 동전이 앞면과 뒷면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한 복음, 한 순종을 보는 관점에 따라 하나님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복음,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수동적 순종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나중에 3:21-26을 취급하면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하여 공개적으로 세웠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수동적 순종으로 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그의 수동적 순종으로만 한정할 수 없는 것은, 바울이 바로 이어 5장에서 십자가의 죽음을 그리스도의 능동적 사역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5:6-8, 19).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도 다른 측면에서 보면 얼마든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왜 복음이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인가? 바울은 1:17에서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의는 오직 복음을 통해서 나타나고, 이 복음을 통해서 주어진다고 말한다. 여기 복음 안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의는 로마서의 주제어이다. 바울은 이 문구를 로마서에서만 8(1:17; 3:5,21,22,25,26; 10:3x2) 사용할 뿐, 그 밖에서는 단 2(고후 5:21; 3:9)만 사용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사실상 로마서 전체를 통해서 63회 나타나는 어휘의 근간이 된다. 명사든 동사든 로마서에서 나타나는 모든 어휘는 1:17에서 처음 나타난 어휘인 하나님의 의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로마서 전체 내러티브가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참고, 최갑종, “로마서 중심 주제에 대한 연구. ‘하나님의 의에 대한 내러티브 접근을 중심으로,” 신약연구18/4 [2019], 507-537). 이것은 1:17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로마서의 모든 의 어휘의 용법은 물론, 로마서 전체 내러티브의 흐름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바울은 주제 구절에서 하나님의 의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지만, 그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주제 해설 문단인 3:21-26에 가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주제 구절의 문맥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가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는 미리 짐작할 수 있다. 하나는, 1:16에서 바울이 복음을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 다음, 1:17에서 그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을 보아, ‘하나님의 의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 활동’, 혹은 복음을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 하나는, 1:2에서 바울이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그의 아들에 관해 약속하신 것으로 말하고, 그리고 1:17 하 반절에서 하박국 2:4를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아,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약속하신 것을 아들을 통해 신실하게 지키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이 1:16에서 구원을 믿는 자와 연결을 시키고, 1:17에서 하나님의 의를 다시 믿음과 연결한 다음 믿음 어휘가 나오는 하박국 2:4를 인용하고 있는 점을 보아, 하나님의 의가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이신칭의의 의미 또한 갖고 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주제 구절에서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의 하나님의 의를 말하지만, 그것을 단일 의미가 아닌,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2.2. 불순종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인류(1:18-3:20)

로마서 구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바울은 서언에서 제시한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한 설명을 주제 해설 문단인 3:21-26까지 보류한다. 그 대신 구약성경에 있는 아담의 창조와 타락, 이스라엘 백성들의 율법에 대한 불순종과 심판의 이야기를 반영하고 있는 1:18-3:20의 내러티브를 통해 인류(이방인과 유대인)가 불순종과 범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절망적인 상황을 먼저 이야기한다. 마치 의사가 환자에게 처방을 내리기 전에 환자의 병에 대한 진단을 먼저 하는 것처럼, -왜냐하면 환자가 그가 처한 정확한 병을 알아야 의사의 처방을 잘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인 것처럼-, 바울은 3:21-5:21에서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치유 처방을 제시하기 전에 인류가 처한 치명적인 상황을 먼저 고발한다. 그렇게 할 때 인류는 3:21-5:21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해결책인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첫 번째 내러티브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1:18-32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인류)을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존재로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능동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그에게 감사를 돌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마음이 어두워져서 하나님 대신 온갖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했고, 그 결과 온갖 종류의 성적 부패와 윤리적 범죄를 저질러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구약 창세기 1-3장의 이야기, 곧 하나님께서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한 다음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가진 모든 축복을 계속 누릴 수 있도록 선악과의 명령(2:17)을 주셨다는 그것과 그런데도 아담이 자의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계명을 어겨 불순종함으로써 자신과 전 인류와 전 피조 세계를 죄와 사망의 비참 상태에 떨어지게 한 것과 평행한다. 그다음 전반부보다 더 긴 후반부 2:1-3:20을 통해 바울은 율법이 주어진 유대인의 위선과 불순종과 그리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에 대해 말한다.

2:1-3:20의 후반부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세워진 자기 당대 유대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율법, 성전, 할례와 축복의 약속을 소유하였지만, 율법을 지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위선적인 범죄와 악을 행하여 할례와 율법 없는 이방인들과 똑같이 불의한 죄인이며,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고발한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하나님의 심판과 평행한다. 그래서 바울은 결론적으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3:10), “율법이 말하는 바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함이다”(3:19),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3:20)고 선언한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인류는 스스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율법마저도 인류가 처한 비참한 상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아래 처했다는 것이다.

1:18-3:20의 내러티브에서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먼저 선악과에 대한 금지법을 주시고, 그 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의 형상과 에덴동산의 축복을 누리게 할 것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이 먼저 아담을 자기 형상으로 삼으시고 에덴동산을 포함하여 온 세상을 관리할 축복을 주시고, 그 축복을 계속 누릴 수 있도록 선악과 금지 명령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이 사탄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이 금한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배반하였다는 점이다.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바로 왕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겨 아브라함을 위시한 족장들에게 약속하신 것(12:2-4; 2:24-25)에 신실하심으로, 그들을 출애굽 사건을 통해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삼으신 다음, 그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제사장의 나라와 거룩한 백성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다(19:6). 이것은 아담이든 이스라엘이든,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에 불순종하였으며, 그 결과 죄와 사망의 징벌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하더라도, 계명과 율법은 처음부터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으로, 이를테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말한다. 구약성경이 여러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성실히 지킬 경우, 땅의 소유 등 여러 가지 축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말하고 있다 하더라도(, 28:1-2; 30:9-10), 이 모든 축복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축복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언약 백성이 된 자가 주어진 축복을 유지하고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에 있다(18:5; 10:5; 3:12).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의 본래 목적과 그 기능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아담에게 주어진 계명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율법도 의와 구원의 수단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설사 바울 당대 유대인 중에 다메섹 사건 전의 바리새파 바울처럼 의와 구원을 얻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는 자들이 있었다 하더라도(15:1; 3:6; 10:3), 그것은 그들이 율법을 곡해하거나 남용한 것일 뿐, 율법은 처음부터 의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구약의 역사가 대변한다. 의와 구원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일 뿐, 여하히 율법을 지키는 나의 공로로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계명과 율법은 이미 주어진 약속과 구원을 유지하는 방편일 뿐, 그것과 동등하거나 대체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지난날의 율법을 통한 자기- 추구를 배설물처럼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3:9)고 고백한 사실과 그가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의 실례를 들어 거듭거듭 믿음에 의한 의를 강조한 사실이 이를 확인시켜 준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율법 준수에 의한 의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의한 의로 구분하면 두 가지 오해를 피하기 어렵다. 하나는 하나님이 처음부터 율법을 통한 의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의 등 두 종류의 의를 얻을 방법을 세웠다거나 혹은 율법에 의한 의의 길이 실패하자 하나님이 믿음에 의한 의의 길을 주셨다는 오해이다. 실제로 오늘날 하나님께서 유대인에게는 율법을 통한 의와 구원의 길을, 이방인들에게는 믿음을 통한 의와 구원의 길을 주셨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다(, Gaston, Paul and Torah [Vancouver: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Press, 1987]. 또 하나는 만일 그렇게 할 경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한 의가 상대적으로 약화 되는 위험에 직면할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주제 문단에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고 하면서 복음을 통한 오직 하나의 의와 구원의 길만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런 다음 1:18-3:20에서 이방인과 율법을 가진 유대인의 불순종과 절망적인 상황을 길게 설명한 다음, 전체 내러티브의 총 결론을 내리는 3:20에서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라고 선언한다. 유대인이 자랑하는 율법도 결코 의를 얻는 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 3:21 이하의 문단에서 오직 하나의 길,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게 되는 의를 제시한다.

 

2.3. 십자가 사건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3:21-26)

로마서 몸체(1:18-15:13)의 두 번째 내러티브(3:21-5:21)를 대변하는 3:21-26의 문단은 첫 번째 내러티브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을 보여준다. 이 문단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마련하신 하나님의 의를 말한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논란이 되는 그리스도의 순종에 관한 바울의 설명이다. 로마서 구성면에서 보면 첫 번째 내러티브 1:18-3:20이 창세기에 있는 아담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이스라엘의 불순종 이야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면, 두 번째 내러티브는 출애굽 사건을 통한 이스라엘 백성의 구속 이야기를 반영한다. 이 점은, 3:21-26이 인류의 타락과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에의 순종을 출애굽 사건에 나타난 속량과 구약의 희생 제사 제도에 나타난 화목/속죄 제물로 설명하고 있는 점을 볼 때 부정하기 어렵다. 또한 3:21-26에 주제 문단의 중요한 어휘인 하나님의 의’, ‘나타나다’, ‘구원’, ‘믿음’, ‘유대인과 이방인’, ‘모든 사람등이 반복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사실상 로마서 전체를 주도하는 주제 문단 해설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로마서 3:21-26문단을 로마서의 축소판,” 혹은 바울 복음의 심장으로 본다(, Cranfield, Schreiner, Kruse).

바울은 로마서 3:21-26에서 로마서 전체를 통해서 그가 제시하려고 하는 핵심적인 질문과 그 해결책인 대답을 제시한다. 즉 이 문단에서 그는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전 인류(1:18-3:20)에게 하나님 편에서 구원의 의가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리고 사람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의를 어떻게 받아 의롭게 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다면, 무엇 때문에,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은혜로 의롭게 되는가?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구속과 화목제물, 칭의(稱義)는 각각 무엇을 뜻하는가? 믿음은 무엇을 뜻하며, 믿음과 하나님의 의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등 기독교 구원교리의 핵심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제시한다.

 

1) “그러나 이제는”(3:21)

3:21의 서두에 나오는 그러나 이제문구는, 마치 사형 선고를 받고, 모든 소망이 끊어진 절망적 상태에서, 초조하게 처형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형수에게, 어느 날 대통령의 특사가 와서, “당신은 이제 대통령의 특별 사면령에 따라 무죄 석방되었다라는 선언처럼, 일순간에 1:18-3:20이 말한 인류의 절망적인 상황을 완전히 반전시키는 선언이다. 이점에 있어서 3:21의 선언은 1:18의 인류 불순종과 심판에 관한 선언과 대칭을 이룬다. 1:18 이하의 선언이 인류의 불순종에 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선언이라고 한다면, 3:21 이하의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구원의 선언이다. “이제는이란 말은 새로운 역사의 전환, 곧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였던 그때, 그 종말의 시간이 도래하였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약속된 미래 세대가 현재의 세대로 침투하였다는 선언이다. 이 선언은, 바울의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라고 한 선언과 평행을 이룬다.

 

2) 하나님의 의가 나타남”(3:21-22)

완료형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라는 말은 주제 문단인 1:16-17에서 천명한 복음 안에 나타난 그 하나님의 의가 특정한 역사 세계에서 이제 누구든지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나타났으며, 그 영향과 결과가 지금 계속되고 있음을 뜻하고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역사 세계에 우연히 나타나게 되었거나 율법을 통한 길이 실패로 돌아가자 마련한 차선책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율법과 선지자, 곧 구약성경에서 이미 증거가 되어왔었다고 말한다. 주격 속격으로 표현한 하나님의 의는 의를 계획하신 분도, 준비하신 분도, 약속하신 분도, 그리고 이루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옛 언약의 당사자인 창조주 하나님 그분이 또한 새 언약을 성취하는 구속자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개입되지 않은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의요,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3:8에서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라고 하면서, 복음 안에 나타난 의가 율법이 주어지기 전 이미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다고 말한다. 구약성경이 말하는 의는 오직 하나, 곧 하나님의 의라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 안에,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3:21-31의 문단에는 하나님의 의2(3:21, 22), 하나님의 의를 가리키는 그의 의2(3:25, 26), 하나님이 의롭게 하는 행동의 주체임을 뜻하는 동사 의롭게 하다5(3:24, 26x2, 28, 30) 나타난다. 그리고 어휘와 함께 사용되는 믿음어휘가 9(3:22x2, 25, 26, 27, 28, 30x2, 31) 나타난다. 3:21-31의 문단에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어휘와 믿음어휘의 용법은 두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하나는 가 명사든 동사든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속하거나, 하나님의 행동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휘는 한 번도 사람을 주어나 혹은 사람을 수식하는 속격 관계로 사용되지 않는다. ‘가 명사 경우 모두 하나님이나 하나님을 가리키는 인칭대명사 그의와 함께 사용되고 있고, 동사 경우 신적 수동태 형식을 취하여 모두 하나님의 행위를 강조한다. 반면에 사람은 여러 번 하나님이 의롭게 하는 동사의 목적격으로 나타난다(3:24, 26, 28, 30). 또 하나는 믿음어휘가 하나님이 사람을 의롭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믿음 어휘 9번 중 8번이 명사인데 모두 수단을 가리키는 전치사 통하여’(‘디아’)부터’(‘에크’)와 함께 사용되거나(3:22, 25, 26, 27, 30x2, 31) 아니면 수단의 의미를 지닌 여격(3:28)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믿음어휘의 용법을 중심으로 바울이 3:21-26의 문단에서 하나님의 의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가를 다시 살펴보자. 바울은 3:21에서 모세의 율법과 별도로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말한 다음, 22절에서 1:17의 경우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관계시킨다. 즉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주어지는 이신칭의라는 것이다. 그런 다음 3:23에서 왜 하나님의 의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주어지는가를 말한다. 바울의 답변은 1:18-3:20을 요약하여 전 인류가 죄를 지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의와 동의어처럼 사용하고 있다면, 23절은 범죄 한 전 인류가 그들 스스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과, 이제 유일한 해결책은 22절이 말한 오직 하나의 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신칭의 길임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 된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3:22)

바울은 3:22a에서 하나님의 의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디아 피스테오스 예수 크리스투’, 이하 믿음-그리스도’)라는 문구와 연결을 시킨다. 그가 1:17에서 하나님의 의를 신자의 철저한 믿음 문구인 믿음으로부터 믿음을 통하여와 연결시킨 것처럼, 여기서도 하나님의 의를 일종의 강조를 위한 이중적인 믿음 문구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믿는 자들과 연결을 시킨다. 이것은 사실상 앞 믿음 문구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뒤 분사절 믿음 문구의 대상임을 암시한다. 그런 점에서 3:22믿음-그리스도문구는 1:17의 믿음 문구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믿음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오늘날 국내외적으로 이 믿음-그리스도문구를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믿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신실성,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한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보는 자들이 적지 않다(, 박익수, 최흥식, 홍인규, R. Hays, T. Wright). 이들은 믿음-그리스도문구에 대한 구원론적 접근이 아닌 기독론적 접근을 한다. 그래서 최근에 적지 않은 영어 성경도 믿음-그리스도문구를 전통적인 “faith in Christ” 대신 “faithfulness of Christ”로 번역한다(, CEB, ISV, NET, RGT ). 전통적인 번역이 문법적으로 믿음그리스도의 관계를 목적 속격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새로운 번역은 믿음그리스도의 관계를 주격 속격으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필자는 최근에 발표한 최갑종, pistis Christou(‘믿음-그리스도’)는 어떻게 번역되어야 하는가?로마서 322절의 pistis Christou 구문에 대한 문맥적 접근을 중심으로-”성경원문연구50 (2022), 141-173에서 믿음-그리스도문구에 대한 전통적인 번역이 옳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이 문제가 이신칭의 문제와 깊이 연결되기 때문에 요지를 소개한다.

첫째, ‘믿음-그리스도구문이 처음 등장하는 3:22에서 바울이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어디서, 무엇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느냐가 아니다. 그는 이미 3:21에서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거했던 하나님의 의가 이제 나타났다고 선언하였다. 그렇다면 3:22에서 언급되어야 하는 것은 3:21의 반복이 아니라, 3:19-20의 부정적인 율법의 길과 대조되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든지 의에 이를 수 있는 새로운 긍정적인 믿음의 길이어야 한다. 3:22에 동사가 생략되어 있다고 본다면, 생략된 동사는 3:21에 있는 나타나다가 아닌, 갈라디아서 3:22b에 나타나는 유사한 믿음-그리스도문구에 있는 동사 주다로 보아야 한다. 22절에 이어 나오는 23절의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는 구문과 24절의 수동태 분사절 그들이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음으로22절의 믿음-그리스도구문을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받는 수단으로 보게 한다.

더구나 그다음 문단인 3:27-31이 너무나 명백하게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믿음으로 의롭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고(특히 3:30을 보라), 로마서 4장도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실에 대한 실례로 제시하고 있다. 평행을 이루는 주제 문단(1:16-17)도 이를 뒷받침한다. 만일 주격 속격 주창자들처럼, 3:21 이하의 문단이 기독론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면, 전 문단(3:20), 후 문단(3:23-31), 후 문단의 실례로 제시되고 있는 4, 그리고 4장과 연결된 5:1a에 있는 분사 절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음으로가 모두 이상하게 된다. 이처럼 문맥의 흐름 면에서 볼 때 믿음-그리스도구문에 나오는 믿음을 그리스도의 신실한 순종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믿음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뿐만 아니라 바울은 로마서에서는 물론 그 밖의 다른 서신에서 믿는다라는 동사를 42회 이상 사용하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믿는 행위를 언급한 적이 없다. 즉 예수님이 믿는다는 동사의 주어가 된 선례가 없다. 오히려 믿는다의 주어는 항상 사람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는 동사의 목적어로 나타난다(9:33; 10:11; 2:16).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나 독자에게 있어서 믿음”, “믿는 것의 대상은 우리의 의와 구원을 위해 구속과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임을 뜻한다.

둘째, 로마서 3:22믿음-그리스도문구에 이어 믿는다의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 분사절이 나온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분사절의 동사 믿는다의 주어가 신자를, 목적어가 사실상 그 앞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고 있다면, 분사절 앞에 있는 믿음-그리스도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믿음이 아닌 분사절의 주어인 믿는 사람의 믿음과 연결해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 점에서 명사 믿음과 동사 믿는다가 나란히 나오는 문구에서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후자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보는 것은 불합리하다. 바울이 명사와 동사구문을 함께 사용하고 있는 것은, 1:17의 경우처럼, 믿음의 중요성, 즉 앞에서는 신자의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뒤에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사람은 실제로 모두 믿어야 함을 재차 강조하기 위함이다.

셋째, 3:22믿음-그리스도구문에 이어 23절에서 바울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믿음의 필요성, 다시 말하자면 23절에서 1:18-3:20의 전 내용을 요약하여 범죄한 인류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필요성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은 바울이 22절에서 믿음과 관련해서 사용한 동일한 모든 사람23절에서도 사용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점에서 확인된다.

넷째, 3:30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할례자도 믿음으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신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상호교차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믿음으로믿음을 통하여라는 말은 믿음-그리스도문구의 단축어로서 3:26예수 믿는 자를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의롭게 하는 근거가 아닌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믿음으로믿음을 통하여가 그리스도의 신실한 순종이 아닌 유대인과 이방인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지칭하고 있다고 한다면, 동일한 문단에서 하나님의 의가 주어지는 방편으로 언급된 22절의 믿음-그리스도문구와 26절의 믿음-예수문구는 기독론적 관점이 아닌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읽어야 한다.

다섯 번째, 주격 속격 주창자들은 3:21-26의 중심 내용을 기독론에 두고 있지만, 사실상 3:21-26의 전 내러티브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순종보다도 하나님의 신실한 행위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의를 계시한 분도 하나님이고(21, 22),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통해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24), 그리스도 예수를 공개적으로 화목제물을 세우신 분도 하나님이시고(25a), 이를 통해 의를 드러내신 분도 하나님이시고(25b, 26a), 예수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26b). 이처럼 3:21-26의 전체 내러티브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신실성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그리스도문구를 전체의 흐름과 배치되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순종으로 읽어야 할 이유가 없다.

 

4) ‘십자가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의 순종(3:24-26)

먼저 3:24-26의 전체 흐름을 살펴보자. 3:24-26 이하는 가까이는 23절과 조금 멀리는 21-22절과 연결된다. 3:24-26은 한편으로는 23절에서 말한 인간 편에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을 하나님 편에서 가능하게 하신 역사적 사실을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3:24-26은 가까이는 3:22에 말한 모든 사람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으며, 멀리는 3:21이 말한 하나님의 의의 나타남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실현되었는가를 보여준다. 바울은 3:24에서 현재 수동태 분사 그들을 의롭게 하심으로를 사용하여, 3:23에서 말한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값없이 그들을 의롭게 하신다는 것과 그가 의롭게 하시는 사역은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바울은 1:17에서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의 복음과 연결했지만, 3:24 이하에서는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세우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직접 연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바로 하나님의 의의 표현이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범죄 한 자들을 의롭게 하시는 것은 아무런 조건 없이 그의 은혜로 되는 것이지만(24), 이를 가능하게 하려고 하나님 편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속량)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였다는 것이다. 관계대명사 절로 구성된 3:25-26의 긴 문장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이루신 구속사건의 목적과 그리고 그 결과를 말한다. 이 긴 문장을 통해서 바울은 그가 3:21-22에서 말한 하나님의 의를 더 확실하게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3:24의 그리스도 예수를 수식하는 3:25-26의 관계대명사 절을 살펴보면, 주어는 하나님이고, 동사는 단순 과거 중간태 공개적으로 세우다’(‘프로에데토’)이고, 목적어는 두 가지인데, 직접목적어는 관계대명사 앞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이고, 간접목적어는 속죄/화목제물’(‘히라스테리온’)이다. 그리고 히라스테리온그다음에 나오는 두 전치사 구 믿음으로그의 피로로 수식되고 있다. 그다음에 나오는 두 목적 전치사구 하나님의 참으심 가운데서 전에 지은 죄들을 잠정적으로 간과한 것에 대해 그의 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가 의롭고, 그리고 그가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기 위하여는 다 같이 주동사 프로에데토를 수식하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히라스테리온으로 공개적으로 세운, 이를테면 십자가 사건을 마련하신 이유를 설명한다.

첫째,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난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죄에 대하여 그때그때 즉각적으로 심판하지 않고 구약의 속죄 제사로 인해 잠정적으로 용서해준 일에 대하여, 이제 그리스도 예수를 화목/속죄 제물로 삼아 그들의 죄에 대하여 단번에 심판하시고 용서하심으로 자신의 의를 드러내셨다고 말한다. 둘째, 바울은 하나님께서 속죄/화목제물로 세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지금 이때에 자신의 의를 나타내셨다고 말한다. 셋째, 바울은 하나님께서 속죄/화목제물로 세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자신이 의로운 분이라는 것과, 그가 예수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셨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공개적으로 속죄/화목제물로 세우신 것을 십자가 사건으로 이해한다면,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의 의가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다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잊지 않아야 할 사실은 바울이 두 종류의 의가 아닌 오직 하나의 의인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이 십자가 사건 전의 예수님의 순종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은 처음부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셨고, 십자가의 희생적 순종에 합당한 무죄한 삶을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생애 어느 것도 그의 십자가 사건과 무관하거나 분리되어 있지 않다.

 

구속과 화목/속죄 제물로서 십자가 사건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직접 말하는 3:24-26절에서 22절에 말한 하나님의 의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왜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가 무슨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설명한다. 먼저 24절 상 반절에서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값 없이 죄인들, 23절의 죄를 지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모든 사람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사역인 동시에 믿음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 임을 말한다. 그런 다음 24절 하반 절과 25절에서 하나님의 의가 왜 하나님 자신의 사역인 동시에 하나님의 선물인가를 설명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공개적으로 마련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나타난 구속과 그의 피로 인한 화목/속죄 제물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다음 바울은 25절 하 반절과 26절에서 구속과 화목/속죄 제물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말한다.

우선 24절과 25절에 나타나 있는 구속’(개역개정은 속량’)화목/속죄 제물’(개역개정은 화목제물’, 표준 역은 속죄제물’)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우리가 이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든,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우선 24절의 구속’(‘아폴루트로시스’)이란 말을 살펴보자. 구약성경에서는 이 말이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월절의 희생을 통해 구속[해방]한 사건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되고 있다(6:6; 7:8; 9:26; 15:15; 77:15; 51:11). 하지만 로마의 크리스천들이 구속’(救贖) 이란 말을 들을 때, 그들은 구약적인 해방의 의미와 함께, 또한 자기 당대에 노예시장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는 구속’, 곧 어떤 사람이 노예가 된 종의 몸값을 그 종의 주인에게 지불하고 그 종을 자유인으로 해방한 일을 연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당대 노예시장에서 노예에 대한 몸값, 곧 속전금(贖錢金)을 지불하고, 그 종을 자유롭게 하는 단어인 구속이란 말을 사용하였다는 것이다(8:23; 고전 1:30).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죄의 노예가 된 죄인(1:18-3:20, 23)을 의롭게 하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의 죗값을 대신하는 속전금으로 지불하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사용한 구속이란 말을 구약적인 배경이든 헬라-로마적인 배경이든 한 측면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양면적인 배경에서 보아야 한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속전금)로 주려 함이니라”(10:45)라고 하시면서, 자신이 많은 사람의 죗값을 대신하는 속전금으로 지불될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마셔야 할 잔, 곧 십자가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죗값을 하나님께 대신 지불하였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전금을 받으시고 우리를 죄와 죄책으로부터 구속하시고,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들어내셨다.

그렇지만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25절 상반 절에서 하나님이 그의 피로 세운 화목/속죄제물”(‘히라스테리온’)이라고 말한다. 24절에서 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이란 말이 십자가 사건에 대한 헬라-로마적 배경으로부터의 설명이라면, 여기 하나님이 그의 피로 세운 화목/속죄제물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구약적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 화목제물’, 혹은 속죄 제물로 번역되는 헬라어 히라스테리온은 구약의 희생 제사에서 사용되는 속죄소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9:5). 본래 속죄소는 구약에서 성막의 가장 중요한 지성소 안에 비치되는 법궤 위에 있는 금속판을 가리킨다(16). 대제사장 아론은 일 년에 한 번씩 대 속죄일에 먼저 자신과 자기 가족을, 그다음 백성들의 범죄에 대한 속죄를 위하여, 각각 흠 없는 수송아지와 염소를 속죄 제물로 삼아 도살하고, 그 희생된 피를 취하여 지성소에 들어가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키는 법궤 위에 있는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렸다. 속죄소 위와 앞에 뿌려진 피는 아론과 백성들의 죄를 지고, 그들의 죄 값을 대신하여 맞아 죽은 송아지와 염소의 희생적인 죽음의 결과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뿌려진 피는 무슨 역할을 하는가? 이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인 십자가 사건에 대한 해석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설명하고 있는 속죄소를 개역 개정은 화목제물로, 표준 역은 속죄 제물로 번역하였다.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이 우리의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1:18)를 진정시켜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반면에 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덮거나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다시 맺을 수 있도록 하였음을 강조한다.

어떤 학자(, Dodd)는 후자가 옳다고 보고, 어떤 학자(Morris)는 전자가 옳다고 본다. 구약적 배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속죄 제사에서 사용되는 희생제물의 피는 도살된 희생제물의 결과이다. 희생제물이 성소 밖에서 도살되는 것은 속죄를 원하는 범법한 자의 죗값을 대신 받는 것을 뜻한다. 즉 율법을 범한 죄의 형벌인 죽음의 심판을 인간의 죄를 짊어진 짐승이 대신 담당한 것이다. 이것은 속죄를 위해서는 하나님의 법을 어긴 그 사람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죽음의 심판이 선행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도살된 짐승의 피를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속죄소 앞에 뿌린다는 것은 이름 그대로 속죄, 곧 죄를 덮고, 죄를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만나 화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구약의 희생제물은 죗값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담당하는 심판과 죄의 속죄라는 양면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이점을 기억한다면 바울이 예수님의 죽음을 히라스테리온으로 표현할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적 죽음이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과 속죄의 양면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전자를 우리의 율법 불순종에 대한 예수님이 대신 죗값인 사망의 심판을 받으신 능동적 순종으로, 후자를 예수님이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덮으시고, 깨끗하게 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신 수동적 순종으로 볼 수 있다면,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바로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동시에 수동적 순종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로마서 1:18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불경건과 불의에 대하여 진노하신다.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심판하는 것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인격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진노와 심판 없이 그분은 죄인을 용서할 수 없고, 죄인인 사람도 속죄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죄값을 지불하는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도 없느니라”(9:22)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피를 쏟는 화목/속죄제물로 세우셨다는 것은, 그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의 죄에 대한 진노와 죽음의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신 쏟으셨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그를 믿는 모든 자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공의의 심판을 대신 받으신 것이다. 그렇게 하심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의를 마련하셨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언급한 자신이 마셔야 할 잔의 의미일 것이다. 즉 예수님은 이사야 53장의 예언처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담당시킨 우리 모두의 죄악을 대신 짊어지시고, 유월절의 어린양처럼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대신 받아 희생적 죽임을 당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하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수행만을 뜻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옛 언약 제사 제도에서 희생제물의 피가 속죄의 기능이 있는 것처럼,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덮고 깨끗하게 하는 속죄의 기능도 가지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점과 관련하여,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9:13-14)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의 공개적 표현인 십자가 사건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유효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공개적으로 세우셨는가? 바울은 25절 하 반절과 26절에서 공개적으로 세우다동사를 수식하는 세 가지 목적절을 통해 십자가 사건과 로마서 전체의 주제어인 하나님의 의와 직접 연결을 시킨다.

첫째, 25절 하반 절의 전치사 구절인,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看過)하신 것에 관하여 자기의 의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 전치사 구절은 아담 이후 인류의 계속된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범죄에 대한 죽음의 심판을 즉각적으로 실행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심으로 심판을 잠정적으로 보류하셨다가, 그 보류하신 심판을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에서 수행하심으로 자신의 의를 들어내셨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말하자면 옛 언약 시대에 이루어진 모든 짐승의 속죄 제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죄가 선언되었다 하더라도, 그 속죄 제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다만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잠정적으로 보류하는 기능만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당한 짐승과 그 피가 하나님의 공의를 충분하게 충족시켜주지는 못하였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죄에 대한 죗값은 오직 사람만이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짐승의 희생 제사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의가 충분하게 드러나지 못한 것이다. 구원을 가져오는 자비와 사랑의 의뿐만 아니라, 징벌과 심판을 가져오는 공의의 의도 충분하게 드러나지 못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잠정적으로 보류했던 그의 진노와 심판을 수행함으로써 그 자신의 의를 들어내고, 입증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옛 언약 백성에 대한 완전한 죄책에 대한 면제와 속죄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에서 비로서 이루어진 것을 뜻한다.

둘째, 바울은 계속해서 26절 상 반절에서 두 번째 전치사 목적구를 통해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세우신 것은 지금 이 때에 자기의 를 나타내기 위함이다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죄를 지은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잠정적으로 보류한 것에 대한 그의 의를 들어내신 것일 뿐만 아니라, 현재에 죄를 지은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면제와 죄 용서를 선언하는 것에 대해서도 자신의 의를 드러낸 사건이라는 것이다. 셋째, 바울은 26절 하 반절의 부정사 구절을 통해 십자가 사건의 목적에 대한 종합적인 결론을 내린다: “그 자신이 의로운 분이라는 것과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그 자신이 의로운 분이심을 나타내었다는 것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언약에 대하여 신실하심을 드러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찍이 아담에게 금지한 선악과를 먹을 경우, “반드시 죽으리라”(2:17)라고 하신 심판의 언약뿐만 아니라, 그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을 반드시 구원하겠다는 언약을 지키심으로 자신의 언약적 신실함을 구체적으로 나타내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의 십자가 사건은 보류되어왔던 옛 언약 백성들의 죄에 대한 심판과 그들의 구원을 가져온 하나님의 의의 사건일 뿐만 아니라, 지금 이때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시며, 동시에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확증한 사건이다. 요약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모든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 약속을 믿었던 사람이든, 지금 그 성취를 믿는 사람이든, 한편으로 그들의 불순종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고, 또 다른 한편으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의가 ` 확증되는 의의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자신이 의로우신 분임을 확증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자신에게 의로우신 분임을 확증하셨다. 즉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온전하게 충족되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위해 세우신 이 십자가 사건의 당사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현재나 미래에 의롭게 하신다. 이처럼 칭의는 현재든 미래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의한 것이지, 그 어떤 행위, 그 어떤 율법 준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3:21-26의 문단에서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이 문단에서 거듭거듭 강조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능동성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수동적 역할이라는 사실이다. 의를 마련하신 분도, 의를 나타내신 분도,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분도, 의를 드러내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공개적으로 그리스도를 세우신 분도,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구속과 화목과 속죄를 마련하신 분도 다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항상 모든 문구의 주어 역할을 한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근거와 방편이 된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사역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수행하셨다. 그런 점에서 3:21-26은 하나님의 능동성을, 반면에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을 강조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바울이 로마서에서 십자가 사건을 단순히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의 표현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은, 곧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로마서 5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그의 능동적 순종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능동적, 수동적 순종의 양면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의도 이 양면의 순종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2.4.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으로서 십자가 사건(5:12-21)

바울은 5:12-21의 문단에 들어가기에 앞서 5:6-9에서 3:21-26에서 설명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간략하게 다시 언급한다. 5:6-9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십자가 사건에서 단순히 수동적 역할만을 감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를 문장의 주어로 삼아 그리스도가 십자가 사건에서 능동적 역할을 하였음을 분명히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5:21-21에서 말할 그리스도의 능동적 역할을 미리 짐작하게 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이것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 관점만이 아닌, 또한 능동적 순종 관점에서도 보고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말하자면 그가 로마서 서언에서 하나의 복음을 하나님의 복음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한 것처럼, 하나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을 수동적 순종능동적 순종양면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점을 5:12-21에서 아담의 능동적 불순종 및 그 결과와 대조하는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그 결과를 통해 자세하게 설명한다.

 

1) 연대성의 원리: 한 사람 아담과 한 사람 그리스도

잘 알려진 대로, 5:12-21의 핵심적인 내용은 인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한 사람 아담과 한 사람 그리스도와의 대조이다. 옛 세대, 곧 죄와 죽음의 시대를 대변하는 아담의 불순종과 의와 생명의 새 시대를 대변하는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의 순종과의 대조이다. 단순한 수평적 대조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이 아담과 그의 사역이 우리에게 가져온 결과보다 훨씬 더 크고 넓고 깊은 결과를 가져오는 비교급의 대조이다. 인류의 시조 아담 한 사람의 불순종을 통해서 죄와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와 죽음의 세력이 모든 후손과 첫 창조 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리고 모든 후손이 죄와 죽음의 자리에 떨어졌다. 이처럼 아담 한 사람이 전 인류와 세상에 불순종//정죄/허물/죽음이라는 어둡고 무서운 부정적인 영향과 결과를 가져왔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전 인류에게 아담이 가져온 결과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더 높고 더 귀한 순종/은혜//은사/생명이라는 새로운 창조와 회복을 가져왔다. 바울의 아담과 우리(옛사람), 그리스도와 우리(새사람)를 연결하는 이와 같은 주장의 근저에는 헤브라이즘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인 연대성 혹은 대표성의 원리가 놓여있다.

헬레니즘에서는 개인이 중요성을 가진다. 개인의 인권과 책임이 강조된다. 그러나 헤브라이즘에서는 개인의 인권과 책임이 무시되지는 않지만, 개인보다 공동체나 민족이 더 강조된다. 한 가정의 가장이나 민족의 지도자 행동 여하에 따라 그 가정이 자자손손 복을 받기도 하고 벌을 받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는 개인이 아니라 한 가정이나 민족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대표자라기보다도 모든 가족이나 민족의 구성원이 대표자에게 연대하기 때문에, 대표자의 행동에 그 구성원이 참여하고 있다고 본다. 창세기 12:2-3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의 약속,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도 이와 같은 대표성과 관련되어 있다. 여호수아 7장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아간 한 사람의 범죄에 대해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범죄하였다”(7:1)고 진노하여 아이성 함락을 실패하게 하신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5:12 이하에 나타난 바울의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헤브라이즘의 대표나 연대성의 원리를 알고 있어야 한다.

 

2)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과 그 결과

12절 서두에 나오는 이러므로는 바울이 5:1-11에서 말한 내용, 곧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 및 화목과 연관되어 있다. 이제 5:12 이하에서 그는 죄와 죽음이 어떻게 한 사람 아담을 통하여 인간 세상에 들어와서, 모든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모든 사람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와 죽음의 세력에게서 벗어나 의와 생명의 세력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는가를 설명한다. 바울은 먼저 창세기 3장에 있는 아담의 범죄와 타락을 염두에 두고,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을 통해 죄와 죽음의 세력이 전인류세계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바울은 헤브라이즘의 중요 사상 중의 하나인 연대성 개념을 따라 아담은 전 인류를 대변하므로, 아담 한 사람의 범죄가 동시에 전 인류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창세기에 따르면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본래 선하게 창조하셨다(1:31). 죄는 하나님의 창조 이후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2:17)에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따먹는 아담의 범법행위를 통하여 인간 세상에 들어왔고, 그리고 그 죄로 인해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다. 죄와 사망의 원천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불순종, 곧 그의 범법행위에 기인한다. 여기서 바울은 죄와 사망을 물질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인간과 세계에 영향력을 가진 하나의 어두운 세력으로 보고 있다. 바울이 죄를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인격화된 세력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로마서 7:11에서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느니라에서, 사망 역시 세력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은 고린도전서 15:55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에서 각각 확인된다. 이처럼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죄가 자신은 물론 그의 모든 후손에게 죄와 죽음을 가져왔다.

물론 이 죽음은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과의 단절을 가져오는 영적인 죽음도 포함한다. 사실상 아담이 하나님이 금한 선악과를 따먹은 즉시 그가 육체적인 죽음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그의 하나님 형상의 손상으로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는 단절되었다. 창세기 3장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아담이 범죄 한 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숨은 그의 행동이 이를 보여준다. 이처럼 죄와 죽음은 인간을 지배하는 세력으로서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우리가 아담과 우리와의 연대성으로 오는 죄와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구속 사역이 인류 전체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아담은 한 개인이 아니고 장차 하나님이 보내실 그분의 모형이기 때문에, 아담 이후의 모든 후손이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이 아담과 인류와 연대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대 관계를 설명하는 가교역할을 한다.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았어도 아담과의 연대로 인해 죄와 사망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의로운 순종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예수님과 연대로 인해 우리가 예수님이 마련한 의와 생명의 지배를 받게 되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아담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도와주고,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또한 우리와 아담과의 관계에 관한 이해를 도와준다. 아담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온 전 인류의 머리이지만, 그리스도는 긍정적 결과를 가져온 전 인류의 머리이다.

 

3) 한 사람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 결과

5:15 이하에서 바울은 본격적으로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하면서 이들이 인류에게 각각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아담은 그의 불순종으로 인류 역사에 죄와 죽음의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왔다면, 그리스도는 그의 순종하심으로 아담의 모든 부정적인 영향을 치유하고 역전시켜 의와 생명과 은혜의 더 밝고 더 희망찬 역사를 가져왔다. 곧 죄와 타락과 죽음과 정죄의 역사가 의와 생명과 은혜와 소망의 역사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 아담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있는 신자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축복된 자가 되었는가를 말한다.

첫째, 아담의 범죄는 많은 사람에게 죽음을 가져왔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에게 더 풍성한 은혜의 선물을 가져왔다(15). 그리스도가 가져온 은혜의 선물은 아담이 가져온 죽음을 능히 극복하고도 남을 만큼 더 크고 풍성하다. 둘째, 아담의 범죄는 심판과 정죄를 가져왔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온 은혜의 선물은 오히려 많은 범죄자를 의롭게 하였다(16). 그리스도가 주는 은혜의 선물은 심판과 정죄 아래에 있는 자들을 오히려 의롭게 할 만큼 더 능력이 크고 풍성하다. 그리스도는 단순히 아담의 범죄로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정도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첫 창조 때에 주어진 것보다도 훨씬 더 나은 것을 주셨다. 셋째, 한 사람 아담의 범죄는 죽음이 모든 사람을 지배하게 하였지만,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의의 선물은 생명이 모든 사람을 지배하게 하였다(17).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운 선물은 죽음의 지배를 받는 자들을 해방하여 생명의 지배를 받게 할 만큼 더 능력이 크다.

 

4)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5:18-19절에서 바울은 이미 15-17절에서 언급한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와 그들이 각각 인류에게 미친 상이한 결과를 다시 요약하여 진술한다. 첫째, 아담 한 사람 불순종의 행동은 많은 사람(원문은 모든 사람’)을 정죄에 이르게 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의의 행동, 곧 그의 십자가의 희생적 죽음은 많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의롭다함을 가져왔다(18). 여기 많은 사람을 정죄에 이르게 한 아담의 한 범죄, 곧 그가 하나님이 금한 선악과를 따먹고 불순종의 행위와 대조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의로운 행위19절에 있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병행한다. 따라서 많은 사람을 생명의 의로 인도한 그리스도의 한 의로운 행위는 십자가 이전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순종보다도,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의 순종으로 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3:25-26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자신의 의를 나타내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게 하셨기 때문이다. 더구나 18절의 한 범죄19절의 한 사람의 불순종이 아담이 하나님이 금한 선악과를 먹은 특정한 행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와 평행을 한 18절의 한 의로운 행위19절의 한 사람의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구체적인 순종으로 보는 것이 옳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5:12-21의 문단에서 아담의 능동적인 불순종과 그리스도의 능동적인 순종을 대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생애를 둘로 구분하여, 십자가 이전의 삶을 율법에 대한 긍정적 순종으로,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수동적 순종인 것처럼 도식화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오히려 바울은 빌립보서 2:6-11에서 그리스도의 성육, 지상에서의 낮아지심의 삶, 십자가의 죽음 전체를 그리스도 자신의 능동적 순종으로 말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선악과 금지법을 어긴 아담의 불순종과 대조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한편으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어긴 불순종의 죗값을 그리스도가 대신 담당한 것인 동시에, 또한 아담과 이스라엘이 지키지 못한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전히 성취한 것으로써, 하나님의 법에 대한 최고의 순종이라 할 수 있다.

둘째,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이 많은 사람을 죄인 되게 하였지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오히려 죄인이 된 많은 사람을 의인이 되게 한다(19). 여기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다라는 것은, 18절 하반 절의 모든 사람을 생명의 의로 인도한다라는 말과 평행하는 데, 그리스도를 통해 많은 사람이 실제로 의인이 되는 것, 곧 칭의를 받는, 혹은 그리스도가 이루신 의가 전가 되는 것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칭의는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이며, 사죄와 구원을 다 포함한다. 이처럼 한 사람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각각 모든 사람(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특성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긍정적 사역은 아담의 부정적인 모든 사역을 극복하고 해결할 수 있을 만큼 더 크고, 더 넓고, 더 능력이 많다.

 

5) 율법의 역할

바울은 5:12-19까지 아담의 불순종이 인류에게 가져다 죄와 사망 등 부정적인 결과와 그리스도의 순종이 가져온 더 놀라운 긍정적인 결과인 의, 은혜, 생명을 대조시킨 다음 20절에서 율법의 역할을 말한다. 아마도 독자 중에 제기될 수 있는, 그렇다면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에 주어진 모세의 율법은 왜 주어졌고, 무슨 역할을 하는가는 질문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바울은 3:20에서 율법은 의를 가져다주지 못하고 죄를 깨닫게 할 뿐이다고 결론을 내린 다음, 3:21 이하에서 오직 의는 율법과는 별도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진다고 말하였다. 그런 다음 바울은 자연히 제기될 수 있는,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율법을 폐기시키느냐는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믿음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어떻게 믿음이 율법을 굳게 세우는가에 대한 설명을 8장까지 유보한다. 오히려 그는 4장에서 아브라함의 실례를 들어 하나님의 축복의 언약인 의는 율법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온다(4:13), 율법은 범법과 진노를 가져온다(4:15)고 하면서 율법을 의와 믿음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5장에 와서 바울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조시키면서 다시 율법을 아담과 연결한다. 그는 5:13에서 죄가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하면서, 율법을 아담의 범죄가 가져온 죄와 연결한다. 그런 다음 5:20에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면서 율법과 죄를 다시 연결한다.

하지만 바울은 20절 하 반절에서 죄가 더 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라고 하면서, 율법이 죄를 죄 되게 하는 부정적인 역할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와 의의 길을 연다고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3:23-24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 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한다와 일치한다. 개역 개정 성경은 율법을 몽학선생으로 비유하여, 마치 율법이 우리를 긍정적으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과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몽학선생으로 번역된 헬라어 파이다고고스는 바울 당대 헬라-로마 사회에서 주인 몰래 종종 주인의 아들을 괴롭혔던 소년 인도자를 지칭한다. 말하자면 율법은 그의 부정적인 역할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가 그 앞에서 말한 로마서 3:20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하여진 것이라와도 부합한다. 어쨌든 바울은 로마서 5:20 하 반절에서, 마치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여 수술이 필요한 환부를 들추어내어 수술실로 안내하는 것처럼, 죄의 심각성을 폭로하는 율법의 부정적 역할을 통해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더 풍성한 은혜의 필요성을 가져온다고 말한다.

21절은 5:12-20의 총 결론이다. 이 결론적인 구절에서 바울은 다시 한번 그가 지금까지 진술한 내용을 염두에 두면서, 한 사람 아담의 범죄가 가져온 결과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가져온 결과를 서로 대조시키면서, 예수 그리스도 사역의 비교할 수 없는 우위성을 재강조한다. 아담 한 사람 불순종의 범죄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죄로 인해 사망이 모든 사람을 지배하게 되었다. 죄는 모든 사람을 노예화하여 창조주 하나님보다 피조물을 신격화시키고 그것에 종이 되도록 하여 결국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사망과 심판을 자초하게 한다(1:18-3:20).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3:21-26)는 우리를 의의 지배 아래 두게 하고, 우리를 의와 영생으로 인도한다. 이처럼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은 전 인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인류 역사를 이끌어간다. 첫 사람 아담으로 대변되는 첫 창조와 타락, 그리고 마지막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대변되는 새 창조와 구속은 인류 역사와 전 피조 세계를 이끌어가는 동인이다.

여기서 거듭 잊지 않아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는 아담을 통해 나타난 죄의 세력보다 더 크고, 더 풍성하고, 더 능력을 소유했다는 것이다. 아담은 에덴에서 실패하였고 아담의 후예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실패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으로부터 승리하였으며,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아담으로부터 유래된 죄는 죽이는 역할을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는 살리는 역할을 한다. 은혜의 힘이 죄의 힘보다 더 크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연합 하여 은혜 아래 있는 자는 더 우위에 있다. 그리스도를 통한 새사람으로의 구속과 새 창조는 단순히 옛 창조와 아담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옛 창조보다 더 아름답고 더 위대하다. 물론 그 완성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새 창조는 이미 시작하였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새 창조로 옮겨져 그 축복을 부분적으로 누리고 있다(고후 5:17; 6:15; 1:13).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능동적 율법 순종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없이 십자가의 수동적 순종만으로는 단지 옛 아담과 첫 창조의 상태로 돌아간다고 보는 것은 여하히 옳다고 보기 어렵다.

 

2.5. 율법의 성취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순종(8:1-4; 참고, 10:4, 13:8-10, 5:17)

바울은 로마서 7장에 와서 3-6장까지 가끔 언급했던 율법의 부정적 역할에 대하여 상세하게 말한다. 율법과 계명은 하나님의 법(7:22)으로서,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고 신령하지만(7:12, 14),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된 나를 해방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나에게 죄를 알게 하고(7:7, 9), 그로 인해 나를 사망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의와 구원과 생명을 가져다줄 수 없는 율법의 한계와 무능력을 강조하였다. 율법이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와 성령 없이 율법에 의존하는 나는 나를 지배하는 죄와 사망의 세력을 깨뜨릴 수 없는 율법의 무능력으로 인해 오히려 절망적인 상황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7:24). 이점은 바울이 로마서 8장 서두(3)에서 7장의 상황을 요약하여,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이라고 말한 사실에서 확인이 된다. 그렇다면 7장으로부터 당연히 제기될 수 있는 문제는 무엇이, 어떻게 신자가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느냐,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된 신자에게 있어서 율법은 어떤 역할을 하느냐이다. 로마서 8장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준다.

로마서 구성면에서 보면, 8장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하나님이 주신 불기둥과 구름 기둥, 만나와 반석으로부터의 물로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여정을 상기시킨다. 두 번째 내러티브를 여는 3:21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라는 대전환의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세 번째 내러티브의 결론을 여는 8장 역시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8:1)라는 대전환의 선언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통해 주어진 칭의 사건(3:21-5:21)과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사건을 통해 주어지는 성화 사건(6:1-7:6)이 서로 나누어질 수 없다(고전 1:30; 6:11; 딤전 3:5)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8장을 여는 1절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정죄로부터의 자유의 선언은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8:39)라는 약속의 선언으로 종결된다. 이처럼 8장은 그 무엇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를 정죄할 수 없다는 보증의 선언에서 시작하여 역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보증의 재확인으로 끝난다. 이 보증의 시작과 종결을 하시는 분은 신실한 하나님이시고, 그 중보자는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그것을 신자 안에서 이루는 분은 성령이시다.

 

1)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8장은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라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이 선언은 부정적으로는 7장에서 말한 율법 아래 있는 절망적인 자들과 대조를 이루면서, 긍정적으로는 3:21-7:5의 전 내용을 요약하는 7:6이제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음으로 율법에서 해방이 되어 묵은 율법이 아닌 새로운 성령으로 섬기게 되었다라는 선언과 직접 연결이 된다. 여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6장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정죄함이 없다라는 말은 3장과 5장에서 말한 인류가 자신의 죄 때문에 마지막 날에 받게 될 그 종말론적인 정죄의 심판을 이미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대신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더는 종말론적인 정죄의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이제라는 말은 3:21그러나 이제는의 경우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및 부활과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하여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 하는 새로운 의와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종말론적인 선언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한 자들(6:1-11)에게는 정죄함이 없는 선언이 이미 적용되기 시작하였으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완성됨을 시사한다(8:18-30). 왜냐하면 바울이 6장과 7장 서두(1-6)에서 거듭 밝힌 것처럼,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신자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죄와 육과 율법에 대하여 죽음으로 이들 세력으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이다(2:5-6; 1:13-14; 2:12-13). 바울은 이러한 선언을 통해서 7장의 죄, , 사망과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자의 어두운 면과 8장 이하에서 소개할 그리스도, 성령, 생명의 지배 아래 있는 자의 밝은 면을 날카롭게 대조시킨다. 그렇다면 왜,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이 가져오는 정죄함이 없는가? 바울은 이와 같은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그 답변을 이유 접속사 을 동반하고 있는 8:2 이하에서 제시한다.

 

2) “생명의 성령의 법죄와 사망의 법

2절에서 바울은 1절의 선언에 대한 이유를 왜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2절에 대한 이유를 다시 이유 접속사 을 동반한 8:3-4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7:14-25에서 거듭 밝힌 율법의 무능력과 관련하여, 율법은 그것을 온전히 지키지 못한 인간을 정죄할 뿐,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오히려 죄와 죽음의 포로가 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건을 통하여, 그 율법의 모든 요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죄와 사망의 법으로 작용하였던 율법을 이제는 성령에 의해 율법의 진정한 목적이 성취되는 성령의 법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 이상근, 이한수, Moo, Schreiner)2절에 나타나고 있는 생명과 성령의 법죄와 사망의 법을 같은 율법에 대한 다른 관점의 사용으로 보지 않고, 서로 다르게 보거나 혹은 모세의 율법이 아닌 원리세력으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7장에서 이미 바울이 율법을 한편으로 거룩하고 신령한 하나님의 법으로 말하면서(7:22), 다른 한편으로 율법이 죄를 예방하기보다도, 죄의 도구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죄의 법이라고 부르고 있는 점(7:23)을 볼 때, 양자를 다르게 볼 이유가 없다. 바울이 여기서 같은 율법을 각각 다른 전망에서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홍인규, Wright, Dunn, Stuhlmacher).

바울은 의와 구원의 원리를 말할 때 율법이 결코 인간을 구원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점과 관련하여, 율법을 ’, ‘믿음’, 혹은 성령등과 날카롭게 대조시키면서, 율법의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율법의 무용론이나 폐기론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3:31에서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라고 하면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 신자에게는 율법 무용론이나 폐기론이 아닌 오히려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서 율법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옹호한다. 바울은 로마서 13:10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라고 하면서 새 시대에서도 율법은 사랑의 법으로서 성도들에게 여전히 유효함을 말한다. 갈라디아서도 5:14에서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너 자신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다라고 한 다음, 6:2에서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라고 말한다. 서로의 짐을 지는 것, 곧 온 율법의 성취(5:14)인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어, 그리스도의 법이 된 율법을 성취하라고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 다른 곳에서도 이 성취된 율법을 믿음의 법” (3:27,31), “하나님의 법”(7:25), “생명의 성령의 법”(8:2)이라고 부르면서, 새 시대에서 믿음 및 성령과 연합하는 율법의 새로운 역할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바울에 따르면 그리스도와 성령과의 관계없이 옛 시대의 세력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이 여전히 죄와 사망의 법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그를 대신하여 율법의 모든 요구를 성취하셨다. 그래서 이제 그에게 있어서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성취한 새 계명인 사랑의 법으로서 구속받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삶을 위한 성령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언제, 어떻게 율법을 성취하여 죄와 사망의 법을 성령의 법이 되게 하였는가? 그리스도의 율법 성취는 그의 십자가 이전의 율법 순종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십자가 사건에서의 순종을 지칭하는가?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5:17)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선언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내가 율법을 수행하였다’, ‘지켰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완전하게 했다라고 한 점이다. 여기 완전하게 했다라는 헬라어 원문 어휘는 성취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146:2와 그리고 로마서 8:4에서 그리스도의 율법 성취와 관련하여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왜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내가 율법을 다 지키기 위해 왔다,’ ‘내가 율법을 모두 행하기 위해 왔다라고 말씀하지 않고, ‘내가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 왔다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리고 바울도 예수님께서 우리가 지키지 못했던 율법을 우리 대신 남김없이 다 지켜다, 다 수행했다고 말씀하지 않고 율법의 요구를 성취했다고 말하고 있는가?

본래 율법을 행한다라는 말은 특정한 율법을 하나하나 지킨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율법을 성취한다라는 말은 율법을 행한다는 의미를 뛰어넘어 율법이 가지고 있는 본래 의미를 완전하게 달성한다는 의미가 있다. 전자의 경우 설사 예수님이 어떤 율법을 행한다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다른 사람에 의해 행하여야 할 여지가 남아 있다. 하지만, 성취한다는 것은 그 율법이 예수님에 의해 한번 성취가 되면, 다시 성취할 다른 자리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5:17에 앞서 성취하다라는 말이 이미 1:22, 2:15, 17, 4:14에 나타난다. 1:22는 성령에 의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 이사야 7:14의 성취임을, 2:15는 아기 예수의 애굽 피신이 호세아 11:1의 성취임을, 2:17은 헤롯이 베들레헴의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를 살해한 것이 예레미야 31:15의 성취임을, 그리고 4:14는 예수님의 가버나움 거주가 이사야 9:1, 2의 성취임을 각각 말하고 있다. 이들의 경우 한번 성취가 되면, 다른 사람에 의해 다시 성취될 수 있는 자리가 남아 있지 않다. 말하자면 이사야 7:14의 동정녀 탄생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한번 성취가 되면, 다른 사람에 의해 다시 성취될 수 있는 자리가 없다. 따라서 마태복음 5:17에서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지 않고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에 의해 율법이 한번 성취가 되면, 더는 그 성취를 위해 예수님의 자리를 대신할 자가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예수님에 의해 이미 율법의 완전한 의미가 달성되고 율법의 진정한 목표에 도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라”(10:4)라고 말한다(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증은 최갑종, ‘소위 예수, 율법, 그리고 제자들-마태복음 5:17-20을 중심으로,’” 신약논단19 [2012], 395-421; 최갑종, “예수와 율법,” 갈라디아서[서울: 이레서원, 2016], 402-408을 보라). 그렇다면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셨는가? 그가 출생 때부터 십자가 사건 이전까지 율법을 준수한 것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십자가 사건에서 율법의 완전한 의미를 성취한 것을 가리키는가? 바울이 그리스도의 율법 성취를 말할 때 어떤 것을 무엇을 염두에 두었는가? 전자인가, 후자인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율법 성취는 신자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성취했기 때문에, 신자는 이제 율법과 무관한가? 여기에 대한 답변이 8:3-4에서 주어진다.

 

3) 율법의 무능력과 그리스도의 율법 성취

바울은 먼저 8:3a에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언급한다. 이것은 좁게는 7:14-24가 말하고 있는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려있으며”, 죄 아래 팔린 나를 도울 수 없는 율법의 무능력을 가리킨다. 하지만 넓게는 1:18-3:20에 나타나 있는 죄와 비참 가운데 있는 인류와 이를 도울 수 없는 율법의 무능력을 다 포함한다. 반면에 8:3b 이하는 이와 대조적으로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인간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과 그리고 이를 도울 수 없는 율법의 무능력을 어떻게 반전시킨 사실을 설명한다. 그런 점에서 8:3b1:18-3:20과 대조가 되는 3:21-265:12-21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동성과 그리스도의 순종과도 다 연결된다.

바울은 먼저 3b의 분사절(‘펨파스’)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그리고 죄를 위하여 보냈다고 하면서, 3:21-26에서 말한 하나님의 능동성을 재차 강조한다. 여기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냈다라는 것은 자기 아들을 범죄 전의 아담의 모양이 아닌, 범죄한 이후의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을 대신할 수 있도록 죄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육을 가진 사람으로 보냈다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4에서 이를 가리켜,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신 것으로 말한다. 그리고 빌립보서 2:7-8에서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저자 역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다”(4:15)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죄인인 우리를 대신할 수 있게끔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우리와의 차이점이 있다면 예수님도 우리처럼 죄를 지을 수 있는 육을 가진 자였지만, 다만 그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죄인의 모양이 아닌 우리와 전혀 다른 존재로 왔거나, 설사 우리와 같은 자였지만 우리처럼 죄를 지었다면, 그는 우리를 대신할 수 없으며, 그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대신하는 죽음과 부활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다음에 나오는 3c죄를 위하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신 것이, 3:24-25에서처럼, 그를 우리의 죄의 값을 대신 지불하는 속죄 제물로 보내셨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주절에 있는 하나님이 육신 안에 있는 죄를 정했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낸 목적을 보여준다. 곧 죄인을 대신 할 수 있는 육을 가진 예수님을 속죄 제물로 삼아 그에게 우리의 죄에 대한 모든 심판을 쏟았다는 것이다.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십자가의 순종을 통해 우리가 지키지 못했던 율법의 모든 요구를 성취하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구절의 배후에는 초대교회의 중요한 신앙고백이었던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전 15:3)와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53:4-5)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이를 가리켜,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다”(고후 5:21)라고 말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우리를 대신할 수 있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그에게 우리의 죄에 쏟으실 심판을 쏟으심으로 죄의 세력을 무력화하였다. 동시에 아들은 그의 희생적 순종을 통해 율법의 모든 요구를 이루어 의를 이루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더는 죄와 사망의 법이 아닌, (생명의) 성령의 법이 되었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 있는 자, 곧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된 자는 더는 죄로 인한 정죄함이 없고(6:14; 8:1, 39), 그리스도의 성취를 통해 성취된 법이 된 성령의 법을 누리게 되었다. 그렇게 볼 때 8:38:1의 선언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처럼 신자가 정죄함으로부터 자유 하게 된 것은, 신자가 행한 무엇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것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에게 주어진 이 정죄함이 없는 자유를 빼앗을 수 없다. 바울은 8장 끝에 가서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오”(8:33-34)라고 말하면서, 이 자유가 하나님이 보증하는 확실한 것임을 재확인한다. 하지만 바울은 신자에게 주어진 이러한 자유와 보장이 신자에게 이제 마음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칭의는 성화와 무관하거나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8:4히나의 목적절,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에 나타나 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율법 성취는 결코 반율법주의를 가져오거나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8:4히나목적절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을 가진 우리의 모양으로 보내어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로 삼으신 목적이 우리가 육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에 의해 이미 성취가 된 그 율법(8:3)의 요구가 계속 성취되도록 하기 위함에 있음을 말한다. 이 구절에서 두 가지가 관심사로 떠오른다. 하나는 율법의 요구가 무엇이냐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육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 때, 율법의 요구가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이다. 이 두 질문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여기 율법의 요구는 그리스도와 무관한 율법의 요구가 아닌,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그 율법의 요구가 우리 안에서 계속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리고 이것은 육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자들 안에서 이루어진다. 먼저 율법의 요구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자.

여기 율법이 모세의 율법을 지칭하는 것은 맞지만, 7:25에 나오는 죄의 법이나 8:2에 언급된 죄와 사망의 법을 가리키지 않고, 그와 대조가 되는 8:2생명의 성령의 법”, 곧 그리스도에 의해 율법의 본래 목적이 성취되어 그리스도의 법(6:2)이 된 그 법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8:2는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에게 말하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보다 먼저 바울이 여기서 율법의 요구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닌 성취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그것도 바울은 성취하다의 단어를 능동태가 아닌 가정법 단순 과거 수동태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 수동태 동사가 사용된 것은 율법 요구의 성취가 나의 힘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성취하다의 동사가 사용된 것은, 3절에서 언급한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곧 우리의 육신으로 율법이 연약하여 할 수 없었던 것을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율법의 모든 요구가 성취되도록 한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가정법이 사용된 것은, 갈라디아서 6:2의 경우처럼,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율법 성취가 계속 이루어져야 할 것을 시사한다.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예수님은 율법 중에 어떤 계명이 크냐고 질문하는 한 율법사에게 신명기 6:5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레위기 19:18에 있는 이웃 사랑으로 요약한 다음(22:34-39),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말하자면 모든 율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야말로 아버지의 뜻에 전폭적으로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였고, 동시에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최고의 사랑을 실천인 셈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율법을 완전하게 성취하셨다.

이점은 예수님께서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하신 고별설교에서, 한편으로 내가 아버지의 계명[사랑]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계명[서로 사랑하라]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5:10)라고 하신 말씀과 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관련하여,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에서 확인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모든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시고, 그 성취된 율법을 사랑의 새 계명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다[성취하였다]”(13:8),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13:10)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서로의 짐을 지라[서로 사랑하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그리스도가 성취한 법]을 이루라[성취하라]고 교훈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사실상 십자가를 통해 율법을 성취하신 예수님의 성취를 재현하는 것이 된다. 물론 이 성취는 수동태가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나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하나님, 곧 성령이 하시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사랑하게 함으로,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율법 요구 성취를 구현한다는 사실은 이미 로마서 5:5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에 암시되어 있다. 그래서 바울은 8:4에서 그 영[성령]을 따라 [사랑]을 행하는 자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된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역시 갈라디아서 5:16에서도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교훈한다. 성령을 통해 율법의 요구[사랑]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이미 에스겔 36:26-27에 언급된 새 영을 너희에게 주어 내 율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는 말씀에 이미 예견되었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능동적, 수동적 순종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주의 영광[십자가의 순종]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우리의 순종]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니 곧 주의 영[성령]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고 말한다.

 

3. 나가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로마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순종에 관한 바울의 교훈을 살펴보았다. 먼저 로마서 서문(1:1-17)을 통해 복음은 그리스도의 능동적·수동적 순종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것과 이 복음을 믿는 자에게 의와 구원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즉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만이 아닌 능동적 순종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복음이 하나님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지칭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순종을 능동적, 수동적 순종으로 지칭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나누거나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였다. 다음 로마서 몸체(1:18-15:13)의 첫 내러티브에 해당하는 1:18-3:20에서 인류(이방인과 유대인)가 하나님께 불순종과 불의의 죄를 지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아래 처해 있다는 것과 인류는 그 무엇으로도, 심지어 율법을 통해서도 죄와 죽음과 하나님의 심판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과 그래서 인류에게는 복음을 통해서, 즉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서 주어지는 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다음 로마서의 심장으로 여겨지는 3:21-26에 대한 주석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류가 처한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공개적으로 세워 자신의 의를 드러냈다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구속과 화목 및 속죄 제물이 되는 능동적이며 동시에 수동적 순종을 하셨다는 사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가 율법에 불순종한 범죄의 죗값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은 능동적 순종인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인류의 죄를 덮으신 사죄를 통해 인류와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한 그의 수동적 순종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의는 오직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내셨기 때문에 하나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받는 이신칭의만이 참된 의임을 확인하였다. 그다음 5:12-21에 대한 주석을 통해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가 각각 인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었는가를 살펴보고, 그리스도는 자신의 능동적인 십자가 순종을 통해 아담의 능동적 불순종이 가져온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훨씬 더 나은 의와 생명을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말하자면 그리스도는 그의 순종을 통해 우리에게 첫 아담이나 첫 창조로의 복귀가 아닌 훨씬 더 뛰어넘는 새사람과 새 창조를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의 수동적 순종의 최고의 표현(3)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능동적 순종의 최고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8:1-4에 대한 주석을 통해 율법의 역할이 무엇이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율법을 어떻게 성취하셨으며, 그리스도가 성취한 율법이 신자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살펴보았다. 필자는 주석을 통해 율법은 처음부터 의와 구원의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에 합당한 삶, 곧 온전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밝혔다. 동시에 인류가 율법을 어겨 죄와 사망에 빠졌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건을 통해 온전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심으로 모든 율법을 성취하셨다는 사실과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가 성취한 그 사랑을 구현함으로써 사랑의 새 계명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끝으로 한마디 부언한다. 필자는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남겨준 개혁신앙의 유산을 매우 소중하게, 그리고 감사하게 여기고, 당연히 그 유지에 힘써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베뢰아 사람들이 그들에게 전하여 준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았지만, 또한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던 것(17:11)처럼, 우리가 받은 소중한 유산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다시 한번 부지런히 살펴보고 확인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오늘 성경학자들은 과거의 선배들보다 훨씬 더 좋은 환경에 있다. 새롭게 발견된 수많은 고대의 유산, 엄청난 연구와 자료를 과거에 없었던 다양한 매체를 통해 쉽고 신속하게 접근할 수 있다. 이들은 실로 우리에게 준 하나님의 축복이요, 선물이다. 따라서 이제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분들이 앞장서서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한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살펴봄으로써 최근의 논란을 속히 잠재울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인위적인 접근이 아닌, 통합적인(holistic) 접근을 한다면,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전체 생애를 인위적으로 십자가 이전의 능동적 순종과 십자가 사건의 수동적 순종으로 구분하지 말고 십자가 사건을 포함하여 그리스도 생애 전체를 능동적, 수동적 양면으로 보는 것이다. 복음서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역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한 그의 수동적 순종이 아닌 것이 있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죗값을 위해 우리 대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신 능동적 순종이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하여 성경을 통합적으로 접근하고 해석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선배 개혁자들이 내세운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전체 성경으로”(tota Scriptura), “항상 개혁”(semper reformanda)을 실천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긴 글을 읽어주신 독자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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