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교회포럼(대표회장 권오헌 목사) 2022 전국대회가 125일 서울제일교회(담임 김동춘 목사) 예배당에서 개최되었다. 대표회장 권오헌 목사가 환영사를 하고 직전 회장 오병욱 목사가 기도함으로 포럼이 시작되었다.

발제하는 양낙흥 교수
발제하는 양낙흥 교수

김동춘 목사의 사회로 첫 번째 발제가 시작되었다. 발제자 양낙흥 교수는 고신 70년과 사회라는 제목의 발제를 통해 지난 70년간 고신 교단의 사회적 스탠스를 시대별로 정리하며 비평했다. 아래 발제문 전문.

 


고신 70년과 사회

양낙흥

고신 70년과 사회라는 제목의 발제를 부탁받고 처음 내 마음에 떠올랐던 반응은 고신에도 기독교와 사회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나? 그나마 다행이다하는 것이었다. 필자가 신대원에 근무한 30년 가까이 무수한 고신 목사들이 와서 경건회, 입학식, 졸업식, 개강 집회 등에 초청받아 와서 집회 말미에 축도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의 축도는 한결같이 신대원, 고신대학, 복음 병원, 그리고 고신 교회 위에 성삼위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기원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다가 코로나 기간 중 합동측 서울 강남의 어느 교회 예배에 영상으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 주일 예배가 끝날 때 들은 그 교회 목사의 축도에는 합동 교단에 대한 언급 대신 조국 교회와 조국 사회, 그리고 세계 교회와 세계 열방이 포함되었다.

고신 목사들은 관심과 시야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전체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관심사가 온 세계와 한국 사회 전체는 고사하고 하다 못해 한국 교회 전체에까지도 미치지 못하고 오직 고신 교회에 국한되어 있다. 우주는 오직 고신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사고 방식이 고착될 때 어떻게 사회에 대한 교회의 책임이라는 인식이라도 가질 수 있겠는가? 우리는 마땅히 자신이 고신의 창조주의 종이 아니라 온 우주와 보편 교회의 창조주의 자녀들이라는 성경적 자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들어가는 말

80년대 말 미국에 유학을 가기 며칠 전에 친한 친구를 한 사람 만나 작별 인사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친구는 중고대학 동창으로 대학 새내기 때 내가 인도해서 우리 교회 대학부에도 한동안 다닌 적이 있었으나 몇 달 못가 그만두고 대학의 운동권 서클에 가입했다. 그러고는 졸업반 때 시위를 주동하다가 제적을 당하고 감옥에 갔었다. 출국을 앞두고 만난 그 친구가 그 때 내게 했던 한 마디 질문이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한국 기독교가 한국 사회를 위해 한 일이 뭐가 있니?”

그 질문을 받은 나는 이 친구가 기독교를 모르다 보니 기독교인들이 꼭 무슨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일을 해야만 가치있는 역할을 한다고 느끼는 모양이다고 생각하면서 중 1 때 부산의 초량교회 저녁 예배 시간에 있었던 한 가지 장면을 떠올렸다. 어떤 집사 가족이 나와서 특송을 부르는 데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녀 두 명이 샤론의 꽃 예수를 부르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평화롭게 보였었다. 그리고 한 가정으로 하여금 저처럼 화목하고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만들 수 있게 해 주는 복음의 역할이 얼마나 위대한가 생각했다. 우리 집은 어머니는 별 깊은 신앙 없이 그냥 교회 다니는 정도였고 아버지는 아예 교회 근처에도 가지 않는 분이었다. 술담배를 하는 것은 물론 종종 외도를 했다가 가정 불화를 일으켰다. 그런 날 밤이면 밤새 부부 싸움을 하는 바람에 31녀의 어린 우리 형제들은 새벽이 되도록 그 시끄러운 싸움의 와중에서 공포와 고통에 몸서리치면서 지옥같은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어린 시절 이런 기억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나는, 기독교가 남자들로 하여금 바람피우지 않게 하고 자녀들이 가정 불화 없는 화목한 가정에서 상처 입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게 해 주는 것만 해도 그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기여라고 생각했다. 기독교 신앙의 기여가 단지 남자들의 술담배와 외도를 막아 주는 것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을 방탕한 삶으로부터 건전한 삶으로 옮겨가게 한 다른 여러 방식들도 있었다. 옛날에는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는 가장들이 드물지 않게 있었다. 알코올 중독이 되어 상습적으로 아내를 구타하고 자녀들을 학대하는 남자들, 또 입에 쌍욕을 달고 사는 남자들도 종종 있었다. 여자들 중에는 춤바람이 나서 맨날 캬바레 같은 데 드나들다가 제비족을 만나 패가망신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예수 믿고 그런 도박, 불건전한 댄스, 욕설, 알코올 중독, 외도 같은 것들을 안 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만해도 기독교가 가정, 나아가서 사회에 엄청난 간접적 기여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 어릴 적 나의 생각이었고 그런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면 기독교와 교회가 그 정도의 역할만 하면 할 일을 다한 것인가? 그런 식의 간접적 기여만으로도 기독교가 사회적 책임을 충분히 다 한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중등학교 상급 학년이 되어 가면서 사회와 세계에 대한 지식이 증가하고 동시에 교회 교육을 통해 선악에 대한 판단력이 자라면서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는 사실을 점점 더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고신 사람들은 자신들의 존재에 대해 굉장한 높은 평가를 가지고 있다. 신사참배 반대와 그로 인한 희생의 역사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 남들도 그 사실을 그렇게 평가하리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까지 초중고를 부산에서 다녔지만, 나는 단 한번도 고신 교회가 나를 포함한 부산 시민들에게 존재를 부각시켰던 적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타 교단들이나 교파 교회들은 특별한 인상을 부산 지역 사회에 남긴 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단지 타교단에 비해 월등하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 고신 교단을 지역 사회의 이웃들은 왜 그렇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교단이 사회와 국가의 결정적 사건들에 대해 취한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1950-80년대에 걸쳐 독재 정권들이나 정통성이 결여된 군사 정권들이 연속 들어섰을 때 고신 교단을 포함한 대다수 한국 교회가 취했던 태도는 무관심 아니면 불의한 권력에 대한 굴종적 지지 일변도였다.

지난 70년간 고신 교단의 사회적 스탠스를 시대별로 조금 더 자세히 살펴 보도록 하자.

 

50년대의 한국 사회와 고신

1956년 현재 8년을 집권하여 두 번째 임기를 마친 이승만은 당시 헌법의 중임 제한 규정에 의하여 더 이상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수 없었기에 세 번째 출마를 위해, 장기 집권을 꾀하는 독재자들이 흔히 하는 방식대로, 개헌을 시도했다. 국회 투표에서 개헌선인 재적 의원 수의 2/3를 획득하는데 간발의 차이로 실패했으나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와 그의 자유당은 사사오입이라는 불법적이고 억지스러운 방식을 통해 개헌을 강행했다. 그리고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됨으로 세 번째 임기를 시작했지만 정직하게 말하자면 그의 정부의 도덕적 정통성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대한민국 헌성사상 정통성 없는 정부의 첫 번째 케이스가 시작되고 있었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기초인 정부의 합법성이 사라지고 있었던 이 때 고신 교단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주지하다시피, 고려파는 195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독립하여 총노회를 구성하고 4년 후인 1956년 총회를 조직함으로 독자적 교단으로 출범했다. 여러 해 장로교 총회측과 갈등과 대립을 거쳐 이제 겨우 자신들만의 새 교단을 형성한 집단으로서 자체 조직을 정비하기에도 바빴을 터이니 사회와 국가 현실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그 뿐 아니라 출범도 채 하기 전에 내부 균열이 일어나 과연 새 교단이 순항할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야기했다. 1회 고려파 총회로 모이기 직전 영적인 분위기를 고조하기 위해 개최된 부흥회에서 박윤선은 고려파가 고쳐야 할 몇 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했다. 먼저 그는 고려파가 총노회 수준을 벗어나 총회를 구성하는 것보다 시급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체 반성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회개를 도외시하고 총회를 조직하기에만 급급한 내실없는 총회에 속해 있을 수 없기에 고려파로부터 탈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고려신학교 설립 초기부터 교장이자 핵심 교수로서 고려파 설립의 중추적 멤버요 그 존재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해 왔던 지도자가 창립 총회를 목전에 두고 일종의 내부 고발자 같은 양심 선언을 했으니 그런 취약한 상태의 교단이 세속 권력의 불의를 지적하고 비판할 겨를이 있을 리 만무했다.

박윤선은 단지 교단 탈퇴의 제스처만을 취하지 않았다. 정말 그는 57년 초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올라가 독자적으로 개혁신학교라는 학교를 설립했다. 고려신학교 재학생 수십 명도 그를 따라 상경해 버렸다. 고려파 교단의 기초로 여겨지던 고려신학교의 존립 자체가 흔들리는 상태였으니 그런 위태로운 교단이 사회를 걱정하거나 국가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논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60년대의 고신과 사회

1960년대 초는 국가의 격동기였다. 60년 네 번째 대통령 임기에 도전한 이승만 정권의 부정 선거에 반발하여 일어난 4.19 의거, 그리고 그 이듬해인 1961년 사회의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일부 정치 군인들이 일으킨 5. 16 쿠테타를 통해 박정희 소장이 집권한 시대였다. 박정희는 이승만과 꼭 같이 두 번의 임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세 번째 임기에 대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 1969년 삼선 개헌을 시도했다. 진보측 교회 지도자인 김재준 목사를 삼선개헌저지 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장으로 하는 재야 인사들과 지식인들, 야당 정치인들과 대학생들이 반독재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암울한 시대의 서막이었다.

1960년 민족사의 격동기에 고려파를 비롯한 한국 장로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1950년대 후반 한국 장로교 주류인 총회측은 에큐메니칼측과 NAE 양측으로 나뉘어져 갈등과 대립을 이어가고 있었다. 결국 1958-9년 총회는 승동측과 연동측으로 분열되어 세칭 합동측통합측이라는 장로교단을 각각 조직했다. 미북장로교, 남장로교, 카나다 장로교, 호주 장로교 등 모든 재한 장로교 선교부에 의해 외면당하고 국제적으로 고립된 승동측은 1960년 고려파에 합동을 제의했다. 박윤선 교수의 두 번째 상실 이후 맞이한 위기를 타개할 길을 찾고 있던 고려파는 기꺼이 합동에 응했다. 그러나 채 1, 2년도 지나기 전에 노회와 총회, 이사회 등의 요직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등의 불만으로 가득차 있던 구 고려파 목사들은 3년만인 63년 합동을 깨고 다시 합동된 교단을 뛰쳐 나와 독자적 교단, 세칭 고신을 조직했다.

환원이라고 자칭하는 그 사건 후에는 교단 최고 지도자 두 사람이 몇 년의 시차를 두고 번갈아 가며 거의 동일하게 불법적이거나 비양심적인 일들을 자행했다. 67년 한상동 목사 편에서는 학교법인 고려학원에 대한 정부 인가를 얻기 위해 가짜 이사회를 날조하여 이사회록을 허위 작성하는 소위 私租 이사회 사건을 일으켰다. 그것은 단지 비윤리적 수준이 아니라 상식과 일반인들의 양심, 심지어 실정법을 범하는 수준의 심각한 불법이었다. 세속 정부의 인정을 획득하기 위해 불법적 수단까지 동원하는 것은 불신자들도 감히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때 출옥성도의 영성은 심각하게 변질되어 있었다는 지적은 부인할 수 없이 정확해 보인다. “순교 신앙,” “생활의 순결,” “진리 운동을 위한 일사각오를 신학교 설립의 모토로 내걸었던 그룹이 바로 그 신학교의 정부 인가를 얻기 위해 이런 대담한 편법 내지 탈법을 자행한다는 것은 범인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70년대의 한국 사회와 고신

1972년 가을 박정희 대통령이 10월 유신을 단행했다. 이어서 통과시킨 유신 헌법의 내용은 한 마디로 박정희의 영구 집권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민주주의의 본산지 미국 헌법을 거의 그대로 본따 만들었던 초대 헌법은 그 본질적 내용이 거의 다 파괴되고 형해만 남은 기형적인 것이 되었다. 본래의 헌법에을 중고등학교에서 제대로 배웠던 사람들이라면 박정희의 유신 헌법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최소한 20년 후퇴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70년대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암울하고 비참했던 세월이었다. 그 때는 국민의 기본권들과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이 사정없이 유린되던 시절이었다. 얼마나 많은 젊은 대학생들, 재야 인사들, 정의감 있는 종교인들이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인권을 되찾기 위해 투쟁하다가 혹은 목숨을 잃고 혹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거나 투옥되어 몇 년 혹은 몇 십년씩 감옥에서 인생을 허비해야 했는지 모른다.

이런 역사를 생각하면 현재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추구한다 하면서 동시에 박정희를 찬양 미화하는 데 앞장서는 어떤 언론들은 전혀 신뢰할만한 부류들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가장 기본적인 논리에서 자가당착을 범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끼지도 못한다. 그들이 정말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있다면 현대사에서 그것을 가장 결정적으로 파괴하고 후퇴시킨 박정희를 결코 찬양할 수 없다. 특별히, 물질적 가치보다는 정신적 영적 가치를 훨씬 귀하게 여기는 그리스도인들로서는, 경제 발전에 대한 박정희의 기여를 일정 부분 인정한다 하더라도, 총체적으로는 그의 공보다 과가 훨씬 크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인권, 자유, 민주주의라는 기독교적 가치를 처참하게 파괴하고 그 과정에서 많은 무죄한 피를 흘린 과오에 비하면 물질적 소득 수준의 향상이라는 공로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추구하는 종교이다.

한국 사회에서 박정희 일인 독재를 위한 유신이 한참 진행되고 있던 무렵인 1970년대 초 고신에서 일어났던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이었는가? 1972년 송상석 목사는 고려신학교의 이사장직을 억지로 연장하기 위해 이전의 한상동 목사와 꼭 같은 방식으로 불법 이사회와 이사회록을 날조했다. 이에 대한 한목사측의 공격은 결국 1974년 송상석 목사의 목사직 박탈로 연결되었고 그것은 1976년 반고소 고려파 교단의 분리로 귀결되었다. 이런 형편의 교회가 국가 권력자의 불법과 불의를 비판하는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애당초 그런 것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그런 사명에 대한 관심도 없었다.

 

80년대 한국 사회와 고신

197910. 26으로 영원할 것 같았던 박정희 정권이 심복 김재규 중정부장의 총탄에 쓰러졌다. 80년에는 서울의 봄이 찾아 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5. 18로 인해 그것은 속단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박정희의 정치적 아들이라는 전두환 보안 사령관이 국보위원장이 되면서 삼청 교육대 등으로 상징되는 군부 독재의 철권 통치는 더 강화되었다. 통일주최국민회의라는 허수아비 단체를 통한 대통령 간선제를 이용하여 전두환은 7년이라는 기나긴 집권 기간을 누렸다. 그러나 시민들이 절망적이라 느꼈던 것은 전두환의 집권이 끝난다 하더라도 대통령 간선제 헌법이 다시 유신 이전의 직선제로 바뀌지 않는 한 군부 독재가 종식될 가능성은 전무하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중산층을 포함한 시민들과 재야 세력, 그리고 반정부 인사들은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을 요구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나라는 백척간두의 위기에 빠졌다. 서울대생들이 도서관에서 농성 시위를 하다가 5층에서 분신을 하고 뛰어 내려 죽었다는 기사도 보도되었다. 생각있는 시민들의 눈에 국가는 풍전등화와 같았다. 이런 때 북한이 침공해 온다면 패전과 공산화는 명약관화의 사실이었다. 교회들은 모두 문을 닫아야 할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은 배교를 요구당하고 순응하든지 아니면 순교해야 할 것이었다. 신학교니 신학 교육이니 목사 양성이니 하는 것도 물론 불가능해질 상황이었다. 조금만 사고할 수 있는 신자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실제적 가능성이었다.

그리하여 서울대, 연고대 등 서울 소재의 대학들을 필두로 지방 국립 대학, 나중에는 장신대, 한신대 등 신학대학을 포함한 전국 대학 교수들이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연이어 발표했다. 교수들의 성명이 끝나자 이번에는 서울대에서부터 전국 대학원생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성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근처의 부산대학원생들도 성명을 내고 급기야는 장신대 신대원생들이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완강하게 직선제 개헌을 반대하며 소위 호헌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직선제로는 도저히 군 출신 후보를 자기 후임으로 당선시킴으로 퇴임 후를 보장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두환 정권과 시민들이 정면 충돌하고 있었다. 소위 서울 시청 앞과 광화문에 넥타이 부대가 등장하여 대학생들의 시위에 동참함으로 전두환 정권이 결국 무릎을 꿇고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기 직전이었다.

당시 신대원 3학년이었던 나는 이럴 때 그리스도인들, 특히 고등 교육을 받고 있는 교회 지도자들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동시에 신학적으로 교단의 최고 지도자들인 우리 신대원 교수들은 과연 이런 상황에서 수업에 들어와 무슨 말을 하며 어떤 행동을 취하는가를 주의깊게 관찰했다. 놀라왔던 것은 우리 교수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시국에 대해 단 한 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지금 자기 조국이 망하기 일보 직전처럼 보이는 어지럽고 위험한 상황인데도 그들은 입이 무거워서였는지 아니면 국가나 사회 문제는 기독교 신앙과 무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양심적인 발언 한 마디 하다가 서슬퍼런 군부 독재 정권 하에서 크게 다치고 불이익을 당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인지 일체 모른척하고 침묵을 지켰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바였지만 이건 너무하다 싶었다. 보수 신학은 민족의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조차 침묵하고 외면하는 태도를 가르치는가? 정교분리라는 말은 이런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반응하라는 의미인가? 개혁주의 신학은 민족과 국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는 것인가? 참된 경건은 자기가 속한 사회의 운명에 대해 아무 관심도 갖지 않는 것인가?

그러한 상황 속에서 우발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시국에 신대원생들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인가를 토론하기 위해 고려신학대학원 학생들 거의 전원이 자발적으로 점심 시간을 이용해 강당에 모였다. 예상보다 학생들의 참여와 발언은 다양하고 뜨거웠다. 점심 시간이 끝나고 오후 수업 시작 시간이 되어도 발언자들의 행렬이 끊어지지 않았다. 그 때 신대원장이 당시 그 모임을 주도했던 나를 포함한 학생들 다섯 명을 원장실로 호출했다. 원장 이하 아마도 당시 보직 교수들 여러 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본 원장의 선언은, 지금 당장 해산하고 교실로 돌아가지 않으면 행정조치하겠다는 것이었다. 학생 대표들은 평상시 같으면 당연히 수업을 최우선시해야 하겠지만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 있는 이런 특별한 때에는 일상적 수업보다 더 우선적으로 중요한 일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잠시만 시간을 더 주면 토론을 마치고 들어가겠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원장을 비롯한 학교측의 입장은 완강했다. 무조건 즉각 해산하지 않으면 처벌하겠다는 것이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을 느낀 대표들은 강당으로 돌아가 학생들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교수들의 위협이 통했는지 다수는 해산하는 데 동의했다. 이것이 개혁주의 전통인가 하는 의문과 함께 고신의 역사 의식과 사회정치적 양심에 대한 깊은 회의를 가지게 된 결정적 순간이었다.

다음날 수업에 들어온 모 교수는 다짜고짜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이니 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한신이나 감신으로 가라!” 하면서 전 날 학생들의 시국 토론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다. 분개한 나는 일어나 질문했다. “교수님, 저는 개혁주의 신학의 자랑스런 전통은 바로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시국 문제에 대한 기독교인의 올바른 반응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지는 것이 소속 학교를 옮겨야 할만큼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만일 교수님의 생각이 개혁주의 전통과 다르다면 교수님이 다른 학교로 옮겨 가시겠습니까? ” 그는 잠시 주저하다가 손을 휘두르면서 , 옮겨가지. 내가 이 놈의 학교에 무슨 미련이 있다고. . . .” 했다. 이 해프닝은 고신의 사회관과 정치관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인 사건이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후일 나로 하여금 박사 과정에서 개혁주의 사회 윤리와 한국 장로교회라는 주제의 논문을 쓰게 한 결정적 계기였다. 그 글은 좁게는 한국 장로교에서, 넓게는 한국 복음주의 진영 전체에서 최초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칼빈주의 이론을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그 주제에 대한 한국 장로교회의 이론과 실천 100년과 비교 분석한 논문이었다. 결론은 한국 장로교회는 그 점에서 개혁주의 전통과는 결정적으로 반대되는 입장을 취해 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롬13:1-7절에 대한 오해, 정교분리 내지 교회와 국가의 분리(separation of the Church and the State)의 역사적 기원과 그 취지에 대한 무지, 재세례파적 정치관 등에 있다고 분석했다.

예를 들어, 7, 80년대에 불의한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한 선지자적 비판의 책임이 교회와 목사들에게 있다는 말을 들을 때 보수 교회 지도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 반론은 정교분리, 즉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하기 때문에 목사들은 정치 문제에 대해 일체의 언급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미국 수정 헌법에 나와 있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원칙을 오해한 것이었는데 그 원칙의 정신은 교회와 설교자들의 선지자적 사명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국교 수립, 혹은 국가에 의한 특정 기독교파의 후원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당시 정교분리라는 명분이 보수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단지 선지자적 역할을 회피하기 위한 핑계로 악용되었을 뿐이라는 점은 2000년대 이후 대한민국의 민주화가 완성된 이후 일부 극우적 목사들이 선량하고 양심적인 민주 정부를 마음대로 비난하고 극렬하게 반대하는 행동들에 의해 증명되었다.

 

민주주의 형성에 개혁주의 전통이 미친 영향

여기서 고신을 비롯한 한국의 보수 장로교인들이 입버릇처럼 외치면서 내세우고 자랑하는 개혁주의 혹은 칼빈주의 사상이 역사적으로 어떤 정치적 태도를 견지해 왔는지, 더 구체적으로, 칼빈주의자들이 민주주의 사상의 확립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잠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신 교회들이 취했고 지금도 다수가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정치적 노선은 개혁주의 전통에 정면 반대되는 것이다. 특히 정치적 목소리를 높이고 선명한 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나이든 고신 목회자들 상당수는, 정치 사상에 있어, 자신들이 그처럼 열렬히 지지한다고 하는 개혁주의 전통의 그것을 부정하는 입장에 서 있다.

역사적으로 민주주의 이론의 수립에 가장 앞장 섰던 것은 다른 어느 신학 전통보다 칼빈주의였다. 민주주의의 몇 가지 사상적 기초는 문자 그대로 국민 주권, 언약 사상에서 비롯된 사회계약설, 부당한 국가 권력에 대한 국민 저항권 등이다. 거기서 파생된 것이 전 세계 민주 국가 헌법의 기본권에 포함되어 있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학문의 자유 등 정치적 자유를 포함한 천부 인권설, 인간 본성의 부패 교리에 기초한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신념, 또 거기서 비롯된 삼권 분립을 통한 견제와 균형 이론 등이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토대를 이루는 이러한 정치 사상들의 확립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들은 칼빈, 그의 제네바 후계자 데오도르 베자, 스코틀란드의 종교개혁가 존 낙스, 사무엘 러드포드, John Ponet, Christopher Goodman, John Milton을 비롯한 영국 청교도 목사들, 프랑스의 위그노 Mornay 등 칼빈주의자들이었다. 그리하여, 역사가들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칼빈주의가 들어간 나라마다 전제 정치를 민주정으로 바꾸는 혁명이 일어났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 미국 청교도들과 장로교도 같은 칼빈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미국 독립 혁명, 프랑스의 칼빈주의자들인 위그노 혁명, 네델란드 칼빈주의자들에 의한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전쟁 등이 그것이다.

칼빈은 교회의 기본 사명 중 하나가 권세자들이 탈선할 때 그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에스겔 3:17-18에 있는 대로 설교자들은 교회에서 파수꾼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이었다. 모든 목사들은 하나님에 의해 파수대 위에 세움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공동체의 안전을 위한 파수를 보기 위해서였다. 칼빈은 모든 통치자들이 성경의 관점에서 제시되는 설교자의 비평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왕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낸 칼빈의 편지는 파수꾼의 사명이 교회의 선포의 의무에 속한다는 칼빈의 확신을 보여주는 많은 예들 가운데 하나이다. 칼빈은 설교자의 권위를 얼마나 높이 생각했던지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근거해서 최고 권력자들과 국가를 책망할 수 있을 정도의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외쳤다. 하나님이 선지자들과 교사들을 민족들과 나라들 위에세우시고 당신의 말씀을 그들의 입술에 두기 때문에(1:9-10) “설교자들은 언제든지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 왕들과 민족들을 과감히 꾸짖을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지자들이… 주로 지도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던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지도급 인사들에게 더 많은

책임이 있었기 때문에 선지자들은 그들을 더 신랄하고 엄하게

다루었다. … 지도급 인사들은 정의와 공평을 무너뜨리고 모든

종류의 방자함의 원천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는 자기의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을 그토록 날카롭게 꾸짖으셨다.

 

현대 대부분의 민주 국가들이 헌법을 통해 국민의 기본권들 중 하나로 인정하고 있는 (불의한 권력에 대한) 것은 저항권 사상이다. 그것은 국민이 주권자라는 민주주의 사상의 핵심적 기초들 중 하나이다. 그런데 그 저항권 사상은 역사상 주로 칼빈주의자들에 의해 발전되고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칼빈의 제자로서 스코틀란드에서 최초의 성공적 칼빈주의 혁명을 일으킨 사람으로 평가받는 존 낙스는 폭군의 불의한 명령에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불의한 권력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자는 하나님의 상을 받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폭군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침범하거나 무죄한 사람들을 억압할 때 신자들은 그에게 순종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은 폭군들에게 불순종하는 자들을 인정하시고크게 상주신다.” 그런데 한국 보수 교회는 폭군들에게는 순종하고 합법적인 통치자들에게는 대담하게 반발하는 성향이 있어 보인다.

데오도르 베자는 폭군들을 두 종류로 분류했다. 하나는 찬탈자이고 다른 하나는 권력 남용자였다. 베자는 전자와 후자가 완전히 다른 경우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백성들은 찬탈자에 대해서는 어떤 의무도 지지 않고” “어떤 식으로도 복속되지 않기때문이었다. 베자는 심지어 찬탈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이후라도 찬탈자는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쿠테타는 찬탈의 전형적 방식이므로 성공한 쿠테타의 주역이라도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폭군이 찬탈자의 범주에 속한다면 그에 대한 저항의 책임은 일차적으로 관원들에게 있다. 그러나 만일 관원들이 찬탈을 묵인함으로써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사사로운 시민들이라도 온 힘을 다해 자기 나라의 정당한 제도를 수호해야 하며그 권력이 합법적이지 않은 자들에게 저항해야 한다.” 이미 수 백년 전에 칼빈주의 조상들은 충격적일 정도로 급진적인 정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장로교 목사로서 웨스트민스터 회의 (1643-7)에 참석했던 스코틀랜드 대표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던 유명한 사무엘 러드포드(Samuel Rutherford: 1600-61)1644년에 출판된 「법과 왕(Lex Rex or The Law and the Prince)」에서 국가의 비성경적 행위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를 논했다. 그 책에서 그는 17세기 유럽의 정부 기초가 되었던 왕권신수설을 공격했기 때문에 그 책은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금서가 되었고 스코틀랜드 의회는 러드포드를 내란 죄목으로 사형에 처하기로 결의했다. 그가 처형당하지 않았던 것은 체포되기 전에 먼저 사망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문자 그대로 국민 주권 사상인데 청교도들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애초에 국민들을 통해서 통치자들에게 권력을 위임하셨다는 성경 계시에 근거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처음에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으셨지만 훗날 백성들의 추대에 의해 실제 왕으로 등극했다는 사실을 사무엘서는 기록하고 있다. 즉 모든 권세는 본래 하나님의 것이지만 하나님이 지상에 그것을 주실 때는 권력자들에게 바로 주신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먼저 주셨다. 그래서 지상에서는 국민이 주권자이지만 모든 백성이 다 직접 국가 통치에 참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그것을 왕이나 통치자들에게 위임하여 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주권을 행사한다. 천상에서 권력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지만 지상에서 권력의 첫 번째 좌소(seat) 혹은 수령자는(receptacle) 백성들이라는 것이다.

유명한 작가 청교도 밀턴 (John Milton)은 이렇게 말했다. 왕과 방백들의 권력은 단지 파생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백성들이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왕과 방백에게 위탁해 놓은 것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이므로 그것을 그들로부터 빼앗는 것은 그들의 천부적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사실은 그보다 이미 한 세기 전에 청교도 목사들은 밀턴과 꼭 같은 주장을 하고 있었다. 존 낙스의 친구였던 크리스토퍼 굳맨 (Christopher Goodman)은 그의 논문 <위에 있는 권세에게 어떻게 순복해야 하는가?(How Superior Powers Ought to be Obeyed)>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왕이나 통치자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백성들의 압제자, 살해자가 되면 그들은 더 이상 왕이나 적법한 방백들로 간주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사사로운 개인들로 심사되고 고발당해 하나님의 법에 따라 처벌되어야 한다. 그들은 그 법 아래에 있으며 또 있어야 한다. 그 법에 의해 그들이 유죄 선고를 받고 처벌될 때 그것은 사람 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다.

민주주의의 핵심 사상들 중 또 하나는 사회 계약 사상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청교도들의 언약 사상의 세속적 버전이다. 하나님, , 백성 사이에 상호 언약이 존재한다는 것이 존 낙스 같은 장로교 창시자의 근본 사상이었는데 거기서 하나님이라는 요소를 빼버리면 치자와 피치자 사이의 언약만 남는다. 그 양자 사이의 언약에 초점을 맞춘 것이 존 로크의 사회 계약 사상이다.

정치권력에 대한 복종의 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에도 무수한 저서들을 통해 널리 알려진 저명한 개혁주의 사상가 프란시스 쉐퍼는 하한선이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하한선이란 국가에 불복종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가 발생하는 지점이다. 그는 사무엘 러드포드의 「법과 왕」을 읽고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다. 「법과 왕」의 결정적 영향 하에 집필한 「그리스도인의 성명 (A Christian Manifesto)」에서 프란시스 쉐퍼는 그리스도인들이 무력 사용을 위한 정당한 조건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만일 무력 사용을 위한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그리고 그것을 과용하지 않도록 끊임없는 주의를 기울인다면 어떤 시점에서 무력 사용은 정당화된다.” 쉐퍼는 단지 국가만 무력을 합법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한 순진한생각은 국가가 전체주의적 경향을 띠게 될 때 우리로 하여금 속수무책이 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한선이 필요하다. “시민 불복종을 위한 최후의 선이 없을 때 정부는 독재적이 되고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프란시스 쉐퍼는 1776년의 미국 독립 선언에 존 낙스와 사무엘 러드포드의 종교개혁 사상의 여러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에 대한 저항을 논의할 때는 그것을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선언은 억압적 정부에 대한 시민의 의무를 직접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권리라는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이 선언은, 정부가 그 권리들을 파괴할 시에는 어느 때라도 그 정부를 바꾸고 타도하여 새 정부를 수립하고 자신들의 안전과 행복을 확보하는 것이 국민의 권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또한 미국독립선언서는 수립된 정부를 사소하고 일시적인 이유로 바꾸거나 타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오직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국가를 만들려는 여러 종류의 남용과 찬탈(a long train of abuses and usurpations)”이 있을 때에 비로소 그런 정부를 전복시키는 것이 국민들의 의무요 권리라는 말이었다. 만일 미 건국의 아버지들이 하한선이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면 미국은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쉐퍼는 주장했다.

그런데 50-80년대 고신을 포함한 한국 보수 교회는 폭군적 통치자들과 독재자들에게 맹종 내지 굴종하고 그들을 미화 찬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결과 한국 보수 장로교회 다수는 자신들의 민주적 전통을 배반하고 가장 수구적인 정치적 성향을 가진 집단이 되어 버렸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사사오입 개헌이나 3.15 부정 선거, 박정희, 전두환 등 쿠테타를 통해 집권했던 군인들이 삼선 개헌, 유신 헌법 같은 것들을 통해 헌정 질서를 파괴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하던 그 시대야말로 한국 장로교회가 개혁주의 전통을 따라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할 때였었다. 그런 시대에 교회는 칼빈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무게를 실어 불의한 권력을 준엄히 책망하고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어야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때 한국의 보수 교회들은 철저히 침묵하거나 아니면 앞서 살펴본 바처럼 오히려 그 불의한 권력들을 지지하고 비호했다.

 

90년대 이후 극우화되는 한국 보수 교회들

이처럼 자신들의 선지자적 전통과 개혁주의 전통 전부를 배신했던 한국의 보수 장로교회들은 엉뚱하게도 민주주의가 만개된 2000년 이후에 수립된 정부들에 대해 과격한 반대와비판을 퍼붓기 시작했다. 정말 정의의 소리를 발해야 했던 독재 정권 시절에는 단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던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이제 완벽하게 보장된 언론의 자유를 남용하여 민주적 정부들을 향해 공격적 발언들을 마음대로 쏟아 놓기 시작했다. 민주 투사들의 피로 획득된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오용하여, 그것을 얻는 데 기여는 커녕 오히려 방해했던 이들이 적극적인 정치적 발언을 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념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즉 어떤 세력이 대한민국을 공산화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이 나라를 종북 좌파, 혹은 주사파 빨갱이의 손에서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과연 이러한 주장은 근거가 있는 정확한 지적이었는가 아니면 어떤 보수언론들과 가짜 뉴스를 양산하는 유튜브들을 비롯한 불순한 기득권 세력의 농간에 넘어간 결과였는가?

여기서 한 가지 명백한 허위와 자가당착을 지적하고자 한다. 어떤 소위 보수언론은 자신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라고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것이 철면피한 거짓말이라 확신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5. 16 쿠테타, 삼선 개헌, 유신 헌법, 긴급조치 등을 통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역사를 수십 년 후퇴시킨 장본인인 박정희를 찬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가당착이다. 자유민주주의와 박정희 양자를 동시에 찬양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필자가 보기에 소위 보수 언론들이 정말 보수하고자 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박정희, 전두환 군사 정권 하에서 수십 년간 구축된 자신들의 기득권이다. 자신들의 이권에 부합되는 한국 사회의 기존 질서를 고수하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참된 관심이지 우리 칼빈주의 선조들이 수백 년 동안 성경을 근거로 수립해 놓은 자유” “인권” “민주주의라는 고상한 가치가 아닌 것이다.

 

과연 한국 사회와 정계에 주사파가 위협적인 정도로 남아 있는가?

혹자는 자신들이 우려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공산화라고 한다. 지금 모 정당에는 종북 좌파 주사파 빨갱이 세력이 가득한데 결코 그런 세력에게 대한민국을 맡길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현재 한국의 지도적 정치인들 중 정말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이 의미있는 수와 세력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군사 정권 때부터의 기득권 정당과 재벌 언론들이 지어낸 주장이라 생각한다. 물론 현재 소위 진보에 속하는 정치인들 중 젊은 시절, 특히 80년대 5. 18 ,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심지어 김일성 주체 사상에 매력을 느끼고 심취했던 이들이 있었던 것 같다. 박정희가 자유민주주의 간판을 걸어 놓고 독재와 반민주, 반인권, 그리고 재벌 위주의 경제 정책을 통해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것을 본 80년대 초의 대학생들이 그런 사이비 자유민주주의를 보고서는 자유민주주의는 저런 것이구나 속단하고 그 반대 이념인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호기심을 가지고 그것을 표방하는 북한 체제를 한 때 동경하고 추종했을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한국의 기형적 현대사가 나은 슬픈 현실이었다. 박정희가 허울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한국에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했었더라면 어린 대학생들 사이에 북한에 대한 그런 환상적 동경이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불행 중 다행으로 그 때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은 80년대 말 동구와 소련의 공산주의 정권들이 붕괴함으로, 그리고 이어서 여러 경로를 통해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북한의 처참한 실상을 접할 기회를 가졌던 젊은 한 때의 북한 체제 흠모자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북한 사회에 대한 동경이 환상이었음을 깨닫고 사상 전향을 했을 것이라 본다. 아직도 현실을 외면하고 여전히 주사파나 공산주의자로 남아 있는 정치인이 혹시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소수일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2000년 이후 소위 진보정권이 무려 15년이나 집권했지만 한국 사회는 공산화와는 전혀 무관한 행보를 보였다. 앞으로도 그 가능성은 전무해 보인다. 이미 선진국으로 분류될 정도의 나라에서 거의 무제한적인 자유와 풍요를 누리는 데 익숙해진 남한 백성이 북한처럼 질식할 것 같은 통제, 개인 우상화, 왕조 시대보다 더 권위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억압적 체제를 용인할 가능성은 제로이다.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언론, 정치인, 지식인들이 현재 남한 정치 지도자들 중 주사파나 종북 좌파가 상당히 있다느니, 그들에 의해 대한민국이 공산화될 위험성이 있다느니 주장하는 것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단순 무지한 백성들의 두려움을 이용하는 것이라 본다.

 

기독교적 정의는 약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

하나님은 정의를 사랑하신다. “대저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며. . . ”(61:8). 그리고 정의를 행하라고 명하신다. “공평(mispat)을 지키며 (sedaqah)를 행하라”(56:1). 구약의 선지자들은 한결같이 공의를 강조했다.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5:15).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5:24). “공평(mishap)정의(sedaqah)를 행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22:3l 참고. 7:5-6). 공의는 예배와 제사 같은 종교적 형식보다 더 중요하다.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구하시는 것이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으로 제사를 드리거나 태의 열매맏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6:6-8). 여호와께서는 제사보다 (sedaqah)와 공평(mishap)을 행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은 구약의 중심되는 가르침 가운데 하나였다(21:3). 이처럼 성경적 윤리는 정의를 행하라는 것이며 정의는 불의한 강자들의 횡포로부터 약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기독교 하나님은 과부, 고아, 외국인 같은 약자들의 보호에 관심을 가진다. 강자들의 이권을 더욱 강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과 노선이 아니다.

고전적으로 정의의 의미는 각 사람에게 본래의 자기 몫one’s own due을 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이들이 자기 몫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어떤 이들은 그 이상을 챙기는가? 약자가 강자의 권리를 희생시켜 자기 몫 이상을 가져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의가 구현되지 않을 때 그 희생자는 항상 약자들이다. 그러므로 정의를 행한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약자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회복시켜 주는 것이다. 강자의 횡포로부터 약자들의 몫을 보전해 주기 위한 노력이 정의이다. 그런데 정의를 구현할 수단으로 하나님이 지상에 주신 가장 중요한 수단은 국가요 정부이다.

기독교의 경제적 관심은 어려운 자들을 도와 그들이 생존 내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관심이요 성경의 관심이다. 그런데 한국 보수 교회는 주로 강자들과 가진 자들을 더 강하고 부유하게 하는 정당이나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반성경적이고 반기독교적이다. 특히 많은 대형교회들과 그 지도자들이 그러하다. 그들 역시 기성 질서가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진보와 보수의 문제

그 내용을 알고서 그러는 것이든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표방하는 것이든, 현재 대한민국은 명분상 보수와 진보로 양극화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진보가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보수의 편에 서야 하는가? 사안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고 본다. 이를테면 크리스챤으로서 나는 낙태, 동성애, 동성 결혼, 동성애자 안수를 반대하는 점에서 보수이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 특히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종교와 사상과 학문의 자유를 불가양의 천부 인권으로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누구보다 강력한 자유주의자이다.

그러나 경제적 자유에 대해서는 좀 다르다. 기본적으로 경제 활동의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믿지만 경제적 양극화를 심화시켜 결국에는 전 인류를 공멸로 이끌 정도의 무분별한 경제 활동의 자유는 제한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회의 건강과 존립을 위협할 정도의 자유에는 국가가 일정한 개입을 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것이다. 자유는 무제한적인 것이 아니다. 바울 사도도 자신이 누리는 자유가 형제를 실족케 할 위험성이 있다면 기꺼이 그 자유를 포기하겠다 하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명했다. 우리는 자유하나 그 자유로 육신의 기회를 삼지 말고 그 자유를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한국의 재벌 언론들을 비롯한 소위 보수 언론이나 자칭 보수주의자들의 목표가 진정으로 보수의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것인가에 대해 나는 심히 회의적이다. 미국의 보수는 생명의 가치를 위해 낙태를 반대하고 전통적인 결혼과 가정을 지키고자 한다. 이른바 “family value”를 고수하고자 하는 보수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의 존엄성과 결혼 및 가정 같은 성경적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보수주의자들을 나는 존경하겠다. 그러나 한국의 자칭 보수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성경적 가치가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시켜 주는 불의한 기존 사회경제적 질서인 것으로 보인다. 소위 보수 언론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유리하게 형성되어 있는 기존 질서를 보수하여 군사 독재 정권 이래 수십 년간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뱀처럼 지혜로운 판단력을 가지고 거짓 선지자들을 삼갈 필요가 있다.

 

결론적 대책

지금까지 지난 70년간 고신을 비롯한 한국의 보수 교회들이 한국 사회와 정치 현실 속에서 얼마나 역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했는가를 살펴 보았다. 그들이 불의한 권력을 책망했던 엘리야, 미가야, 나단 선지자의 전통을 올바로 계승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미래에도 동일한 우를 범치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이유의 상당 부분은 현대 사회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역사 의식과 정치사회적 교양의 결핍, 그리고 좁은 세계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향후 고신과 한국 보수 교회들이 한국 사회 속에서 순기능적인 역할을 하기 위한 관건이라 여겨진다.

민주주의는 근대적 제도요 따라서 인류에게 상대적으로 생소한 개념이다. 근대 이전 수천년 동안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정, 군주정이 당연시되었다. 왕권은 신이 부여한 것이라는 왕권신수설이 백성들의 목을 옥죄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전까지는 몇몇 서구의 선진국들을 제외한 지구상의 대부분의 민족들은 민주주의라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민주주의는 사실상 대부분의 나라에 소개된지 100년도 되지 않았다. 심지어 교회마저도, 특히 교황제를 가진 로마 카톨릭 교회는 최근까지도 줄곧 민주정을 정죄하고 군주정을 지지하는 공식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현대 사회에서 교회가 선지자적 역할을 감당하려면 기독교와 사회, 혹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성경적 이해가 필요하다. 특히 개혁주의 전통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역사적 신학적 지식이 있어야 한다. 지나간 과거는 어쩔 수 없지만 다가오는 미래에 한국 장로교회 지도자들이 긍정적인 사회정치적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칼빈주의 선조들이 신학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민주주의의 형성 과정에 어떤 역할을 감당했는가를 배울 필요가 있다. 나아가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정확하고 상당한 지식도 필요하다. 중고대 과정에서 이런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목회자들이라면 개인적 공부와 독서를 통해서 그 부분에 대한 소양을 길러야 한다.

바람직한 것은 신대원 과정에서, 특히 기독교 윤리학 교수들이나 한국 장로교회사를 가르치는 교수들이 목사 후보생들에게 이 점에 대한 특별한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우리 신대원 기독교 윤리학 교육은 필자가 학생이었던 80년대부터 지금까지 40년 이상 주로 개인 윤리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동안 신대원 윤리학 교육이 개인 윤리만 아니라 공적 윤리, 즉 사회 윤리에 대한 소양을 좀더 길러 주었더라면, 그리고 신대원의 다른 교과과정에서도 공공 신학의 차원에 적절한 노력을 기울였더라면 교단 목사들의 사회적 인식은 훨씬 성경적이고 개혁주의적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미주

1) 모 교회사 교수는 어느 글을 통해 70년대 유신 시절, 고신의 대표적 교수 한 사람은 유신 헌법 지지 연설을 하면서 전국을 순회했다고 지적했다.

2) 이승만은 자신의 자유당으로 하여금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만은 중임 제한 규정의 예외가 되게 하자는 헌법 개정안을 제출하게 했다. 헌법에 의하면 헌법 개정을 위해서는 국회의원 재적수의 삼분의 이의 찬성이 필요했다. 그런데 당시 국회의원 재적수가 203명이었기 때문에 산술적으로 그 삼분의 이는 135.3333 … 이었다. 법률적으로 헌법 개정에는 136명의 국회의원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투표 결과는 찬성 135에 반대가 60이었다. 그리하여 그 제안은 공식적으로 부결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이틀 뒤 여당이 불법을 감행했다. 자유당은 사사오입의 원칙을 적용하여 개헌안이 통과되었다고 억지를 부렸다. 그 결과 이승만은 집권을 연장하게 되었지만 엄격히 말한다면 이승만 정권의 도덕적 정통성은 이 때 이미 상실되었다 할 수 있다.

3) 박윤선, “나의 걸어가는 길,” <파숫군> 61, 19573, p. 15.

4) 1969725일 박정희는 헌법 개정안을 국민 투표에 회부하겠다고 공포했다. 그리고는 만일 자신의 개정안이 부결되면 그것을 자신에 대한 국민의 불신임으로 간주하고 즉시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고 공언했다. 야당 정치인들과 반체제 지식인들은 김재준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고 함석헌, 박형규 목사 등의 진보적 교계 지도자들을 포함한 삼선 개헌 저지 범국민 투쟁 위원회를 조직했다. 그 해 815일 동 위원회는 삼선 개헌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주요 일간지들에 발표하여 교회가 불의를 공격하고 정의의 편에 섬으로써 선지자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92, 그 성명이 발표된 일주일 후, 보수 교회에 속한 242명의 목사들이 개헌 문제와 양심 자유 선언이라는 반박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김재준 등의 성명서가 순진하고 선량한 뭇 성도들의 양심에 혼란을 일으키는 선동적 행위라고 비난하면서 교회는 정교 분리의 원칙에 따라 정치적 문제에 대해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의 구현을 그 본연의 사명으로 하는 정부가 법의 정신에 역행하는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정치적인 문제이면 교회는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과 며칠 뒤 보수 교단 지도자들도 진보 교단의 지도자들 못지 않게 정치적임이 드러났다. 242인의 성명이 있은 사흘 후 그 242인 중에 포함된 박형룡, 박윤선, 조용기, 김준곤, 김장환 그리고 김윤찬 목사 등의 보수 교단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대한기독교연합회라는 단체가 개헌에 대한 우리의 소신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 성명에서 그들은 개헌 문제에 대한 박 대통령의 용단을 환영하고 오늘과 같은 국제 정세나 국내 시국에서는 강력한 영도력을 지닌 지도 체제가 있어야한다고 주장했다.

5) 19711017일 박정희는 돌연 대통령 특별 선언을 통해 헌법의 일부 조항들의 효력을 정지시키면서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 활동과 정당 활동을 금하는 한편 비상 계엄을 선포했다. 그 날부터 정치적 목적의 집회와 시위가 금지되고, 언론은 사전 검열을 통과해야 했으며, 대학들은 휴교에 들어갔다. 열흘 후 헌법 개정안이 비상국무회의에 의해 공포되었는데 그 핵심은 한마디로 한 사람, 즉 박정희의 권력을 영구화, 그리고 절대화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유신 헌법이라고 불리우게 된 이 헌법안에 의하면 대통령은 국회 해산권, 국회의원 총수의 삼분의 일 지명권 등을 비롯하여 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게 되어 있었다. 대통령의 임기는 4년에서 6년으로 연장되었다.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그 개정안에서는 대통령의 중임 제한이 철폐되었다는 것이었다. 또한 대통령은 헌법 개정안 제출권과 함께 긴급 조치권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에 의해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제한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이 헌법은 대통령에게 봉건 시대의 전제 군주와 같은 권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유신 헌법에는 박정희가 대통령 선거에서 확실하고도 간단하게 승리하게 하기 위한 장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사실상의 허수아비 기구였다. 박정희는 이것이 남북 통일의 길을 모색하기 위한 기구라고 언명했다. 전국 1,630 선거구에서 투표로 선출된 2,359명의 대표로 구성될 통일주최국민회의에 맡겨진 실질적 역할은 집권당이 내세운 대통령 후보를 거의 만장일치로 당선시키는 것이었다. 1971년 직선제하의 대통령 선거에서 가까스로 승리한 박정희는 이제 국민들의 직접 선거를 통한 당선에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대통령 선출 방식을 간선제로 바꿈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던 것이다.

197312월 야당 정치인, 교수, 그리고 진보적 교회 지도자들로 구성된 반체제 인사들은 유신 헌법 개정을 위한 100만인 서명 운동에 착수했다. 그러자 197418일 박 대통령은 이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선포했다. 이 조치에 의해 ① 유신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가 금지되었고, ② 그것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도 금지되었으며, ③ 긴급 조치 1, 2호를 위반한 자와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하여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지게 되었다. 이어서 공포된 긴급조치 4호는 더욱 가관이요 폭력적이었다. 그것은 유신 헌법에 대해 토론하는 것 자체를 중범죄로 처벌한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이것은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권력의 횡포였다.

6) Calvin, Commentaries on the First Twenty Chapters of the Book of the Prophets Ezekiel, trans., Thomas Meyer, (Grand Rapids, Eerdmans) 1:148-9.

7) 《기독교 강요》 IV, xx, 6.

8) Calvin, Commentaries on the Book of the Prophet Jeremiah, trans. and ed. John Owen (Eerdmans, 1950) 1:44.

9) Calvin, Commentaries on the Twelve Minor Prophets, trans. John Owen (Grand Rapids, Eerdmans) vol. 2, Joel, Amos, Obadiah , 363-364.

10) Works, 4:495-6, 490.

11)Theodore Beza, Concerning the Rights of Rulers over their Subjects and the Duty of Subjects toward their Rulers, trans., Henry Louis Gonin, ed., A. H. Murray (Cape Town, 1956),

12) . 「법과 왕」의 핵심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왕권신수설교리는 왕이나 국가는 하나님이 임명하신 대리자로 다스리기 때문에 왕의 말이 곧 법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부의 근거인 법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법에 기초해야 한다. 국가는 하나님의 법의 원리에 따라 통치되어야 한다. 만일 법이 하나님의 법에 기초했다면 모든 인간은, 심지어 왕까지도, 그 법 아래에 있지 그 위에 있지 않다. 법이 왕이다. 만일 왕과 정부가 그 법을 어기면 국민들은 그들에게 불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법에 반하는 국가의 행위는 불법이며 횡포다.

러드포드에 의하면 폭정은 하나님의 재가 없이 통치하는 것이었다. 압제(oppression)의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죄악된 본성과 옛 뱀으로부터 온 권력의 방종한 이탈이다. 폭정은 사탄적인 것이므로 그것에 저항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저항하는 것이다. 역으로 그것에 항거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뿐 아니라 통치자는 조건부로 권력을 부여받았으므로 적절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국민들은 자기들의 재가를 철회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통치자가 백성들과 맺은 약속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어겼다고 해서 그를 폐위해서는 안 된다. 단지 그가 사회의 근본 구조를 공격할 때는 그의 권력과 권위를 박탈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국가가 하나님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고의로 파괴할 때는 그것에 저항하는 것이 합당하다.

사사로운 개인에게 있어 저항은 세 가지 단계로 추진될 수 있다. 첫째, 그는 항의 (protest)에 의해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 둘째 만일 가능하다면 그는 도피해야 한다. 셋째, 필요하다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 국가가 집단 (합법적으로 이루어진 국가나 지방 단체나 교회) 에 대해 불법적 행위를 자행할 때는 그것에 저항하는 두 가지 단계가 있다. 하나는 항의 혹은 이의(異議) 제기요, 다른 하나는 필요하다면 자기 방어를 위한 무력 사용이다. 국가에 대한 저항은 합법적인 권세자들, 즉 관원들 (lesser magistrates)의 보호 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프란시스 쉐퍼, Manifesto, 99-104.

13) John Milton, The Works of John Milton, vol. 5, The Tenure of Kings and Magistrate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33), 10.

14) Christopher Goodman, How Superior Powers Ought to Be Obeyed (Geneva, 1558), 139-140.

15) . Ibid., 93.

16) . Ibid., 106-7.

17) . Ibid., 130.

18) . The Encyclopedia Americana (Grolier Incorporated, 1988), vol. 8, 591.

19) . Ibid., 129.

20) 소위 보수언론들을 포함한 단순한 백성들은 또 박정희가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는 이유로 그를 찬양한다. 수천 년 배불리 먹어 본 적이 없는 민족이 경제 정책 덕분에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평가는 사물의 한 면만을 본 결과이다. 경제 성장의 명분 하에 유린했던 인권, 그의 고문과 투옥과 처형에 의해 죽고 불구가 되고 수십 년씩 감옥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 청계천에서 하루 18시간씩 노동을 착취당하며 희생했던 어린 여공들, 대기업에서 무리하게 장시간 근무하다가 40대에 과로사한 수많은 회사원들을 생각하면 과연 박정희의 경제 정책에 과보다 공이 더 많은지 의문이다. 또 경제가 중요한 것이라 하더라도 박정희가 장기 집권하는 대신 헌법을 누더기로 만들어 장기 집권하지 않고 정직하게 다른 사람에게 정권을 이양했더라면 더 유능한 지도자에 의해 한국 경제가 더 발전되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는 것도 맹신에 불과할 것이다.

21) 서울대 재학 중 시위를 주동하다가 제적되고 감옥에 갔던 운동권 출신 내 친구가 최근에 나에게 그것을 확인해 주었다.

22) 주지하다시피, 미국이나 유럽 같은 선진국에서 수정자본주의가 확립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국가 주도 하의 의료보험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 보장 제도들을 통해 사회주의적 요소가 이미 도입되어 있다. 만일 모든 것을 개인의 자유에만 맡겨 두었다면 오늘도 질병에 걸렸지만 적절한 치료를 받을 돈이 없어 죽어 가야 할 국민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적인 것이라면 모두 사탄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지의 결과이다. 사회주의에 성경적이고 윤리적인 요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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