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교회포럼(대표회장 권오헌 목사, 고신 총회장)이 주최한 2022 미포(2022.12.5.) 세 번째 발제 시간에 정남환 교수(호서대 교수서울강남교회 장로) “고신총회 70년과 전영창 선생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서울제일교회에서 열린 2022미포에서 발제하는 정남환 교수
서울제일교회에서 열린 2022미포에서 발제하는 정남환 교수

정남환 교수는 “고신 70년에 전영창이 설립했던 복음병원 초기의 기록을 바로잡고 그의 복음병원 설립 정신을 재조명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또한 “초기 SFC 형성기와 그 후 SFC 운동에 미친 전영창의 영향을 살피고 거창고의 교육을 연구하여 우리나라 초중고 교육의 대안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전했다. 다음은 정남환 교수 발제문 전문.


고신총회 70년과 전영창 선생

정남환 (호서대 교수, 서울강남교회 장로)

.들어가며

2022미래교회포럼에서는 지난 70년간의 고신교회의 역사를 통해 고신교회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을 소환해서 발표하고 있다. 한상동(1901-1976) 송상석(1896-1980) 장기려(1911~1995)에 이어서 전영창(1916~1976)을 살펴본다.

전영창선생(이하 전영창)1947년 대한민국 유학생 1호로 도미하여 웨스턴신학교에서 수학하고 있던 중 6.25전쟁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고신교단 역사의 초기였던 때, 부산을 중심으로 고신교단과 인연을 맺었다. 전영창은 현재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의 전신인 복음진료소(복음의원) 설립과 운영에 커다란 역할을 한 일로 초기 고신교단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전영창은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 활동과 복음의원 설립자로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며 초기 SFC(학생신앙운동)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고신교회의 지도적 인사와의 모종의 불화로 1953년 여름 복음의원을 떠나 도미하여 컨콜디아 신학대학원에 수학하여 석사과정을 마치고 195512월에 귀국하였다. 19564월 대학부학장이라는 평탄한 미래를 버리고 개교 3년 만에 빚으로 넘어가는 거창고등학교를 인수하여 제3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20년간 일하며 사회적 신망을 얻는 기독명문학교로 육성하였다. 거창고등학교 역사에서는 거창고의 오늘을 있도록 기반을 만든 전영창 교장을 빼놓을 수 없다. 개척, 모험, 봉사, 희생정신으로 압축되는 전영창 교장의 정신은 오늘날 거창고의 주요 교육목표로 자리잡고 있다.

이 글에서는 전영창이 설립한 복음진료소(복음의원)와 초기 SFC에서 전영창의 역할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전영창이 인수하여 명문 기독사학으로 키운 거창고등학교에서의 그의 교육을 살펴보고자 한다. 전자는 고신교회와 연관이 있는 역사이고 후자는 고신교회와는 약한 고리의 역사이다. 기간 중 SFC운동이나 장기려와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고신70년이 지나면서 전영창의 생애가운데 첫 번째 미국유학 중 귀국이후 만난 고신과의 인연을 기록 자료를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더욱 세밀한 부분은 다음으로 남겨두었다. 두 번째 미국유학이후 만난 거창고등학교에서의 역사기록은 졸업생 제자들과 교사들로부터 남아있는 자료들이다. 그리고, 향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생각해보는 시간과 공간을 남겼다.

 

※전영창(全永昌,1916~1976)선생님 약력

19161226일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출생

아버지 전일봉의 높은 교육열로 안성 초등학교 입학.선교사의 도움으로 5년제인 전주 신흥학교(新興學校)에 근로 장학생으로 진학

1936년 전주 신흥학교 졸업, 무주의 초등학교 촉탁 선생이 됨.

조선 역사를 가르친 것이 문제가 되어 학교에서 쫓겨남.

1938년 신흥학교 교장 린턴의 배려로 일본 고베의 중앙신학교에 입학

1941122일 사상이 불온하여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2년간 징역형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 감옥에서 복역.

복역 1년 만에 고향인 무주를 벗어날 수 없다는 주거 제한 처분을 받고 집행 유예 5년으로 풀려나 무주로 돌아옴

1945년 해방을 맞아 서울로 상경, 영어 실력으로 미군 부대 군목인 브라운 소령의 통역관으로 일함

1947년 브라운 소령의 도움으로, 한국 최초의 유학생 여권을 들고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웨스턴 신학교에서 유학.

1950년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에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이 6·25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한국에서 철수한다는 소식을 듣고, 학장을 찾아가 즉시 귀국하여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소신을 밝힘.

이에 감동한 학장이 귀국 하루 전인 195118일 졸업 시험을 치르지 않았는데도 졸업장을 주어 귀국함

1951115일 군용기편으로 수영비행장에 돌아온 전영창은 부산에서 전쟁 피란민을 위한 구호 사업을 시작.

19516월 텐트를 치고 시작한 임시 병원에 이어 장기려(張起呂) 박사와 함께 부산 복음의원(현재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을 설립하는 데 앞장 섬

1953년 휴전이후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 컨콜디아 신학대학원(Concordia Seminary)으로 다시 유학을 감.

19551210일 컨콜디아 신학대학원 졸업 후 선편으로 귀국

1956412일 좋은 직장이나 일자리를 마다하고 파산 직전의 거창고등학교 제3대 교장으로 취임. 기독교교육을 시작하여 평생 교육에 헌신

1964년 샛별초등학교 설립 (전영창 선생 사후 1980년 샛별중학교 거창고등학회에서 설립)

19655월 부속농장 구입 (42m2)

1967년 국민이주는 희망의 상 (경향신문) 수상

1969914일 박정희 대통령 3선을 위한 개헌반대 데모 주동학생 처벌 거부로 교장직 해임

19714월 대법원에서 승소, 교장 복직.

197110월 학교시설 확장 모금 차 도미

1973123일 로버트 슐러 목사의 후원으로 본관 건물과 강당 준공

1976520일 네덜란드 교회 연합회의 후원 기금으로 직업훈련관을 건립하던 중 과로로 인한 담석증과 패혈증의 합병증으로 대구동산병원에서 수술치료 중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남

거창고등학교 구교사
거창고등학교 구교사
거창고등학교 신교사 (1973.1월준공)
거창고등학교 신교사 (1973.1월준공)
거창고등학교 직업훈련관 기공식(1974.8.6.)
거창고등학교 직업훈련관 기공식(1974.8.6.)

. 복음병원과 전영창 선생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70년사를 편집한 이상규의 복음병원의 설립부분을 살펴본다.1)

1951115일 복음진료소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복음병원은 처음에는 고신교회와 무관하게 전영창 선생 개인에 의해 부산시 영도의 전차종점 인근의 제3영도교회 창고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주소는 경상남도 부산시 남항동 246번지였다. 1957528일에는 현재 위치인 부산시 서구 암남동 34번지로 이전하였고, 196596일에는 재단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유지 재단이 병원을 인수하여 복음병원은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로 편입되었다. 1970년에는 학교법인 고려학원의 수익기관으로 편입되었고, 1977년에는 종합병원으로 인가를 받았다. 1980년 고신대학교 의과대학이 설치되면서 대학병원이 되었고, 2022년에는 고신대학교복음병원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이 병원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복음병원은 전쟁이 발발한지 6개월가량 지난 1951115복음진료소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어 그해 말 곧 1223복음의원으로 개칭되었고, 10년 후인 196187일로부터 복음병원으로 불리게 된다.

이 병원은 1951115일 조직된 전영창 선생의 경남구제회로부터 시작된다. 전라북도 무주 출신인 전영창(全永昌, 1916-1976)은 미국 남장로교의 보이어(Emler Boyer, 1893-1976) 선교사의 도움으로 전주 신흥학교에서 수학하고 그 학교 교장이던 윌리엄 린튼(William Linton, 1893-1976) 의 주선으로 일본 고베신학교에서 공부하게 된다. 해방 후 주한미국 군종실에서 근무하던 중 미 군목의 도움으로 1947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이 학교에서 1년간 수학 한 다음 미시간 홀란드에 위치한 웨스턴신학교로 옮겨가서 신학을 공부했다. 이 학교는 미국개혁교회(RCA: Reformed Church in America)가 운영하는 학교였다. 졸업을 불과 두 달 앞두고 있을 때 조국의 전쟁 발발 소식을 듣게 된 그는 졸업을 포기하고 귀국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웨스턴신학교는 졸업한 후 귀국토록 종용하였으나 (중략) 전영창의 애국심을 보고 큰 감명을 받은 웨스턴신학교는 그의 졸업을 인정해주고 필요한 곳에 사용하라며 5,000불을 모금해 주었다. 전영창은 주변을 정리하고 미국을 떠나 195119일 미군 수송기를 타고 부산 수영비행장으로 귀국했다. 귀국한 그는 115경남구제회를 조직하고 부산시 영도구 남항동 제3영도교회에서 구호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가 부둣가에서 병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가난한 피난민을 목격하고 병원설립을 결심했다. 이 때 전영창은 노르웨이 의료지원단 장인 넬슨 의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의 충고가 병원설립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다. 넬슨 의사는 5,000불로 항생제를 사서 피난민들에게 나누어 주면 얼마 못가서 재정이 바닥이 나고 더 이상 일할 수 없으니 그 기금으로 병원을 설립하라는 충고였다. 그렇게 할 경우 매일 50인분의 약을 원조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는 또 대형 군용 천막 3개를 지원해 주었다. 그래서 전영창은 115일 부산시 남항동 246, 3영도교회 구내에 작은 진료소를 세웠는데 이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다. 이때 의사로 초빙된 이가 초량교회 출석하던 여의사 차봉덕(車鳳德, 1921-2009 )여사였다. 사실상 그가 첫 원장인 셈이다.

평남 평원군 출신인 차봉덕은 평양 정의여학교를 거쳐 1948년 경성의전(서울여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이화여대 부속병원에서 수련의로 훈련을 받았다. 1948년에는 부산교통병원 산부인과 과장으로 일한 바 있다. 그러다가 1950년 초에 부산 동구 초량동에서 차산부인과 의원을 개원하여 운영하던 중 전쟁이 발발하였고 다음 해 1월이 1.4후퇴로 엄청난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밀어닥치게 되자 전영창의 간곡한 요청을 받고 복음진료소에 가담하게 된다. 전영창은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유엔군과 미군을 찾아다니며 의약품과 각종 의료용품들을 조달하였고, 또 옥수수와 밀가루, 분유 등 구호품을 얻어 와서 텐트 밖에 솥을 걸고 끓여서 전재민들을 구제했다. 차봉덕 여사는 후에 역시 의사인 황영갑(黃永甲)을 만나 혼인하고 진주로 이거하여 의료 활동을 계속했다. 황영갑은 진주교회 장로가 되어 활동하던 중 부인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하였다. 황영갑은 작은 불꽃이라는 자신의 회고기에서 부산 차봉덕이 전영창과 더불어 복음진료소에서 일한 첫 의사였음을 밝히고 있다. 전영창은 경남구제회 활동과 더불어 복음병원 설립자로 중요한 기여를 하였으나 고신교회의 지도적 인사와의 모종의 불화로 1953년 여름 복음의원을 떠나 거창으로 갔고 거창고등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으로 일하며 사회적 신망을 얻는 명문학교로 육성하였다. 필자는 1988년 멜버른의 장로교신학대학에서 유학할 당시 초빙교수로 왔던 웨스턴신학교 은퇴교수 유진 오스터하벤(Eugene Osterhaven) 교수를 만났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점을 알게 되자 그의 첫 마디가 영창 전을 아느냐?”고 물었다. 자기의 학생이었다고 했다. 그가 어떤 학생이었느냐고 물었더니 특히 스피치를 잘 했다고 대답했다. 37년이 지났지만 그는 한국인 제자 전 영창을 기억하고 있었다.

전영창 차봉덕 이후 장기려 박사가 병원장으로 일하게 된다. 그는 6.25 동란 중 차남 기용과 함께 월남하여 19501218일 부산에 도착했고, 1221일에는 제3육군병원으로 의사로 취직했다. 12월 성탄 전날인 24일 삼일사(三一社)라는 정보기관에 잡혀가 1주일간 구금 중 조사받고 한부선 선교사의 보증으로 1231일 풀려난 일도 있다. 그가 복음진료소에서 일하기 시작한 때는 1951620일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3육군병원에서 근무한지 반년쯤이 지난 1951620일 한상동 목사와 전영창씨가 새 일거리를 가지고 나를 찾아왔다. ---한목사가 함께 그런 의원을 해 줄 수 있으냐고 의논하러 온 것이었다. 불우한 사람들을 치료해 준다는 것은 내가 의사가 되려고 결심했을 때 하나님께서 서약한 일이다. 나는 6월말로 제3육군병원을 그만 두었다. 영도에 있는 제3교회 창고가 복음병원이 되었다. 처음에는 의사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었는데, 두 달 후에는 전시피란 서울의대교수로 부산에 와 있던 전종휘 박사가 도와주었다. --- 직원은 총무인 전영창씨, 서무, 경리, 약국을 맡아 본 오재길씨, 간호원 김재명씨, 김순리씨, 이금숙씨, 운전사 김정일씨 등 11명이었다.

이상의 장기려의 기록에서는 1951620일을 복음진료소에서 의료 활동 시작을 말하고 있으나 그 이전의 차봉덕 의사가 맹숙희 간호사에 대하여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문제는 19516월 이전의 차봉덕 의사로 시작된 진료소와 1951620일 장기려 의사로 시작된 후일의 복음병원 간의 관계인대, 후자가 전자의 계승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은 진료소가 지금의 고신대학교 병원으로 발전한 것이다.

흔히 장기려 박사를 복음병원의 설립자라고 말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전영창 선생이 1951년 이전과 이후 두 가지 경우의 주도적인 인물이었고 실제적인 설립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1951621일부터 진료에 가담하였고, 72일에는 복음의원 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전영창과 장기려 외의 한상동목사도 설립의 동료였고, 김상도 목사는 첫 원목으로 활동했다. 병원의 설립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기려 박사는 병원 발전에 크게 기여한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병원 초기 병원의 제반 업무와 병동 건축 등에 기여한 이가 위에서 언급한 전영창 외에도 박손혁 목사의 헌신이 적지 않았다. 경남구제회 회장을 역임한 그는 미군부대와 접촉하면서 필요한 물자를 공급했고, 필요한 비품을 조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1. 고신대학교복음병원 설립 초기역사에 관한 연구 및 자료

1) 고신대학교 한상동 홀에 있는 고신역사관 연혁

202277일 전국대학 교수선교대회가 고신대학교 영도캠퍼스에서 열렸다. 200여명의 기독교수들이 모인 한상동 홀에 있는 고신역사관 연혁에는 “52.6.21 2영도교회 부속창고에서 복음진료소(복음병원의 전신)”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복음진료소(복음병원의 전신) 설립일은 52.6.21에서 51. 6.21일로, 2영도교회는 제 3영도교회로 수정되어야 할 기록들이다.2)

고신대학교 한상동 홀에 있는 고신역사관 연혁
고신대학교 한상동 홀에 있는 고신역사관 연혁

2)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홈페이지 연혁

올해 71주년을 맞은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홈페이지에 있는 연혁을 찾아보았다.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 조직 날짜가 없다. 621일을 복음진료소 개설일로, 72일 복음의원 초대원장을 장기려박사로 하고 있다.3)

1951.01.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 조직( 대표: 전영창)

1951.06.21. 복음진료소 개설(부산시 남항동 246, 3영도교회내, 직원3)

1951.07.02. 복음의원 초대원장 장기려박사 취임

1951.12.23. 복음의원 개설허가

1957.05.28. 복음병원 신축이전(부산시 서구 암남동 34번지)

고신대학교 홈페이지
고신대학교 홈페이지

3) 장기려 박사 영아와 유아의 찬미

영아와 유아의 찬미(복음의원, 1953) 창간호가 최근 발견되었다. 복음병원설립 2주년 기념으로 발행한 이 책 권두사에서 장기려는 "복음의원의 설립자는 전영창 선생"임을 밝히고 있었다.“그 다음 달(7) 개원 기념 예배 석상에서 설립자 전영창 씨는 본 의원의 목적은 1.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고, 2. 피난민, 전재민, 극빈자들의 병을 치료하여 수고를 덜어 주며, 3. 외국인에게 신용을 얻도록 정직을 위주로 함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문서는 전영창 선생이 복음병원 설립자라는 사실을 장기려 본인이 밝힌 최초의 문서이다.4)

복음의원 발행 '영아와 유아의 찬미' 창간호(1953)
복음의원 발행 '영아와 유아의 찬미' 창간호(1953)

4) 장기려 박사, 나의 이력서

육군병원 나와 교회창고에 복음병원설립, 복음병원설립자 전영창씨(왼쪽)와 함께. 거창고 교장을 지낸 전선생은 "나의 이력서"가 시작될 무렵 세상을 떠났다.5)

장기려, 나의 이력서 한국일보.1976.7.6.
장기려, 나의 이력서 한국일보.1976.7.6.

5) 전영창 선생 약력보고

전영창 선생 약력보고에는 “1951115일 부산 영도에 천막2 개를 치고 경남구제위원회를 설립하여 장기려박사, 전휘종박사와 함께 피난민을 위해 복음병원이라는 무료진료소를 시작하신 것이 지금의 고신의료원으로 발전하였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6)

전영창 선생 약력보고 (전영창 전집2, 2013)
전영창 선생 약력보고 (전영창 전집2, 2013)

6) 이재술 장로, 고신교단 중요기관 초창기의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필자( 이재술,1922~2019 )가 부산복음병원의 서무과장(재단 총무처장 서리 겸임)으로 부임하게 된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필자가 당시 거창고등학교 재단 총무와 서무과장으로 일하면서, 고 전영창 교장 선생과 함께 폐교 직전까지 갔었던 거창고등학교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또 자립에 성공시킨 것을 알고 복음병원에서 오라고 초청이 왔다. (추천: 남영환목사, 거창교회 권성문목사 ) 그러나 그 당시는 초청이 왔다고 마음대로 사임(거창고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즉 거창고 전영창 교장과 고신 교단 간에 꼬여있는 감정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필자의 가정 형편 상 고향인 거창을 떠날 수 없었는데, 거기에다 당시 복음병원의 위기상황을 살펴보니 당면한 애로와 난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고, 사건과 사고 수습 등 해결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감당할 수 없었다.7)

(1) 1951. 1 - 대한기독교 경남구제위원회(대표 전영창)를 조직하여 당시 경남노회 제 54(1951. 3. 6 ~ 8, 장소 문창교회)의 승인을 받았다.

그 때 노회 산하 각 교회가 그 해 4/29 주일에 구제 헌금하여 구제회에 보내기로 가결하고 구제회 사무실은 부산 광복동 소재 고려신학교 내에 두기로 결의하다.

(2) 1951. 6. 21 복음진료소를 부산 제3영도교회의 창고를 빌려 개설할 때 구제회 전영창 대표가 $5,000을 출연함과 동시에 당시 유엔 CAC 민사위원회 경상도 팀 소속 노르웨이 의사 넬슨씨로부터 진료소 의약품 보조조로 월 $500150인분 지원받아 경영하기로 하고 직원 3(의사, 간호원, 총무)으로 진료소를 개설하였다.

복음병원 설립 목적을 전영창 대표는 다음 4가지를 제시, 주장하였다.

복음 전하는 병원(동포에게)

무료 구호 진료하는 병원(극빈자에게)

정직, 정확한 진료로 신용 얻는 병원(외국인에게)

병 치료법을 가르치는 병원(영육간에)

(3) 1951. 7. 2 복음의원장에 장기려 박사가 취임하였다.

(4) 1951. 12. 20 임시진료소가 협소하여 부산 영선동 2180번지(영도초등학교 옆) 텃밭 약 200평지에 천막 3개를 치고 진료시설을 갖추어 임시 진료소를 이전하였다. (직원 7)

(5) 1951. 12. 23 - 복음의원으로 개설 허가(경남구제회 정관 제정) 받아 경영하되 외과 장기려 원장과 내과 전종휘 의사 중심으로 운영하다.

(6) 1954. 4 부산시 서구 암남동 34번지 주변 동산 () 총 부지 15,464(도로 수용 35평 포함)을 말스베리 선교사 소속단체로부터 약 $30,000과 현금 300환의 지원을 받아 고려신학교 및 복음병원 부지, 건축 용지로 구입하였다. 그 후 위 부지를 한상동 목사 개인 명의로 보존등기 하였다가 재단법인 총회유지재단 설립 시 증여등기(1965. 10. 12일자)함으로 비로소 본 교단과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중략)

(17) 1965. 2. 4 복음병원 서무과장에 이재술 장로가 부임하다. (1966년부터 고신재단 총무처장서리 겸임하다.)

(21) 1965. 9. 6 재단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유지재단에 복음병원 재산을 편입하여 당시 문공부의 설립허가를 받았다.

이재술은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의 과도기적 초창기를 1951. 6. 21일자 복음진료소의 개설일부터 재단법인 고신총회유지재단 설립 시 복음병원을 편입하여 1965. 9. 6일자 당국의 법인설립 허가를 받은 때까지로 기술하고 있다.8)

복음병원발행 '영아와 유아의 찬미' 20주년 기념호(1971) 9)
복음병원발행 '영아와 유아의 찬미' 20주년 기념호(1971) 9)
복음병원 20주년 기념호 병원연혁(1971)
복음병원 20주년 기념호 병원연혁(1971)

복음병원 발행 '영아와 유아의 찬미' 20주년 기념호(1971)에는 1951.1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조직(대표자 전영창)1951.12.23.복음의원 개설 허가 받음(경남도보 제103호 개설 대표자:전영창)으로 기록하고 있다. 71년이 지난 오늘에는 복음의원 개설허가에서 전영창의 기록이 생략되었다.10)

1960연대 후반 복음병원 하계휴양소 해수욕장에서 좌로부터  이재술장로,전영창교장,장기려박사,박영훈의사, 운전기사 김정일 씨
1960연대 후반 복음병원 하계휴양소 해수욕장에서 좌로부터  이재술장로,전영창교장,장기려박사,박영훈의사, 운전기사 김정일 씨

7) 정기상 장로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 뒤돌아보는 복음병원의 시작과 발전

전 고신의료원 행정처장 정기상(1932~2013)장로는 회고기(回顧記)에서 글을 쓰게 된 동기와 목적을 밝혔다. 교단과 병원에서 수고 하시고 병원을 설립하신 고 전영창 선생님, 고 장기려 박사님, 고 한상동 목사님, 그리고 고 박손혁 목사님을 비롯한 그 외의 믿음의 선진들은 대부분 하나님 앞으로 가셨다. (중략) 나는 천막병원에서 송도 새 병원으로 이전한 후부터 병원간부회의에 참석하였고, 오랫동안 앞에서 언급한 어른들과 함께 일했기 때문에, (중략) 한 가지 예로 경남구제위원회가 어떻게 생겼고, 무슨 일을 했는지를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경남구제회에 대해서는 교단 역사에서도 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중략) 남교회 한명동 목사가 미국에서 귀국한 친구 전영창 선생을 형인 한상동 목사에게 모시고 가서 소개했다. 한상동 목사와 전영창 선생은 미국 개혁파교회에서 모금해 온 의연금 5천불과 월 500불 추가 지원 약속한 기금으로 어떻게 피란민을 도울까 하는 활용방안을 두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중략) 며칠 뒤 한상동 목사님과 전영창 선생님이 제3육군병원에 계시는 장기려 박사님을 찾아감으로 역사적인 복음병원을 위한 상봉이 이루어진다. (중략) 세분이 한 자리에 앉게 되어 피란민을 위하여 구호병원을 세우기로 합의하고, 3영도교회의 창고에서 이미 차봉덕 의사가 진료소를 세워 활동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보강하여 의사, 약사, 간호원, 원목, 사무원, 운전기사 등 7명으로 구호병원을 하되 복음전도, 정확한 진료, 그리고 의학지식의 교육 등을 3대 설립목표로 정하고, 이름을 부산 복음병원으로 정했다. 초대 원장에 장기려, 총무과장 전영창으로 하여 정식 병원등록을 마치고, 1951621일 창설예배를 드리고 진료를 시작 하였다. 이것이 역사적인 부산복음병원의 시작이었다.(중략) 어떤 일을 하려면, 생각과 사람과 자본 등 3가지 요소가 구비되어야 한다. 한상동의 생각, 장기려의 인술, 전영창의 자본, 3가지가 있었기에 복음병원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중략) 그래서 경남구제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대표는 전영창 선생, (중략)여기에 병원관리규정이 추가되어 경남구제위원회가 오늘의 복음병원을 운영하는 학교법인 고려학원이사회의 모체가 된 셈이다.(중략) 원조 자금을 개척하신 전영창 선생은 총무과장으로 경남구제위원회 사업을 관장하게 된다.11)

8) 지강유철의 연구

성산 장기려선생 주요연보에는 195171일 한상동목사, 전영창선생과 더불어 복읍병원 복음진료소를 설립하고 초대원장에 추대로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장기려박사가 오기 전에 천막병원 최초의 여의사(1951)인 차봉덕씨가 있었음을 고신의료원50년사에서 밝히고 있다. "이곳에는 이미 서울의전 출신의 여자 의사 차봉덕이 진료소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한상동,장기려, 전영창은 차봉덕 의사의 진료소를 이어받아 그곳에 복음진료소를 시작했다....설립자 겸 운영자로는 한상동 목사가, 원장은 장기려 선생이, 그리고 병원 총무는 전영창이 맡았다“12)

9) 나삼진의 연구

복음병원 설립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려는 고명길 목사의 시도가 있지만, 병원의 설립은 전영창 선생의 자본, 한상동 목사의 신앙, 장기려 박사의 의술이 하나가 된 것이라 보는 것이 정확하다. 한국전쟁 기간에 자선병원으로 시작된 복음의원은 1954년 고려신학교가 광복동 교사에서 송도로 이전할 때 함께 부산 송도 지금의 부지 13,000평을 확보하여 병원과 고려신학교를 신축, 이전하였다. 장기려 박사는 복음병원을 중심으로 고신교회와 평생 동역하였고, 생애 마지막까지 고신의 울타리 안에서 살았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신앙을 가졌던 그는 한상동 목사를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생각하고, “그의 관용의 신앙을 앙모하면서 살고 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우찌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 신앙의 영향을 받고, 함석헌과의 깊은 유대로 고신교회의 신앙과 일정한 거리가 있었지만, 그의 진료, 병원 운영,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 농어촌 의료 봉사를 통한 사랑의 실천은 한결같았다.13)

좌로 부터 전영창 선생, 한상동 목사, 장기려 박사
좌로 부터 전영창 선생, 한상동 목사, 장기려 박사

10) 고명길의 연구

고명길은 실제 복음병원 설립자를 전영창 선생으로 보고 있다. 2015년 고신 사회복지위원회(위원장 김세중, 전문위원장 고명길)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연구조사와 복수의 증언자들을 만난 결과를 종합하여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설립자 장기려인가 전영창인가?”를 발표했다.14)

고명길은 지금도 복음병원 설립자 문제에 대한 글을 신문이나 블로그를 통해 발표하면서 얼마전 나삼진의 복음병원 설립자 3인설(전영창, 장기려, 한상동)에 대한 반론을 기독교보에 싣기도 했다. 고명길은 이 반론에서 의료법, 개원일, 자본금, 장기려의 증언 등 4가지만 보아도 한상동과 장기려는 복음병원 설립자가 아니며 오직 전영창만이 복음병원 설립자임이 확인된다. 그 외에도 전성은 선생(전영창 아들), 맹숙희 권사(당시 간호사), 황영갑 목사(차봉덕 남편), 차진실 사모(차봉덕의 조카, 박희천 목사 부인), 이재술 장로(이정건 선교사 부친), 성소균 장로(신흥교회) 등 당시 함께했던 여러 증인들이 전영창이 설립자라고 밝히고 있다.15)

전영창은 복음병원을 설립한지 3년만인 1953년 가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부정축재자라는 누명을 쓰고 축출당했다. 전영창은 자신의 억울함을 3일간의 단식으로 항변했지만, 교권에 의한 탄핵에 힘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953년 가을 복음병원을 떠나 도미 후 거창고등학교(19564)로 부임해 갔다. (중략) 지금까지 고신은 한 번도 전영창과 그 가족에게 사과도 복권(명예회복)도 해드리지 않았다. 복음병원 연혁에 설립자, 초대원장, 개원일의 왜곡도 70년간 그대로다. 마침 서울남부노회(노회장 강영진목사)와 김해노회, 부산서부노회 등에서 복음병원 설립자, 초대원장, 개원일 수정 건을 고신총회 정식 안건으로 상정했다고 한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오기된 복음병원 초기 역사를 바로잡고 선조들과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고신교단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16)

고명길은 이상의 내용들을 기초로하여 복음병원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할 기록으로 본다.

1951.01.15. 대한기독교 경남구제회 설립( 설립자: 전영창)

복음진료소 설립 ( 설립자: 전영창, 초대원장 : 차봉덕)

장소 :부산시 남항동 246. 3영도교회 내, 직원3

1951.07.02. 복음진료소 제2대 원장 장기려박사 취임

2) 복음병원의 설립목표와 전영창

현재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의 사명은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환자중심의 치료, 전도, 교육을 실현하여 모든 인류의 건강과 행복한 삶에 기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도록 한다.”이다. 설립자 전영창이 제시한 복음의원의 목표를 살펴본다.

설립자 전영창씨는 본 의원의 목적은

1. 동포에게 복음을 전하고,

2. 피난민, 전재민, 극빈자들의 병을 치료하여 수고를 덜어 주며,

3. 외국인에게 신용을 얻도록 정직을 위주로 함에 있다.17)

구호병원을 하되 복음전도, 정확한 진료, 그리고 의학지식의 교육 등을 3대 설립목표로 정하고, 이름을 부산 복음병원으로 정했다. 초대 원장에 장기려, 총무과장 전영창으로 하여 정식 병원등록을 마치고, 1951621일 창설예배를 드리고 진료를 시작.18)

 

복음병원 설립 목적을 전영창 대표는 다음 4가지를 제시, 주장하였다.

1.복음 전하는 병원(동포에게)

2.무료 구호 진료하는 병원(극빈자에게)

3.정직, 정확한 진료로 신용 얻는 병원(외국인에게)

4.병 치료법을 가르치는 병원(영육간에)19)

이상을 살펴보면 전도, 구호, 진료, 교육의 목적이 분명하다. 이는 전영창의 기독교신앙과 교육사상이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전도의 기능, 구호 역할, 치료의 기술, 교육은 향후 전영창의 일생을 통해 전개된다. 오늘날의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의 정체성과 복음병원의 사명에서 전영창을 재조명해 보아야 한다. 한편 거창고등학교,샛별중학교,샛별고등학교의 교육이념구현에서 전영창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1953년 3월19일. 복음의원 진찰권.(거창고 23회 이영인 목사 소장)
1953년 3월19일. 복음의원 진찰권.(거창고 23회 이영인 목사 소장)

3) 초기 SFC와 전영창

초기 SFC 형성기에 전영창의 역할을 살펴본다.

학생들은 고려신학교 교수들의 지도 아래 매년 기독교소년 하기수양회로 모여 말씀을 배우며 학원에서 배우며 전도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194882일부터는 이 모임을 학생신앙운동’(Students For Christ)이라 칭하고 일주일간 수양회를 개최했다.

그 후 매년 수양회를 갖게 되었다. 수많은 한국교회 크리스천들의 회심을 만들어낸 SFC 수양회의 시작이었다. 당시 SFC 조직은 한명동 목사가 주도했고, 신학훈련은 박윤선 교장, 전도는 한부선 교수, 협동총무는 전영창 선생이 맡았다.20)

학생신앙운동은 1946년 한부선 선교사가 시작하여 박윤선도 지도하였던 부산 청년신앙운동(YFC), 1947년 한명동이 지도한 학생신앙협조회의 청소년기도회, 성광회, 고려신학교 주최의 수양회와 성경공부, 고신교회의 학생수양회로부터 발전하여 1953년 확립된 청소년과 청년 신앙운동이었다. 한명동과 전영창이 지도위원이었다. 초기에는 정기적인 기도운동, 국기배례반대운동, 주일성수운동을 실행하였다. 1950년대부터 학생 주도 활동으로 발전하여, 전국 조직을 구축하고, 전국과 지방 단위의 수양회를 개최하여 학생들의 신앙운동을 독려하였다.21)

Calvin Theological Seminary 교표(주여 내 마음을 드립니다. 즉시 그리고 신실하게)
Calvin Theological Seminary 교표(주여 내 마음을 드립니다. 즉시 그리고 신실하게)

 

S.F.C.(학생신앙운동) 배지
S.F.C.(학생신앙운동) 배지

SFC배지는16세게 종교개혁자 칼빈의 문장에서 따운 것으로 SFC초창기 지도위원이셨던 고 전영창선생께서 미국의 칼빈신학교(Calvin Seminary)의 교표에서 힌트를 얻어 고안했으며 1952725일 부산 남교회 진행된 제6SFC하기수양회에서 채택되었다.22)

SFC운동의 시발기에는 지도위원장에 한상동 목사, 부위원장에 전영창 선생을 추대하고,다음에는 박윤선목사를 지도위원장으로 지도를 받아오다가 19538월 전국SFC 정기대회 시 지도위원추대문제를 총회에 위촉하기로 하였다.23)

초기 SFC의 형성과 발전에는 전영창의 참여가 있었다. 필자는 전영창으로부터 SFC뱃지에 관한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전영창은 초기 SFC이후 고신교단과는 공식교류가 없었으나 복수 의 장소에서 SFC관련 특강을 하였다. 1975년 소천 1년 전에 거창고등학교에서 동계수련회를 진행하였다. 동계수련회에서 전국의 SFC중고생들과 대학생을 거창고등학교에서 만나는 행사를 허락하고 교제했던 것이다. 필자는 대학 1학년 겨울방학에 이 수련회에 참가하여 강당에서 사진을 촬영하였다.24)

1975년 1월9일~15일 제32회 전국학생신앙운동동기수양회가 거창고등학교에서 개최되었다. 사진에는 전영창선생,한명동목사,이금도목사,손봉호교수,김성복간호사,박은조(대회장),이일호(대학생),박윤배(대학생),정남환(대학생),고명길(대학생)이 보인다. 현관에서 대학생들과 찍은 사진에는 윤현주목사, 변의남목사, 양승달목사, 김만우목사, 장희종 목사를 찾을 수 있다.
1975년 1월9일~15일 제32회 전국학생신앙운동동기수양회가 거창고등학교에서 개최되었다. 사진에는 전영창선생,한명동목사,이금도목사,손봉호교수,김성복간호사,박은조(대회장),이일호(대학생),박윤배(대학생),정남환(대학생),고명길(대학생)이 보인다. 현관에서 대학생들과 찍은 사진에는 윤현주목사, 변의남목사, 양승달목사, 김만우목사, 장희종 목사를 찾을 수 있다.

 

. 전영창 선생과 교육

1. 전영창 교육 연구

1) 강기수의 연구

강기수는 전영창의 생애와 교육사상논문에서 거창고등학교 정신을 정초한 전영창의 교육적 이상과 교육적 의의를 밝히는 연구를 했다.25)

전영창의 교육적 이상은 참다운 기독교인,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인간, 인격을 갖춘 인간을 양성하기 위해 전인교육, 자유자율교육, 공동체 교육, 노작체험교육, 개인차를 고려한 수준별 수업, 학생사랑 등을 교육의 방법적 원리로 삼아 실천하였다.

전영창의 교육적 의의를 살펴본다.

첫째, 인간교육, 전인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인간교육, 전인교육을 직접 실천하였다. 

전영창은 실력 있는 인간, 능력 있는 인간을 강조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참다운 인간인간다운 인간, 바람직한 인간성을 갖춘 인간을 길러내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행사 활동, 체험활동 등의 다양한 교육과정 운영을 통해 전인적인 인간을 육성하고자 했다.

특히 입시교육에 경도되어 있는 한국의 고등학교 교육의 현실을 감안하면 앞으로도 인간교육, 전인교육의 구현은 쉽지 않은 과제임이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일찍이 인간교육, 전인교육을 교육적 이상으로 삼고 그것을 학교현장에서 직접 실천했던 전영창의 삶과 교육사상은 교육적으로 의미가 있다. 또한 전영창은 인간교육, 전인교육을 학교교육과정 운영과 활동을 통해서 교사와 학생 모두의 공감과 자발적인 참여 속에 구현하고자 했. 이러한 그의 인간교육, 전인교육에 대한 구상과 실천은 아직도 인간교육이나 전인교육이 형식과 구호에만 그치고 있는 한국의 교육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자유자율정신을 존중하고, 자유자율교육을 실천하였다

전영창은 자유인으로서 자유로운 삶을 살았으며, 자유와 자율을 존중하는 그의 신념과 태도는 학교운영이나 학생교육에 있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학생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존중하였다. 그는 그 당시 다른 학교에서는 감히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교복자율화

두발자율화를 시행하고, 직선제 학생회장 선출과 자유로운 학생회 활동의 보장은 물론 학생이 참여하는 행사 대부분을 학생들이 직접 기획운영하도록 하였다. 그는 수준별 이동수업에서도 학생들의 의사를 존중하여 분반을 자신의 능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교육청의 보충수업 금지를 거부하고 무보수 보충수업을 끝까지 결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자유자율을 존중하는 학교분위기 속에서 그 당시 고등학생인 거창고등학교 학생들3선 개헌 반대시위를 하자, 교육청이 시위 학생의 징계를 요청하였고, 그는 교육청의 징계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다 학교장 승인 취소를 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학생들에게 자유자율정신의 소중함을 훈화나 설교를 통해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자유자율의 원리를 학교교육 운영에 반영하였고, 그것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러한 그의 자유율의 원칙에 입각한 교육실천은 아직도 획일적이고 일률적인 교육분위기가 지배적인 한국의 교육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셋째, 학생 중심의 다양하고 창의적인 교육과정을 운영하였다

전영창은 학교를 인수한 직후부터 학생들의 관심과 수준, 지역의 특성을 고려한 체험활동 등 다양한 교육과정을 운영하였다. 그는 학교 교육과정을 통해 봄가을 예술제, 합창제, 초청강연, 독서동아리 활동, 농장에서의 노작활동, 직업보도관 운영을 통한 기술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시도하였으며, 학생의 흥미와 관심 및 이해 수준을 고려한 수준별 이동수업을 실시하였다.

또한 인문계 고등학교이면서도 자동차기술, 컴퓨터 기술 등의 기술교육을 의도하였는데 이러한 학교경영 및 교육과정 운영은 농촌 지역인 거창의 사정과 형편을 고려한 것이었다.

즉 그는 지역의 특수성과 현실성 등을 고려하면서도 학생들을 중심에 둔 학생중심의 교육과정을 운영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현재 강조되고 있는 학교수준, 학급수준의 교육과정 운영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다양하고 창의적인 교육과정 운영이었다. 결국 그가 시도했던 노작교육이나 기술교육 등의 체험교육과 합창제, 초청특강, 동아리 활동, 그리고 학생회 중심의 각종 행사활동 등은 다양한 행사 그 자체도 의미가 있지만, 그러한 활동을 통해서 학생들 스스로가 체험활동의 의미를 깨닫고 공동체 의식을 형성할 수 있었다는 점과 이러한 모든 활동의 중심에 학생이 있었고, 학생들 모두가 적극적, 주체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교육적으로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넷째, 학생들의 흥미와 수준을 고려한 수준별 수업을 통해서 개인차를 고려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전영창은 능력에 따라 수업을 하는 것이 한 개인의 능력을 극대화 할수 있는 방법이고, 이것이 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수준별 교육과정을 적용하는 이유에 대하여 사람마다 누구나 개인적 차이가 있는데, 이러한 개인차는 서로 다르다는 뜻이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자신의 수준에 관해 자랑하거나 부끄러워해서는 안 되며, 대신 자신의 잠재능력을 최대한 계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거창고등학회, 2007: 3). 그는 수준별 이동수업을 단지 학력향상을 위한 수업의 차원에서 이해한 것이 아니라 학생 개개인의 능력을 고려하고 존중하는 인간존중, 학생존중의 차원에서 이해하고 접근하였다. 러한 그의 인간존중, 학생존중의 신념이 있었기에 거창고등학교는 수준별 이동수업을 실시하는데 있어 학생의 흥미와 관심은 물론 학생의 학습 선택권과 수업만족도, 개인차에 대한 고려 등의 많은 준비를 했고, 그 결과 성공적으로 정착될 수 있었다.

다섯째, 참다운 교육자상을 제시하였다

전영창은 진정한 신앙인이었고 훌륭한 애국자였으며, 학교와 학생을 진정으로 사랑한 교육자였다. 그는 신앙을 바탕으로 국가와민족을 사랑하고 남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할 줄 아는 바람직한 인간을 기르고자 하였으며,이러한 교육적 이상을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교육자였으며 학생을 사랑했다.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된 길을 마다하고 폐교직전의 학교를 선택한 것도, 어려운 학교재정을 위해서 자신의 전 재산을 내어놓은 것도, 그리고 부당한 권력으로부터 학생을 보호하기 위해서 학교장 승인 취소를 당한 것도 모두 학생과 학교에 대한 그의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희생과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전영창은 학생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는 공중목욕탕에 가지 못하는 학생을 위해 목욕탕을 전세 내어 씻어주기도 했고, 대학등록금이나 병원입원비가 없어 고민하는 재학생이나 졸업생을 위해 자신의 월급을 가불하여 도와주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학생이 있으면 어디든지 찾아갔다. 그는 불의와 부당한 권력에는 조금도 굴하지 않는 정의의 사도였지만, 학생들에게는 한없이 자상하고 인정스런 교육자였다. 그는 자신의 교육적 신념과 이상을 직접 삶으로 보여주었다. 학생들을 향한 그의 훈화나 설교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과 당시 교사들이 월급을 절반으로 줄이자는 제안을 해 왔던 것은 그가 스스로 앎과 삶이 일치하는 모습을 직접 몸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의 설교나 훈화가 설득력이 있었던 것은 그의 언변이나 지식보다는 언행일치와 교육에 대한 열정그리고 학생들에 대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보여준 그의 교육적 이상과 교육실천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교육의 본질과 교육자의 진정한 사명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제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소천 한달 전 전영창 교장과 유연수 학생(1976.4.)
소천 한달 전 전영창 교장과 유연수 학생(1976.4.)

2) 조성국의 연구

조성국은 전영창의 기독교교육의 기초적 신념과 교육적 인간상논문에서 전영창을 연구하였다.26)

전영창의 기독교교육의 기초적 신념은 기독교신앙에 기초한 애국심, 그리고 기독교신앙에 기초한 고난극복의 신념이었다. 그가 지향한 교육적 인간상은 정의로운 인간, 교양과 실력을 갖춘 글로벌 지식인, 그리고 국가와 사회, 약자와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인간이었다. 이러한 그의 기초 신념들은 그의 살아있는 기독교신앙의 통찰로부터 나온 것이며, 그는 기독교신앙이 이러한 참 인간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그는 목자인 교사로서 자신의 신념들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구체화한 모범 사례였으므로 제자들로부터 한국의 페스탈로찌, 조국의 목자로 추앙받았다. 전영창과 거참고등학교는 기독교신앙이 한국사회와 학교 교육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보여준 의미 있는 기독교학교교육모델이다.

전영창은 거창고등학교가 교육을 통해 민족과 조국과 사회적 약자와 인류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인재를 양성하도록 하는 일에 최적의 교육내용과 여건을 구비하도록, 자신의 인생과 전 재산을 드렸고, 미국과 네덜린드 기독교 단체들로부터 원조를 얻어내어 교육시설을 확장하였으며, 결국 겹친 과로에서 온 질병으로 아쉽게도 향년 59세만인 1976526일 소천하였다. 전영창은 그를 학교의 목자로 부르신 예수님보다 더 오래 살았으나,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살다 갔다. 그래서 그는 앞서 인용된 제자 신중신의 추모시에서 하나님의 목자로 칭해졌고,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묻혔다고 회고되었다. 전영창의 장남으로 그의 교육사업을 이어 헌신했던 전성은은 아버지 전영창은 오직 예수만 알던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전영창의 인생은 기독교적 참 교육의 모범이 되어 지금도 그 이름과 교훈으로 살아 거창고등학교 학생들을, 그리고 기독교학교교육을 열망하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

고신교단은 역사적 초기에, 교회의 참된 목사로서 한상동, 보건 분야에서 참된 의사로서 장기려, 교육계에서 참된 교사로서 전영창을 가졌다. 그러나 고신교단의 좁은 관심과 이원론적 시야는 한상동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장기려는 줄곧 고신교단의 경계선 안팎을 맴돌았고, 복음병원은 공적으로 수용되었지만 종종 부담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데 전영창은 고신교단을 곧 떠났고, 이후 마음으로만 이어져있었으며, 거창고등학교는 고신교단과 무관하였고, 단지 졸업생들은 신학지원 학생들로 고신교단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각성되지 못했을 뿐, 한상동에 의한 고려신학대학교(고신대학교)가 해방이후 한국 기독교계의 모델이 되었던 것처럼, 장기려에 의한 복음병원은 해방이후 한국 기독교병원의 모델이었고, 특히 전영창에 의한 거창고등학교는 해방이후 한국 기독교학교의 모델이 되었다. 따라서 전영창과 거창고등학교는 한상동과 고신대학교만큼이나 의미 있는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2. 거창고등학교의 정체성과 인재상

1) 거창고등학교

거창고등학교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민주 시민을 양성하며 지나왔다. 특별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잠언 17절 말씀을 기초로 산상수훈 빛과 소금교육은 각계각층의 많은 지도자와 고신교회 목회자를 배출했다. 거창고등학교는 경남 부산지역 선교를 담당했던 호주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학교를 주남선 목사의 장남 주경중 장로 등이 뜻을 두고 인수하여 1953616일 학교인가를 받았다. 거창에 탄생한 남여공학의 첫 인문계 고등학교였다. 그러나 1956년 학교의 재정이 매우 어려워 견디지 못하고 폐교 직전에 이르렀을 때 전영창 선생이 교장을 맡아 학교를 재건했다. 그 후에 풀무원을 설립한 농부 원경선 선생과 무소유의 삶을 살다간 장기려 박사가 이사로 취임하여 학교의 기반을 든든하게 다졌다.전영창 선생은 우리나라의 미국 유학 1세대로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학교 운영의 기반을 마련했다.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대학부총장이라는 확실한 지위와 평탄 한 미래를 버리고 재정문제로 폐교 직전 에 있는 시골학교인 거창고에 부임을 하게 된다. 학교 재정이 매우 어려워 교사회에서 자신이 먼저 학교를 위해 월급을 반으로 줄이겠다고 선언을 하자 교사들도 여기에 함께 하였다. 이때부터 흩어진 학생들을 모으고, 거창 땅에 전인교육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지만 학교가 진 빚이 너무 많아서 어려움이 많았다. 어려움과 핍박이 많았으나 실력 있는 교사들을 초빙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그의 열정으로 인하여 전국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어 거창고등학교는 시골 학교로서 소문난 학교로 발전했다. 향학열에 불타는 학생들에게 복음으로 희생과 봉사를 가르쳤다.27)

2) 거창고등학교의 정체성

거창고등학교의 교육은 처음부터 끝까지 고 전영창 교장 선생님의 교육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고 전영창 교장선생님의 교육이 출발점이었고, 현재도 그 길을 가고 있으며, 종착역인 고 전영창 교장 선생님의 교육완성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다. 그렇기에, 거창고등학교 교육프로그램에는 기독교신앙을 바탕으로 한 민주시민양성이라는 그 분의 교육철학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 분의 인생 사는 법, 교육에 바친 헌신, 제자사랑은 많은 제자들과 선생님들의 인생관, 세계관, 종교관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진한 감동의 교육 그 자체였다.

3) 거창고등학교의 인재상

거창고등학교가 길러내고자 하는 인간상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우선, 대전제는 교육을 바탕으로 한 기독교정신이 아니라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교육이라는 점이다. 분명, 기독교정신이 아니라 교육에 방점이 찍혀 있으며,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교육을 통해서 길러내고 싶은 인간상은 거고인이라는, 겉으로 보기에는 다소 추상적인 보통명사화 되어 있다. ‘거고인이라는 단어가 갖는 상징성에 대해서는 거고식구들 사이에 일정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만, 그것의 함축성에 대해서는 칼로 두부 자르듯 명확한 선을 그어 의미론적 범주화가 매우 어려우며, 설령, 그런 시도를 한다 해도 거고식구 모두의 공감을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가령,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는, 불의에 눈감지 않는, 개인의 이익보다는 집단이나 국가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람이 거고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참 명제이긴 하지만 참 정의는 아닌 셈이다.28)

3. 전영창 정신

1) 애국심

웨스턴신학교 졸업고사를 2주 앞둔 상황에서 6·25전쟁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귀국을 결심한 그를 뮬더 학장이 막아섰습니다. 그때 전 선생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내가 미국에 온 것은 미국에 살기 위해서가 아니요 조국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만약 돌아가지 않으면 주님뿐만 아니라 동포들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의 목자가되기위해 미국에 왔는데 이제 위험에 빠진 양들을 모른체 한다면 목자는 커녕 사악한 사기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2주일만 있으면 졸업시험을 칠테니까. 그때까지만 기다리시오.”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는 판에 학위를 받고 안받고가 문제입니까? 나는 한시라도 빨리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뮬러학장은 마침내 그의 귀국을 허락하고 말았다.

귀국하기 전날인 18일 저녁에 뮬러박사로부터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 식사가 끝나자 뮬러학장 내외가 학장실로 가자고 했다. 뮬러박사는 학장실에서 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에게 졸업장을 수여했다. 뮬러학장 부부와 그, 세 사람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이것이 전영창의 웨스턴 신학교 졸업식이었다.29)

2) 희생정신, 봉사정신

전영창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인 19539월 도미하여 콘코디아 신학대학원에 수학하여 석사과정을 마치고 19561월에 귀국하셨다. 귀국 가방 속에는 미국 남장로교의 선교사요 한남대학교의 설립자겸 초대학장인 린턴 박사가 보낸 부학장 초빙장이 들어있었다. 린턴 박사는 전주고등학교 시절의 교장선생님이셨다.

대학 학장 등 여러 곳에서 모시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청소년들을 바르게 교육해야 희망이 있다는 소신에 따라 재정 문제로 폐교 위기에 놓인 두메산골의 거창고 교장을 맡은 것이었다. 낮은 길, 좁은 길, 희생과 봉사의 길을 택한 것이다

3) 정의감

학교 설립 후 거창고의 시련은 끝이 없었다. 대부분의 시련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바른 교육을 시키겠다는 전영창 교장과 우리 이사진의 의지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렇게 다가온 시련은 거창고를 더욱 굳건하게 단련시켰다. 학교를 설립한 지 약 10년이 흐른 1969년에 3선 개헌파동이 있었는데 거창고 학생들도 시대적 흐름을 좇아 반대데모 행렬에 참여하게 됐다. 이를 두고 교육위원회나 각 기관에서 주모자를 처벌하라는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 교장은 학생들이 틀린 주장을 한 게 아니라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특히 교육위원회와 교육청은 집요하게 거창고를 공격해 왔다. (중략) 이를 빌미로 교장임명을 취소해 버렸다. 나는(원경선(1914~2013) 이사장) 학교재단 이사인 장기려(1911~1995) 박사와 함께 부산에 있던 교육청으로 찾아갔지만 교육감도 어쩔 수 없다고 뒤로 물러서는 것이었다. 소송을 했다. (중략) 소송은 우리의 승리로 끝났다.30)

4) 근검절약 정신

전영창 교장은 위대한 애국자요, 설교자이다. 당시 그는 미국의 유명한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와 동기 동창으로 미국 웨스턴 신학교 출신이었다. 그는 당연히 목사가 되어야 하고, 신학교 교수로 초청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교수도 마다하고 목사가 되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꿈은 젊은 청년 곧 고등학교 학생들을 철저히 성경적이고 하나님 중심 사상의 인물로 키워서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세우려고 했다.

전영창은 거창에 다 쓰러져가는 학교를 인수해서 거창고등학교를 만들고, (중략)그 자신은 밤색 골덴 제건복을 입고 거름을 저나르며, 강단에 설 때는 불꽃같은 메시지를 통해서 청년들을 깨우고 신앙의 확신을 주었다. 그가 청년 시절에 결혼을 해야 하는데,(중략)무명 바지 저고리로 만들어 그 옷을 입고 장가를 들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는 1961'진주 봉래동교회' 전국 S.F.C 특강 때 내가 직접 들었다.

후일 1972년 내가 화란의 암스텔벤이란 조그만 집에 혼자 살 때, 어느 날 갑자기 전영창 교장이 화란에 모금 운동 때문에 왔었다. (중략) "정목사님! 하룻밤 재워주세요. 내가 가진 달러($)는 공금이니 모두 학교에 보냈습니다. 호텔에 갈 돈이 없으니 하룻밤 신세를 집시다고 했다. (중략) 그는 비록 옷은 제건복을 입었지만 신학자이고,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지만 낮은 자리에서 대한민국의 청년들에게 하나님 중심 사상과 세계를 향한 꿈을 심어주는 불같은 외침에 그의 옷은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근검, 절약, 검소한 삶을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실천하면서 귀한 인재들을 키워냈다.31)

4. 전영창의 교육

1)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민주시민교육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이라는 수식어구가 바로 거고인을 묘사하기에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다. 한마디로, 거창고등학교의 특색교육은 바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민주시민을 양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기독교정신민주시민이라는 표현이 함축하고 있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가치관, 세계관, 인간관, 종교관을 가진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학생들에게 정규교과 시간에 경험해 볼 수 없는 탈교과적 자극과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마련된 거창고등학교의 특색교육프로그램들은 수십년의 전통을 이어오는 것도 있고, 시대상황에 맞게 변형되기도 하고 새로 도입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특색교육 프로그램이 학생들의 삶에 끼친 영향에 대한 몇몇 체계적 학위논문이 있다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대부분의 거창고등학교 졸업생들에게 거창고등학교란,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곳, 그리운 곳, 선생님들이 보고 싶은 곳, 친구들과 함께 했던 순간들이 삶을 소중하게 여기며 하루를 감사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자양분을 제공해 주었던 곳, 평생 간직하고 싶은 가치들을 몸과 가슴으로 느끼며 어느새 인생의 일부분이 되어 버렸던 곳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은 이런 특색교육프로그램의 역할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32)

2) 인성교육, 전인교육, 자율교육

새 학기가 시작하는 4월에는 봄 예술제를, 6월이면 12일의 봄소풍, 방학 때는 동아리별 활동, 가을에는 연극제와 음악제를 연다. 이런 활동들은 학생들이 계획하고 진행하고 스스로 참여해 치른다. 교사들은 울타리 역할만 할 뿐이다.·가을마다 열리는 교내 체육대회와 학예발표회는 이후 23일 청소년 수련활동의 본보기가 되었다.

교문도 울타리도 없는 학교, 겨울에 눈 내리면 수업하다 말고 뒷산으로 몰려나가 토끼몰이에 열중하고, 진학을 못하는 학생들은 전용 운전 연습장에서 방과후 실습을 해서 운전면허증을 따게 했다. 직업교육이다. 학교 한 켠에 마련된 텃밭에서 농사 짓는 법을 배울 만큼 입시와는 동떨어진 인성교육에 익숙하다. 때문에 인성교육의 대명사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물론 입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도 괄목할 성과를 낸 덕이 크다.33)

3) 신앙교육, 가치관 교육

거창고는 인문계 고등학교지만 교육의 1차 목표는 대학 보내기가 아니다. ‘사람 만들기이다. 기독교 신앙을 통한 정신교육, 가치관 교육을 하고 있는 거창고의 교육이념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구약 성서잠언 17절의 말씀을 기초로 하고, 신약성서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 나오는 빛과 소금을 교육 목표로 삼고 있다. 경쟁에서 이기는 삶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남과 더불어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가치관을 습득하게 하고,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 아니라 모두가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지향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 학교에는 교목인 목사님이 상주한다. 매주 화요일 1교시에 전체 예배를 하고, 전 학년이 매주 한 시간씩 성경수업을 받는다. 이 외에 절기예배, 신앙집회의 시간이 있다. 신앙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친다.

4) 개척교육, 모험교육

직업선택 10계명1956년부터 20년간 이 학교 교장을 맡았던 전영창 선생의 철학과 가르침을 그의 아들이자 4·6대 교장이었던 전성은 선생과 5대 교장 도재원 선생이 계명 형태로 정리한 것이다. 졸업생들은 학교 다닐 때 직업선택 십계명을 따로 배운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도 세상 살면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 십계명을 꼽는다.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을 절대 가지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을 가라

6. 장래성이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을 바랄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직업 선택 십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직업 선택도 성경의 관점에서 이해된 개념으로 가르친다. ‘어떤 꿈은 꿈이고, 어떤 꿈은 꿈이 아닌지, 어떤 길은 가지 말아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마태복음 713-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잠언 1412절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는 바른길 같으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라

로마서8장 십자가 없이 면류관도 없다.

직업 선택 십계명은 기독교의 정신을 모르는 사람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전영창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이 바로 이런 희생의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직업 선택 십계명이 학생들에게 더 큰 감동을 주었던 것은 바로 전영창이 최고의 공부를 했지만 막상 직업을 선택을 할 때는 희생적인 직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3년 동안 거창고에서 배운 것은 위대한 사람이 되어라, 세상을 바꿀 정치인이 되어라, 기독교 정신을 전파할 선교사가 되어라, 훌륭한 기업인이 되어라 같은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어떤 일을 하든지 을 이루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랑과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고, 이 땅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저는 직업십계명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전혀 실천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하지만 우리 모두에게서 가장 중요한 어떤 선택의 순간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순간에 내가 가진 것을 모두 걸고 남들이 절대로 하지 않을 결정을 내리는 것. 직업십계명이 우리에게 말하는 게 이런 것이 아닐까요?”34)

직업선택의 십계는 거창고 강당 후면 벽에 있다
직업선택의 십계는 거창고 강당 후면 벽에 있다

5. 전영창이 키운 거고인

전영창 선생은 자주 꿈에 대하여 말하였다. Boys, be ambitious(소년소녀들이여 대망을 품어라), No cross, no crown( 고난 없이 영광 없다 ), 적극적 사고방식(positive thinking),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 결코 포기하지 말라(Never give up), 불의와 타협하지 말라, Serendipity(우연히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 사필귀정(事必歸正), 남아입지출향관(男兒立志出鄕關) 학약불성사불환(學若不成死不還) 사나이 뜻을 세워 고향을 떠났으면 배워서 뜻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죽어도 돌아가지 않으리, 빛과 소금 같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교육은 그의 삶 자체였고 간증이었다. 실천이었다. 그의 가치관, 인생관, 기독교 신앙관은 졸업이후 수십 년이 지나도 기억하며 그렇게 살고 있다.35)

제자들은 세계에 흩어져 각 분야에서 희생 봉사하는 모범을 보이며 스승의 얼굴에 누를 끼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 특별히 각기 다른 교파에 목사 장로 권사가 백여 명, 총장, 학장, 판사, 검사, 교수, 의사, 간호사, 교육부 고위공무원을 비롯하여 초중고 교장, 교사, 사장, 기자, 방송위원, 화가, 문필가 등 사회에 진출하였으며,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사회봉사자들로 수고하고 있다.

2003년 경남 거창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최지헌학생의 답사

거고인 건축가가 세운 다리는 무너지지 않고

거고인 농부가 키운 작물은 안심하고 먹을 수 있으며

거고인 의사는 사람의 목숨을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

거고인 판사가 내린 판결은 믿을 수 있고

거고인 직공이 만든 옷은 단추가 잘 떨어지지 않으며

거고인 선생님에게는 안심하고 자녀를 맡길 수 있다.

거고인 관리는 뇌물을 받지 않고

거고인 기자는 거짓을 전하지 않으며

거고인 역사가는 그 무엇보다 진실을 목말라 한다.

그래서 세상은 거고를 빛이요 소금이라고 한다.

거창고 동문 중에는 기업체의 회장 등 사회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이 많지만 졸업생들 중 상당수는 교육자의 길을 택했고 기독교계 학교인 만큼 선교활동을 하는 이들이 많다. 의료 선교를 위해 의대에 진학하는 경우는 있어도, 법대 진학생이 드문 것이 거창고의 전통이다. 유상부(포스코 회장) 전성우(대한항공 상무) 신성범(국회의원) 김도호(공군소장) 김형식(한국재활복지대학학장) 등 이다. 거창고 출신으로 고신교단 목회자로 배출된 인사는 많다. 임종수 목사(교단 총무),이영한 목사(교단 사무총장) 김경영 목사 (경주교회 원로),김세중 목사 (김해 활천교회 담임),천종권 목사 (합동, 전주교회) 김만주 목사 (개혁, 옥중교회), 정상시 목사 (한신, 안양교회)),천광신 목사(언약교회 담임) 유연수 목사 (수영교회 담임), 원대연 목사(마산교회 담임) 등이다. 통합 측의 류영모 목사 (한소망교회 담임, 통합총회장, 한국교회총연합대표), 감리교측의 김정석 목사(광림교회 담임) 등이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교육부장관을 못 시켜드려 죄송하다고 했던 전성은 전 거창고등학교 교장은 전영창 선생의 아들로 서울대를 졸업하고 1965년부터 거창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교장을 맡았다. 20093월 대통령직속기관인 교육혁신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3권의 교육관련 저서가 있다.36)

6. 전영창 추모

1) 1주기 추모식에서 6회 졸업생 신중신의 추모시

님은 하나님의 목자(牧者)

이 고장에 오시어

여호와를 경외함과

십자가 보혈(寶血)의 뜻을 받들어 행하시고

님은 끓는 정열, 타오르는 신념으로

이 학원을 일으켜 세워

진리, 사랑, 정의의 구현으로

교육의 거룩한 사표(師表)를 보이시다

불의(不義) 앞에서는

맹수보다 더하고

일신의 고난과 의무 밑에선

위대한 노예로 순()했던 이

님은 살아생전에

우리에게 소금과 빛이었고

죽어선 한 알의 밀알로

이 땅에 묻히시다

이글은 전영창 교장의 동상 아래에 새겨진 추모의 글이다.

2) 로버트 슐러의 추모

로버트 슐러 목사는 경남 거창고등학교를 찾았습니다.로버트 슐러 목사는 한국인 최초 미국유학생이었던 전영창 선생의 룸메이트로 청년시절을 함께 보냈습니다. 이후 친구의 교육열에 반한 슐러 목사는 거창고의 신축 당시 13만 달러를 기부하는 등 한국 사랑으로 이어졌습니다.

잊지 못하던 옛 친구와의 만남을 위해 80세 노구를 이끌고 경남 거창을 찾은 슐러 목사는 특별강연에서 전영창 교장과의 인연을 학생들에게 전했습니다.

I can. I will. I believe. 그립던 친구와 해후하는 즐거움을 맛본 로버트 슐러 목사. 2시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에겐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가슴 뭉클한 시간이었습니다.37)

3)성소균의 31주기 전영창 교장 추모

전영창 선생님은 귀국하자마자 부산 제3영도교회를 본부로 삼아 구호활동을 전개하였다. 하루는 부산 부둣가에서 병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피난민 여인을 목격하고 병원 설립을 결심 복음구호의원(지금의 복음병원)을 설립하였는데, 그때가 전영창 선생님이 34살 때 일이었다.38)

부정 불의의 순풍보다 정의와 역경의 돛을 올린 개척자

훈화마다 야망과 희생과 봉사를 외치신 광야의 음성

빛과 소금이 되신 사도의 모범스승

끝내는 한 알의 밀알로 승화 되신 거인

선교와 교육에 생명을 기꺼이 바치신 하나님의 종

날개에 풍긴 사랑의 향기 온누리 퍼지리이다

보이신 숭고한 예수사랑

돌비에 새겨 길이길이 전하리이다

어린 맘에 심은 씨앗 철따라 불꽃으로 피고

사랑과 야망의 알에서 깨어난 희망새들

세계를 누비리이다

4) 전영창 선생 추모공원 낮은 정원완공

2002년 세상의 낮은 곳을 향해 십자가를 지라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기리는 낮은 정원을 만들고 바람벽 앞에 작은 벤치하나를 놓아 선생님의 뜻을 기억하기 위해 낮은 정원을 만들었다.39)

낮은 정원 (2020 준공)
낮은 정원 (2020 준공)
No cross, no crown(바람의 벽)
No cross, no crown(바람의 벽)

5) 정남환의 회고

전영창 교장 선생님께서 천국으로 가신 지 46년이 되었다. “내가 대학2학년 때 그러니까 1976년 봄 갑자기 선생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셨다. 필자는 교장선생님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맥박이 정지되고 호흡이 멈추어진 교장선생님은 병원 침대에 실려 D병실을 떠나 중환자실을 지나 앰블란스로 옮겨졌다. 동산병원 병실 입구에 대기하던 앰블란스는 거창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이 세상을 떠나시는 마지막 전영창 교장선생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많이도 울었다. 김성복 간호사도 이금도 목사님도 계속 울었다.”40)

눈이 오는 날, 학교 수업을 취소하고 토끼를 몰러 가는 놀이가 기억난다.

첫눈이 오면 , 그날 수업을 취소하고 학교 소유의 거고농장으로 간다. 그곳에서 소복히 쌓인 눈들로 눈싸움을 하기도 하고, 눈사람을 만들기도 하고, 썰매를 타기도 한다. 토끼몰이는 보통 12시 전후로 끝낸다. 이후 학교에 돌아오면 간단히 결산을 한다.

고등학교시절 내가 화장실청소를 하고 있는데 수세식변기가 막혀서 물이 넘치고 있었다. 그때 선생님께서 화장실에 오셨다. 선생님께서는 손수 팔을 걷으시어 오물을 치우시고 변기를 뚫으셨다. 빙그레 웃으시면서 공부하러가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예수님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예수님의 삶을 가르치셨다.

1985년 필자의 미국유학시절 귀국길에 로스엔젤레스에 체류하면서 로버트슐러(1926~2015)목사님이 계시는 수정교회와 디즈니랜드를 찾았다. 공중전화부스에서 죽으면 죽으리라의 저자 안이숙 여사님에게 전화를 드렸다. “전영창 교장선생님께서 죽으면 죽으리라 안이숙여사님 말씀 많이 하셨습니다.” 안이숙여사님은 전영창교장은 돌아가신 것 알아요. 귀국해서 다음 세대에게 예수님을 잘 믿도록 잘 가르쳐주세요. 그것이 교장선생님의 뜻을 이 땅에 펼치는 것입니다.” 라고 하셨다.

1991년 거창고등학교 영어교사로 1년간 근무하였고 2009년 거창고등학교 총동문회 사무총장으로 섬겼다. 거창고 학생으로 3년을 전영창선생님으로부터 배우고 그의 임종을 보았다. 그가 세운 학교의 교사로 일하면서 그리고 총동문회 일을 하면서 거고정신을 입체적으로 경험하였다. 2010년 대학교수로 고입, 대입 전형에 관해 모교학생들과 교사들에게 특강을 하였다. 그러면서 거창고 후배 학생들과 거창고 교사들과 교류하였다. 아내의 말에서 거고정신은 내 삶속에 남아 있음이 증명된다. “전영창 교장선생님은 남편의 작은 예수입니다, 그분의 생애 속에 남편은 존재했습니다. 그분의 신앙, 그분의 사랑, 그분의 열정. 그분의 헌신. 그분의 글로벌한 기독교 세계관이 남편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7. 전영창에 관한 복음병원 기록 수정 청원 - 서울남부노회의 제72회 총회 청원

2022227일 서울강남교회( 강영진 담임목사 ) 당회는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설립자, 초대원장, 설립일 수정청원 건을 가결했습니다.

서울강남교회 당회 (당회장 강영진 목사)
서울강남교회 당회 (당회장 강영진 목사)

제 목 / 제72회 고신총회 상정안건 : 복음병원 설립자, 설립일, 초대원장 수정 건

제안 설명 :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115일 전영창 선생이 미국에서 모금한 5천불로 차봉덕 원장을 모시고 부산 제3영도교회 창고에서 설립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껏 복음병원

의 설립자 및 초대원장은 장기려 박사로, 설립일은 1951621일로 알려져 왔고 그렇게 지키고 있습니다. 1951621일은 장기려 박사가 여전히 부산 제3육군병원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고, 이날 전영창 선생이 한상동 목사, 김상도 목사를 모시고 장기려 박사를 찾아가 복음진료소 원장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고, 장기려 박사는 이를 수락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621일은 장기려 박사가 복음진료소 원장을 맡겠다고 수락한 날입니다. 그리고 72일 복음진료소로 부임했습니다. 이에 대해 장기려 박사도 여러 차례 복음병원 설립자는 전영창 선생임을 밝혔고 (한국일보 1976. 7.6일자 신문), 자신이 영도의 복음진료소에 갔을 때 차봉덕 원장이 근무하고 있었다는 점도 밝힘으로 초대원장도 아님을 밝혔습니다. 일제의 침략역사를 왜곡 날조하는 일본을 비판하면서 우리 고신의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두는 것은 코람데오 정신이 아닐 것입니다.

청원 사항 : 본 노회는 복음병원 설립자(전영창), 설립일(1951115), 초대원장(차봉덕)으로 수정해 줄 것을 총회에 상정하오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41)

경남김해노회 윤은수 목사, 부산서부노회 김경준 목사, 서울남부노회 강영진 목사가 청원한 복음병원설립자, 설립일, 초대원장 수정 건은 1년간 연구조사해서 다음 총회에 보고하기로 가결되었습니다.

고신총회 제72회 학교법인 이사회 보고(2022년 9월22일 오후 6시 20분)
고신총회 제72회 학교법인 이사회 보고(2022년 9월22일 오후 6시 20분)

 

. 고신 70주년에 전영창 연구를 바라며

역사학은 세계의 변화를 초연하게 다루는 고고한 학문인 것 같지만, 역사학도 변화한다. 외부의 세계가 변화하는 것에 맞춰 변하기도 하고, 역사학 내부의 필연적인 요구에 의해 변하기도 한다. 역사는 하나의 해석이며, 그 해석에는 역사가의 견해가 들어간다. 그렇게 서술된 역사는 사회와 그 구성원에게 영향을 미친다. 모든 역사가들이 동의할 수 있는 역사 해석이 나올 가능성은 많지 않다. 그렇기에 역사적 주장은 수시로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나아가 기존의 역사 해석에 도전하는 것은 사회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민주적 사고방식이다. 따라서 역사적 사고는 곧 개방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고방식이다.42) 미시사(微視史, Microhistory)연구는 거시적인 역사적 구조보다는 인간 개인이나 소집단의 삶을 탐색하는 역사연구를 말한다. 구술사(口述史,Oral history)연구는 과거의 사건 또는 역사 과정을 경험한 참여자들이나 증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증언을 채록하고 그 구술 증언들에 의거해 역사를 연구하고 서술하는 방법론이다.43) 미사가(微視史家)나 구술사(口述史家)는 자신이 역사의 현장에 있는 것처럼 관련 자료를 읽어 나가면서 사람들의 가치관과 문화적 태도를 최대한 복원하고자 한다. 나아가 일기, 연대기, 편지, 탄원서, 이차기록, 녹취록 등 이전까지 고문서 자료에 비해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무시되었던 이른바 내러티브(narrative)자료까지도 십분 활용한다.44)

고신총회 70주년과 전영창을 주제로 발표준비를 하면서 다양한 자료를 접하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기억에 의존하여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부모님으로 혹은 같이 근무하면서 경험했던 이야기와 자료를 접할 수 있었다. 전영창 선생은 필자가 직접 3년을 배운 스승이었기에 접근하기는 비교적 쉬웠다. 몇 십년 전에 발간했던 작은 책자 하나와 당시에 남겼던 회고록이나 인터뷰기사를 만나는 데서 얻는 기쁨은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미시사 연구나 구술사 연구방법을 동원해도 쉽지 않은 연구이지만 향후 좀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사람을 만나고 관련 자료를 찾고 증언을 수집해가면 조금씩 발전된 모습의 기록으로 객관화 될 것으로 믿는다. 권력에 의해 묻혀지고 잊혀진 보통 사람들의 삶을 찾아서 복원하는 의미 있는 도전이 될 것이라 믿는다. 세 분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전영창 선생님, 그는 6.25 동란으로 온 나라가 초토화 되어 어려웠던 때에 목돈 5,000불과 5년간 매월500달러를 후원받아 와서,

a. 복음병원을 창설 하셨고, 복음병원에서 해직 당하셨다

b. 복음병원에 와서 간호대학교 건축신청서 감수를 잘 하셔서, 복음간호대학 교사 짓는데 일

(一助)하셨고, 이 일을 하시다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

c. 17만 불을 원조 받아 거창고등학교 교사증축을 하셨다.

전영창 선생님은 하나님이 일찍부터 택하시고 복음병원과 한국 교육계를 위하여 쓰신 분이심을 나는 증언하고 싶다. 복음병원 총무과장직을 해직당하여 외롭게 방황 했던 때가 있었지만 하나님은 또 한 번 복음병원 발전을 위해 귀중한 일을 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세상을 떠나신 후였지만 그의 꿈을 이루어 주셔서 후손에게 안겨주셨다. 의인의 기도는 죽은 후에도 소멸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나는 감히 증언 한다.45)

전영창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재평가를 하는 것이 늦은 감은 들지만 교단과 병원이 역사적 관점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46)

반세기도 훨씬 지난 지금 교단설립자 한상동 만큼이나 복음병원 설립자 전영창과 초대원장 차봉덕도 함께 그 공적을 인정하고 역사를 바로 세워 간다면 교단과 복음병원을 위해서도 바람직하고 그 후손들과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리라 확신한다.47)

고신총회 70주년 복음병원 71주년 거창고등학교 설립69주년이 지난다. 고신총회 설립 70주년 기념 학술집을 발간했고, 복음병원은 개원 71주년 기념행사를 했다. 고신은 고신대학교 학부와 고려신학대학원에서 목사를 양성하고 있다. 직원 1912명 월평균 외래환자 42,516명의 복음병원은 의료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고신대학교는 26개 학부전공수업을 통한 대학교육을 하고 있다.48)

거창고등학교는 주남선 목사(1888~1951)의 아들 주경중 장로가 세웠다. 초기 교신교단과 관계가 있었던 초기 거창고는 제3대 교장 전영창선생의 인수 이후 올해로 10,215명의 졸업생 배출하였다.

고신교단의 교회들과 복음병원과 고신대학교 그리고 거창고등학교를 보면 구한말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병원을 세우고 학교를 세운 패턴이다. 70년을 지나는 고신총회는 고신교회와 복음병원과 고신대학교의 미래를 살펴야한다. 70년을 지나는 거창고등학교는 샛별중학교와 샛별초등학교와 함께 초중고교육의 미래를 살펴야한다. 고신총회 70년에는 전영창이 설립했던 복음병원 초기의 기록을 바로잡고 그의 복음병원 설립정신을 재조명할 시간이 필요하다. 초기 SFC 형성기와 그 후 SFC운동에 미친 전영창의 영향을 살펴야 할 때이다. 거창고등학교의 교육을 연구하여 우리나라 초중고 교육의 대안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다. 전영창선생의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민주시민교육 모델은 21세기 기독 대안교육의 좋은 사례일 것이다.

거창고등학교에 있는 전영창선생 동상/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에 설립자 전영창선생의 동상이 서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거창고등학교에 있는 전영창선생 동상/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에 설립자 전영창선생의 동상이 서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미주

1) 이상규.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 70년사. 총회출판국. 2022.

2) 정남환. 고신대 복음병원 개원기념일을 살펴본다. 2022.06.22.

https://m.blog.naver.com/jnh1955/222783760526

3) 고신대학교 복음병원. 병원연혁. 2022.11.20.

https://www.kosinmed.or.kr/01hospital/hospital03.htm#hospital03

4) 장기려. 영아와 유아의 찬미. 복음의원. 1953. 2p,

5) 장기려. 나의 이력서. 한국일보. 1976.07.06.

6) 전영창, 전영창 전집2. 마루 그래픽스. 2013. p271.

7) 이재술. 고신교단 중요기관 초창기의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 코람데오 닷컴 2012.11.27.

8) 이재술. 고신교단 중요기관 초창기의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 코람데오 닷컴 2012.12.10.

9) 장기려. 영아와 유아의 찬미. 복음의원. 1971.

10) 장기려. 영아와 유아의 찬미. 부산복음병원. 1971. 67p,

11) 정기상. 남기고 싶은 이야기 뒤돌아보는 복음병원의 시작과 발전”.미발간 원고. 2021. 4~7pp

12) 지강유철, 장기려 그 사람. 홍성사. 2007.269P,

13) 나삼진.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14) 복음병원의 설립과 고신의 사회적 영성. 고신뉴스2022.02.23.

14) 고명길. 복음병원설립자 전영창. 2회 고신 사회복지포럼 및 세미나. 2015. 52~68pp

15) 고명길. 나삼진 목사의 복음병원 설립 3인설(전영창, 한상동, 장기려)에 대한 반론, 고신뉴스. 2022.07.13.

16) 고명길. 나삼진 목사의 복음병원 설립 3인설 (전영창, 한상동, 장기려)은 사실일까? 코람데오닷컴 .2022.07.18.

17) 장기려. 영아와 유아의 찬미. 복음의원. 1953. 2p,

18) 정기상. 남기고 싶은 이야기 뒤돌아보는 복음병원의 시작과 발전”.미발간 원고. 2021.7p

19) 이재술. 복음병원의 초창기와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들. 코람데오 닷컴 2012.12.10.

20) 금주의 고신 역사 - 그때 그 시절(10) 1953111SFC 1회 전국학생대회로 전국조직 출범. 고신뉴스. 2022.01.12.

21) 조성국. 고신교회 교회교육 70년 역사와 미래과제. 고신총회 설립 70주년 기념 학술집.고신언론사.22p

22) 오성도. 학생신앙운동 50년 화보.SFC출판부.2001.9p 학생신앙운동의 발자취와 역사.2022.08.04.

23) 학생신앙운동의 발자취와 역사. 2022.08.04.

https://m.cafe.naver.com/ca-fe/web/cafes/29637787/articles/372?menuId=2

24) 오성도. 학생신앙운동 50년 화보.SFC출판부. 2001.33p

25) 강기수. “전영창의 생애와 교육사상”. 교육사상 연구27-3.2013

26) 조성국. “전영창의 기독교교육의 기초적 신념과 교육적 인간상고신신학16, 2014.

27) 금주의 고신 역사 - 그때 그시절(30) 1953616일 거창고등학교 설립인가 2022.06.15. 고신뉴

28) 거창고등학교 홈페이지. 학교소개.

http://geochang-h.gne.go.kr/geochang-h/cm/cntnts/cntntsView.do?mi=146047&cntntsId=8730

29) 거창고등학회. 전성은 감수. 배평모지음 거창고등학교 이야기, 종로서적 1995.pp23~25

30) 원경선. [나의 이력서]생명 풀무꾼 원경선 <46> 거창고의 교육이념. 한국일보.2003.11.01.

31) 정성구. 정성구 박사 칼럼, 옷이 날개인가? 시사미래신문. 2022.04.04.

32) 거창고등학교 홈페이지. 학교소개.

http://geochang-h.gne.go.kr/geochang-h/cm/cntnts/cntntsView.do?mi=146047&cntntsId=8730

33) 거창고, 폐허를 일군 인성과 기본의 60년 신화. 베리타스알파, 2013.11.29.

34) 강현정·전성은. 거창고 아이들의 직업을 찾는 위대한 질문. 메디치미디어.2015. 223p

35) 거창고등학회. 거창고등학교의 스승 전영창 이야기. 종로서적.1996

36) 전성은. 왜 학교는 불행한가. 메디치미디어. 2011

전성은. 왜 교육은 역사를 불행하게 하는가. 메디치미디어. 2014

전성은. 왜 부모는 자녀는 불행하게 만드는가. 메디치미디어. 2019

37) https://www.cts.tv/news/view?ncate=THMNWS10&dpid=66234 2007.08.08.

38) 성소균. 추모의 꽃다발. 전영창 교장 추모. 기독교보.2007.06.02.

39) 전영창 선생 추모공원 낮은 정원완공식. 코람데오 닷컴. 2020.06.13.

40) 정남환. 전영창 교장선생님 이 세상 떠나시던 날, 거창고등학교 개교50주년기념 동문회고록.2004.

41) 학교법인 이사회 배정안건. 고신총회 제72회 회의안 및 보고서. 고신총회. 2022.127~129pp

42) 제임스 M. 배너 주니어.김한종,박선영 번역. 끊임없이 변하는 과거. 책과 함께. 2017.20p

43) 곽차섭. 다시 미시사란 무엇인가?. 푸른역사. 2017

44) 김귀옥. 구술사 연구. 한울 .2014

45) 정기상. 남기고 싶은 이야기 뒤돌아보는 복음병원의 시작과 발전”.미발간 원고. 2021.36p

46) 신이건. 거창고등학교 고() 전영창 선생을 재조명한다 한국기독신문. 2013.03.16.

47) 고명길 복음병원 설립자, 전영창인가 장기려인가? 코람데오닷컴, 2015.5.5.

48) 장경미 복음병원의 현실과 전망. 고신70주년과 복음병원.2022 미래교회포럼.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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