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병목회연구소 연합특별강좌가 121일 서울 남포교회당에서 약 800여 명의 목사와 성도들이 운집한 가운데 한국목회자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박영선 목사가 강사로 나와 특별강좌를 열었다.

과연 설교자는 어떤 사람이며, 어떻게 설교를 해야 하고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가를 해부하기 위해 박목사는 오전에는 <대표성>에 대해 강의하고 오후에는 <구체성>에 대해 강의를 했다. 그 강의를 요약해 본다. 

▲ 강의하는 박영선 목사

대표성

하나님은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대표자를 세우신다. 그 중심에 자기 아들을 세웠다. 예수가 바로 그분이다. 요한복음 1장에 요한은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소개한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것이다. 그 예수는 로고스이다. 말씀이다. 하나님의 메시지이다.

그는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도 하셨지만 삶으로 말씀하시기도 했다. 하나님의 메시지의 클라이맥스(Climax)는 십자가를 지심이었다.

설교자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다. 그도 역시 사람들 중에 대표자로 세운 사람이다.

신명기 18:18절에 보면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고 하셨다. 너희 중에 하나를 말씀을 전하는 대표자로 세우는 것이라 하신다. 무엇을 위해서일까어떤 말을 하라는 것일까?

베드로의 설교: 사도행전 4:10-12절에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했는데 이는 베드로의 설교이다.

베드로는 본래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는 어부였다. 그런데 그가 설교를 한다. 예수에 대해 설교를 하는 것이다. 그가 보고 듣고 믿는 예수를 전한 것이다. 그것은 진리다. 진리를 듣는 사람들은 놀란다. 학문이 없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저런 말을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설교는 예수를 증거하기에 분명했다. 이것이 이 시대 모든 설교자들의 목적이다. 설교를 잘해서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굴복시킬 것이라는 생각은 말라.

설교자는 당신의 좋은 설교에 변화 받았다고 하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듣더라도 속지 말라. 죄인을 변화 시키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우리가 설교를 못한다고 낙심하고 사람을 이해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하지만 교인들은 되레 못 알아들으면 잘한다고 생각한다. 낙심하거나 주눅 들지 말라.

설교를 맡은 사람들은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자기를 세우려는 노력은 다 헛된 것이다. 오늘 교계를 보면 저놈은 나쁜 목사요 하고 나팔을 불어댄다. 남을 비난하는 나팔 불어서 하나님이 무슨 영광을 얻으실까? 자기 얼굴에 침 뱉기 아닌가? 예수만 전하는 목사가 되라.

모세의 정체성: 우리는 모세의 정체성을 이해해야 한다.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라고 했다. 12:3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했다. 왜 그랬을까? 의분에 못 이겨 사람을 쳐 죽일 만큼 과격했던 모세가 어떻게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였을까?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목표를 알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볼 때, 하나님은 쓰레기 같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목표로 하여 자신을 부르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겸손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쓰레기 같은 이스라엘에 속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은 모세의 시각이었다. 그는 민수기 20:10절에 보면 이 패역한 너희여라고 이스라엘을 지칭했다. 모세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렇지만 하나님에게는 소중한 자식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할아버지의 품에 안긴 손자를 두고 못 생겼다고 하는 것은 개의 귀를 잡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못 생겨도 쓰레기 같아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식이었다. 하나님은 그렇게 말해도 되지만 사람은 그렇게 말하면 하나님은 기분이 상하신다.

목사는 하나님의 목표와 방법을 알고 해야 한다. 하나님은 목사를 자기의 대표자로 세웠다 하나님의 나팔이 되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쓸 데 없는 나팔을 불거나 혹은 듣고 화내지 말고 하나님이 세우신 목표에 합당하고 충실한 나팔 되어야 한다. 

▲ 강좌가 진행되고 있는 남포교회.

구체성

이야기가 있는 드라마: 기도합시다. 사랑합시다. 하는 것은 단어의 조합일 뿐이다. 인격이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것이 감동이 되려면 구체화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구체적이 되려면 사건에 개입이 되어 실천이 일어나야 한다. 즉 구체적 실천이 있어야 감동적인 드라마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주먹을 불쑥 들이밀었다. 구정물에 손을 쑥 담그신 것이다. 그 구정물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대가를 치르셨다. 십자가의 대가를 치르시고 구원을 베푸신 것이다. 그것이 구체성이다.

미국의 위대함은 폭격에 있다. 미국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아는가? 워낙 독일군의 저항이 강해서 그 4키로 미터 정도를 초토화 시키려고 폭격을 감행했다. 하늘이 새까매질 정도로 폭격기가 떴다. 폭격기는 한 번에 수십 대가 뜨는 게 정상인데 수천대가 한꺼번에 뜬 것이다. 그리고 쑥대밭을 만들었다. 그러나 부서진 건물에 은폐한 독일군을 몰아내기 까지는 수개월이 걸리도록 육군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정답을 던졌으면 그것을 끝까지 완수해 나가야 한다.

정답은 사전에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사전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스토리가 있는 드라마를 보고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하나님도 아들을 보내 곧바로 십자가에 내주지 않았다. 많은 스토리를 만든 다음 십자가를 지게 했다.

설교는 정답만 던지면 사람들에게 감동이 없다.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정답은 던졌는데 실천이라는 스토리가 없는 한국 설교자들이 욕을 먹는 것이다. 오히려 정답을 말해놓고 그 반대로 하기 때문이다. 모든 설교를 들어보라. 다 정답이다. 정답을 던졌으면 실천도 행하라. 스토리를 만들어라.

채우시는 하나님: 그러나 우리가 설교나 실천이나 모두 정답을 채우려고 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누구처럼 그렇게 설교를 잘할 수도 없다. 누구처럼 그렇게 성자같이 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거기에 채워 넣으시는 분이 계시니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맡기고 자신은 그 실천하려는 길에만 서 있으라.

나침반은 방향을 가르쳐 주지만 길을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설교자는 나침반이 되면 된다. 오늘 다 끝내자고 하지만 하나님이 끝내시지 않으면 끝까지 가야 한다.

로마서 12:1절에 산 제물은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한다. 설교자는 아침마다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도전을 겸손히 받아들이면서 살아내야 한다. 우리에게 어느 날 사고가 찾아온다. 부도, 실패 등등. 어쩌면 살아있는 모든 일생이 대형사고이다. 그런 사고 가운데 사는 우리는 집어치울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그것을 깨닫는 것이 지혜이다.

우리는 모든 사고를 다 회복할 수 없다. 그 사고로 비어있는 공간은 하나님이 채워 넣으신다. 우리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회개, 회개, 회개만 하고 지나왔다. 앞으로 나아가야할 적극적인 기도와 행위가 없다. 우리의 진정성은 흠을 닦는 것으로만 알았다.

이제는 구체성 속에 담아야 한다. 스토리를 만들어 가야 한다. 그렇게 하도록 주님은 계속 우리를 찾아와 우리에게 도전과목을 제시한다. 그것이 설교이다.

고린도전서 1:21절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말씀하셨다. 전도(설교)는 미련한 방법이다. 말이 안 된다.

말을 해보라 말이 되는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셨다고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어 죽게 하셨다고요?

그런데 삼일 만에 살리셨다고요?

그러면 왜 죽게 내버려 두셨나요? ? 우리의 죄 땜에....

아니 도로 살리실 걸 왜 죽게 했냐고요?   네???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서 그런 방법밖엔 없나요?

설교는 믿는 것을 선포하는 것: 지식인들이 보면 말이 안 되는 것이 전도(설교)이다. 그러나 전도는 내가 그 사실을 믿는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믿는다는 데는 도리가 없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는 것이다. 내가 믿으려고 해서 믿는 게 아니라 믿음을 주니까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우리를 미쳤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고 우리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한다. 이기심도 여러 개 가지면 혼자 가질 수 없다. 나눌 수밖에 없다. 그것이 전도(설교)라고 생각하자.

그러므로 설교를 겁내지 말라. 앞뒤가 안 맞더라도 아주 멋진 말을 하고는 내려가라. 못 알아듣는 것은 청중의 책임이다. 주인공은 칼싸움을 잘할 필요가 없다. 칼을 빼는 장면과 넣는 장면만 보여주고 죽은 사람을 보여주면 모두 다 이해한다. 편집인이 편집하면 영화가 된다. 우리는 칼을 빼고 넣는 장면만 보여줘도 모자라는 부분은 하나님이 채우신다.

설교자의 권능: 바로 빌립보서 3:10-14절의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3)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의 말씀에 선포되고 있는 그 부활이다.

죽으면 부활의 영광에 들어간다. 그러나 내가 살아 있음은 너희를 위함이라고 하는 바울의 말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개고생이지만 아직도 복음을 들어야 하는 사람을 위해 살아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에게 소원이 있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목회로 끝내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다. 왜들 평범한 목회를 실패로 보는지 그것이 알고 싶다.

▲ 일병 목회연구소 회원들의 단체사진

박영선 목사의 잔잔한 그 강의에 청중은 때로 배꼽을 빼도록 웃기도 하고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도록 숙연해 지기도 했다. 한마디 한마디가 설교자를 채찍질하면서도 자부심을 불어넣고 설교 강단에 자신 있게 오를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오전 강의를 마치고 식사장소로 이동을 하면서 한 목사가 인사를 건넸다. “학교에 계실 때 저는 학생으로 교수님의 강의를 아무리 들어보았지만 난해했는데 오늘은 귀에 너무도 선명하게 쏙쏙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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