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준 박사의 ‘쉐마교육에 대한 개혁주의적 조명’ 논찬

 

▲ 현용수 박사 쉐마교육연구원 원장 쉐마교육학회 이사장

서영준 박사님(편의상 이하 발표자로 호칭함)은 자신의 논문이 논찬자인 현용수(편의상 이하 저자로 호칭함)의 저서 25권과 탈무드 번역서 7, 32권 중 2(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1-2, p. 1)과 쉐마교육학회(회장 김진섭 박사[백석대]; 부회장 안병만 박사[고신대원]) 임원들, 고용수 박사님(전 장신대 총장, 기독교교육학) 그리고 김의원 박사님(전 총신대 총장, 구약학)모두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다의 서평을 읽고 그 내용을 개혁주의적 입장에서 비평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먼저 비록 저자의 2권의 책만을 중심한다는 제약이 크지만, 저자의 책들을 읽고 연구한 데에 깊은 감사를 표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평하고자 한다.

1. 발표자는 서론에서 한국교회의 교회성장 문제를 거론하면서 자신의 논의를 설득할만한 통계 자료가 하나도 없는 것은 학문적이지 못한 것 같다.

2. 전체적으로 발표자의 논지는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은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예수님으로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는 데 있다. 삶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삶 전체를 그리스도께 헌신하며 하나님의 말씀인 기록된 성경을 따라 살아가는 것에 초점을 둔다.”(p. 2)고 요약했다. 이를 요약하면 1) “교육의 내용이 성경적인가?” 그리고 2) “그의 삶이 성경적으로 윤리적인가?”이다. 저자가 저술한 학문 분야는 인성교육론’(7)쉐마교육론’(18)이다. 본 논문에 너무 많은 부분이 오해의 여지가 많지만, 모두 다루지를 못하고 지면상 주제별로 몇 가지를 논찬한다. < >표시는 논문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3. 발표자가 4.1.1인간관의 문제’(pp. 9-10)에서 인용한 각주 23, 24, 25는 저자의 책 부모여, 자녀를 제자 삼아라1p. 59(인성교육학적 측면), 2p. 122(신언서판과 한국인과의 관계), 2p. 175(인지발달과 학문 연구에 유익한 법사상)에서 인용한 것으로 주제가 각각 다르다. 더구나 각주 24의 원본은 유대인의 인성교육 노하우 제3권에 있는 제목을 2차 인용한 것이다. 그럴지라도 저자는 각주 2425에 대한 발표자의 논지에 대한 오해를 밝히고자 한다.

4. 인용 각주 24: <양반이 예수님을 믿으면 양반교인, 상놈이 예수님을 믿으면 상놈 교인된다. 예수님 믿기 이전에 인성교육이 잘 된 사람이 성화의 과정도 쉽다> (p. 9)

이 설명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저자의 저서 현용수의 인성교육 노하우(동아일보, 2008) 4권 제61. 3. ‘신언서판과 기독교인과의 관계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바울이 개척한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전자 교회는 성령님의 은사가 많은데도 교회에 부도덕한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후자 교회는 성령님의 은사는 많지 않았지만 온 아가야 지방의 모범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전자는 타락한 항구도시의 시민들이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고, 후자는 양반들이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예는 같은 기독교인인 박윤선 박사님이나 박형룡 박사님대도 조세형과 깡패 두목 양은이파 김태촌의 차이에도 나타난다. 전자는 어린 시절 고향에서 서당을 다니며 양반교육을 받은 분들이고, 후자는 어린 시절부터 험악한 곳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전자는 예수님을 믿은 후 그분들의 생활이 모든 목사들의 모본이 되었고, 후자는 예수님을 믿고도 여러 번 죄를 지어 감옥에서 살았다.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예수님을 믿으면 인격이 변한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상대적이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강할 때는 변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약해지면 옛 습관이 다시 나타나기 쉽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기 이전 어린 시절 인성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이어령 교수가 몇 년 전에 예수님을 믿으므로 기독교의 위상이 높아졌다. 그의 인격이 예수님 믿기 이전에 형성된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믿은 후에 형성된 것인가? 물론 예수님 믿기 이전에 형성된 것이다. 바울이 다른 기독교인보다 더 훌륭한 인격을 가진 것은 예수님 믿기 이전에 어린 시절 유대식 양반교육을 잘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인성교육을 잘 시켜야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적 마음의 토양이 옥토가 되어 예수님을 믿기도 싶고 믿은 후 성화의 과정도 쉽다고 설명했다.

오늘날 전도가 힘든 이유와 기독교인이 된 이후에도 제자화가 잘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예수님 믿기 이전에 인성교육이 잘 안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예수님 믿기 이전에 인성교육을 'Pre-Evangelism'이라고 명명했는데(앞의 책, 24심리학적 측면에서 본 수직문화와 수평문화참조), 발표자는 이를 구원과 연관시키며 비판했다(p. 18). 인성교육은 복음을 위한 마음의 토양교육이지 자체를 통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복음과 인성교육의 목적을 혼동하면 안 된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는 말씀이 지적하는 바, 복음 이전의 상식의 인성교육(불신자의 인성)의 중요성은 개혁주의 신학이 특징적으로 강조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든 인간에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일반은총이 그분의 특별은총이 요구하는 인성교육의 중요성에 못하지 않게 사활적으로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5. 인용 각주 25: <어려서부터 분별없이 제멋대로 자란 사람과 비교가 안 된다> (p. 10)

발표자는 1) “유대인이 그들의 교육을 받고 자라 그들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말 그대로 어려서부터 분별없이 제멋대로 자란 사람과의 차이는 없다.” 2) “유대인의 나음은 없다.”고 단정 지으며 비유대인의 삶을 유대인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바른 자세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p. 10).

그러나 성경의 견해는 발표자의 견해와 다르다. 바울은 유대인이 비유대인보다 범사에 유익이 많다고 했다. 그 이유는 우선은 그들[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라고 했다(3:1-2, 이외에도 많음). ‘말씀을 맡은 자율법을 맡은 자’(바미치바)란 뜻이다. 유대인은 율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비유대인과 다르다. 따라서 왜 1)항의 주장이 틀렸는지 알아보자.

이것은 발표자가 복음과 성화를 혼동하는 것 같다. 복음은 구원을 받기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보혈을 믿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복음은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에게나 차이 없이 모두 열려 있다. 그러나 성화는 구원을 받은 이후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과정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이 비유대인과 달라야 한다.

정통파 유대인(이후 유대인이라 표기함)과 기독교인 중에 누가 더 성경적으로 구별된 삶을 사는지 예를 들어보자. 유대인 소녀들은 신 225절의 율법에 의거 정숙하게 무릎 밑을 덮는 긴치마를 입는다. 반면 많은 한국교회 중·고등부 여학생들은 대부분 무릎 위까지 올라가는 짧은 치마를 입는다. 전자는 율법을 지키어 구별되게 자란 소녀들이고, 후자는 분별없이 자란 소녀들이다.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이고,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에 맞는가?

또한 유대인은 신 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란 율법에 따라 입만 열면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친다. 그리고 3대가 수천 년 동안 여전히 새벽기도회’(샤하리트)에 함께 참석한다. 5계명에 따라 부모에게 매우 순종적이다. 7계명을 지키기 위해 어려서부터 남녀 간에 손을 잡는 악수는 물론 스킨십이 전혀 없다.

나는 발표자에게 묻고 싶다. 교육은 실천신학에 속하기 때문에 삶의 열매로 그 이론을 증명해야 한다. 발표자께서 그렇게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을 잘 시키는 교수나 교사들에 의해 양육 받은 청소년들이 왜 그렇게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왜 대부분 부모에게 순종적이지 못하는가? 그리고 대부분 부모들은 왜 입만 열면 자녀들에게 공부해라를 외치는가? 왜 자녀들은 새벽예배에 참석하지 않는가? 왜 대부분 중·고등부 남녀학생들이 서로 손을 잡고 스킨십을 많이 하는가? 이것이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의 한계라고 생각한다(이것이 pp. 14-15신약교회와 한국의 기독교교육역사 폄하문제에 대한 답이다). 그래서 저자는 물론 그 동안 기독교교육자들의 공헌도 많지만, 한계가 있기 때문에 대안으로 쉐마, 즉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외치는 것이다.

그러면서 발표자는 김의원 교수님(전 총신대 총장, 구약학)이 저자의 잃어버린 구약의 지상명령 쉐마를 읽고 쓴 서평에서 한국교회는 기독교교육에 믿음과 은혜만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마땅히 가르쳐야 할 율법을 가르치지 못한 결과로 자녀들이 방자해 지고 있다.”(p. 16)고 썼는데 그에 대한 대안이 저자의 쉐마교육’(저자의 책 잃어버린 구약의 지상명령 쉐마2, p. 20, 22)이라는 것을 생략했다. 따라서 발표자는 수십 년 동안 기독교교육을 연구한 고용수 박사님(전 장신대 총장)이나 구약학을 전공한 김의원, 김진섭 박사님 모두를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 한 것은 발표자의 함의점(pp. 19-21)에서는 저자가 부모들에게 가정을 찾게 해준 것, 기독교교육을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것, 그리고 유대인의 대화법 및 부모교육을 강조하는 것 등은 극찬했다. 앞의 글들과 매우 모순이다. 그의 글을 보자.

쉐마교육이 기독교 가정교육에 있어서 성경을 교육의 기초로, 교육의 내용으로 구성한 것은 가장 잘 한 일이라 여겨진다. 성경이 중요한 줄 알지만 그 성경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성경이 왜 교육의 기초이며 교육의 내용인지를 설명하고 설득하여 교육 그 자체로 교육신학을 정리한 것은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이라 할 만 하다. (p. 20)

그러면서 결론 부분은 꿩 잡는 게 매’(p. 21)라는 용어를 쓰면서 쉐마교육의 검증을 요구한다. 검증받을 것은 현재 신학교에서 기독교교육을 전공한 이들이 꿩 잡는 게 매라고 교회에서 말씀과 기도 대신에 학생들에게 재미 위주로 거룩하지 못한 세속적인 수평문화의 방법으로 가르치는 것을 검증해야 한다.

쉐마교육은 이미 국내외 저명한 신학자들(메릴 박사[달라스신대원, 구약학], 덕스 박사[탈봇신대원장, 기독교교육학], 고용수 박사[기독교교육학], 이정근 박사[기독교교육학], 김의원 박사[구약학], 김진섭 박사[구약학], 윤사무엘 박사[구약학], 정성구 박사[실천신학], 김상복 박사[신약학])과학회들(미국 ETS[당시 부회장 메릴 박사], 한국기독교교육학회[당시 회장 이금만 박사] 등 많은 학회에서 검증되었다. 그 외 저자의 교육에 참석했던 수많은 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검증을 받았다[쉐마교육을 아십니까?(쉐마, 2007) 참조].

6. 3항에 이어 발표자가 논증한 쉐마 가정교육이 갖는 문제점’(pp. 12-14)에 대해 오해를 살펴보자. 발표자는 유대인의 가정교육 결과가 그들이 예수님(복음)을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말했다.

이것 역시 발표자가 유대인의 구원과 선민의 성화를 구별치 못한데서 나온 말이다. 유대인은 성경적인 가정교육을 통하여 성화는 잘 되었는데, 왜 예수님을 거부하여 구원을 받지 못했는가? 바울은 하나님이 이방의 구원을 위해 유대인을 버리셔야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저희(유대인)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11:15).

그 이유는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다(벧전 2:8b). 즉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구약시대는 유대인을 사용하셨고 신약시대는 이방인 기독교인을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말에는 온 이스라엘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11:26). 그래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다”(11:25-27). 즉 유대인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완악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 예정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바울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신의 동족이며 하나님의 선민이었던 유대인의 입장을 이렇게 설명했다. “복음으로 하면 저희(유대인)가 너희(이방인)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다”(11:28). 유대인이 넘어짐으로 이방인이 복음으로 부요케 되었다는 말씀이다(11:12). 누구 때문에 유대인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야 했는가?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함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저자의 저서 잃어버린 구약의 지상명령 쉐마2권 제3부 제1I. ‘하나님은 이방의 구원을 위해 유대인을 버리셔야 했다참조)

7. <중국이나 일본은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나라이지만 한국민족이 하나님을 잃는다면 또 다시 일본의 종이 될 수밖에 없다.> (p. 10)

발표자는 이 글이 인종차별적 시각이라고 하며, “어느 역사가도, 어느 누구도 한국이 일본에 의해 지배를 받은 것은 한국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서 그렇다고 읽는다면 그건 코미디다라고 했다.

저자의 이 말은 저자의 저서 IQ는 아버지 EQ는 어머니 몫이다3권 제7유대인의 고난의 역사교육과 특히 제8부 제2유대인과 한국인의 유사점을 읽어야 이해가 된다.

역사적으로 지정학적으로 한국은 이스라엘과 비슷하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작은 나라인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을 땐 승하고 나쁠 때는 패했다. 북한(비기독교인 나라)과 남한(기독교인 나라)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보라. 반면 중국이나 일본은 대부분 침략자였다. 저자는 한국이 늘 역사적으로 중국이나 일본의 침략 때문에 수천 년 동안 지독한 고난에 처했지만, 현대사에서 한국이 일제에서 해방된 이후 이렇게 성공한 나라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목사로서 한국이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또 다시 일본의 종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이 지금의 일본이 보여주고 있는 독도 분쟁, 신사 참배를 중심한 군국주의 부활 염원, 후쿠시마 원자로 폭발 대응에 대한 거짓말을 직시하는 한국인의 입장에서 과연 코미디가 되는가? 오히려 이것을 부정하는 발표자가 더 코미디스럽게 보인다고 지적받지 않겠는가? 발표자의 언사는 기독교를 모함하고 악평하는 비기독교인(안티-기독교인)의 언행과 비슷하다는 오해를 가져올 수도 있다. 역사를 해석할 때 개혁주의 신앙관을 가진 이는 비기독교인의 역사관과 달라야 한다고 본다.

8. 발표자는 성경해석 문제를 거론하면서 구약성경을 기독교교육학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p. 11)고 했다. 그리고 이를 수건을 가리고 희미하게 보는 교육”(p. 13)이라고 말했다.

저자는 발표자가 구약성경을 알고 이 얘기를 하는지 의심이 간다. 구약성경 신 6:4-9(쉐마) 말씀 자체가 기독교교육학적인 입장에서 읽어야 맞다. 구약성경이야말로 몇 몇 원시복음(3:15)이나 출애굽 사건(고전 10:1-4)을 제하고는 거의 모두가 기독교교육에 관한 내용이다.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후 그 후손을 키우시는 과정과 시내산 언약 체결(19-24) 이후 율법을 주신 후 그 언약을 지키는 방법이 율법을 자녀에게 가르쳐 실천하라(쉐마)는 교육계명이다. 그러면 복이요, 아니면 저주라는 것이다(30:19-20). 유대인의 자녀교육 성공 여부에 따라 그들의 역사도 복과 저주로 달라진다. 그 역사가 말라기까지 이어진다. 대부분 선지서는 유대인이 자녀교육이 실패해서 율법대로 살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음과 그러나 다시 교육을 잘해서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주시겠다는 것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책들이다.

또한 수건을 가리고 구약을 읽는다는 것은 구원론적인 입장에서 인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신 후 성령님이 오셨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님 안에서 구약을 읽어야 구약이 이해가 되며 하나님의 구속사가 보인다는 뜻이다(고후 3:13-18, 이상근 주석 참조).

그러나 성경은 구약성경만으로도 선민교육이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바울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4:12)라고 말했다.

여기에 나타난 모든 성경혹은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성경인가, 신약성경인가?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없었을 때이기 때문에 구약성경이다. 이것은 신약시대에도 구약성경만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지만[구원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가능함(4:12)], 선민교육은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고용수 박사님이 저자의 서평에 복음주의자들의 오류를 지적했는데, 발표자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여 그분의 논지를 비판한 것은 옳은 것인가?(p. 11-12).

9. <‘쉐마 가정교육이 갖는 문제점'에서는 “3세대가 함께 같은 신앙을 공유하는 것을 우수한 교육적 모델로 접근하는 것은 무리가 많다> (p. 12).

그렇다면 쉐마교육을 받은 주준태 목사님(고신교단 총회장)이 금년 총회 표어를 복음의 길, 3세대의 따뜻한 동행으로 정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인가? 고신교단이 복음으로 돌아가 순교자적 신앙을 유대인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3세대가 함께 신앙을 공유하는 것처럼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의 저서 저자의 저서 잃어버린 구약의 지상명령12부 제3아브라함이 지상명령을 실천한 방법(3대 가정교육신학의 효시)’ 참조] 지금까지 쉐마교육을 받고 실천하는 수천여명 이상의 ‘3대를 잇는가정교육과 그 교회 복음사역의 괄목할 만한 열매들을 어떻게 보는가? 김진섭 박사님이나 안병만 박사님 그리고 오늘 본 학회에서 구약의 논문을 발표하는 이희성 교수님(총신대원, 구약학)도 쉐마교육을 받고 변하여 가정에서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쳐 실천하는 분들이다. 이것이 옳고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을 실천하는 것이 아닌가!

10. 탈무드의 문제

저자는 한 번도 탈무드를 정경으로 인정한 바가 없다. 그리고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탈무드는 무엇인가? 토라에 있는 ‘613개의 율법’(타르야그 미쯔보트)에 관한 유대인의 실천 방법은 '기록된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이 입에서 입으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전승해오던 장로의 유전에 있다. 이 내용은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 집대성된 탈무드의 할라카에 정리되어 있다. [자세한 것은 저자의 저서 유대인 아버지의 4차원 영재교육(동아일보, 2006), 22유대인은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치나: 토라와 탈무드참조].

기독교는 기록된 성경만 정경이기 때문에 비록 탈무드가 정경은 아닐지라도 구약성경의 내용을 생활에서 실천하는 데 필요한 자료들을 많이 담고 있는 만큼, 그 자료들 중에서 신약성경의 원리에도 일치되는 부분들은 엄선하여 십분 활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모욕하는 글이 있는 탈무드를 왜 현용수가 인용하느냐고 반박한다. 탈무드는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 집대성 되었다. 따라서 예수님 이전, 구약시대에 구전되어 내려오던 성경시대 장로의 유전도 있지만, 예수님 이후의 자료들도 있다. 따라서 전자는 토라를 설명하는 자료들이 많지만 후자에는 기독교인과 예수님과 적대관계였기 때문에 서로 비방하는 자료가 있다. 따라서 저자는 대부분 성경시대의 자료를 인용한다.

11. 결론적으로 발표자가 서문에서 개혁주의 기독교교육을 요약한 교육의 내용이 성경적인가?” “그의 삶이 성경적으로 윤리적인가?”를 만족시키는 교육은 성경에 근거를 둔 쉐마교육이라고 볼 수 있다. 발표자는 저자의 책을 몇 권만 읽었기 때문에 25권 전체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젊은 학자가 새로운 학문의 영역을 연구하려는 자세는 높이 살만하다. 앞으로 더 연구하여 한국교회와 가정을 살리는데 동역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다시금 쉐마교육에 대한 긍정적 관심을 고취시켜 준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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