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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병금 목사 한복협 부회장강남교회 담임

이땅에 개신교가 전파된 후 수많은 신앙인들이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미치고 귀감이 되어왔다. 그 가운데서 한경직 목사와 장기려 박사는 우리에게 섬김의 신앙을 보여준 대표적인 목회자와 평신도일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사회적 위상이 추락하고, 자본주의의 무한경쟁과 양극화로 인해 사람들의 인정이 더욱 각박해지는 이때에, 한경직 목사와 장기려 박사의 섬김의 삶은 우리에게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리라 생각한다.

먼저 개신교 안팎에서 교회와 민족의 지도자로 불리우는 한경직 목사는 교회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성자의 삶을 살다가 가신 분이다. 한경직 목사가 이 시대의 진정한 목회자요, 지도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재능과 학식 때문이 아니라, ‘주의 종은 사람들의 종이라는 신념으로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에 일생토록 헌신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한경직 목사가 교회는 곧 봉사기관이라는 원칙에 충실한 사람이었다고 회고하며, “인간을 잘 봉사함이 하나님을 잘 봉사함이다라는 명제를 일관되게 지켰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그 분은 교회 사역의 울타리를 넘어, 학원 및 군복음화 사역과, 기독교아동복지회(CCF), 홀트양자회(현 홀트아동복지회), 세계선명회(현 월드비전) 등의 섬김의 사역으로 그 지경을 넓히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일에는 언제나 발벗고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내가 개인적으로 그분을 만난 것도 그분의 섬김의 사역의 연장선상에서였다. 한경직 목사는 군선교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는데, 그 이유는 선교를 위한 가장 좋은 황금어장이 군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경직 목사는 영락교회의 도움을 받아서 군목들의 생활을 지원하고, 예배당 신축을 보조하고, 군인들을 대상으로하는 대중집회를 개최하거나 지원해 주었다. 한경직 목사는 이일을 보다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 1972년 군복음화 후원회를 조직하여, 군목에게 오토바이 지원, 군인교회 건축지 원, 집회지원, 합동세례식 거행, 성경 보급 등 여러 가지 일들을 주도하였다.

내가 그 분을 만난 것도 바로 그때였다. 1972년에 나는 군종 장교로 복무 중이었는데, 당시 2119명의 합동세례식을 준비하는 과정에 영락교회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때 교회 사택에서 한경직 목사를 처음 뵙게 되었는데, 다른 대형 교회 목회자와는 달리 아무런 격식도, 권위의식도 없이 새파랗게 젊은 군종장교의 군선교 사역에 적극 협조해 주셨다.

그 당시 그분은 젊은 목사가 군선교에 헌신하고 있는 것이 너무 반갑고 고맙다고 하시면서 내 손을 꼭 붙잡고 앞으로 큰 사람, 큰 목회자가 되기를 기도해주시곤 하셨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분은 약속대로 내가 준비하던 진중세례식에 설교자로 오셨다. 뿐만 아니라, 많은 영락교회 교인들을 성가대로 데리고 오시고, 풍성한 선물까지 준비해 오셨다.

나는 그때, 교단도 다른 젊은 목사를 위해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이셨던 분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협력해 주시는 모습에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다. 그 이후로도 그분은 나와 서신을 왕래하며 안부를 전해 주시기도 하셨다. 이렇듯 누구에게나 섬기는 마음으로 대해 주시는 모습을 보며 한국의 성자라는 칭송도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며, 예수님을 닮은 성도란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경직 목사는 그 다음해인 1973, 영락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된 이후에도 군복음화운동후원회 회장에 추대되어 본격적으로 군인들을 섬기는 일에 나서기도 하였다.

한경직 목사는 2000419일 향년 99세로 소천하셨는데, 그 분이 남긴 재산은 말년에 타고 다녔던 휠체어와 지팡이, 겨울 털모자, 입던 옷가지, 생필품이 전부였다고 한다. 이처럼 일신의 성공과 안락함 보다는 소외된 이웃들의 울타리가 되고 마지막 대변인이 되고자 했던 한경직 목사는 개신교라는 울타리를 뛰어 넘는,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큰 어른이었으며 이 시대의 진정한 거인이었다. 이런 한경직 목사의 섬김의 신앙이야말로 자기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본받아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장기려 박사는 평신도 가운데 섬김의 신앙으로 평생 가난한 이웃을 위해 헌신했던 분으로 한국의 슈바이쳐’, ‘바보 의사로 불린다. 장기려 박사는 한국동란 전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평양의과대학, 김일성종합대학의 외과 교수를 지내다가 6.25때 월남하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 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곧 피난민 신세가 되어 부산에 머물면서 19511월에 부산 서구 암남동에 현 고신의료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을 세워, 피난민 등 가난한 사람을 무료진료하면서 19766월까지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으로서 섬김의 인술을 베풀었다.

장기려 박사는 의사로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박애와 봉사정신으로 인술을 펼쳐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우리 시대의 성자로 칭송 받았는데, 장기려 박사가 청년시절 의사가 되면서 품었던 다짐이 하나 있다고 한다. 그것은 의사를 한 번도 못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다짐을 한평생 지키고 실천했다. 이에 관한 그의 선행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걸인이 돈을 구걸하자 현찰이 없어 수표를 줬다는 이야기, 병원비를 내지 못해 발이 묶인 환자에게 몰래 도망가라고 병원 문을 열어준 이야기, 며느리가 혼수로 가져온 이불을 고학생에게 갖다 주라고 한 일, 책 도둑에게 책 대신 돈을 갖고 가라고 했던 일들은 지금도 널리 회자되며 그의 섬김의 신앙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헌신적으로 앞장섰던 장기려 박사는 정작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집 한 칸도 마련하지 않는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19951225, 86세로 생을 마감할 때도, 정년퇴직 후 복음 병원에서 마련해준 병원 옥탑방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비에 새겨진 비문에는 그의 이러한 무소유와 사랑, 섬김의 신앙을 실천한 삶이 잘 나타나 있다. “모든 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고,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겨 놓지 않은 선량한 부산 시민, 의사, 크리스천. 이곳 모란공원에 잠들다.”

나는 장기려 박사가 평생에 걸쳐 사랑과 섬김의 신앙을 묵묵히 실천하는 모습을 통해 이 시대의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장기려 박사가 남긴 말을 마음에 되새겨본다. “우리 주위 어딘가에 병든 이웃과 가난한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이처럼 소외된 이웃을 향한 조건 없는 사랑과 섬김이 우리의 삶과 사회를 좀 더 따뜻하고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그분은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요즘 우리는 신문과 방송을 보는 것이 겁이 날 정도로 생명이 경시되고 사람을 수단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곤 하지만, 그것을 사랑과 섬김으로 실천하는 이는 드문 것 같다. 이러한 시대에 한경직 목사와 장기려 박사는 그 섬김의 삶을 통하여, “사랑은 베풀수록 더 커진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한국교회는 그 분들이 보여준 섬김의 신앙을 사모하여, 세상에 빛과 소금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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