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아픔에 응답하는 개혁 신앙

고신사회복지역사 포럼 및 세미나가 지난 427일부터 28일까지 경주 코오롱 호텔에서 고신사회복지위원회 주관으로 개최되었다. 첫 번째 강의에서 고신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김세중목사는 고신복지역사연구 및 복원의 중요성이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김목사는 19511월 고신 교단은 개혁 신학과 신앙 그리고 기독교 복지사역을 통해 출발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개혁신앙과 신학은 계승되고 있으나 기독교 복지사역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고 진단했다. 김목사는 이번 제2회 고신사회복지역사 포럼 및 세미나를 통해 교단 초기 기독교 사회복지 역사를 재 정립하고, 기독교 사회복지 사역의 실천방안과 고신 교단사회복지 사역의 나아갈 방향을 연구 발표하여 교단의 정체성 회복에 기여코자 한다고 밝혔다.

두 번째 강사로 나선 이상규교수(고신대학교)초기 고신교회에서의 사회복지: 손양원, 조수옥, 장기려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했다. 이교수의 발표는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이상규 교수

초기 고신교회에서의 사회복지: 손양원, 조수옥, 장기려를 중심으로 /이상규 박사

나환자들과 함께 한 손양원

손양원은 1921년 도일하여 일본유학 기간 동안 일본 성결교 인물 나카다 쥬지(中田重治)의 나환자 전도활동을 목격했다. 또한 그는 나병환자 수용원인 상애원 원장이었던 호주 선교사 메켄지(James Noble Mackenzie 1865-1956)를 상애원교회 전도사로 일하면서 만났다. 이런 두가지 사건의 영향으로 손양원은 1909년 광주제중원장 윌슨(Robert Manton Wilson)에 의해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나환자 보호 및 치료기관이었던 애양원의 전도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어 손양원은 나환자들을 위한 목회자로 일하게 되었고,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복지운동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손양원의 사역에서 중요한 점은 전쾌론(全快論)이다. 전쾌론이란 의학적으로 나병을 완전히 고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재림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되면 우리는 변화된 육신으로 모든 질병이 완전히 치료된다는 점을 말하는 것으로써 이를 통해 신앙에 정진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손양원 목사는 단시 나병이라는 이유만으로 학대받고 가족과 별거되어 고통을 받는 이들을 위해 위로의 복음과 하늘의 소망을 전하는 은혜의 전령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흉측한 몰골의 나환자들에게 인간적 사랑을 쏟았을 뿐만 아니라, 전염의 위험 때문에 감히 접근할 수 없었던 14호 중환자실에도 거침없이 출입하여 나환자들은 물론이지만 선교사들도 크게 탄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훌륭한 목자였고, 이런 봉사는 그의 가족들의 무한한 희생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고아들의 어머니 조수옥

조수옥 권사는 1946년 초 마산 장군동에서 인애원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것은 신사참배 반대로 인한 옥중 경험에서 얻은 깨달음의 결과였다. 그는 옥중에서 4가지를 배웠다. 첫째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점이었고, 둘째는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 그리고 셋째는 고아들을 돌보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깨달음이었고, 넷째는 돈이 만악의 뿌리라는 점이었다고 한다. 조수옥은 감옥에서 죄를 짖고 형무소에 들어오는 사람 중에 고아들이 많았다는 점을 보면서 인간은 부모의 애정으로 양육해야 하고, 부모가 없을 경우에는 누군가가 부모를 대신하여 아이를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점을 깊이 체득했다고 한다. 이것이 고아원 운영의 동기였다.

인애원은 19461030일 미군정청 후생시설로 인가를 받아 지원을 받게 되었고, 19514월에는 기독교아동복리회(CCF)에 가입하고 지원을 받게 되었다. 1957년 보건사회부로부터 재단 설립 인가를 받았다. 조수옥은 인애원에서 고아들과 불우청소년을 양육하였을 뿐만 아니라 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기독교 교육을 실시하였다는 점이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온갖 어려움을 격으면서도 2012년 현재 1700여명의 청소년들이 인애원에서 양육을 받아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조수옥 권사는 신앙의 어머니로 일생을 사시며 고신교회의 대표적인 사회복지 혹은 사회사업가였다.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경성의학전문학교를 1932년 졸업하고 의사가 된 장기려는 19409월 나고야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성의전 외과에서 일했던 그는 19403월 평양연합기독병원 외과 과장으로 갔고, 곧 병원장에 취임하였다.

해방되던 해 11월에는 평양도립병원장 겸 외과과장으로 약 일 년 간 봉사하고, 19471월부터 주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조건을 달고 김일성대학의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과장으로 일했다. 6.25동란이 발발하고 부산에 도착한 장기려박사는 19516월 경남구제위원회의 총무 전영창 선생, 서기겸 회계인 김상도 목사와 초량교회 담임목사였던 한상동 목사의 요청으로 부산 영도구 남항동에 위치한 제3영도교회 창고에서 무료의원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19766월까지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으로 그리고 의사로 일했는데 초기 복음병원 시절은 의사로서 가장 보람된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특히 그는 1968년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 위치한 복음병원 분원에서 채규철, 조광제, 김서민, 김영환 등과 함께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발족했는데, 사회복지 차원에서 중요한 기여였다.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 받자라는 취지로 시작된 이 의료보험조합은 순수 민간단체에 의한 의료보험 기구로서 영세민들에게 의료 복지 혜택을 주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써 기독교적 자애정신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것은 정부가 의료보험제를 실시하기보다 10년 앞서 시작된 의료보험으로서 1975년에는 의료보험조합 직영의 청십자의원 개원을 가능케 했고, 이듬해에는 한국 청십자 사회복지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지역사회 봉사 활동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19798월에는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렇게 볼 때, 장기려 박사는 기독교적 사회사업, 혹은 사회 참여 방식의 한 가지 모델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기독교 정신의 사회화를 추구하였는데, 그것이 청십자의료보험조합운동이었다. 그리스도의 사랑, 가난한 이웃에 대한 배려, 이타적 생활방식등과 같은 기독교 정신을 개인 차원에서 공동체의 차원으로 조직화하고 제도화 한 것이 바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의료보험의 개념이 인식되기도 전에 의료협동조합을 만들었고 담배값 일백원에도 못 미치는 월 70원의 회비를 받은 것을 보면 그것이 가난한 서민을 위한 구빈원의 성격 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초기 한국교회가 기독교학교를 설립함으로서 특수계층의 사람들만이 누리던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고 학교교육을 대중화한 것처럼, 의료보험조합은 국가가 할 수 없었던 영세민 의료혜택을 가능케 한 이상적인 사회참여 혹은 사회봉사의 한 모델이라라고 볼 수 있다.

 

탁월한 복지 목회자 이약신

이교수의 강의에 이어서 고신사회복지위원회 전문 위원장 고명길 목사는 탁월한 복지목회자 이약신(1898-1957)에 대해서 발표했다. 이약신 목사는 고신교단 제1,2,3대 그리고 제6대 총회장을 지낸 목사님이시다. 그는 당대 실력과 영성을 겸비한 목회자였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난하고 병든자를 위해 봉사했던 탁월한 복지목회자였다.

이약신은 정주의 오산중학교에서 주기철을 만난다. 그 이후 신학 공부를 하기로 결단을 내릴 때에 친구 주기철의 도움과 안내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주기철목사는 192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의 초량교회로 이거하면서 양산교회 전도사직을 이약신에게 부탁하게 된다. 주기철 목사가 초량교회에서 마산 문창교회로 전임해 가면서 이약신 목사를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하였고, 부산 초량교회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이약신을 담임목사로 청빙케 된다. 한마디로 이약신 목사는 주치철 목사가 보증하는 목사였다. 이약신목사는 한국교회를 대표해서 호주교회를 방문해서 1년여간을 머물며 유창한 영어로 설교함으로 호주교회를 깨우고 한국선교에 대한 큰 지원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이약신 목사는 부산 초량에 빈민치료를 위한 예도제중원이라는 병원을 설립했다. 이약신목사가 호주방문시 받은 복지기금 1만원여원(현 약 10억원정도로 추정)으로 설립한 병원이었다. 또한 194512월 초 10여명의 고아들을 모아 희망원이라는 고아원을 개원했다. 이약신 목사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고아들을 돌보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가 마땅히 실천해야 할 사랑의 봉사로 인식을 했고 같은 맥락에서 고아원 경영도 교회 목회의 한 부분으로 믿고 실천했다. 그는 194610월 진해교회 부임과 더불어 본격적인 희망원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핍절한 시절, 늘어나는 고아들과 교인목회 사이에서 갈등이 생겼다. 진해교회 몇몇 교인들이 목회자로서 고아원 사업을 겸하는 이약신목사에게 불만을 품으면서 이약신은 교회를 사임하고, 우여곡절 끝에 19501217일 진해 희망원 예배실에서 진해남부교회를 개척한다. 이후로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본격적인 복지목회를 시작하게 된다.

1937년 이약신 목사가 [기독신보]에 기고한 봉사생활과 그리스도인이라는 설교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남을 존중하고 섬기는 모범을 보이시며 걸인과 창부에게 자비로서 대하였고 불구자와 멸시받은 인간들에게 사랑과 긍휼로서 같이 하셨다. 이렇게 예수님은 뭇사람의 즐거운 종이 되어 섬기셨으니 우리는 그와 같이 가난한 자를 섬기며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특히 이약신 목사는 그 당시 부흥사들의 병 고치는 이적과 신비주의를 배격하고 복음주의 신앙의 정통성과 경건을 강조하면서 성령 받은 사람은 마땅히 생활로서 봉사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여러 설교에서 강조했다.

▲ 단체사진

포럼을 통해서 고신 초기 복지목회의 증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고신교회의 초기역사에서 개혁신앙을 가지고 시대의 아픔을 위로하고 치료 했던 귀한 인물들은 이외에도 더 많이 있다고 한다. 사회복지위원회는 더 많은 복지역사의 증인들을 발굴하여 연구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개혁신학과 신앙 그리고 시대적 아픔에 응답하는 복지목회 이것이 고신의 초기 정신이었다. 시대의 아픔에 응답하는 개혁 신앙의 회복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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