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표절, 그 정죄(定罪)의 기준은 무엇인가?

▲ 서문강 목사가 발제하고 있다.

1. 시작하는 말

본래 표절(剽竊)’이란 문학의 장르에서 창작(創作)과 관련하여 회자되는 용어이다. 그런데 그 용어가 이제는 전 학문이나 예술 분야나 독창성이 요구되는 전 분야에서 전체에서 사용되고 있다. ‘표절시비에 말려들면 그 장본인의 도덕성을 의심하는 쪽으로 금방 회자(膾炙) 되어 명예에 중대한 손상을 입기 마련이다.

최고의 도덕성이 요구되는 설교자가 표절시비에 말려들고 혐의가 사실로 드러나면, 그 사역의 지위에 심대한 타격을 입어 그 이후를 예측하기 힘들게 된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가볍게 다루어질 문제가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표절의 혐의를 입을 만한 증거가 없는데도 표절자로 몰아가 그 장본인의 명예를 크게 손상키는 고의성 짙은 악행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가볍게 다루어질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을 우리 모두 공유해야 한다. 여론몰이 식으로 단죄하고 설교자의 몇 십 퍼센트에 해당하는 이들이 표절을 하고 있다.’는 식의 말도 쉽게 해서도 안 된다. 또는 이런 일에 연루된 모든 이들의 자들의 저급하고 비열한 도덕성을 탄핵하고 성토하는 것만으로 할 일을 다 했다는 식으로 하는 것은 마치 고장 난 기계를 분해하고는 각 부품들을 고물(古物)로 취급하고는 할 일 다 했다.’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인생의 방면들 중에서 완전하고 문제가 없는 데가 어디인가? 설교자의 표절문제도 일단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죄 가운데 있는 인간성의 연약과 부패함이 산출한 사안이다. 설교자도 본질적으로 일반인들과 동일한 그 연약과 부패성을 지닌 사람이다. 그러니 설교 표절문제도 그런 차원에서 접근하여 소극적으로 는 방지하고 적극적으로 치유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만일 어느 설교자가 나는 설교 표절을 한 적이 없다.’면서 자기는 그런 함정에 빠질 만큼 연약하지 않다고 큰 소리 친다면, 그 설교자는 표절은 하지 않았을 지라도 설교자가 빠질 수 있는 다른 더 큰 함정에 빠져 있을 개연성이 너무 농후하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큰 도덕성이 요구되는 지위이면서도 여전히 설교자는 자신이 본질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설교를 듣고 있는 회중과 조금도 차이 없는 죄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항상 겸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식으로 항상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겸비하지 않으면, 그 설교자는 표절 보다 더 악한 데로 나아갈 수 있다. 발제 내용 중에서 언급이 되겠지만, ‘설교의 독창성을 강조한 나머지 성문(城門)을 굳게 잠그고 자기의 세계 속에서만 설교를 짜내는 설교자는 회중으로 하여금 심대한 영적 영양실조에 걸려 사탄의 시험에 무방비 상태로 들어가게 할 수 있다.

하여간에 이 문제와 연관하여 생각할 여러 요점들을 조심성 있게 살펴 이 문제의 적극적 해법을 제시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본 발제자는 오늘 이 자리에서 그런 노력을 위한 작은 제안자의 입장에서 섰다. 다시 말하면, 표절 설교자를 정죄하고 단죄하고 비난하기 보다는, 함정의 위험과 악독을 상기하게 하고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의도하신 진정한 설교자상(說敎者像)에 따른 설교 사역의 진로를 제시하여 보려 한다. 우리 모두 오늘 이 자리가 상황적, 또는 대증적(對症的)인 접근을 시도하여 성토장, 내지 설교자들의 양심과 도덕성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재판정과 같은 것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여, 소위 표절 설교자의 부도덕성을 탄핵하기 보다는 설교자라면 누구나 빠질 수 있는 그 시험에서 건져 주기 위한 적극적인 대안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그래서 무엇을 두고 표절 설교라고 할 수 있는지 그에 대한 기준도 제시하여야 한다. 설교자가 자기의 설교 사역을 위해서 남의 설교를 참조하고 보면 절대 안 되는 것인가? 그러면 남의 설교는 읽지도 보지도 듣지도 말고 그저 자기 나름의 독창적인 설교만을 해야 옳고 바른 설교자인가? 그런 설교자만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가? 또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쓰시기에 좋은 설교자로 세워나가실 때 다른 설교자와 완전하게 이격된 골방에 틀어박히게만하시는가? 대체 무엇이 표절인가? 이 문제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이런 여러 국면에 대해서 함께 생각하여 보아야 한다.

 

2. 본론

1. ‘표절’(剽竊)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표절’(plagiarism)이란 창작(創作) 세계, 곧 문학이나 예술 분야에 자주 거론되는 문제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표절이란 낱말을 설명하기를, ‘(, , 노래 등에서) 남의 작품의 일부를 몰래 따다 쓰는 것이라고 하였다(이숭령 감수 국어사전). 이 설명에서 주목할 어구는 몰래 따다라는 표현이다. 필자가 생각하기로 그 어구가 나타내는 정황은 이러하다. ‘남의 작품의 일부를 따다 자기 작품의 어느 부분에 삽입시켜 그것이 마치 자신의 창작인양독자나 다른 이들을 속여 먹는행위다. 그러니 표절 행위는 기만적이고 부도덕한 도둑질이다. 그 표절 행위 뒤에는 자기 자신을 남에게 더 잘 보여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려는 이기적이고 외식적인 허상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예술계나 문학계에서 표절 시비에 걸려들어 결국 그 일이 사실로 판명되면, 그 장본인은 그 영역에 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예술계나 문학계의 경우 작품 전체를 표절하는 경우, 곧 어떤 작품 전부를 취하여 본래의 작가나 저자의 이름을 빼고 그 자리에 자기 이름을 넣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거의 없다할 것이다. 그런 경우라면 단박에 들통 날 테니 누가 감히 그런 짓을 하겠는가. 그래서 표절은 아주 기술적(技術的)으로이루어지기 마련이다. 그런 경우라도,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사람을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사람을 속일 수는 없다한 링컨(Abraham Lincoln)의 말과 같이 언젠가는 드러나고 만다.

그런데 이 표절 시비가 문학계나 예술계의 햇병아리 같은 초심자들에게 나오기 보다는 소위 유명

세가 붙어 있는 사람들에게서 잇따른다. 초심자들이 표절하게 되면 모방이라고 너그럽게 보아주어 세인들의 주목을 받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여간에 표절도 아무나 못하고 기술을 부릴 정도로 그 분야에서 나름의 전문성을 어느 정도 갖추어야할 일인가 보다(?)

 

2. 무엇이 표절 설교인가?

(1) 일반적인 정의

표절 설교는 무엇인가? 필자 나름으로 위의 표절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를 적용하여 이렇게 규정하여 본다. ‘표절 설교란 남이 한 설교를 가져다가 그것이 마치 자기의 연구와 기도를 통해서 나온 열매인양 하며 회중들 앞에 제시하는 행위이다.’ 더 짧게 말하면 남이 한 설교를 순전히 자기가 작성한 설교인양 하며 설교하는 행위이다.

그러니 이 표절 설교 문제는 설교의 문제 자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 설교자의 신앙 양심까지 수반되는 문제다. 곧 남이 발견하여 증거한 진리를 자기가 발견한 것 같이하여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속여 자신을 높이는 기만적인 술수이다.

어떤 설교자가 설교 시간에 남의 설교를 그대로 베껴 가지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표절 설교이다. 예를 들어서 A라는 설교자가 B라는 설교자에게 언제 설교한 원고를 달라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자기 교회에서 설교한다면, 그것은 분명 표절임에 분명하다. 듣기로는 이전에 설교문을 아예 정기적으로 배달해 주는 설교 도우미들이 있다고 한다. 또는 인터넷의 설교문들이나 인터넷방송의 설교프로그램에서 다운 받거나 들은 설교를 그대로 받아서 자기 것인 양 설교한다면, 그것 또한 표절 설교임에 분명하다.

또는 어떤 경우에는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지금은 아닐지도 모르고, 또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소위 어떤 큰 교회담임 목사는 자기 부목사들에게 설교를 작성하도록 하고 자기는 그 작성된 원고를 가지고 강단에 올라가서 전하기만 한다고 한다. 그 담임 목사의 변이 가관이다. ‘이렇게 큰 교회 이끌어 나가다 보면 설교 준비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 부목사들이 나를 도와주어야 해요그 소문이 뜬소문이기를 정말 간절히 바란다. 설교 준비하지 못할 정도로 바쁠 만큼 큰 교회라면 설교 준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질 정도의 작은 여러 교회들로 그 큰 교회를 나누어 여러 설교자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독설을 발제자는 하고 싶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고서도 어떻게 큰 교회는 되어 가는지, 정말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참 한국교회에서 그런 큰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참 설명이 어려운 기괴한 현상이다.

 

(2) 표절 설교와 독창설교(창작설교)의 차이

그러면 여기서 위에서 규정한 표절 설교의 보편적인 정신과 자세대로 하면, ‘표절 설교독창적인 설교의 차이는 무엇인가? 발제자가 보기에, 오직 한 가지 척도로만 결정될 수 있다고 본다.5) , ‘설교자가 자기가 할 설교를 위해서 어떤 준비를 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만일 자기가 할 설교의 소임을 위해서 남의 것을 베끼거나 도용하여 회중들 앞에 가지고 나가서 설교하면 그것은 표절 설교임에 분명하다. 곧 설교 준비를 위해서 쏟아야 할 정상적인 과정이나 수고 없이 그대로 회중 앞에 나가서 마치 자기가 그런 과정을 거쳐서 맺히고 익힌 열매를 준다는 식으로 설교하는 행위가 표절 설교라는 말이다. 그러나 설교자가 자기가 할 설교를 위해서 나름으로 자신이 직접 성실하게 준비하여회중 앞에 가지고 나가면 그것은 독창적인 설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여기서 자신이 직접 성실하게 준비한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어떤 주어진 예배에 설교할 소임을 받고 그 설교를 위해서 자신이 직접 그 설교할 것을 준비하고 원고나 내용을 작성하거나 정리하는 것을 가리켜 말함일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설교자가 자기가 할 설교의 메시지를 하나님 앞에서 점검하고 그 메시지를 받을 회중들의 영적인 상태를 미리 내다보거나 점검해 보는 것이 수반되는 것이다.5)

설교 표절의 기준을 제시한 학자들을 찾기가 어려워 발제자는 작은 제안자의 입장에서 조심스럽게 제시하여 보고 그것을 함께 생각하여 보고자 한다.

설교를 준비한다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설교할 본문에 대한 바른 이해, 설교할 회중의 영성에 대한 바른 이해, 설교자 자신의 영적인 준비 - 이 준비는 단순하게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것만이 아닌 자신의 삶에 대한 준비를 포함함 - 그것을 위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 등, 소위 설교안(說敎案)이 설교자의 마음속에 보일락 말락 흙을 뚫고 고개를 내밀고 나오는 작고 여리고 노란 떡잎같이 나타나기부터 강단에 서기 전 그의 손에 들려진 설교 원고로 완성되기까지의, ‘진을 빼는 해산의 수고(말씀 해석과 묵상과 기도를 수반한),’ 또 그 설교내용을 가지고 회중들에게 증거할 때에 함께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간절한(마음 상할 정도의) 기대와 부담 등, 그 모든 것이 다 포함되는 작업이다. 그래서 한 편의 설교를 바르게 준비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얼마나 진을 빼는 고투가 있어야 하는가! ‘표절 설교는 그러한 과정이 전혀 없었는데도 그러한 과정을 겪은 것 같은 가면(假面)’을 쓰고 행해지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지혜의 방식으로서의 설교와 설교자의 위치에 비추어 본 표절의 심각성

설교는 그 설교자의 인격을 통해서 회중들에게 전달이 되고 회중들은 그 설교자의 인격을 통해서 증거되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접하는 것이다. Phillip Brooks는 그의 설교론(On Preaching)의 서두에서 설교는 진리가 인격을 통해서 전달되는 행위이다.”고 정의한다. 회중들은 단순한 어떤 진리에 대한 개념을 접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인격 속에서 숙성(熟成)’, 본질은 전혀 바뀌지 않으면서도 설교자의 인격 속에서 역사(役事)하고 숙성(熟成)된 진리를 받는 것이다.6)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가 설교자의 인격을 통해서 회중들의 인격 속으로 전이(轉移)되고, 그 하나님의 진리가 그 회중들 각자의 인격 속에서 역사하는 것이다. 설교자 중의 설교자였던 사도 바울은 이와 관련하여 인용되기에 좋은 말을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3:13) 물론 이 말이 더 본질적으로는 신약의 계시를 수령(受領)하고 증거하고 기록하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사도의 설교의 위치를 상기하게 하는 말씀이다. 그러나 설교와 관련하여서도 인용되기에 전혀 적실성이 없지 않다. 설교자의 인격을 통해서 증거된 하나님의 말씀이 회중들에게 설교를 통해서 증거되어 그 회중들 각자 속에서 역사하였다. 이것이 설교라는 방식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양육하시고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다. “하나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1:21). 여기서 전도의 미련한 것은 개인 전도에도 적용될 수도 있으나 문맥적으로 볼 때에는 설교의 미련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확하다.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의 방식인 설교라는 제도는 반드시 설교자의 인격과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인격적인 교감과 상호작용을 통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의 미련한 것을 통해서 설교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먼저 은혜와 진리 속에서 먹고 자라고 회중들도 함께 자란다. 설교자도 자기가 전하는 진리가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에, 그 진리를 회중들이 듣고 받고 그 인격들 속에서 역사하는 은혜를 받듯이 회중 보다 먼저 자기 속에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정말 설교와 설교자의 제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세우신 거룩한 지혜의 소산이다. 설교자와 회중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주시고 설교자로 부르시고 설교자로서 가져야할 은사를 주시어 그 일을 감당하게 하셨다. ‘설교와 설교자의 제도는 사도 시대 이후 주님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교회에서 항상 같은 무게를 가지고 존재한다. 어느 시대 교회도 이 제도를 대체할 것이 무엇이랴. 칼빈 이후 모든 신실한 설교자들은 이 제도를 두신 하나님의 의도를 존중한 자들이다.

6) 참 이 표현이 오해를 불러 일으킬만하다. 그러나 여기서 숙성된이라는 말은 진리 자체가 자라고 익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인격 속에서 이해되고 그 인격에 영향을 주어 그 진리 됨이 확증된 것이라고 이해하기 바란다.

그러니 표절 설교의 문제점은 남의 설교를 자기 설교인양 하는 부도덕한 행위로 대번에 정죄당할 만한 것 외에 또 더 심각한 것은 바로 그 점에서이다. 하나님께서 설교자를 세우사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기르시고 먹이시고 자라게 하시는 방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점이 되는 과정을 빼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도 진리 속에서 자라지 못하게 된다. ‘표절 설교를 하는 이는 그 설교되는 진리를 먹고 묵상하고 자기 것으로 받고 순종하는 삶이 열려질리 만무하다. 삶도 표절하는 것같이 그러할 것이니 말이다. 곧 설교자의 인격 속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이해되고 역사하고 작용하여 그 인격을 진리에 걸맞게 준비시키고 변화시키는 과정이 전혀 없이,’ 진리에 걸맞지 않는 부도덕한 양심을 통로로회중들에게 설교안이 전달되니 참으로 좋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 설교자의 인격이 진리와 전혀 관계가 없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회중들 역시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얼른 생각하기에 전달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이니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그 진리로 먹이시고 세우시겠으니 결과적으로는 크게 문제 될 것 없다.’ 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하여 인간적인 술수나 부도덕을 방편으로 당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자들을 먹이시겠는가. 물론 우리 설교자들이 아무리 잘 준비하여 나간다 해도 부족하기 마련이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시면 안 되는 것이다. 또 어떤 때에는 우리 설교자들의 준비가 부실해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서 설교할 당시에 은혜를 주시기도 하신다. 모든 생각 있는 설교자들은 그것을 체험하였다고 고백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세우고 먹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인식하고 겸비하여 오직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자랑할 뿐이다.

사실 우리 설교자의 인격의 수준만큼만 하나님께서 회중들에게 은혜를 주신다면 회중들이 언제 은혜를 받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당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백성들을 먹이시고 기르시는 것이다. 그 일에 우리 부족한 사람들을 설교자로 부르시어 쓰시는 것이다. 그렇게 늘 부족함을 느끼면서도 역량대로 설교자의 임무를 감당하는 자와, ‘표절이라는 편이한 방식을 채용하여 쉽게 설교사역을 해나가는 설교자의 사이를 어찌 구별하지 않으시리요.

 

3. 표절의 시험에 빠지는 원인

(1) 설교자로서의 소명이 불확실 할 때

이미 이 문제를 위하여 2001년에 총신대에서 포럼이 열렸었다. 박희천 목사와 주승중 교수 등 여러 발제자들이나 토론자들이 나름의 원인을 분석하였다. 그리고 그 지적들이 그 나름의 일리들이 있었다. 어떤 이는 설교하는 횟수가 너무 많다 보니 그리 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실력이 없어서라고 하기도 하였다. 어떤 이는 창작적인 설교를 할 줄 모르니 그리되었다고 한다. 참으로 시험의 여려 경우들을 잘 적시한 대답들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표절의 시험은 본질적으로 설교의 본질과 설교자로서 자기가 받은 소명의 막중함과 영광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거의 없거나, 설교의 대 주제인 성경의 복음의 필요성과 긴박성에 대한 원만한 이해가 부족한데서온다.

사실 위의 필자가 제시한 원인에 대한 진술 속에 나오는 말은 중차대한 국면에 대한 것이다. 곧 그 설교자의 설교자로서의 소명이 확실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그의 목사와 설교에서 설교자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낳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 말은 설교자는 자기가 원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설교자를 인위적인 억지로 만들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직 설교자는 하나님의 소명에 의해서만 산출된다는 말이다. 물론 그렇게 산출된 설교자는 그 자체로 설교자로 바로 서는 것은 아니다. 이제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 설교자를 낳으시면,’ 실제로 설교와 목회사역에 자신을 드릴 수 있기 위해서 필요한 소정의 신앙과 그 인격과 신학의 과정이 들어가야 한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설교자로 하나님께서 쓰시려하여 부르신 자들은 그 부르신 순간부터 설교자로서 필요한 소양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천성 속에서 설교자의 소양을 가지고 있기가 십상이다. 설교자로서 가져야 하는 은사가 또 한 성령 안에서 주어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든지 아무 준비도 없이 즉흥적으로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원대한 목적, 곧 예정과 구속의 계획을 창세전에 이미 세우시고 그 계획에 따라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고 통치하여 나가시는 것이다. 어떤 이를 설교자로 쓰시려 하실 때에 그를 향하신 하나님의 준비가 그가 낳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사도는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1:15-16)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소명 받은 설교자들에 대해 그 말씀의 교훈이 적용된다. 물론 설교자 마다 복음을 증거할 소임을 받은 장소나 대상이나 위치나 상황이 다양하게 차이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소명이 없는 자가 설교를 해야 하는 것 같은 고역’(苦役)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서양 속담에 남을 정말 지독하게 욕하는 말 중에 은혜(소명)없이 목회나 하라.’는 말이 있단다. 정말 소명 없이 목회한다, 소명 없이 설교한다,’ - 지상에서 가장 지겨운 임무일 것이다. 반면에 소명을 받은 설교자에게는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지상에서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소명을 받은 것이라고 하던 로이드 존스 목사의 그 눈부신 빛난 면류관과 같은 진술이 해당이 되지만 말이다.

그래서 소명이 없다면 은사도 주어지지 않는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주신 직임에 합당하게 주어지는 것이다(고전 12:11-12). 그렇게 되면 설교를 할 수 있는 센스, 또는 감이 전혀 생기지 않는 것이다.’ 설교자는 정말 설교자로서 하나님께로서 받은 은사가 있어야 한다. 물론 그 은사를 더 예리하고 풍성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설교자로서의 피나는 훈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한 사건을 보더라도 설교자와 그렇지 않은 자 사이에는 보는 방식과 거기서 얻어내는 교훈과 진리의 빛에 대한 이해의 정도나 분량이 다르다. 그러니 소명이 없으면 몇 번 정도는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얼마간은 설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기진한다.

 

(2) 소명자라 할지라도 꾸준한 설교자로서의 묵상과 연구 및 사유(思惟)의 과정이 무시될 때

로이드 존스 목사는 말하기를, ‘설교자로서 초기에는 무엇을 설교할지가 주어진다. 그러나 그 과정이 지나면 고된 공부(hard study)를 통해서만 설교가 나온다.’고 하였다. 물론 여기서 고된 공부란 단순하게 책만 가지고 씨름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 연구와 묵상을 겸비한 것이리라.

어떤 후배 목사가 필자에게 강해설교하기에 가장 좋은 주석을 소개해 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제 나름의 생각으로 강해 설교하기에 완벽한 도움을 줄 만한 주석은 없습니다. 좋은 주석을 참고하되, 먼저 본인이 본문과의 씨름, 그리고 묵상의 과정이 강해 설교의 가장 좋은 준비로 생각됩니다.’

라고 일러주었다. 그 후배 목사는 그 말을 귀담아 듣고 그대로 실천하여 지금은 아주 좋은 강해설교를 하고 목회의 열매도 좋다. 그가 나중에 필자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하였다. 사실 필자도 그런 센스를 가지게 된 것은 로이드 존스 목사의 강해설교를 번역하고 읽고 한 때문이었다. 그 로이드 존스의 강해설교는 부단하고 집요한 본문연구와 기도와 묵상, 그리고 당시 회중들이 살고 있었던 세대를 통찰하기 위한 집요한 독서와 묵상과 사유(思惟)를 통해서만 나올 수 있었다고 필자는 확신한다.

여기서 말하는 묵상과 사유는 철학자의 사유나 묵상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흔히 박윤선 박사가 생전에 책이나 강의에서 늘 강조하였듯이 계시 의존적묵상과 사유이다.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그 성경에 비추어 인생과 사물을 묵상하고 사유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설교자의 생각과 의식과 생활 속에서 계속 되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설교자들과 교통을 가지고 당신의 백성들에게 증거할 메시지를 제시하고 설교자는 성령의 감동하심(영감)을 용케 그 메시지를 감지하는 것이다. 그런 설교자의 경우에 설교할 거리가 모자란 적이 있을 수 있겠나. 할 말 없어서 무슨 말을 할까 해서 설교에 쓰려고 남의 설교 기웃거리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런 과정이 없을 때에 표절에 대한 시험이 불같이 일어나게 되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표절할 설교들을 쉽게 (아무 눈치 안보고도) 입수할 경로들이 모든 설교자들의 책상에 광케이블 선으로연결된 세대가 아닌가.

 

(3) 하나님께서 각 설교자에게 주신 개성(個性)의 중요성을 무시할 때

앞에서도 지적하였듯이, 설교자는 본질적으로 설교자로서 소명과 그에 필요한 은사와 연단이 동질적(同質的)으로 주어진다 할 수 있다. 그러함에도 하나님께서는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개별적인 다양성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설교자 각자는 나라는 설교자는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다.’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교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이다. 자기 얼굴이 어떠하든 간에 하나님께서 내 얼굴 같이 지으신 경우는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그 개성을 견지하기를 원해야 한다. 설교자들도 마찬가지다. 남의 원고 그대로 베껴서 설교하는 것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듣기로 어떤 사람이 회중들이 자기 설교에 불평하기에 작심하고 대설교가 한경직 목사의 설교 원고를 그대로 가지고 설교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교인들이 그렇게 훌륭한 설교를 하시다니요.’라고 칭찬할 줄 알았는데, ‘우리 목사님은 갈수록 더 유치한 설교를 한다.’고 불평하더란다. 한경직 목사가 설교할 때에는 그 메시지가 정말 회중들에게 감동적으로 받아드려졌는데, 다른 목사가 그 원고 가지고 하니 내용도 없고 빈약하고 유치한 설교로 둔갑되었다. 참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이상할 것 하나도 없다. 한경직 목사의 인격을 통해서 그 진리가 증거될 때에는 그 진리를 위해서 준비된 그 인격을 통해서 자연스럽고 생명력 있게 전달이 되었지만, 전혀 그 진리를 위해서 준비되지 않은 다른 목사의 인격을 통해서는 그 진리가 제대로 발휘되지 않고 성령께서 그 설교를 할 때 역사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또 설교자마다 스타일이 있기 마련이다. 한경직 목사는 한경직 목사의 스타일이 있었다. 그러니 우리 설교자들 모두는 더 잘 하려거나 더 잘한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내가 아니고 남이 되려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로이드 존스 목사에게 어떤 이가 목사님은 컴벌 모간(G. Campbell Morgan,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목회자로 젊은 로이드 존스 목사를 지목하여 자기 후임자로 세웠던 당시 최대의 강해설교자로 알려지던 사람)과 다르네요.’라고 하였다 한다. 그랬더니 로이드 존스 목사가 캠벌 모간 목사님은 대단한 설교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고 나는 나입니다.

 

(4) 설교의 효과를 내려하거나 성공 지향적인 야심이 생길 때

보편적으로 표절 설교의 대상은 소위 유명한설교자, ‘큰 교회설교자, 소위 성공한 목회를 하였다는 자들의 설교이기 십상이다. ‘그러한 이들의 설교에는 다른 설교자들의 것과는 다른 것이 있고, 그래서 그것을 우리 교회에 적용하게 되면 무엇인가 그 교회에서와 같은 효과가 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시험을 받게 될 때에 표절의 유혹을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연만물을 들여다보라. 꽃의 세계만을 보라. 그 세계를 보면 크고 소담스럽고 화려하고 풍성한 꽃잎을 내는 꽃도 있다. 그러나 반면에 한설(寒雪) 속에서 피어나는 작으나 기이하고 생명력 있는 작은 꽃도 있다. 어느 것이 더 아름다운가? 크고 소담하고 화려한 꽃인가? 아니면 작고 앙증맞게 그 한설 속에 핀 작은 꽃인가? 다 나름대로 하나님께서 아름답고 존귀하게 지으신 것이다. 큰 꽃만 있고 작은 꽃은 없다면 얼마나 꽃의 세계가 멋이 없을까! 반면에 작은 꽃만이 널려 있고 장미나 목단이나 목련 같은 큰 꽃은 없다면 또 얼마나 그 세계가 부조화스러울까!

큰 교회, 많이 모이는 교회, 소위 감동적이어 듣는 이들을 많이 둔 설교자만 하나님께서 쓰시는 것이 아니라,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나 신실하고 바른 설교로 목회를 하는 교회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그 이름과 나라를 위해서 영광을 나태내시고 쓰시는 것이다. 설교자가 이러한 소신이 없을 때에 표절의 시험자가 그 설교자의 현관을 넘어 안방 문을 열려고 하는 셈이다.

남의 설교를 흉내 내거나 아예 표절하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 다양하게 만드신 의도를 무시하고 자기 야심에 따라서 하나님의 세우신 조화와 아름다움을 깨는 불손이다.

 

(5)􀀁 말씀과 기도하는 일을 하지 못할 정도로 다른 일로 부산할 때

말씀과 기도를 하는 일에 전무하는 것이 설교자의 본무요 설교자의 본영이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일을 제쳐두고 다른 일로 분주하게 되면 설교를 위한 정당한 시간이나 묵상이나 연구나 사유나 기도가 그만큼 줄어들고 나중에는 허겁지겁 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설교를 해야겠으니 표절의 마수(魔手)’에 걸려들게 된다. 사도들은 이미 초기에 그 사실을 감지하여 조처하였던 것이다(6:1-6)

그러니 설교자는 그 어떤 경우에도 말씀과 기도하는 시간을 빼고 나서 다른 일을 하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면 표절 설교의 함정에 발을 이미 들여 놓은 셈이다. 그러니 설교자 자신만 아니라 교회의 성도들도 그렇게 목회자의 시간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아니 설교자가 그런 규례를 따라서 일하면 성도들도 그렇게 되어간다. 그러나 설교자가 다른 일에 분주하게 뛰어 다니면 사역의 중심이 거기에 있는 줄로 안다. 그래서 설교자가 묵상하고 연구하고 기도하고 설교준비에 쏟을 시간들을 제 멋대로 빼앗아 간다. 그런 설교자는 허둥지둥 궁여지책으로 표절의 마수와 손을 잡는다.

 

4. 표절 방지를 위해 남의 설교는 참조하지 말아야 하는가?

우리가 위에서 생각한 바를 통해서 암시되듯이 표절은 남의 설교를 참조하는 것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남의 설교를 따거나 베껴서 자기 것인 양하여전하는 행위이다. 마치 벌이 다른 통을 침입하여 거기 있는 꿀을 마치 자기가 직접 꽃에 가서 따오고 자기가 씹어 뱉어낸 것인 양하는 행동과 같은 것이다.

남의 설교를 참조하는 것은 모든 설교자에게 있어서 사활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요소이다. 어떤 설교자도 혼자서 훌륭한 설교자로 자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자로 소명을 받았다 할지라도 실제 설교 사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러 준비가 있어야 하는데, 그 중에 남이 한 설교를 듣고 읽고 하는 것은 필수적인 과정이다. 이러한 것이 없이 바른 설교자로 세움 받은 적이 있는가? 아니 하나님께서는 설교자로 소명 받은 이들을 연단하시고 양육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쓰신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듣게 인도하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신실하게 소명을 감당한 설교자들의 자서전적인 진술들을 보면 그에게 영향을 미친 앞선 설교자가 반드시 있었다. 곧 그 설교자로 하여금 설교하는 것의 본질과 영광과 실제에 대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선배 또는, 선진, 또는 동료 설교자가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그 영향의 정도가 큰 경우도 있고 적은 경우도 있지만 모든 설교자마다 자기에게 영향을 끼친 설교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 말은 모든 설교자마다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듣거나 읽는 과정을 통해서 설교자로 자라게 된다는 말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통해서 당신의 설교자들을 자라게 하시고 연단하시는 방식을 쓰신다는 의미이다. 로이드 존스 목사와 같은 대 설교가도 그의 스승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존 칼빈(john Calvin), 존 오웬(John Owen)과 같은 유명한 청교도 설교자들,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스펄전(C. H. Spurgeon), 라일(J. C. Ryle)과 같은 그의 설교학 멘토들이 있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사 속에서 하나님의 쓰임을 받은 설교자들의 설교집이나 강해집이나, 그들의 전기들을 읽는 것을 성경 읽기 다음으로 중요한 것으로 삼았다는 것을 우리는 그의 강해들을 통해서 자주 듣게 된다. 발제가가 번역한 그의 전기(이얀 머레이의 로이드 존스의 초기 40)를 통해서 그 점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그의 목사와 설교에서도 스펄전이나 교회사에 빼어난 바른 설교자들의 설교를 많이 읽을 것을 권면하였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늘 영국이 낳은 최대의 설교자(the greatest preacher)는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고 늘 말하였다. 그 말은 그에게서 진정한 설교자 상()을 보았다는 것이고, 그의 설교를 참조하여 참된 설교의 방식을 배웠다는 말이다. 조지 휫필드에게는 스코갈(H. Scougal)이란 설교자가 있었다. 그는 그의 사람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란 책에서 참된 믿음의 진수를 보았다. 그로 인하여 설교자로서의 소명을 인식한다. 웨슬리(John Wesley)에게는 윌리암 로우(William Low)가 있었다.

그러니 설교자로 사역하고 섬기는 과정에 있는 우리 모든 설교자들은 다른 이들의 설교를 듣고 참조하는 습관을 견지하는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설교자가 되어 가장 잘 빠지는 함정은 다른 설교자의 설교에 대해 귀를 닫아 버리게 되는일이다. 그래서 설교를 하려고만 하지 설교를 듣는 일은 완전하게 멈추어 버린 병폐에 빠지게 된다. 발제자를 포함하여 모든 설교자들이 이 일에 대해서 극히 삼갈 위험이다. 흔히 목사들의 모임에 가서 설교하기가 가장 어렵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도 그런데 있지 않은가? 그것은 설교자들이 남의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고, ‘나도 다 아는 이야기인데 뭐 들을 것 있나하는 거만한 심기가 설교자들에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는 남의 설교를 그대로 받아서 자기 설교인양 하는 표절 설교를 하는 설교자 못지않게 설교자의 빠질 수 있는 악덕(惡德) 가운데 하나이다. 설교자들은 알아야 한다. 자기를 하나님께서 세우시어 교회를 섬기게 하시되 설교자로 섬기게 하시고 그에 필요한 은사와 재능과 지각을 허락하사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회중들에게 먹이게 하신다고 믿고 있으면, 다른 설교자를 통해서도 그리 하심을 인정해고 존중해야 한다.

또 자기도 다른 설교자를 통해서 은혜 받을 태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필자가 존경하는 어느 원로 설교자를 생각할 때마다 참으로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만일 그 설교자가 바로 이점에 있어서 좀 더 열려 있었더라면, 그의 설교 사역은 마치 호랑이에게 날개를 단 것 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궁극적으로 어떤 설교자를 들어서 당신의 복음과 그 영광을 나타내시려 하시고 그 설교자의 개성을 주장하시어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 분이 가진 성경 다독(多讀)과 그로 인해 쌓인 성경을 아는 지식의 분량 - 아마 우리 한국 교회에서 성경을 가장 많이 읽은 설교자 중 한 분이시리라 - 과 설교자로서의 그 분이 가진 정직성과 도덕성과 성실성, 또한 바른 성경적인 설교에 대한 그 분의 지칠 줄 모르는 역설(力說)은 강의나 세미나를 통해서 그의 설교론을 들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으로 각인된다. 필자도 그런 점에서 그 분에게 받은 감화가 크다. 그러나 그 분이 보다 더 폭넓은 시각을 가지고 다른 이들, 특히 교회사적으로 신실하였던 여러 구미의 설교자들, 청교도 설교자들이나 그 전통에 있는 참된 설교자들, 존 오웬이나 조나단 에드워즈나 로이드 존스 목사 같은 이들의 강해설교를 정독하였었더라면 그의 설교 사역은 참으로 달라졌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남의 설교를 전혀 듣지도 않고 참조하지도 않고 소위 독창적 설교의 골방속에 갇혀 있는 설교자의 설교풍이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독선적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으면 더욱 더 풍성하였을 것이 빈약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필자는 조심스레 해 본다.

 

5. 어떤 목적으로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참조하여 자기 설교에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표절이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위에서 거론한 바와 같이 남의 설교를 참조하고 읽고 듣는 것이 설교자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전제해 놓고, 어떤 입장에서 참조하고 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위에서 시사한 것에서 더 나아가 상세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 곧 어떤 목적을 가지고 남의 설교를 참조하고 들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에 따라서 표절도 될 수 있고, 아니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설교자가 남의 설교를 부지런히 참조하기는 하고 듣기도 좋아한다고 하자. 그런데 그가 그런 일을 통해서 직접 은혜를 받고, 한 신자로서 자기의 영성을 점검하고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 진리와 복음의 은혜에 대한 안목을 넓히고 설교자로서의 소명의식과 설교자로서의 사고방식과 관점과 센스를 위해서 그리 한다 하자. 그러면 그는 분명 표절 설교자가 아니고 설교자로서 아주 성실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잠언27:17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한 것 같이, 다른 이의 설교는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설교자를 바르게 자극하고 설교자로서의 영감에 있어서 큰 진보를 가져온다. 정말 설교자들이 이러한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그런 입장에서 매주일 다른 이들의 설교를 받아 보고 듣고 읽고 하는 설교자들이 있다면 그 설교자는 표절 설교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맡기신 설교 사역을 위해서 성실하고 신실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권장할만한 일이다. 실제로 그런 입장에서 매주 다른 이들의 설교를 받아 보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오늘날 통신의 이기를 통해서 자유롭게 접할 수 있는 설교들을 그런 목적을 가지고 접하고 연구한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런 설교자들에게 있어서 인터넷은 그들의 설교자 의식과 설교 사역의 영적인 지평을 넓혀주는 좋은 계기를 제공하는 기가 막히게 유익한 이기(利器)이다. 설교자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접할 수 있는 남의 설교들을 그런 목적에서 적극적으로 접하고 읽을 것을 권하는 바이다.

또 어떤 다른 이의 설교를 듣거나 읽고 설교자 자신이 너무나 큰 은혜를 받고 본문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에 대한 조명을 얻었고 또 자기 회중들에게 꼭 필요한 양식이라고 생각했다고 하자. 이런 경우 그것이 남의 설교이니 나 혼자만 은혜 받고 말지하는 식으로 하고 자기 설교에 전혀 반영하지 않는 목사가 잘하는 것인가? ‘표절의 유혹이나 시험에 빠지지 않겠다는 식으로 그렇게 한다면 그는 설교자로서의 모자란 지각을 소유한 자이다.

, 이런 경우 우리는 더 설교의 더 큰 전제와 원리의 기준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곧 설교는 누가 하였다 할지라도 그 증거된 진리는 결국은 목자장 되시고 모든 설교자의 설교자 되시는 주님의 것이다.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12:11). 그러니 누가 증거하였다 할지라도 바른 말씀 증거라면 궁극적으로 모든 성도들이 듣고 취할 책임과 권리가 있는 것이다. 결국 설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고 완전한 세우려는 데 있는 것이다(1:28).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도 그 목적을 향해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1:29). 곧 우리의 설교의 목적은 그 자체에 목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세우시고 자라게 하시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시고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광포하시고 나타내시는 통로요 방편이다.

그러니 진리는 어떤 의미에서 설교자 자신이나 그 회중들만의 독점물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공유(共有)될 것이다. 그러니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통해서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와 조명을 얻고 은혜를 받았다면 설교자는 자기 설교를 통해서 회중들에게 그것을 나눌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목적에서 남의 설교를 자료로 삼았다면 그것을 표절이라고 할 수 없다고 발제자는 본다그런 경우 그 설교의 기본 자료의 원천을 밝혀야 할지 그렇지 않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그 날 설교의 형식과 내용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만일 어떤 남의 설교의 진술을 그대로 따와서 쓸 경우 이름을 밝히지 않더라도 내가 아닌 모 설교자의 설교 속에서 나온 말이라고 밝히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설교의 포인트는 같기는 하지만 나름으로 그 설교자가 본문을 다시 더 묵상하고 설교자로서 자기 회중의 영성을 그 말씀에 비추어 사유하는 과정을 통해 그 설교 스타일이 그 설교자 자신의 방식과 전달 방식으로 재정돈이 되었다면 그 설교의 포인트에 대한 원천을 구태여 밝히지 않아도 될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미세한 것을 결정하는 것은 설교자의 양심에 맡길 일이다. 어떤 경우는 분명 어떤 설교자의 증거를 통해서 들은 말인데, 그 출처가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있을 경우에는 어떤 분의 이야기였는데, 그 분이 기억나지 않으나 그 내용만은 기억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스펄전 목사의 경우에 한 일화가 있다. 스펄전 목사는 설교자, 또는 목회자 대학을 세워 설교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런데 스펄전 목사가 가지 목회자 대학에 재학 중인 어떤 학생이 설교학 설교십습 시간에 설교하는 것을 듣게 된다. 그런데 그 학생이 자기가 보는 자리에서 자기가 한 설교를 그대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스펄전 목사는 그 학생을 불러 추궁하였다. ‘어째서 내 설교를 표절하였느냐?’ 그랬더니 그 학생은 절대로 목사님 설교를 표절한 것은 아니라.’고 잡아떼었다. 스펄전 목사는 정말 괘씸한 생각이 났다. 그래서 재차 다그쳐 물었다. 스펄전은 자기가 전에 한 그 설교를 잘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스펄전의 설교는 영국 전역에 배포되어 읽혀졌다고 한다. 스펄전은 이 학생이 자기 설교를 베껴서 설교했다고 추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학생은 결코 아니라고 부인하였다. 그 학생은 스펄젼의 추궁에 실토하였다. “사실 목사님 제가 목사님의 설교를 도용한 것이 아니라 다른 목사님의 것을 도용하여 설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른 목사의 이름을 대었다. 그리고 그 학생이 표절한 설교가 들어 있는 책을 가져왔다. 과연 그러하였다. 그 학생은 스펄전 목사의 설교를 읽고 그 원고대로 표절 설교한 것이 아니라, 다른 목사의 설교를 표절하였던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인가? 사실은 스펄전 목사가 다른 선배 목사의 설교를 그대로 한 것이었다. 이 말은 스펄전 목사도 표절 설교를 하였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가? 스펄전은 분명 다른 설교자들의 설교를 참조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의 독서량이 거의 4천여 권에 달하였다 한다. 일의 추이는 이러하였다. 그가 2백여 년 전의 청교도 목사의 설교를 읽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 읽은 설교의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게 되었다. 그런데 자기도 알지 못하게 그 심령 속에 각인되었던 그 설교의 인상이 살아났던 것이다. 스펄전은 표절 설교를 한 것이 아니다. 스펄전은 자기의 설교를 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설교는 이전에 그 청교도 목사의 설교의 인상의 복사판과도 같았던 것이다. 스펄전 목사가 독창적인 설교만을 하는 것이 옳다.’는 의식 보다는, 보다 바른 설교를 하는 것이 옳다는 의식을 더 크게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떤 목사는 발제자에게 언제 만나서 이런 말을 하였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에베소서를 잘 번역하여 주시어 제가 큰 덕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아예 저녁 예배 시간에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에베소서 강해집을 중심으로 연속적으로 훑어 나갑니다. 물론 성도들에게 그 사실을 광포하고 말입니다. 제가 읽고 요점을 정리하여 가지고 나가서 성도들에게 설교하지요. 저와 성도들이 다 같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고 있는지요.” 그 목사는 표절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자기가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 곧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바른 꼴을 먹이려는 양심 있는사역자임에 분명하다.

설교자는 꼭 자기 자신의 독창적인 설교만이 참 설교라.’는 아집을 버려야 한다. 자기 보다 더 나은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좋은 것이 있으면 자기 나름으로 소화해서 성도들에게 좋은 꼴을 먹이려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양심적인 처사이다. 그것은 표절이 아니다.

교묘한 짜깁기는 표절 중에 가장 악한 형태이다. 그대로 남의 설교 전체를 통째로 가져다 쓰면서 자기 설교인양 하지는 않지만, 온통 설교 준비를 남의 설교만 뒤지고 다니다 만난 자료들을 뽑아 짜깁기를 하여 설교하면 그것은 표절이 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이 설교 자료가 궁하다 하면서 주일에 설교한 것들을 서로 바꾸어 나누어 가지고 서로 바꾸어 설교를 한다고 하자. 그것도 표절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설교자가 자기 나름으로 연속적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회중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설교하는 일에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서 남의 해 놓은 것만 취하고 혼합하여 내놓는다면 그것은 표절이 되는 것이다. 같은 진리라도 교회마다 상황이 달라서 진리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적용과 강조는 달라질 수 있어서 각 회중의 스승으로 세운 설교자는 자기의 소임을 위해서 자기 교회에 필요한 설교를 하기 위해서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자신이 부단히 연구해야 한다.

 

3. 결론

이와 같이 위에서 알아 본 바와 같이 표절 여부는 설교자의 소명과 설교관과 설교 방식과 설교자의 삶의 실제나 자세에 따라서 결정이 되는 것이다.

누구나 이러한 점에서 확실하지 못하면 표절의 시험에 빠질 수 있다. 이런 일에 나는 완전하게 자유하였다.’고 자랑하고 뽐내는 자가 있다면, 그 교만으로 인하여 언젠가는 표절 설교자의 반열에 자신이 든 것을 발견할 날을 맞게 될 것이다. 또한 표절의 경험이 있고 지금 그러한 식으로 설교를 하고 있더라도 다시 이 설교자의 소임의 막중함과 그 정당한 길을 되찾기 원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능히 그 사람을 표절 설교자의 대열에서 빼 내시어 신실한 설교자의 반열에 들게 하시는 자비를 베푸실 것이다. , 설교자가 한 편의 설교를 하기 위해서 자기에게 그 사명을 맡기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서있으면 분명 하나님께서 그 설교자를 다시 새롭게 세우실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본문 말씀과의 씨름과 묵상과 기도, 자기 회중에 대한 설교자로서의 영적인 진단, 설교자로서의 사유의 과정을 거치고 두려운 마음으로 설교할 내용을 작성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그 내용을 두렵고 떨림으로 증거 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2:1-5는 설교자로서의 사도의 자세를 보이면서 모든 설교자들이 본받아야 할 설교자로서의 본을 제시하시는 성령님의 교훈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런 자세의 설교자 의식과 실천이 없으면 그 설교는 표절은 아니어도 표절과 같이 가치가 없는 설교가 될 것이다. 또한 남의 설교를 참조하였다할지라도 위에서 말한 참 설교자의 소임을 더 잘하기 위한 과정 중의 부분이었다면 그 설교는 표절이 아닌 것이다.

우리 설교자들은 각자 하나님께 받은 설교자로서의 보편적인 소명이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 설교자 각자 하나님께서 주신 개별성, 나와 같은 설교자나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주신 은혜와 은사와 소양을 따라서 내에게 맡겨진 회중 앞에 내 설교를 해야하는 것이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그러는 과정 중에서 설교자와 회중 모두 바르고 견실하게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택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런 과정이 계속 되면서 그 설교자의 설교는 더욱 더 깊어가고 순전하여 질 것이다.

그러한 우리 모두 그러한 일이 우리 모든 설교자들에게 있기를 원해야 할 것이다. 발제자는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설교자로서의 소명의 막중함과 그 영광과 그 소임의 무거움을 다시 재인식하는 계기로 삼으려 한다. 그런 의식과 설천이 모자라면 발제자도 표절 설교자의 라벨을 다는 누추함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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