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웅 박사, 오늘 예배 어땠냐? 하지 말고 하나님 그분을 얻으라!

코닷 편집장 김대진 박사는 얼마 전 예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신진학자 임대웅 박사를 만나 지난 22일 코닷 사무실에서 한국교회의 예배에 대해서 인터뷰를 했다.

임대웅 박사님 먼저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 

모교회는 남서울교회입니다일산벧엘교회와 울산교회에서 봉사한 후 올해 1월부터 서울서문교회에서 대학부와 주일학교 교육을 위해 봉사하고 있습니다대학 때는 행정학을 전공했고고려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남아공 스텔렌보쉬대학에서 예전학을 공부했습니다유학은 전적으로 울산교회의 기도와 물질의 도움으로 가능한 일이었는데지면을 빌어 다시 한 번 정근두 목사님과 울산교회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 인터뷰 하는 임대웅 박사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대학에서 예배학을 전공하셨는데한국교회 예배에 대해서 진단을 한 번 해본다면 어떨까요?

많은 교회들이 예배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가지고 교회 내부적으로 많은 대화를 하는 것은 참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문제점에 대해서도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여러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거기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겠지만제 나름대로는 균형감의 상실을 가장 큰 문제라고 봅니다세 가지 측면에서 균형을 잃었습니다.

세 가지 측면의 균형이란 어떤 것인가요?

첫째, “경외함(awe)”과 맞이함(hospitality)” 사이의 균형입니다예배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경외함과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인해 우리를 맞이해 주시는 기쁨이 공존합니다하지만한 편에서는 경외함만을 강조하면서 일체의 감정의 발산과 기쁨의 표현을 제한하는 예배를 하는가 하면다른 편에서는 축제로서의 측면만을 강조한 나머지 사람의 감성과 흥미를 잡기 원하는 예배를 합니다더구나 맞이함을 하나님이 우리를 맞이하심으로 이해하지 않고우리가 교회에 처음 오는 이들을 맞이함으로 이해한다면, “경외함은 더욱 찾기 힘들게 됩니다

둘째, “말씀과 성찬” 사이의 균형입니다개혁자들의 후예로서 우리는 말씀 중심의 예배를 잘 고수하여 왔습니다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성찬의 중요성과 그 거룩한 의식이 주는 유익에 대해서는 간과한 채 지내온 면이 있습니다

셋째, “음악” 사용의 균형입니다여기에는 음악 장르와 악기 사용의 균형그리고 봉사자(찬양밴드와 성가대사이의 균형 등이 포함됩니다어느 한 장르나 특정 시대의 음악만을 고집하거나예배에 사용될 수 있는 악기와 사용될 수 없는 악기가 있다는 생각이 음악사용에 대한 균형을 잃게 합니다그리고 음악봉사자로서의 성가대와 찬양밴드의 역할이나 교회 내의 지위예산 배정 등등 여러 가지가 결국 예배 음악의 균형을 잃게 만든다고 봅니다

균형이 항상 정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때로는 옹골지게 고집을 부리면서 고수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하지만경외함과 맞이함말씀과 성찬음악사용에 있어서는 균형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이렇게 균형 잡힌 예배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예배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예배당을 빠져 나가면서 오늘 예배에서 은혜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거나 같이 예배한 사람에게 오늘 예배 어땠어?”하고 물어봅니다두 가지 다 사람 중심의 질문들입니다예배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냐고 물어보신다면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얻는 것은 하나님 그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제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배가 은혜 받는 장소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그 이전에 예배는 하나님과의 언약이 갱신되는 자리입니다약속하신 대로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됩니다그런데 이 관계는 단순한 하나님-백성의 관계를 넘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그것을 먹고 마심으로 삼위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예배를 통해 은혜 받고 어떠어떠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을 소유한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럼 자연스럽게 목사님의 학위 논문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어떤 주제로 논문을 쓰셨나요? 

스텔렌보쉬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마쳤는데석사 논문은 위에서 잠시 언급한 경외함(awe)”과 맞이함(hospitality)” 사이의 균형에 대해 썼습니다그리고 박사 논문은 삼위하나님과 연합의 자리로서의 예배에 대해서 썼는데동방교회의 교리인 신격화를 예전적으로 적용해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신격화라고 하면 우리에게는 좀 낯설기도 하고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습니다신격화 교리란 어떤 것인가요?

신격화(deification)는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이 된다(theosis).”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된다라는 표현 때문에 우리로서는 거부감이 드는 교리인 게 사실인데요사실 이 교리를 발전시켰던 동방교부들과 현대의 동방교회에서는 이 교리가 존재론적인 변형을 의미한 적이 없습니다오히려 삼위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정립이 신격화 교리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된다.”라는 말은 그러므로 becoming이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개념 안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신격화 교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칭의 및 성화교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그런가요?

이에 대해서는 약간의 역사적 배경 설명이 필요한데요, 1971년 핀란드 루터란과 러시아 정교회 간에 에큐메니칼 컨퍼런스가 우크라이나 키에프에서 열립니다여기서 핀란드 루터란들은 루터의 칭의에는 기존에 많이 강조되었던 법정적 개념 외에 거룩한 삶으로의 참여라는 능동적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고그것이 곧 동방교회의 신격화 교리와 상통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후 핀란드 루터란에서는 헬싱키 대학의 매너마(Mannermaa)교수를 필두로 루터 다시 읽기 작업이 진행되어 많은 논문들과 단행본들이 출판되었습니다이것은 다시 서방신학자들의 칭의 (혹은 성화)에 대한 가르침을 신격화와 비교 연구하는 작업들로 이어지는데대표적으로는 칼빈의 칭의론과 신격화에 대해 다룬 논문들이 2002년부터 2011년까지 다양한 학술지에 6편이 실렸고존 웨슬리의 성화론과 신격화에 대해서는 이미 1990년대에 출간이 되었습니다그리고 개혁주의 조직신학에서 마이클 호튼은 영화와 신격화를 비교하며 짧게 다루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서방에서의 신격화 연구는 주로 칭의성화영화 등 구원의 서정의 한 단계와 비교되어 연구되었습니다그런데 동방신학에서 신격화는 타락에 대한 해결책으로서의 구원과만 관련되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보다 넓은 스펙트럼을 가지는 교리로그들에게 신격화란 창조의 목적이자 삶의 목적입니다그래서 신격화에 대한 연구는 보다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고구원과 관련해서라면 구원의 서정 전체와 비교 연구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제 논문에서 했던 작업도 신격화 교리를 실천신학특별히 예배에 적용시키는 것이었는데저는 신격화가 본래 내포하고 있는 삼위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언약갱신의 자리로서의 예배가 곧 신격화가 실현되는 자리임을 주장했습니다

재미도 없는 논문 얘기에 신격화 얘기를 너무 오래했네요!

최근 코닷에서는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저서들을 리뷰하는 기획기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최근 리뷰한 기독교의 미래에서 맥그라스는 맥도날드화 된 교회와 상아탑에 갇힌 신학이라는 표현을 했는데요어떻습니까맥도날드식 예배도 있습니까

맥도날드화된 교회가 결국 경영의 방법을 동원해서 소비자의 기호에 맞추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비판하는 이야기라면맥도날드식 예배도 물론 있을 수 있고실제로 그런 예배가 많이 진행되고 있다고 봅니다그것은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표현대로 하자면, “맞이함(hospitaility)”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예배를 성도들 특히 초신자들이 부담 없이 있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으로 만들려다 예배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옆방으로 쫓아 보낸 격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맥그라스는 또한 상아탑에 갇힌 신학이라는 표현을 했습니다오늘날 예배학이라는 학문이 상아탑에 갇힌 신학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소통하는 살아있는 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Lex Orandi Lex Credendi”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도의 원리는 곧 신앙의 원리이다라는 말로이론과 실천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말할 때 주로 사용합니다예배는 반드시 바른 신학 위에 서야 합니다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기호만 만족시키는 이벤트가 되고 맙니다마찬가지로 신학은 예배를 통해 현실화되어야 합니다그렇지 않은 결과가 말씀하신 상아탑에 갇힌 신학이겠죠.

교회사에서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예 중에 하나는 삼위일체론의 형성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삼위일체 교리는 결국 누구를 예배할 것이냐 라는 질문의 답으로 나온 것입니다바른 예배를 위해 신학적 작업이 진행되었고그 결과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천신학의 목적 중 하나는 행동의 원리를 신학으로부터 찾는 것입니다실천과 신학을 분리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예배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바른 신학과 바른 실천” 두 가지를 다 의미해야 합니다이론과 실천교리와 예배의 관계가 바르게 정립될 때 상아탑에 갇힌 신학은 해방될 수 있다고 봅니다

임 박사님의 한국교회 예배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성도들이 예배가 중심이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예배와 삶이 분리된 이원론적 사고에 대한 반성으로 최근에는 삶으로의 예배를 많이 강조합니다저도 우리의 일터와 학교와 가정이 예배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명제에는 동의하지만우선순위는 분명 주일 공예배에 두어야 한다고 믿습니다주일에 말씀을 통해 삼위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얻고성찬을 통해 그 삼위하나님과 연합하는 자만이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그런 사람이야말로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할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제가 말씀드리는 예배가 중심이 되는 삶에서의 예배는 주일 공예배를 의미합니다

이건 개인적인 질문인데요바른 예배 순서의 예를 하나 들어주신다면

개인적으로 물어보시니 저도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 드립니다(웃음). 하나의 바른 예배 순서란 없다고 생각합니다다만 개 교회에 좋은 예배 순서는 있을 수 있습니다바른 신학 위에서 모든 성도들의 몸에 가장 익은 예배 순서가 가장 좋습니다그런 점에서 예배 순서는 자주 바꾸는 것 보다는생각하지 않고서도 그 다음 순서로 바로 넘어갈 수 있을 만큼 적응된 순서가 좋습니다.

저는 종교개혁 시기까지 유지되었던 말씀과 성찬이 각각 한 부분을 차지하는 예배의 회복을 꿈꿉니다성찬이 예배의 한 순서가 아니라말씀과 함께 예배의 축을 이루는 예배입니다그러면서저 나름대로는 현대적인 감각을 살려보려 했는데그것이 잘 드러나는지는 모르겠습니다아무튼이것은 철저히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1말씀의 예전 (35) 

예배로의 부름

사도신경

회개의 기도(공동기도문)

사죄의 선포

송영

성경봉독

설교 (20)

헌금

찬양 

  

비세례자들 퇴장 (세례자들은 이들을 위해 기도함)

이들은 퇴장 후 성찬의 예전이 드려지는 동안 세례교육 주일학교 교육을 받음

  

2성찬의 예전 (30

주기도 

찬양

성령님의 임재를 위한 기도

평화의 교제 교회를 위한 기도

제정의 말씀

떡을 나눔

잔을 나눔

감사의 기도

찬양

축도

 

앞으로도 따끈 따끈한 신진학자님들과의 인터뷰는 계속 될 에정입니다. 주변에 공부 마치신 신진학자들 계시면 코닷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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