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토론방

제목

최갑종교수님의 답변과 질문에 대해서 답변합니다.

닉네임
전영태
등록일
2020-12-08 11:44:53
조회수
880
1. 1번의 7장17절과 20절의 해석문제에 대하여
교수님은 대답하기를
'전영태님은 제가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속에 거하는 죄니라"에서 후반부만 해석하고 전반부는 언급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셨는데 이것은 오해입니다. 저는 "율법은 나에게 선한 것을 알게 하고, 내가 율법이 가르치는 선한 것을 행하기를 원하고 있지만, 실제 행동에서는 나는 율법이 가르치지 않는 오히려 미워하는 것을 행한다. 따라서 문제는 율법이 아니고, 오히려 나로 하여금 내가 미워하는 것을 행하도록 하는 내 속에 있는 죄이다. 이처럼 율법은 그 자체 선하긴 하지만 내 속에 있는 죄의 세력을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의 실제 행동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율법은 원하는 “나”와 행위 하는 “나” 사이의 갈등과 분리를 가져온다... 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율법을 따라 선을 행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실제로 나의 삶을 지배하는 세력인 죄가 나로 하여금 율법이 가르치는 것과는 반대되는 것을 행하게 한다. 말하자면 나를 사로잡고 있는 이 죄의 세력이 내가 원하는 선을 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죄가 내 자아, 인격 그리고 삶을 분리시키는 주범이다"말에서 전반부와 후반부의 내용을 다 언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이 구절에 대한 전영태님의 논지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듭니다.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라는 말이 신자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인지. 요일 3:6,9을 인용하셨는데 왜 요일 1:8, 10은 인용하지 않는지도 궁금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저의 첫번째 답변 :
제가 전반부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말의 의미는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에 대한 교수님의 분명한 견해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은 명확하게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의 견해에는 ’‘이 죄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다’라고 분명하고 명확하게 언급하는 부분을 찾을 수 없습니다.

비슷한 내용이 ‘말하자면 나를 사로잡고 있는 이 죄의 세력이 내가 원하는 선을 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죄가 내 자아, 인격 그리고 삶을 분리시키는 주범이다’말에서 전반부와 후반부의 내용을 다 언급하였습니다.’라고 하셨는데, 하지만 이 내용에서도 전반부인 ' 이것(이죄)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분을 교수님의 설명하시는 내용이라고 본다면, 이 부분을 성경 본문의 의미와 연관지어 문장을 구성해 보겠습니다.
‘나를 사로잡고 있는 이 죄의 세력이 내가 원하는 선을 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죄가 내 자아, 인격, 그리고 삶을 분리시키는 주범이므로,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닙니다’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부분에서 다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이 문장을 불신자에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뒷부분의 ‘내 속에 있는 죄니라’를 덧붙여도 이것은 말이 안된다고 봅니다.
어떻게 불신자(교수님의 주장하듯 대상이 '그리스도와 성령 없이 율법을 따라 살려는 유대인'이라 하더라도)를 향하여 '당신속의 있는 죄의 세력이 죄를 짓는 것이니 당신이 지금 짓고 있는 죄는 당신이 짓는 죄가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죄인을 죄인의 자아와 죄의 세력으로 분리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불신자에 대해서 불신자의 자아와 죄의 세력을 분리해서 말씀하는 부분을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거듭난 자아와 죄의 육신을 분리하는 이원성을 증거하는 본문들은 로마서 7장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 5장, 로마서 8장, 에베소서, 골로새서등 숱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또한 가장 직접적으로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12제자들 중 베드로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입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16:23).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26:41)과 가야바 뜰에서의 예수님에 대한 부인 등입니다.



두번째 답변 :
두번째 내용은 ‘그리고 제가 보기에 이 구절에 대한 전영태님의 논지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파악하기 힘듭니다.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라는 말이 신자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인지. 요일 3:6,9을 인용하셨는데 왜 요일 1:8, 10은 인용하지 않는지도 궁금합니다.’에 대한 것입니다.

: (제 말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로마서 17절(20절)의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있는 죄니라’는 구원후의 신자의 상태를 설명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함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15절에서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에서 알지 못하노니 단어는 기노스코를 쓰고 있습니다. 이는 14절에서 ‘율법이 신령한 줄 알거니와’에서 알거니와를 오히다로 쓴 것과 비교해 볼 때 바울이 단어를 가려서 분명하게 구분해서 사용했음을 인지 할 수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기노스코는 관계적, 인격적인 앎과 관련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보면 바울이 15절에서 말씀할려는 의미는 ‘내가 인격적으로 내가 행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인데, 즉 내가 의도적, 의지적, 인격적인 행함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사도바울은 17절에서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내 육신속의 죄가 마치 주체적으로 행하는 것에 대해서, 성도인 나는 그 죄의 역사에 의지적으로 의도적으로 주체적으로 관여하지 않고 있다라고 분위기적으로 해석할 수 있음입니다.
이는 신자의 이원성과 거듭난 사람속의 내재하는 육신과 그 속의 죄의 악을 실랄하게 증거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는 17절, 20절 뿐만 아니라 21절, 23절, 24절, 25절 그리고 로마서 8장 10절, 12-13절, 17절, 23절, 26절등과 로마서12장 1-2장, 갈라디아서 5장 등등등 많은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과 관련되기 때문에 요한 일서 3장 6절,9절을 인용했습니다(요일 6:9'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6:6, 5:18). 요한 일서 6절과 9절의 바른 해석은 죄를 짓지 않는다라는 말은 본인이 반복해서 의도적으로 계속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또한 본인은 죄를 짓고 싶지 않지만, 신자속에 내재하는 육신의 죄(소욕)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되는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죄를 ‘즐기며’ ‘좋아라’하고 지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의미겠지요.

그렇다면 내 속 즉 육신속의 죄가 죄를 지으면 이 죄는 나와 상관이 없습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가 자신의 뜻과 의지에 어긋나게 육신속의 죄의 소욕으로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죄는 명확히 자신이 짓는 죄임이 명확합니다.
때문에 다윗도 죄를 짓고 나서 회개했고, 사도바울도 임종이 가까워진 그 싯즘에도 ‘나는 죄인중의 괴수니라’고 고백하고 있음입니다.




2. 5번의 구원문제와 관련한 답변
교수님은 대답하기를
‘제가 계속해서 주장한 것은 성경은 믿음으로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가르침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에 합당한 성화의 삶이 없이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양면의 주장이 있다는 것과 전자만을 가르치고 설교하지 말고 후자 역시 성경말씀으로 가르치고 설교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제가 많은 점에서 김세운 교수와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고 하지만 이 점에서는 분명하게 의견을 달리하고 있습니다. 2016년도에 출판한 제 책, [칭의란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우리는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은혜를 강조하는 바울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와 마태복음도 함께 가르치고 설교하여야 합니다. 심지어 바울도 로마서 서두(1:5)와 결언(16:26)에서 "믿음의 순종"(헬라어원문)을 말하면서 믿음은 항상 순종(행함)을 동반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역시 갈 5:6,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했습니다.

: 교수님은 김세윤교수님과 의견을 달리하신다고 하셨지만, 저는 사실 교수님의 대답에서도 교수님에 대한 의구심을 완전히 떨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은혜를 강조하는 바울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와 마태복음도 함께 가르치고 설교하여야 합니다. 심지어 바울도 로마서 서두(1:5)와 결언(16:26)에서 "믿음의 순종"(헬라어원문)을 말하면서 믿음은 항상 순종(행함)을 동반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역시 갈 5:6,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 이 부분만을 본다면, 교수님의 견해에 저도 동의합니다. 성도의 삶이 성화로 드러나야 됨은 당연하고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남의 새 생명이 있는 자가 드러내는 증거가 어찌 아무것도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안에 성령이 계시고 새 생명이 있는 자는 예수님의 형상을 닮는 생명의 역사와 증거를 나타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가르치고 설교함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의문이 있습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가르침 뿐만 아니라 크리스천에 합당한 성화의 삶이 없이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주장을 성경말씀으로 가르치고 설교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라고 하셨습니다.
: 여기서 의문이 있는 것은, ‘크리스찬에 합당한 성화의 삶이 없이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라는 부분에서 ‘합당한 성화의 삶이 없이는’란 부분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심히 걸립니다. 이는 칭의 뿐만 아니라 합당한 성화의 삶이 우리의 구원의 필요 충분조건을 의미하는 듯하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와 일명 유보적 칭의론과 무엇이 다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합당한 성화의 삶이 없이는'라고 하는 한다면, 이때 합당한 이라는 단어는 설명이 필요하다라고 생각됩니다. 이 합당한은 주체가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인간인 우리도 포함됩니까?. 만약에 인간도 포함된다면, 인간인 우리가 어떻게 합당하다라고 할 수 있는 구원의 받을 만한 성화의 범위를 규정할 수 있고 또 알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 단어의 주체를 하나님만이라고 한정하는 것이라면, 굳이 이런 논란이 필요 없다고 봅니다. 이는 익히 우리가 아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성화가 필요함은 당연한 것이고,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함께 아시고, 보시고, 성도의 깊은 속마음까지도 공감하고 이해하셔서 인자와 진리로 우리의 믿음을 판단하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 저는, 교수님의 로마서에 대한 전제가 저의 견해와 많이 다르기에 교수님의 로마서 이해와 논리의 전개와 내용에 대해서 다시 언급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라 여겨 약하겠습니다.
다만 교수님의 견해나 설명이 로마서의 본문이 말씀하는 바른 의미를 얼마나 잘 나타내는 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성일:2020-12-08 11:44:53 183.107.231.219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게시물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최신순 추천순  욕설, 타인비방 등의 게시물은 예고 없이 삭제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