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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더스의 주장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진리의 복음과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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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태
등록일
2022-06-06 17:25:37
조회수
583
샌더스의 주장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음의 진리와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샌더스는 바파유의 결론에서 팔레스타인 유대교 문헌에서 견해를 같이하는 점을 말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은혜와 행위의 관계에는 두 측면이 있다.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지만, 심판은 행위에 따라 이루어진다. 행위는 ’안에‘ 머무는데 필요한 조건이지만, 행위로 구원을 얻지는(사들이지는) 않는다.’
이 샌더스의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이유는 샌더스는 자신이 팔레스타인 유대교 문헌들(예수님 출생 전후 200년)을 연구한 결론적인 패턴(종교적인 패턴)을 무리하게 바울 서신에 적용해서 재단하고 있다. 특히 중요하고 핵심적인 부분에서 샌더스는 무리를 하고 있다, 이 무리는 사실 무리를 넘어 논리의 비약으로 이어져서 내용의 왜곡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샌더스의 주장이 무리라는 점은 자신의 논리의 주장을 위하여 바울이 성경에서 말하는 핵심보다는 근본 외적인 것들 즉 자신이 연구 문헌으로 인용한 유대랍비문서등의 주장들을 중요 핵심 논리적 근거로서 제시하기 때문이다.

위의 주장에서의 문제점을 성경의 말씀과 비교해 보겠다.
먼저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지만, 심판은 행위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문장이다. 바울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내용을 살펴보면 심판은 행위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전체 심판의 형태로 보면 맞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심판을 구원받은 신자에게로 제한하면 이 말은 문제가 있다. 하나님은 믿는 자녀들을 먼저 징계하시고 훈련하시지 무조건 심판좌로 강제하시지는 않는다. 이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믿는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이다. 무엇보다 최종심판좌에서도 믿는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자들의 변호사로 계셔서 믿는자들의 행위가 아니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하시고 구속하심을 변호해 주신다. 이렇게 믿는자들의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음으로 심판받는 것이다.
두 번째는 율법의 행위는 ’안에‘ 머무는데 필요한 조건이지만이라는 말이다.
샌더스의 말하는 의도는 이해하겠다. 하지만 나는 왜 샌더스가 이런 말을 하는지 의아하다. 왜냐하면 샌더스가 말할려는 의도는 이해하겠으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내용과 관련해서 분석해보면 말이 안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율법의 목적은 정죄의 기능이다. 죄를 드러내는 기능인 것이다. 로마서 3장 19절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함이니라’. 로마서 7장 12절도 ‘그런즉 선한 것에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내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이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한다. 결국 율법으로 온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율법을 연구하고 순종할려해도 율법의 의를 온전히 지킬 수는 절대 없다는 것이다. 이는 구약에서 보여주는 유대인들의 삶을 보면 능히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를 명확하게 확증하여 주지 않는가?. 선지서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평가는 정말 안타까울 지경이다. 구약에서의 율법을 순종함에 대한 선지자들의 유대인에 대한 성경의 평가가 옳다면 샌더스의 주장은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즉 절대 가능하지 않은 일을 가능하다는 가능성 뿐만 아니라 그것을 능히 할 수 있고 순종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율법과 유대인에 대한 평가가 아닌 것이다. 예수안에 있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율법아래에 있는 것이다. 율법아래 있는 자는 누구든지 율법의 성격상 절대로 율법을 지킬 수 없다. 때문에 샌더스가 말한 율법 안에 머무는 조건이라는 말은 예수 안에 있지 않는 자들에게는 불가능한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를 성경에서의 율법에 대한 말씀과 비교해보면, 유대인들은 어느 한 사람, 그리고 어느 순간 항상 하나님의 언약안에 머물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하는 점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율법의 기능이 옳다면 유대인은 대부분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다. 성경에서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능력은 성령으로 가능하다고 말씀한다. 이는 에스겔서 36장 26절에서 말씀한다. 즉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진실로 믿을 때 성령께서 함께 하시어 율법을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 새언약에 속한 약속이지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구원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듯 율법의 순종도 은혜로 주신 성령으로 가능(롬8:4)하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그래서 로마서 9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한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고 하시면서 31절에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라고 하신다. 그리고 11장 5절에서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남은 자가 있느니라'하시며 남은 자 사상을 말씀하신다. 이러함에도 이스라엘백성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택한 받은 진정한 하나님의백성 즉 믿음의 참된 백성이 있다는 말씀이다.
또한 한 이론이 있다. 샌더스의 랍비문헌연구에서 도출한 부분을 주장하기 위해서 바울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기전에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다라고 말하는 부분을 차용하는 부분이다. 이 견해는 분석이 필요한 부분일 수밖에 없다. 바로 앞에서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 우리 힘과 능력으로는 가능하지 않다고 했고 율법의 본래 목적이 정죄의 기능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율법을 가까이 할수록 절망스러울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바울은 로마서 7장 7-13절에서 밝히고 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말씀하는 언급이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다. 하지만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다고 한다. 이러하다면 바울이 이 언급은 앞의 성경말씀과 어긋난다. 때문에 표면적으로 이해하기보다 이해와 분석이 필요해지는 부분인 것이다.
샌더스의 견해를 살펴보면 샌더스가 신학자로서는 놀랄만하지만 정말 구원받은 사람인가는 의문이 든다. 구원의 은혜와 놀라움과 감사와 축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샌더스가 구원의 은혜를 안다면 내가 생각하기에 바파유의 견해와 결론은 달라졌을 수 있었겠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교회의 리더들은 샌더스의 이 부분으로 인한 문제를 한번 깊이 숙고하면서 이 책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책을 연구함에 샌더스의 노력과 연구의 분량과 범위와 방대함에 자신도 모르게 압도당할 수 있겠다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놀랄만하고 방대한 노력과 열정이 들어간 훌융하다고 할 수 있는 연구의 내용도 진정한 진리와 복음과는 상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그것이 복음의 진리를 비교 평가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것임에는 정말 조심히 접근해서 분석하고 검색해야 한다고 본다. 예로 헬라 철학의 핵심인 플라톤이나 아리스토 텔레스의 견해가 아무리 탁월하고 심오하다고 해도 구원의 진리와는 실제로 거리가 먼 것이다. 나는 샌더스의 바파유에서 주장하는 내용도 갖은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고 본다.

무엇보다 중요한 우리가 인지해야 할 부분이 있다. 샌더스가 바파유에서 연구자료로서 인용한 핵심 자료들은 예수님을 거부한 유대교랍비들의 주장한 내용들이라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유대교의 랍비들을 어떻게 말씀하셨고 그들을 어떻게 평하셨는가를 이해하면 좀 더 명백하게 판단할 수 있다.
예로 요한복음 8장 31- 59절에서 예수님과 유대인들간의 대화와 논쟁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샌더스의 주장처럼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주장한다. 33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남의 종이 된 적이 없었다고 말하며 예수님께서 진리를 앎으로 자유케 되리라는 구원의 복음을 거절한다는 점이다. 자신들은 남의 종외 된 적이 없기에 즉 언제나 아브라함의 언약의 자손으로 있었기에 자유케 될 필요가 없으며 현재 자신들은 자유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39절에서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이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약속의 후손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샌더스의 주장과 맥락이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놀라운 점은 예수님께서 이런 유대인들을 향한 진단과 평가이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믿고 있는 주장과는 다른 말씀을 하신다. 34절을 보면 ‘죄를 범하는 자는 죄의 종이라’고 말씀한다. 이는 율법의 기능을 말씀하는 로마서3장과 7장을 비추어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자신들의 믿는 바와는 다르게 죄의 종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의 목적은 로마서 3장 19절과 로마서 7장 7-13절을 이해하면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함이니라’하신다.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게 하기 위해서 율법의 기능은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임하면 진정으로 율법을 깨달으면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점은 율법의 기능이 정죄의 기능이기에 율법으로는 구원에 절대 이를 수 없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원래 성경적인 목적이 구원이 아니라 정죄하는 기능이며 좀더 긍정적으로 보면 몽학선생으로서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기능이라는 것이다. 이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똑같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죄의 종이므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이스라엘인일자라도 죄의 종인 것이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에 대한 평가로서 더 놀랄만한 내용은 38절과 39절, 41절 특히 44절에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의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 그리고 율법사들, 대제사장들로 대표되는 유대지도자들과 랍비들을 향한 예수님의 지적은 더 냉혹하고 비판적이고 신랄하시다. 44절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유대인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라 마귀의 자녀라는 의미이다. 여기 뿐만이 아니다. 누가복음 11장 37-54절에서도 유대인의 지도자이며 랍비들은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시고 책망하신다. 유대인 너희들은 죄인이라는 말씀이다.
이로 보면, 바울의 견해는 차치하더라도, 유대교와 유대인을 보는 샌더스의 관점과 예수님의 관점이 너무나 첨예하게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같은 시기를 살고 있는 유대인에 대한 평가가 더욱이 유대인들의 리더쉽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극명하게 갈린다. 누구의 견해가 옳은가?.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믿는다. 더욱이 사도바울의 견해도 사실 이를 확증해 주고 있다..
로마서 10장- 11장은 유대인이 영적으로 신앙에 있어서 실패한 이유와 원인을 말씀한다. 특히 로마서 10장 2-3절은 유대인이 실패한 원인을 잘못된 지식을 좇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그것도 열심히 좇았다라고 하시며 자신들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 것이 원인이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유대 이스라엘 즉 아브라함의 육신의 후손들이 실패한 이유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 신비한 지혜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나님을 송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실패로 인하여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열려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9장 6-8절에서 예수님의 평가와 비슷한 말을 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라고 한다. 약속의 자녀는 누구인가?. 실제적으로는 이삭이지만 로마서 9장을 읽어보면 31-32절을 보면 ‘의의 법을 쫒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이 부딪혔느니라’라고 말씀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자가 약속의 자녀라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로마서 10장 2-3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약속의 자녀가 되지 못하고 실패한 원인을 말씀한다. 그것은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법을 순종치 않고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로 살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5절에서 말씀하고 있다.

또 샌더스의 주장의 문제점은 칭의 복음의 중요성을 축소 혹은 무시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는 로마서에서 말씀하는 복음의 진리를 축소 혹은 무시하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해서 변종길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샌더스의 바울 사상 이해의 핵심은 법정적인 것보다 참여적인 것을 앞세우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이신칭의보다 참여 곧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더 중요한’(participation)‘ 핵심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알버트 슈바이처가 1930년에 이미 제시한 견해이다. 전체적으로 바울 사상에 대한 샌더스의 견해는 슈바이처의 견해에서 못 벗어나며 거의 그대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이신칭의보다 성령의 사역 또는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더 중요한 원리로 보는 경향 속에 계속 이어지고 있다.’
로마서에서 말씀하는 복음의 진리는 대체적으로 1장에서 8장까지 전체를 말씀한다고 할 수있다. 하지만 샌더스는 3장 후반에서 5장까지 말씀하는 칭의의 복음의 중요성을 간과?한다. 샌더스는 그리스도와의 연합등의 참여를 강조함으로 3장 후반에서 5장까지에서 말씀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그리스도안에서 의롭게 됨으로 생명의 풍성함에 이르는 복음을 무시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물론 로마서 6장에셔부터 시작되는 그리스도의 주권, 그리스도 안이 있음,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의미도 복음의 요소중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신자는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며 신자는 믿음으로 이제는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연합에 이르는 중요한 복음이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다. 로마서 5장 21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죄가 사망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은혜가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함으로 영생에 이르게 됨을 말씀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은혜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받음이 영생에 이르게 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로마서 6장 1절은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 ‘그런즉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칼빈이 말했듯이 칭의와 성화가 동시적인 은혜이긴 하지만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칭의를 받음으로 성화 즉 죄의 영향력으로 실제적으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청교도 목사인 존 오웬은 죄 죽이기라고 했다. 즉 이것은 죄성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 해방은 성령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에의 참여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럴 듯 성령의 은혜와 능력으로 성화가 중요하지만 칭의가 복음의 요소에서 중요성을 상실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성화는 칭의의 바탕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칭의의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성화를 이룰 은혜의 기반이 없다. 이런데도 샌더스가 칭의를 무시하고 축소하는 것은 복음의 진리를 간과했던지 복음의 진리를 무시한다기 보다 모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성령으로 역사하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음의 진리를 정확이 믿고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성경을 온전히 믿는 것과 복음의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기본이기 때문이다.

결론
샌더스가 일명 바파유에서 주장하는 내용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음의 내용과는 차이가 있다. 그가 정말 올바로 잘 분석했다해도, 그냥 유대교 특히 랍비들의 생각일 뿐으로 한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는 샌더스가 자료로 삼았던 같은 시대를 살았던 예수님의 견해와 너무나 상반되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샌더스의 견해와 형태를 가지고 성경을 분석하는 잣대로 삼는 것은 대단히 우려스러울 뿐만 아니라 위험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이러할진데 이런 샌더스의 주장을 바울을 통해서 말씀한 이신칭의 등의 복음진리를 재단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할 것이다. 이는 새관점에 호의를 가지거나 관심이 있는 분들이 매우 조심해야 할 부분이라고 본다. 더욱 샌더스는 신약 정경의 어떤 성경들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의 주장들을 교회의 중요한 신학자들과 목사들과 성도들이 그가 도출한 뼈대를 수용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경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샌더스가 바울을 재분석했다. 하지만 샌더스가 재단한 바울은 사실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전한 복음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계시로서 깨닫게 하신 복음이며 예수님의 복음이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샌더스와 새관점자들의 주장들을 그대로 수용해서는 안되며 주의깊게 깨어서 보아야 한다.


* 최갑종 교수님과의 논쟁을 하는 중에 부득이하게 최교수가 주장하는 이유와 근거들을 찾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최교수가 주장하는 가장 핵심 요지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음이 맞으나 최종적인 심판좌앞에서의 구원은 성경에서 명령법으로 말씀하는 말씀을 순종하는 것과도 관계있다’고 생각된다라는 것입니다.
이해될듯하면서도 혼란스러운 주장입니다. 사실 이 형태는 샌더스가 바파유에서 주장하는 유대교의 종교유형과 내용은 차이가 있지만, 뼈대는 비슷합니다. 개혁신학은 이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교수님은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샌더스와 새관점에 대해서 공부했었고, 이 과정에서 여러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샌더스와 새관점과 새관점자들의 주장에 대해서 공부하고 분석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내용은 부족하나마 샌더스와 새관점에 대해서 연구하고 분석하면서 정리한 부분중의 하나입니다.
작성일:2022-06-06 17:25:37 121.159.15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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