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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전재되어야 올바른 해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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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윤철
등록일
2022-06-21 16:13:10
조회수
222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여 그 시행착오를 반복하지않는 것은 우리가 역사나 과거로부터 얻을수있는 선물이다.
과거우리는 일제치하에서 신사참배를 거절하지못했기에 불과 10년도 되지않아서 그걸 후회하고 반성하였다.
이런와중에 어떤이는 마치 죄인인양 취급받았으며 또 어떤 이는 마치 개선장군같이 으시댓다.
그런나 이런 과오나 성과는 그들이 마침 그 순간에 한 행동이나 결과일뿐이지 그것이 항구적으로 가지게 될 족쇄나 면류관은 아니다.
베드로의 인생도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하는 시간도있었으며 주님을 위해서 순교하는 순간도있었다. 이것이 비단 베드로뿐이랴 ....

우리고신교단은 다행스럽게도 과거 신사참배의 오욕에서 차라리 면류관을 가진자들이라 자부하는 교단이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하고 가져야할것은 지금 고신교단에 속해있는 어느누구도 일사각오로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사람은 없다는 것이며. 지금 이시점에 또같이 일이 반복된다면 그렇게 할것이라고 자신할수있는 사람 또한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고신의 정신인 일사각오의 순교자의 정신을 기리고 보존하고 후대에 교육해야 할 신조라는 것이지 다른 이들 앞에서 거들먹거리기위한 상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고신교단임을 자부한다면 우리는 다른 교단에 비해서 더 영적이어야하며, 더 도덕적이어야한다.
필자가 청년시절 타교단의 교회에 출석한적이있었다. 예배후 교회에 등록하고 그 교회 담임목사님을 만났는데 아버지 보다도 더 연세가 드신것 같은 목사님께서 젊은 청년인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고신의 장로님, 권사님 슬하에서 신앙생활하다가 우리교회오니 많이 헐렁하지요?'라고 하셨다. 다른 교단이 우리 교단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새삼느끼게하는 대목이다.

1. 직업의식이냐 소명의식이냐
얼마전 우리교단내의 모 교회의 신천지파문과 그 후속 처리과정은 남미의 마약조직에서나 있을 법한 카르텔을 연상시킨다. 결과적으로 당시 상황을 처리한 결과는 관련된 목사에 대한 징계나 후속조치는 전무하며, 당사자인 권사나 장로에대해서는 과중한 처벌이있었다. 우리교단에서는 교회의 부흥에 방해가 될수있을것같은 당회장이 조치는 문제가 되지않는 다는 판단인것이다. 이것은 교단의 목회자들이 얼마나 직업의식이 투철한지를 보여준다.
또, 수도권의 어느 교회 목회자들 간의 추문에 대한 노회의 조치 또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교회법상 교회는 노회중심이고 개별교회는 그냥 지교회이므로 지교회의 문제는 노회가 재판한다)
어느교회교인이나 들어봤을법한 광고가 고신대학교 총동창회에 대한 것이다. 이와같은 동창회모임에서 목회자들의 어떤 소명을 가질까. 1990년대에 회사나 군내부에 사조직이 공적인이익이아니라 사적인 단체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것 떄문에 철저하게 금지되었었다다. 사회에셔ㅓ 폐기처분된 제도를 답습하는 수준이다. 문제는 이런 생각의 목회자들이 이런생각을 선배 목사들로 부터 배우고 후배들에게 교육한다는 것이다. 우리 나라 교회의 위임목사제도하에서 담임/위임목사는 교회에서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지게 한다. 어떠한 정치권력에서도 이런 형태는 없다.(잘아시겠자먼 우리나라와같은 정치체계에서도 3권으로 분리되어있다) 그렇다면 목사들이 이러한 권위는 교인들에게 강요되어서는 안되고 인정되어야한다. 우리가 추앙하는 목사님들은 그들이 우리에게 어떠한 카리스마도 강요하지 안았다.
이것이 회복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회복되어야 할 것은 목사로서의 직업의식이 아이라 소명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중형교회 이상되는 교회(소위 안정적인교회)의 담임목사가 되는 것은 대학교의 정년보장 교수가 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시분이 계시지 않아야 한다.

2. 제2의 신사참배
우리가 신사참배를 거부한 교단이라는 자부심은 가졌다면 불과 얼마전에 있었던 코로나사태 예배중단 결행에 대해서 우리교단은 다른 교단에 비해서 차별적인 행동이필요했을것이다. 물론 범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에서 지혜롭게 대처하는 방법이라는 측면에서 교회가 충분히 결정할수도있었다. 그러나 그 결정에 반기를 든 일부교회나 목회자를 마치 이단아인것처럼, 비정상적인 기독교인인냥 매도하고 비판하는 것은 세상의 세력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차라리 우리는 건전한 사회인이며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세상에 어필(아부)하는 듯함이 더 강했다.
과거 신사참배는 당시의 권력인 일제에 굴복하는 것이기도하지만 아부하는 것이었다. 신사참배를 결행했던 세력은 신사참배를 하지않는 일부사람들을 이단아라고 취급했으며, 전체 사회에 어울리지 못하는 외골수들이라고 비난했었다. 이런 과거의 모양을 지난 3년여 기간 중에 우리나라에 그대로 벌어졌다. 물론 극단적으로 행동했던 일부사람들이 잘했고 모두가 그렇게 해야했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 하나님의 교회에서 벌하고 꾸짖어야 할 것을 세상의 잣대로 꾸짖는 세상과 벗하여 그들을 욕했다는 것은 과거 신사참배에 대한 대부분의 교회의 태도와 다르지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15세기 독일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종교개혁운동은 다시 교회(천주교)의 부조리함과 비영성적인 것에 대한 운동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30년이 안되어 로마 카톨릭내에서도 같은 문제를 인식하고 그것을 고치려는 쇄신운동이일어났다. 이것이 로욜라의 예수회의 출발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운동과 로욜라의 종교쇄신운동중 어떤 것이 더 옳은 가는 문제가되지않는다. 나타나는 문제를 바로인식하고 올바른 해결책을 찾아서 그걸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작성일:2022-06-21 16:13:10 152.99.203.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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