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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의 그리스도 완결적 이해[2 장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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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창 기
등록일
2008-08-06 11:53:26
조회수
5035
성경을 해석할 때, 성경에 없는 역사적인 사실을 참고할 수 있겠지만, 해석의 근거로 삼을 수 없다. 또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 에스더를 위하여 베푼 잔치가 곧 신랑이신 주님께서 신부인 교회에게 베푼 만찬과 연결하는 것은 일종의 풍유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은 전체[숲]를 파악하고 세부 사항[나무]를 파악하여야 한다. 그런데, 점진적인 구원역사가 단계적 언약으로 이어지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 구원역사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성취되고 절정에 이르게 된다. 특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뒤로 돌아보는 소위, 그리스도 완결적 읽기와 해석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에스더 시대의 정황에 집중한다. 그러면 하나의 고대 사건을 다루고 거기서 일반적인 도덕 및 윤리를 배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구약의 이스라엘 [교회]를 환란 중에도 보호하시며 성장시켜 왔다. 하나님은 구약의 교회를 제국들의 보호를 받게 하시었다는 점이다. 즉 애굽 - 바벨론 - 메데, 바사 -헬라 -로마 등의 제국들 속에서 주님의 교회를 훈련시키시고, 양육하시고, 지키시었다. 에스더서도 당시 국제적 강자인 메데바사 제국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보호되었는지를 보아야 한다. 모르드개와 에스더와 그들에게 일어난 일들은 하나님의 목표를 이루어가는 수단일 뿐이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이런 사건들은 구약의 그리스도 [삼위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일부이다. 구약의 모세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을 받았다[히 11:26]. 때가 되면 아들을 보내시어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의 목표를 성취하시고, 하늘에 오르시어 성령을 보내심으로 만유를 충만하게 [엡 4:10]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사용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코이네 헬라어가 시장상인들이 청구서 작성에 쓰일 정도로 통용시킨 것도 비슷한 원리라고 본다. 이런 헬라 문화권을 조성하신 후에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헬라어 신약 성경이 기록되게 하시고, 복음이 당시 온 천하에 전파되도록 도로를 위시하여 정치, 경제, 사회적 제반 여건을 주님께서 마련하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이미 여러 세기 전에 알렉산더대왕을 세계역사에 등장시킨 것이다. 그로 하여금 당시 지중해를 중심한 그 천하를 통일시킨 것도 하나님의 통치의 일부였다. 이런 안목을 가진 역사가들을 교회가 배출하여야 할 것이다. 세계 역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목표를 이루어 가시는 그리스도 완결적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에는 이 안목이 특히 필요하다. 여기서 구약교회와 신약교회, 천상교회와 미래교회를 어우르는 그리스도의 자신[Person]에 대한 이해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즉 그리스도는 1 세기에 팔레스틴에 제한받지 않고, 시공간을 초월하신 만유[판타]적이신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 완결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우리의 주님이시요 온 세상 통치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모르드개와 에스더 시대도 통치하시었다는 말이다. 또 그리스도가 오시게 하도록, 유대민족을 보호하고, 양육하시고 계셨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통치의 맥락에서 에스더서는 물론, 모르드개와 왕후 에스더를 이해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의 조명으로 에스더를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즉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사건이 고대 중동지역에 일어난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 사건이요, 또 교회적 사건이다. 모르드개와 에스더가 온 교회적인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우리도 온 교회적인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같은 위치에 둘 수 있다. 그들도 만유적인 그리스도 부활 때 함께 부활하였고, 우리도 만유적인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다 [엡 2:5,6]. 이런 안목에서 보면 아하수에로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요, 모르드개는 모든 지혜를 동원하여 자기 맡은 일에 충성하였고[2:10-11; 21-23], 에스더도 왕후로서 아내의 사명을 잘 감당하였다[2:22].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우리 주님께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할 수 있다.

명심할 것은 이러한 적용은 막연한 윤리, 도덕주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기 위치에서 자기 임무에 신실함은 우리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앞에서 신실함과 유비[추= analogy]가 되기 때문이다.[Sydney Greidanus (김진섭,류호준,류호영) 『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328-330, 382-388]. 이 방법에서 아브라함이 새 아담으로, 사무엘이 또 다른 모세로, 다윗은 또 다른 여호수아로 본다. 무엇보다도 이 방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점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다루시는 점에서 연속성과 점진 성을 확립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라 하겠다.

결론적으로 성경해석의 중요한 원리를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사건들의 이해는 구원사의 전진에 비추어 시대별로 (chronologically or epochally) 하되, 그 적용은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Christocentrically), 또는 그리스도 완결적으로 (Christotelically) 시행하라.”
작성일:2008-08-06 11:53:26 125.189.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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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panta 2008-08-07 09:18:15
이러한 시각으로 3 장도 바로 볼 수 있다. 즉 3 장은 아각사람 하만과 유대사람 모르드개의 대결보다도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의 대결이다. 민족주의적 자존심 대결이 아니다. 교회의 승리, 성도의 승리를 내다보는 강력한 메세지로 성도들을 격려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