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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베트남전쟁, 우크라이나전쟁의 공통점과 차이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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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hen
등록일
2023-02-13 19:41:05
조회수
394
6.25전쟁, 베트남전쟁, 우크라이나전쟁의 공통점과 차이점!!!

권영근
2023. 2. 5. 8:28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지구상 도처에서 많은 전쟁을 벌였다. 이들 전쟁 가운데 6.25전쟁, 베트남전쟁, 우크라이나 전쟁은 상당한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첫째, 이들 전쟁 모두 러시아(소련)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스탈린의 지원 아래 김일성이 남침했다. 1960년대 초반 후루쵸프의 지원 아래 북부 베트남의 호지명이 남부 베트남을 침공했다. 2022년 초순에는 러시아의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직접 침공했다. 여기서 보듯이 이들 전쟁 모두 러시아의 주도 아래 시작되었다.

​둘째, 이들 전쟁 모두 중국과 관련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허용해준 주요 이유는 미중관계 정상화를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마오쩌둥의 중국이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었다. 스탈린은 미국과 중국의 관계정상화를 자국 입장에서 최악의 상황으로 생각했다. 미중관계 정상화 차단 차원에서 미국과 중국이 격돌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남침하는 경우 미국 입장에서 미군의 참전이 필연적임을 잘 알고 있었다. 스탈린은 북한군이 남침하는 경우 유엔군의 일환으로 참전한 미군이 진남포와 원산 상륙을 기점으로 38선 너머로 북진할 것이란 1949년 9월의 한반도 전쟁 계획을 캠브리지대학 출신 영국 국무성 간첩들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이처럼 미군이 38선 너머로 북진하는 경우 중국 입장에서의 한반도의 중요성으로 마오쩌둥의 중국이 한반도전쟁에 참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임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이 같은 방식으로 한반도에서 미국과 중국이 격돌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1960년대 초반 후루쵸프가 호지명의 남부 베트남 침공을 허용해준 주요 이유는 김일성의 남침을 허용해준 이유와 유사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중소분쟁이 격화되었다. 후루쵸프는 이 같은 중국을 자국의 품안으로 재차 들어오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호지명의 남침을 지원하는 경우 미군이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고, 이처럼 참전한 미군이 17도선 너머로 북진하는 경우 중국이 참전하면서 베트남에서 미군과 중공군이 격돌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후루쵸프는 이처럼 격돌하는 경우 중국이 자국의 품안으로 재차 들어올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6.25전쟁의 경우와 달리 미국은 미군을 17도선 너머로 북진시킬 이유가 없었다. 6.25전쟁 당시 미군을 38선 너머로 북진시켰던 주요 이유는 미국 입장에서 또한 한반도에서 중공군과 치열하게 싸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공군을 38선 부근으로 유인한 후 중공군과 미군이 장기간 동안 치열하게 싸우게 하는 방식으로 미군 재무장과 동맹체계 구축을 추구하고자 하는 경우 미군의 38선 북진이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전쟁과 관련하여 중국은 물론이고 미국 또한 대결을 원치 않았다. 결과적으로 미군이 17도선을 월경하지 않았던 것이다.

​2022년의 우크라이나 전쟁 또한 중국과 관련이 있었다. 중국의 세력팽창에 대항하기 위한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결집을 초래할 필요성 때문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바이든의 미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처럼 정의한 바 있다.

​셋째, 베트남전쟁의 경우와 달리 6.25전쟁과 우크라이나전쟁은 미국이 유도한 성격이었다. 시카고대학의 한반도 전문가 브루스 커밍스는 1950년 6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이 김일성의 남침을 지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시카고대학의 국제정치학자 존 미어샤이머는 미국이 푸틴의 러시아로 하여금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지 않을 수 없도록 상황을 조성했다고 말했다. 베트남전쟁은 이처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넷째, 미국 입장에서 보면 이들 전쟁은 국가안보전략를 극적으로 바꾸기 위한 성격이었거나 새로운 국가안보전략 변화를 초래한 성격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지구상 주요 국가들과의 상호협조에 입각한 질서 내지는 특정 세력 봉쇄에 입각한 질서를 추구했다. 이 같은 질서 정립을 겨냥한 대전략을 수립하여 이행했다.

​6.25전쟁은 미국, 중국, 소련 및 영국이 상호 협조하는 형태로 국제사회를 관리해갈 것이란 1943년 당시의 루주벨트의 구상이 1949년의 중국대륙 공산화와 1950년의 중소동맹 체결로 불가능해지면서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성격의 것이었다.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은 미 국방비 400% 증액과 더불어 한국, 일본 등 지구상 주요 국가들과 동맹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공산세력을 봉쇄하는 성격의 질서를 구축할 수 있었다.

​1965년부터 시작된 베트남전쟁으로 닉슨이 대통령에 취임한 1969년 1월 당시 미국은 기존의 방식으로 소련을 봉쇄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소련의 핵무기와 미사일이 대거 신장되었다는 사실과 일본과 독일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한편 미국의 의도와 무관하게 1968년 말경에는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대거 악화되었다. 마오쩌둥이 미국에 화해의 제스처를 보냈다.

​당시 닉슨 중심의 일부 세력들은 공산세력을 봉쇄해야 할 것이지만 기존 개념에 입각해서는 이것이 곤란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들은 미중관계를 개선하는 한편 아태지역에서 미군을 줄이는 형태의 대소 봉쇄정책을 추구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키신저 중심의 일부 세력들은 루주벨트의 전후 구상처럼 미국, 소련, 중국, 일본 및 독일과 같은 몇몇 국가가 중심이 되어 국제사회를 관리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1943년 당시의 전후 구상처럼 한반도와 같은 유라시아대륙 주요 지역을 자국의 영향권으로 지속 유지하지만 이들 지역에서 점차적으로 미군을 철수시켜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들 몇몇 국가의 상호 협조에 입각한 국제질서를 구상한 것이다.

​닉슨이 재선에 성공한 1972년 말경부터, 특히 닉슨이 하야한 1974년 중순 이후부터 레이건이 등장한 1981년 1월의 기간 미국은 대소 봉쇄정책에 입각한 질서를 배제하는 한편 몇몇 국가의 상호 협조에 입각한 국제질서를 추구했다. 이 같은 질서 구축 측면에서 미소 데탕트가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미국은 러시아 및 중국과 같은 전체주의 세력에 대항한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결집을 추구할 것이라고 한다. 바이든은 이처럼 말했다. 적어도 트럼프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미국은 중국을 포용하는 듯 한 모습을 유지했다. 2017년 트럼프는 중국과 소련을 자국의 주요 적국으로 정의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미국은 중국과 소련을 동시에 봉쇄하기 위한 자유민주주의 진영 중심의 새로운 질서 구축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 이들 전쟁을 통해 미국 내부에서 대전략 측면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1949년의 중국대륙 공산화와 1950년 1월의 중소동맹 체결을 보며 미국은 1945년 2월의 얄타체제, 장제스 중심의 중국, 자국의 영향권 아래에 있는 한반도, 일본을 중심으로 아태지역을 겨냥한 소련의 세력팽창을 저지할 것이란 얄타체제에 입각한 질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새로운 질서 구축 측면에서 미국의 전략가들은 세 가지 방안을 모색했다. 소련이 더 이상 세력을 키우기 이전에 소련과 전쟁을 해야 할 것이란 방안, 중국 대륙을 마오쩌둥으로부터 빼앗은 후 장제스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이란 시각, 미군 재무장과 동맹체계 구축을 통해 중국과 소련을 동시에 봉쇄해야 할 것이란 시각이 바로 그것이었다.

​소련과의 전쟁은 핵전쟁을 초래할 가능성으로 인해 배제되었다. 두 번째 방안을 맥아더와 같은 인사들이 옹호한 반면 세 번째 방안을 트루먼 대통령과 에치슨 국무장관이 옹호했다. 이들 양대세력이 격렬히 대립했다. 이들 모두 자신들의 구상 구현 차원에서 북한군의 남침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맥아더와 같은 인사들은 북한군의 남침에 대항하여 참전한 미군이 만주로 진격하는 방식으로 중국대륙을 장제스에게 되돌려주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트루먼과 에치슨은 북한군의 남침에 대항하여 참전한 미군이 38선 북진을 통해 중공군을 한반도 전쟁에 참전시킨 후 38선 부근에서 중공군과 장기간 동안 치열하게 싸우는 방식으로 미군을 재무장하고 동맹체계를 구축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필자는 트루먼이 맥아더를 유엔군사령관에 임명한 후 1951년 4월 12일 해임시킨 것이 커다란 구상에 입각한 것으로 판단한다. 영국, 호주 등 대부분 6.25전쟁 참전국들은 한국을 도와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자국 안보 측면에서 참전한 것이었다. 호주와 뉴질랜드는 참전을 통해 미국과 동맹을 체결하기 위해 참전한 것이었다. 영국과 같은 국가들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소련에 대항한 안보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참전한 것이었다. 이 같은 참전 이유로 이들 국가는 유엔군의 38선 북진을 결코 원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트루먼과 에치슨은 유엔군을 38선 너머로 진격시켜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이 같은 측면에서 트루먼은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유엔군이 38선 너머로 북진하면서 압록강을 겨냥하여 진격한 결과 중공군이 참전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서 맥아더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란 관점이다.

​본인의 자서전에서 에치슨은 유엔군의 38선 북진과 압록강 진격이 맥아더 때문에 초래된 것이었다고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맥아더가 이 같은 악몽과 같은 일을 연출할 당시 우리는 전신이 마비된 토끼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We sat around like paralyzed rabbits while MacArthur carried out this nightmare.)” 그런데 비밀해제된 자료를 보니 유엔군의 38선 북진과 압록강 진격은 트루먼과 애치슨의 작품이었다.

​트루먼은 한반도 전쟁을 통해 미군 재무장과 동맹체계 구축을 추구해야 할 것이란 자신의 구상 구현 차원에서 미군과 중공군의 싸움을 통해 중국대륙을 장제스에게 되돌려주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맥아더와 같은 세력들을 이용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 와중에서 맥아더가 희생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유사한 경우가 1972년의 미국 대선 전후에 벌어졌다. 대통령에 취임한 1969년 이후 닉슨과 같은 세력들은 기존의 봉쇄전략을 약간 수정한 형태의 봉쇄전략을 추구했다. 반면에 키신저와 같은 세력들은 미소 데탕트에 입각한 새로운 세계질서 구축을 추구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교수 쏜턴에 따르면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은 닉슨을 제거하기 위한 키신저 일당의 노력의 산물이었다. 쏜턴에 따르면 키신저 일파는 1969년부터 1972년까지의 업적으로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되던 닉슨을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시킴으로써 대선 이후 미소 데탕트에 입각한 새로운 세계질서 구축을 추구하는 자신들의 노력을 닉슨이 저지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통령에 당선된 닉슨이 키신저 일파 제거를 추구하자 이들 일파가 워터게이트 사건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닉슨을 대통령에서 하야시킨 것이라고 말한다.

​6.25전쟁 당시 트루먼이 자신과 상이한 유형의 대전략을 구상했던 맥아더를 교묘히 이용한 후 제거한 것과 마찬가지로 베트남전쟁 이후 새로운 질서 구축을 추구하면서 키신저 일당이 자신들과 상이한 대전략을 구축했던 닉슨을 제거했다는 것이다.

​키신저의 닉슨 제거에 관한 쏜턴의 관점을 아직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그러나 필자는 트루먼이 자신의 대전략 구현을 위해 맥아더를 교묘히 이용한 후 희생시켰음을 입증할 수 있는 입장이다.

​중국의 부상에 대항하기 위한 대전략 정립 차원에서 또한 미국 내부에서 나름의 대립과 갈등이 있어 보인다. 시카고대학의 미어샤이머에 따르면 아들 부시, 오바마, 트럼프, 바이든으로 연결되는 미국 대통령들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상황을 조성했다. 이들은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통해 중국과 러시아 모두를 봉쇄하기 위한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입각한 질서를 구축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미어샤이머는 중국을 겨냥한 봉쇄체계에 러시아를 포함시켜야만 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지 않을 수 없도록 상황을 몰고간 것이 미국의 실책이란 관점이다.

​지금까지 논의에서 보았듯이 6.25전쟁, 베트남전쟁, 우크라이나전쟁은 여타 전쟁과 달랐다. 이들 전쟁은 국제사회의 질서 구축과 관련된 전쟁이었다. 6.25전쟁과 우크라이나 전쟁이 새로운 질서 구축 차원에서 미국이 유도한 전쟁이었다면 베트남전쟁은 미국의 의도와 무관하게 미국이 새로운 질서 구축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전쟁이었다.

​한국국방개혁연구소장 권영근
작성일:2023-02-13 19:41:05 121.159.16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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