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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인 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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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진
등록일
2008-08-18 09:10:44
조회수
4691
성경적 견인

견인이란 하나님께서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부르신 교회(신자)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인도하시며 이끌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교회(신자)의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은 교회(신자)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에 이르도록 지속적으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 은혜가 절대적이어서 한번 구원은 영원하다고 보는 입장이 있습니다. 절대적 견인론입니다. 반면에 그 은혜를 바르게 받아서 절대적인 견인을 입는 경우와 함께 그 은혜를 헛되이 받아서 견인에서 떨어져나가는 경우가 동시에 있다는 입장이 있습니다. 조건적 견인론입니다.

성경에는 견인에 대하여 표면적으로 상충하는 구절들이 있습니다(요 5:24, 롬 8:35상, 39하, 빌 1:6, 고후 5:4-5 등과 마 7:21, 마 25:30, 롬 11:22, 빌 2:11, 딤전 1:19-20상, 히 6:4-6, 약 2:14). 그렇지만 성경은 결코 상충하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동시에 하고 있지 않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가르침을 동시에 담고 있지 않습니다. 위의 구절들은 표면적으로 나타는 것과는 달리 본문의 문맥과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연결하여 해석을 하여야 합니다. 바른 해석은 표면적으로 상충하는 듯한 구절들이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줄 것입니다. 관점의 차이일 뿐임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견인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는 기계적이지 않고 강제적이지도 않습니다. 입력하면 입력된 바를 따라서 그대로 출력되는 기계와 같은 방식의 은혜가 아닙니다. 교회(신자)의 의지가 무시되고 하나님의 의지대로만 되도록 하는 방식의 은혜도 아닙니다. 견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인격적입니다. 당사자가 받아들여서 은혜의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아서 헛된 은혜로 만들 수(고후 6:1)도 있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7-28). 양은 예수님께 속하여서 그분에 의해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에서 각 동사는 현재형입니다. 곧 현재적으로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며 현재적으로 주님께서 알며 곧 사랑하며 현재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요 14:21). 예수님의 이 말씀이 견인에 관한 성경의 절대적인 원리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 6:7-8). 예수님을 말씀을 이해한 바울 사도의 증거입니다. 이와 다르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며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거듭나면 썩어진 것을 거두는 일이 없다는 주장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성경의 증거는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의지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예수님께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믿음과 순종이 동전의 양면이라고 이야기되는 이유입니다.

성경은 구원에 있어서 삼시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원얻었다, 구원얻는다, 구원얻을 것이다. 과거형은 거듭남과 함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것을 가리킵니다. 현재형은 그 회복된 관계를 현재적으로 누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미래형은 회복된 관계로 영원토록 지내게 되는 영원한 구원을 가리킵니다. 영원한 구원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빌 2:11). 예수님은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십니다(히 5:9).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의 진술은 오직 순종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직 순종’이란 행위에 해당되지만 구원과 연관하여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거부하고 있는 행함이란 순종이 아닌 행함이지 순종인 행함이 아닙니다. 새 언약의 백성인 교회가 옛 언약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행함이라는 말로 정죄한 것입니다. 새 언약의 백성인 교회가 새 언약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성경 어디에서도 거부되고 있지 않습니다. 순종으로 구원얻는다는 주장을 행위구원이란 말로 정죄하는 것은 두 번의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성경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주장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선행된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맺은 열매입니다. 순종은 그 당사자가 자기 노력으로 맺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맺는 열매입니다. 당연히 자기 의가 될 수 없으며 자기 자랑일 수도 없습니다. 순종은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고 바르게 받는 것으로서 은혜입니다. 바울 사도가 자기 육체를 쳐서 복종케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모든 모습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은혜를 따라 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심을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자아에 대해 죽은 자가 됩니다. 인간적인 기준, 자기 주장, 습관과 세상적인 관습, 요구 등에 대해 죽은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신자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며 만물에 대해 통일과 충만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신자에게 선물로 주어진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로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는 것입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아 맺게 되는 열매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배교(딤전 1:19-20상, 히 6:4-6), 결정적인 범죄를 행하고 그 이후에 돌이키지 않는 것(고전 6:9-11) 그리고 사명을 저버리는 것(마 25:30)입니다. 배교라는 말은 그 자체로 믿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가라지에게는 배교라는 말 자체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가라지는 믿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명도 오직 거듭난 이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범죄한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절대적 견인의 근거로 제시되는 모든 구절에는 신자의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현재적으로 하나님과 그분의 역사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것 곧 순종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앞 뒤의 문맥을 잘 살피면 아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자들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신다(빌 1:6)는 말씀 앞에는 그 신자들이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교회가 복음에서 교제한다는 것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누리면서 그분의 사심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고 바르게 받으며 산다는 것입니다.

흔히 믿음으로 구원을, 순종으로 상급을 얻게 된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이야기되는 상급은 영원한 구원에 더하여지는 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구원의 다른 이름입니다. 바울 사도가 얻기 위해 달려간다고 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기 때문입니다(빌 3:10-14). 영원한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열매를 맺음에 있어서 당사자가 인격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그 순종에 대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치하하시는 것이 바로 상급입니다.

절대적 견인의 신학적 토대는 칼빈의 예정론과 이중선택사상입니다. 우주의 모든 것이 예정되었다면 한번 구원은 영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택하시고 부르시고서는 영원한 구원에서 떨어져나가도록 예정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주의 모든 것에 예정을 적용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임의로 확대한 결과이며 성경적이지 않은 주장입니다. 564번 글이 이 부분에 대한 것입니다. 이중선택사상도 성경의 가르침과 무관한 주장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목회방 안의 신학 방 531 번 글에서 밝혔습니다.
절대적 견인론에서는 성경의 가르침과 무관한 여러 논리들을 만들어 그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아버지와 비교하며 하나님 아버지는 결코 자녀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중의 하나입니다. 듣기에는 좋은 소리이지만 성경의 하나님에 대한 설명으로는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자녀가 망령될 때에 구약에서는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에는 출교하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망령된 자녀를 끝까지 보호하신다고 말함은 모순된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불변하신다고 할 때에 당연히 구원의 문제가 내포됩니다. 구원의 방식은 첫 창조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이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당사자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맞이하고 그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반면에 맞이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분을 의지하지 않으면 믿지 아니하다는 평가가 뒤따릅니다. 출애굽 1세대가 홍해를 건넌 후에 하나님을 믿었다고 선언되고(출 14:31) 가데스바네아에서 열정탐꾼의 말을 듣고 애굽으로 돌아가려하자 믿지 않는다고 선언되는 것과 같습니다. 믿지 않았다는 평가가 주어졌음에도 구원얻을 수는 없습니다. 현재적으로 구원을 누리지 못하며 영원한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고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기에 그런 일은 결코 없다고 생각한 이들에게 엄청난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거듭난 신자의 아버지이시기에 한번 구원은 영원하다고 주장하며 조건적 견인론에 대해 거부하며 그것을 말하는 이를 핍박하는 것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교회 역사를 통하여서도 구원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명백합니다. 루터 이전까지 교회는 선행구원론을 말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선이란 착한 행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가리킵니다. 교부들에게 이는 너무나 분명하였습니다. 선행이란 하나님의 뜻을 준수하는 것 곧 순종입니다. 사도들이 이와 다른 구원론을 이야기했다면 교회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엄청난 논란을 야기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순종구원론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믿음구원론과 같은 의미였고 사도들로부터 변함없이 증거된 바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견인은 우리 편에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순종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조건적인 견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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