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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구원에 관한 핵심 교리 (The Core Doctrine of Christian Salv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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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등록일
2023-08-24 12:14:44
조회수
193
✝️✝️✝️ "기독교 구원"에 관한 핵심 교리 ✝️✝️✝️
(The Core Doctrine of Christian Salvation)

성경에서는 구원을 두 가지(two kinds of salvation)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중생(regeneration)에 의하여 한번으로 끝나는(요 3:3-6) 영원한 구원(eternal salvation, 히 5:9) 즉 우리 영(혼)의 구원(salvation of soul, 히 5:9; 약 1:21; 벧전 1:9)과 둘째로, 계속적으로 반복하는 행위에 따라 계속 성장하는 점진적 구원(progressive salvation, 엡 4:13-16; 빌 2:12; 히 10:39; 벧전 2:2) 즉 현실 생활의 구원(salvation of life)인 성화(sanctification)를 의미합니다. 이에 전자는 원죄(peccatum originale)를 해결함과 동시에 , 후자는 육신이 살아있는 동안 자범죄(peccatum actuale)를 해결함으로써 평생토록 이뤄나가야 할 구원입니다. 이는 원죄는 하나이지만 자범죄는 다양하고 여럿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구원의 종말론적 구도(eschatological frame)인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이라는 구원의 양면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두 가지 구원을 구별하지 않고 하나로 알고 혼동하기 때문에 구원에 대하여 헷갈린다고 봅니다. 물론, 이 두가지 죄는 숙명적으로 밀접하게 상호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연결해서 그냥 죄를 범하면 멸망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속죄로 원죄와 더불어 자범죄가 해결되었음에도 현세에 아직도 자범죄를 여전히 범하는 이유는 창조와 구속의 종말론적 원리인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구도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는 구속의 영원한 현재적 단회성(eternal present redemption at once)과 구속의 현세적 다회성(multiple redemption/forgiveness of present sins) 즉 원죄와 자범죄의 속죄 원리를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1) 창조론적으로 하나님의 창조가 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회복하는 시간적 과정이 필요하고 (2) 구속론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단번에 모든 죄를 사하셨지만 역시 인간 육신의 남은 시간적 기간이 있으며, (3) 종말론적으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승리로 사탄이 완전히 패배하였지만, 아직도 사단이 제한적 영향을 가지고 있어서 마지막 세상이 끝날 때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승리가 완벽하다는 것이며, 아직도 속죄할 죄가 남아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원죄와 자범죄에 관하여 신학적인 전문 지식이 부족하거나 없으면,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같이 아담의 원죄를 부인하고, 각자 자기가 행하는 자범죄에 의해서 멸망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eg. Pelagius, Harvey Cox). 그러나 인간의 조상이요 대표자인 아담의 원죄가 인간 타락의 원인으로 모든 죄악의 뿌리이기 때문에, 이 원죄를 해결하면 모든 죄악까지 해결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원죄는 단번에 해결되지만, 자범죄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까지 그리스도의 "은혜의 언약"에 따라 사한다는 보증으로 성령에 의하여 인을 쳤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에 의하여 보응(징계, chastening)은 받지만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경우는 원죄를사함받은 중생인에 해당합니다. 원죄를 해결받지 못하여 중생하지 못한 자(불신자, 명목상의 교인)의 자범죄는 원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자범죄로 멸망하게 되는 것같이 표현하고 있어서 혼동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원죄를 해결받지 못한 사람은 자범죄도 해결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범죄의 뿌리가 원죄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원죄를 해결받은 사람은 전술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 안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죄까지 사하심을 약속받았습니다.

성령을 받아 거듭나서 중생한 자(요 3:5)는 원죄와 같은 죄(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못박는 죄, 즉 주를 부인하고 거역하는 죄, 성령 거역죄, 히 6:6; 10:29; 딤후 2:12; 벧후 2:1; 마 12:32)는 절대로 범하지 않으므로(요일 3:9; 5:18) 영생에 이르지만, 중생하지 못한 신자들은 원죄를 해결받지 못한 상태로 원죄와 그것에 연결된 자범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은 원죄와 자범죄를 구별하지 않고 대부분 "죄"라고만 표현하고 있어서 문맥(context)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헷갈리게 됩니다(예: 겔 18장). 그러므로 원죄인지 자범죄에 관한 언급인지 해당 문맥(context)을 통하여 분별하고 원죄와 자법죄의 상관관계를 이해해야 합니다.

만일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고 하는 사람이 고의로(출 21:13-14; 민 15:30; 시 19:13; 히 10:26) 그리고 지속적으로(시 78:17) 결정적인 죄를 범한다면(히 6:6), 그는 중생하지 못하고 중생했다고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한다고 중생한 것은 아닙니다(마 7:21-23). 이러한 사람은 가룟 유다와 같이 주의 종으로서 충성한 것 같으나 실상은 도둑이요(요 12:6) 직무와 능력의 성령(empowering Spirit)의 은사를 받았으나 중생의 성령(regenerating Spirit)은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단번에 드리신 속죄의 은총과(히 9:26), 단번에 선물로 주신 믿음의 도로(유1:3) 거듭난 자들은 단번에 원죄를 해결함과 동시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자범죄까지 사함을 받는다는 견고한 "약속"으로 성령의 인을 치셨습니다(엡 1:13). 만일 예수께서 우리의 모든 죄-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단번에 영원히 사해주셨는데, 다시 우리의 죄를 물으신다면, 돌이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되물려야 하는데, 과연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물론 미래의 자범죄가 사해졌다는 것은 원형적(archetype)으로 말하면, 단번에 성취한 "영원한 사죄"이고, 아날로그 방식의 표상적(type)으로 말하면 시간적으로 보아 아직 범하지 않은 죄이므로 예언적인 "약속된 사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자범죄는 회개가 가능하기 때문에 사망에 이르는 죄가 아닙니다(요일 5:16-17). 우리의 구원은 한번에 성취되는 것이지 실존주의 신학자들의 생각과 같이 구원을 받은 사람이 순간적으로 범죄하면 구원이 취소되고 회개하면 다시 구원을 받고, 범죄하면 또 다시 버림받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히 9:25-27).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중생은 육으로 난 것이 아니라 영으로 난것(born of the Spirit)으로 영의 구원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입니다(요 3:3-8). 니고데모의 질문과 같이 어머니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낳는 것이 아닙니다. 성화의 과정에서 범죄와 회개가 반복되는 것은 자범죄에 관한 것입니다.

산 영(living soul)인 첫째 아담과의 언약(행위계약)은 조건부로 인간의 선택 여하에 따라 영생이냐 사망이냐가 결정되어 사망으로 떨어졌고 그로 인하여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상실했습니다. 그러나 살리는 영(life-giving spirit)이신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와의 언약(은혜언약)은 조건부가 아닙니다. 주님의 기뻐하시는 자에게 무조건 주시는 구원이라 인간의 행위 여하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를 상대적 논리로 하나님과 논쟁했던 욥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교육으로 질책을 받았습니다(욥 42:1-6; 렘 18:6; 사 29:16). 물론, 다른 표현으로 믿음이 조건인 것 같지만, 굳이 말하자면 믿음은 "조건 아닌 조건"이라고나 할까요? 이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gift)로 정확하게 번역하자면, "믿음을 통하여" 즉 믿음은 구원의 근거라기보다는 구원의 방편이라고 해야 합니다. (For by grace you have been saved through faith; and that not of yourselves, it is the gift of God: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물론, 구원파는 이미 구원얻은 자는 무슨 행동을 하고 무슨 죄를 범해도 구원얻는다고 하는데, 이들은 믿음과 행위를 분리시키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구원파의 주장과 같이 구원얻은 사람은 무슨 죄를 범하더라도 구원얻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가룟 유다의 죄와 같이 고의적으로 주를 팔거나 성령을 거역하는 죄로, 회개가 불가능한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16; 히 6:4; 10:26; 마 27:4-5)와 베드로의 죄와 같이 회개가 가능한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요일 5:16-18; 마 26:75)를 분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죄의 원리로 말하면, 그들은 원죄와 자범죄를 분리시키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원죄와 자범죄는 뗄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중생하여 구원 받은 자는 항상 선을 추구하며 고의적으로 그리고 계속해서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 고의적으로 계속해서 결정적인 죄를 범한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하고 구원받았다고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자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죄를 범할 경우에 바울은 주 예수의 날에 영혼의 구원을 위해 교회의 권징을 통하여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고전 5:5). 믿음으로 중생해서 구원얻은 자는 절대로 방종하지 않으며, 결정적인 죄(사망에 이르는 죄)는 범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에(벧전 1:23; 요일 3:6, 9; 5:18), 선을 추구하며, 설령 실수로 실족한다 하더라도 아주 넘어지지 않으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7전8기)는 것입니다(잠 24:16).

이후로는 단번에 죽은 원죄가 다시 살아날리가 없고(히 9:24-26), 단지 하나님의 형상의 전인적인 원리에 의하여 인간 전체가 부패해서 그중에 아직 한시적으로 몸안에 살아 있는 "육성"(not soma but sarks), 바울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우리 안에 있는 악(evil) 인 "죄"(hamaltia)가 죽을 때까지 우리를 괴롭히게 되는데(롬 7:8-25), 성령의 인도하심으로만 이 죄를 이길 수 있고(롬 8:1-17) 성화의 정도에 따라 신앙인격의 수준이 달라지며, 육신이 죽기 전에는 완전성화란 불가능하여 매일같이 자신을 처서 복종시키는 치열한 영적 싸움을 해야 합니다(고전 9:27; 15:31). 이 문제가 우리에게 지워진 우리의 책임과 남은 고난으로 구원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행한대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의 상벌에 관련된 것이라는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반 알미니우스주의자(in particular, Wesleyan Arminian)들은 구원의 조건으로 선행적 은총(prevenient grace)을 전제로한 "행위"를 강조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의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폄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Luther, Calvin).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이 가능합니다(엡 2:8). 반 알미니우스주의(Semi-Arminianism)에서는 하나님의 은총과 인간의 행위가 협력하여 구원을 이룬다고 합니다. 이것을 소위 신인협력설(Synergism)이라고 합니다. 반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렸다고 하면서도 결론에 가서는 구원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벗어나 "구원을 받고 안 받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렸다고 합니다. 새관점 학파와 같은 일부 복음주의자들 가운데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합니다. 첫 열매로서의 구원을 받은 사람도 종말론적인 마지막에 행위로 의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먼저 받은 구원이 취소되고 구원에서 탈락된다고 주장합니다. 혹자는 루터와 칼빈까지도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는 투터와 칼빈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칼빈은 물론, 루터는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어떤 무엇이라도 가감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았습니다. 은혜로 인한 행위라도 결론에 가서 그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순간,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는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 행위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과 같이 상황에 따라 행위를 강조하고 싶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런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대단히 큽니다.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얻는 것이라고 하면서, 끝에 가서는 자신이 아는지 모르는지 의로운 행위가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반 알미니우즈주의와 새관점학파의 결절정인 실수입니다. 믿음이 없는 행위는 윤리적인 "인간의 의"에 불과합니다(딛 3:5; 롬 4:2-3).

중생하지 못한 자들은 원죄와 자범죄로 인해 멸망에 들어가게 되고, 중생한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자범죄에 대한 징계와 보응을 받게 됩니다(히 12:1-13). 예를 들어 다윗과 바울과 같이 그 고통이 평생 그들의 뒤를 따르기도 합니다. 물론, 구원얻는 자는 자기의 행위에 따라 상급의 경중이 가려지게 되고, 구원얻지 못하는 자는 자기의 행위에 따라 경중의 무서운 형벌이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메타포(metaphor)를 사용하여 칼을 쓰던 사람들은 음부(스올)에 내려가 자기 칼을 베고 누운 자같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들이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가운데에 이미 엎드러진 용사와 함께 누운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이 용사들은 다 무기를 가지고 스올에 내려가서 자기의 칼을 베개로 삼았으니 그 백골이 자기 죄악을 졌음이여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용사의 두려움이 있던 자로다"(겔 32:27). 예수께서도 여러가지 비유를 들어 의로운 행위에 대한 상급과 범죄에 대한 징벌의 정도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는 상벌에 관련된 것으로 구원얻는 자들의 영광과 멸망받은 자의 형벌에도 차등(degree)이 있습니다. 혹자는 천국에는 “영생의 상”이 있을 뿐, 행함에 따라 주어지는 “보상의 상”은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절대성으로 공평한 곳이라 차별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구별”(구분)과 “차별”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천국에는 차별은 없습니다. 그러나 구별은 있습니다. 조물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천사와 인간 사이에는 구별이 있고 반드시 있어야합니다. 만약에 천국에 구별이 없다면, (1) 조물주와 피조물 즉 절대자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과 천사의 사이에 구별(classification)이 사라집니다. 가능하겠습니까? (2) 또 피조물 사이에 개성(individuality)이 없어집니다. (3) 피조물의 다양성(diversity)이 없어집니다. 이런 것들이 가능하겠습니까?

성경에는 “유업의 상”(골 2:3)과 “보상의 상”(고전 3:8)에 관하여 수도 없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구원 즉 “유업의 상”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믿음으로, “보상의 상”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행함에 따라 주어지는 상입니다.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수없이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만일, 천국에서 상벌에 대한 차등이 없다면, 이 세상에서의 행위는 의미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피조물로서의 개성과 다양성이 없어지게 되어 절대자와 상대자의 구별마저 없어지게 되어 정말 큰 문제가 됩니다.
작성일:2023-08-24 12:14:44 76.33.9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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