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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와 칭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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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tTemple
등록일
2023-09-02 08:57:48
조회수
145
▪️1. 앞글 <원죄에 대하여>에 이어서 추가로 논증을 이어가볼까 합니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신앙생활하는데 있어서 적지않은 '영적 사각지대'가 존재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지속적인 '원죄'에 대한 회개의 중요성>입니다.

▪️2. 통상적으로 대다수의 정통교회에서는 신자분들께 '자범죄'에 대하여는 회개하라고 가르치나 <원죄>에 대하여는 무방비지대나 마찬가지로 방치하는 경우가 '압도적'이라 추정됩니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교회에서 죄인이 '칭의'받는 즉시 <원죄>에 대하여 즉각적,초월적으로 사면된다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3. 맞습니다.사람은 '관성'의 동물입니다. 그저 흘러온대로 흘러가길 원하는 것이 저희들의 '죄성'이고 '본성'입니다. 그래서 요즘 세상에서는 "사람은 고쳐쓰는 것 아니다"란 말이 버젓이 돌아다닐 정도로 사람이란 존재는 변화를 싫어하고 자신의 우물안에서 보이는 하늘이 우주의 전부라고 쉽게 자위하며 확증편향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4. 16세기 종교개혁 전야 당시에도 오늘날과 상황이 비슷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흘러온대로 그냥 똑같이 흘러가는게 맞다고 본 반면 어떤 이들은 우리가 원점,본질의 궤도에서 심각하게 이탈되었다면 원점으로 돌아가자(Ad Fontes)고 종교개혁을 단행하며 모험하였던 것입니다.

▪️5. 주지하듯 오늘날 저희의 신앙 토대 자체가 이런 16세기 종교개혁의 깃발 아래 형성된 것이기에 대략 500년 이상 흘러온 이 시점에서 16세기 종교개혁 1세대,2세대의 원본의 가르침과 얼마나 매칭이 되는지 끊임없이 점검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6. 본론으로 돌아와서 "하나님께 '칭의'만 받으면 됐지, '원죄에 대한 지속적인 회개'가 구원에 있어서 뭐가 그리 중요한가?"란 질문이 생기실 수밖에 없을 것이므로 종교개혁 1,2세대를 대표하는 <루터와 칼빈의 가르침>을 통해 살펴보자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7. 참고로 저의 입장은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한국교회가 <루터와 칼빈의 가르침>에서 심각하게 이탈했다고 보기 때문에 이분들의 등대,나침반과 같은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현주소'를 들여다보며 앞으로 어떻게 변화되는게 좋을지에 대해 함께 내다보자는 것입니다.

▪️8.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중,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루터의 종교개혁』,『루터의 이신칭의』는 저희에게 아주 친숙한 역사적 사실이며 교리이지만 안타깝게도 저희에게 친숙하고 익숙한만큼이나 등잔밑이 어두웠기에 오늘날 한국교회에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린 9번째 재앙과 같은 '영적 암흑기'가 찾아온 것이 아닌가 추측해보기도 합니다.

▪️9. 루터가 종교개혁을 진두지휘하면서 외쳤던 구호 가운데 하나가 <오직 믿음>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루터의 이 구호가 중세가톨릭의 '공적구원,행위구원'에 맞서기 위해서 탄생되었다고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이것은 루터의 본심이 아닙니다.



⬛️10. 『『 「로마서 강의」에서 루터가 강조하는 <오직 믿음으로>라는 명제는 기존의 루터 학계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중세적 공로주의>를 배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11. 루터가 <믿음>을 강조한 목적은 <믿음>으로 인간이 <진정한 참회>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중략>•••
⬛️12. <믿음으로의 칭의>라는 사상은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칭의'가 된다는 식의 주장이 아니라,
⬛️13. <믿음>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깊은 참회의 경지>에 이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루터의 생각이다.
•••<중략>•••
⬛️14. 결국 <믿음>이란 인간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참회>를 일으키는 동인으로써 그 중요성이 있다.
⬛️15. <믿음과 참회>가 없이 인간은 결코 하나님 앞에 《겸손》케 되지 않으며, 《겸손》케 되지 않은 영혼은 <칭의>될 수 없다는 말이다.』』
✔️출처:< ⬛️10.~⬛️15. < 『로마서 강의』(두란노아카데미)/루터 > p.80 - 역자 서문 중 >



▪️16. 이러하듯, 16세기 종교개혁의 아브라함격인 '루터'가 본래 「이신칭의」의 가르침을 생각할 때의 구도는

《믿음 -> 참회 -> 칭의》

였던 것입니다. 그럼 이 <참회>가 오늘날 보편적인 한국교회의 가르침(영접하는 즉시 칭의의 초월적 완료)대로 죄인이 예수님을 영접할 때 딱 한 번만 필요할까요?



⬛️17. 『『 그래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의롭다(칭의받았다)는 것의 의미가 '완전 무결'해졌다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영적 태도가 하나님을 향하여 새롭게 방향 설정되었다는 데 그 본질적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중략>•••
⬛️18. 이와 같은 점에서 본다면, <믿음>이란 <계속적인 참회(continuous repentance)의 '과정'이며...』』
✔️출처:< ⬛️17.~⬛️18. < 『로마서 강의』(두란노아카데미)/루터 > p.83 - 역자 서문 중 >



▪️19. 이러하듯 루터는 신자들이 <참된 믿음>을 통한 <계속적인 참회>를 통해 '세례' 때 시작된 <칭의의 은혜⚫️【1】 >를 마지막 심판대에 서기까지 누리며 모든 환난을 견디며 전진하고 '칭의의 초월적 완성'을 갈망하는 자들만이 '영화(칭의의 완성)'에 이른다고 봤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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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신자들은 세례때 <칭의>가 시작된 이후에도 내적으로는 여전히 '원죄'와 '자범죄'아래 놓여 있으나 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신자들의 모든 죄를 가리워주시고 '죄책'에 대해서 간과해주시는 상태에 있다. 그래서 전가적으로는 이미 '의인'인 것이나 본질적으로는 아직 '죄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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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자! 그러면 여기서 이 글의 제목대로 <원죄와 칭의>의 상관관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21. 『『 칭의는 '즉각적'이며 '단회적'인 것으로 현재 진행형의 '과정'(process)이 아니며, 또 미래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eternal presence)에 속한 '선언'이다.
⬛️22. 이 후로 우리는 <원죄의 차원>에서는 죄인이 아닌 《당당한 '의인'》이 되어 구원이 보장되며, 그 보증으로 성령의 인침을 받게 되는 것이다.』』
✔️출처:<⬛️21.~⬛️22.< 『현대 칭의론 논쟁(CLC)』/공저 - 제6장_김세윤의 유보적 칭의론 인터뷰에 대한 비판_장부영 > p.217 >



▪️23. 만약 위와같은 '장부영 교수님'을 위시한 대다수의 한국교회의 가르침 대로 죄인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그 즉시 '단번에' 초월적으로 완성되는 <칭의>에 의해서 <원죄>가 완벽하게 해결되어 <원죄의 차원>에서 《당당한 의인》이 될 수 있다면 루터가 그토록 강조한 <계속적인 참회>가 생겨날 수 있을까요?



⬛️24. 『『 그러므로 만약 <원죄>가 '의의 결핍'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에 대하여 <참회>하기를 주저하게 만들고, 그 <참회>조차도 어서 빨리 끝내고자 하는 마음이 들도록 한다.
⬛️25. 사람의 마음에 '교만'과 '건방진 태도'를 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뽑아낸다.』』
✔️출처:< ⬛️24.~⬛️25. < 『로마서 강의』(두란노아카데미)/루터 > p.284 >



▪️26. 위 ⬛️24.에서 루터가 말한 '의의 결핍'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중세 가톨릭에서는 <원죄>를 단순히 '의의 결핍'으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즉, 루터는 <원죄>를 중세가톨릭과 같이 단순한 '의의 결핍'상태만으로 정의하더라도 위⬛️24.⬛️25.에서 말하듯 <참회>가 힘들어질 뿐만 아니라 '교만'과 '하나님 경외의 실종'이 함께 찾아온다고 합니다.

▪️27. 이렇게 될 경우 위 ▪️16.의 루터가 본래 <이신칭의>를 생각하며 의도한 《믿음 -> 참회 -> 칭의》구도가 깨져서 사실상 구원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28. 정리하자면 루터는 단순한 '의의 결핍'만 가지고도 <참회>가 힘들어지고 '교만'이 찾아와 <칭의>가 불가능해진다 보았는데,

▪️29. 하물며 위 ⬛️22.에서의 장부영 교수님의 주장대로 한 죄인이 신앙에 입문하는 초반에<초월적 칭의>로 말미암아 "원죄의 차원에서 《당당한 의인》으로 곧바로 변화된다면 중세가톨릭의 <원죄교리(의의 결핍)>보다도 더 처참한 상황(❶-계속적인 참회 완전 불가능,❷-교만으로 충만,❸-하나님을 경멸하고 조롱함)이 벌어진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30.오늘날 교회안팎에서 타락한 한국교회를 향해 '중세가톨릭'보다 더 타락했다는 이야기도 이와 완벽하게 맞닿아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칼빈은 <원죄>를 어떻게 바라봤을까요?



⬛️31. 『『 우리가 '세례'를 통하여 아담에게서 그의 모든 후손에게로 전수되어 내려간 <원죄(原罪)>와 부패함에서 '해방'되고 '면제'를 받으며, 또한 아담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계속해서 올바른 상태를 유지했더라면 아담이 얻게 되었을
⬛️32. 그 <본성적인 의와 순결의 상태>가 '세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회복된다는 식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일부에서 퍼뜨려왔고 여러 사람들이 여전히 고집하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가> 하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출처:< ⬛️31.~⬛️32. < 『기독교강요』(크리스챤다이제스트)/칼빈 > 4.15.10. "세례와 원죄" 중 >


▪️33. 칼빈 역시 루터와 마찬가지로 '세례'때의 <칭의>로 말미암아 <원죄>에 대하여 《당당한 의인》이 될 수 있다는 허황된 주장을 철저하게 배격합니다.



◤゚요약 ◤゚

★1. 중세가톨릭의 <원죄론>:"의의 결핍 상태" --->
❶- <참회>가 힘들어짐
❷-'교만'해짐
❸- 하나님께 대한 '경외'의 실종
---> <칭의>와 <구원>이 흔들림 - 위 ⬛️15.,⬛️24.,⬛️25. 참고

★2. 장부영 교수님을 위시한 대다수 한국교회식의 <원죄론>:"'단회적이면서 초월적으로 칭의'된 순간부터 <원죄>에 대하여"당당한 의인"이 됨" - 위 ⬛️21.,⬛️22. 참고 --->
❶- <참회>불가능,
❷- '교만'으로 충만,
❸- 하나님보다 높아진 목회자와 신자들 대거 양산.
---> 신자 개개인의 <칭의>나 <구원여부>는 말할 필요도 없이 한국교회 전체의 '존폐위기' 가속화 - 위 ⬛️15.참고

★3. 루터의 처방:

⬛️34. 『『 루터는 우리가 어떻게 <원죄>와 싸워야 할지에 대하여 처방을 해주고 있다.
⬛️35. 우리는 매일 기도하고 말씀을 명상하고 성례전에 참여하고 (원죄의) 독과 부패를 깨끗이 하여야 한다.
⬛️36.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여야 하며 그래서 우리는 깨끗해지고 죄의 독에서 정결해지기를, 우리가 참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깨끗해지기까지 해야 한다.
⬛️37. 이 일은 <최후의 심판>에서 생기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까지 '무덤' 속에서도 계속된다. 이것은 매우 좋은 의견이다.』』
✔️출처:< ⬛️34.~⬛️37.< 『종교개혁과 칭의』(고신대학교-개혁주의학술원)/공저_1권 <루터의 칭의론(김용주) >> p.30 >
®️원출처:< ⬛️35.~⬛️37.< Luther, Studienausgabe, Band,> 5, 204-207.>
작성일:2023-09-02 08:57:48 58.228.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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