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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적 칭의와 예정론>에 대하여 - 1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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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stTemple
등록일
2023-11-26 18:18:56
조회수
192
▪️ 1. 한국 장로교는 ‘칼빈 신학’을 중심하여 가르치고 배웁니다. 이러한 ‘칼빈 신학’체계 안에는 다양한 개념과 독특한 점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중,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도 등장하는 <칼빈의 예정론>을 절대 빼놓을 수 없습니다.



▪️ 2. 문제는 한국 장로교가 <칼빈의 예정 사상>을 올바로 가르치며 이해하고 실천해왔다면 칼빈이 제시한 <예정론적 삶의 가르침>을 각자의 삶에 적용 및 실천하여 왕성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맛보았을 터였겠습니다만, 오늘날 한국교회의 현주소는 불신자들의 시선으로 교회 안과 밖에서의 교인들 삶의 역량 평가(도덕적&윤리적 차원)를 살펴보게 되면 거의 낙제점에 가깝지 않나 보여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요즘 전도의 문이 사실상 막혔다, 새신자의 상당수는 기존 신자들의 수평이동”이라는 분석결과가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 3.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한국 장로교는 ‘칼빈 신학’을 중심으로 가르치고 배운다고 했습니다만 구원론 특히 칭의론에 있어서 만큼은 ‘칼빈 신학’을 외곽이나 변방으로 밀어냅니다. 그리고 아주 독특하게도 한국 장로교는 구원론 특히 칭의론에 있어서만큼은 ????의 <법정적 칭의론>만을 따르며 중심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영적 주가를 곤두박질치게 만드는 원흉인데도 불구하고 신주단지 모시듯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사실은 칼빈의 칭의론은 <법정적 칭의론> 노선과 현격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차후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 4. 그럼 이 <법정적 칭의론>의 창시자는 누구일까요? 『현대 칭의론 논쟁(CLC)』의 편집자이신 고경태 목사님께서는 해당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셨습니다.



⬛️5.
【 1.-... <법정적 칭의>를 누가 처음 제시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2.- ‘루터’나 ‘칼빈’도 <법정적 칭의 개념>을 사용하지 않았다.
3.- ‘이신칭의’와 <법정적 칭의>가 동일한 사상으로 보지만, 동시에 발생한 것은 아니다.】
☑️출처❰ ⬛️5.1.~3. ❰ 『현대 칭의론 논쟁』(CLC)/공저_제5장_김세윤의 「칭의와 성화」비평적 독서(고경태) ❱ p.144_각주2. ❱



▪️ 6. 위와 같은 고목사님의 견해에 따르면 <법정적 칭의론>의 창시자는 명확하지 않아보입니다만 저희는 바빙크에게서 그 열쇠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실제로 바빙크는 자신의 작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7.
【이런 맥락에서 신학자들은 1529년 이후 ‘칭의’를 더욱 오로지 <법정적 의미>로만 이해했던 ≪멜랑흐톤≫을 추종했다.】
☑️출처❰ ⬛️7. ❰ 『개혁교의학_4권』(부흥과개혁사)/바빙크 ❱ p.229 ❱



▪️ 8. 즉, 위 ▪️ 3.의 “한국 장로교는 구원론에 있어서만큼은 ????의 <법정적 칭의론>만을 따르고 있는 것”에서 ????에 대한 정답이 밝혀졌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멜랑흐톤≫입니다. 실로 ≪멜랑흐톤≫은 종교개혁자 루터의 영적 동반자이자 위대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멜랑흐톤≫의 가르침도 반드시 새겨 들어보아야 합니다만 ‘칭의론’에 있어서만큼은 루터와 칼빈의 의견을 중심으로 ≪멜랑흐톤≫의 가르침을 바라보는 안목 또한 절실히 요청된다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칭의’라는 매우 방대한 개념을 <법정적 칭의론>이라는 한 카테고리만으로는 도저히 다 담아내며 설명해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 9. 그럼 여기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서 <법정적 칭의>라는 단어가 생소하다 느껴지시는 분들이 혹시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법정적 칭의>가 도대체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이 생기실 수 있다고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정의와 개념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10.
【 1.- 먼저 ‘칭의’의 용어에 관한 튜레틴의 논의는 헬라어 동사 ‘dikaioun’과 라틴어‘justificare’에서 시작된다.
2.- 성경에 나타난 이 두 동사의 의미는 적절한 경우와 부적절한 경우의 두 가지로 파악된다.
3.- 첫째, 이 동사가 적절하게 사용될 때 <법정적 의미>를 지니는데 이는 <법정>에서 어떤 사람을 ‘무죄’로 선언하거나 정당하고 인정하거나 선언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
4.- 그러므로 마치 판사가 선고를 통하여 무죄한 사람을 사면하고 무죄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이곳에서 ‘칭의하다’는 ‘의롭다고 선언하다’를 뜻한다.】
☑️출처❰ ⬛️10.1.~4. ❰ 『종교개혁과 칭의』(고신대학교 개혁주의학술원)/공저_12.『프란시스 튜레틴의 칭의론』/이신열 ❱ p.385-386. ❱



▪️ 11. 이러한 개념이 바로 <법정적 칭의론>입니다. 그러나 위 ▪️ 8.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개념 자체가 전부는 아닙니다. 이러한 <법정적 칭의론>을 기반으로 조직신학 작품을 기술한 ‘벌코프’ 조차도 다음과 같은 소견을 밝힙니다.



⬛️12.
【’칭의’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법정>에서의 죄인에 대한 객관적 선언이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출처❰ ⬛️12. ❰ 『벌코프 조직신학』(CH북스)/루이스 벌코프 (2판 2쇄 2019.02.11. 발행) ❱ p.801. ❱



▪️ 13. 오늘날까지 한국의 상당수 장로교 신학교에서는 위에서 인용한 ‘벌코프 조직신학’이라는 작품으로 실제로 많은 신학도들을 양성해오고 있습니다만, 문제는 위 12.에서 ‘벌코프’가 경고한 “<법정적 칭의론>이 칭의론에 있어서 ‘전부’가 아니다”란 문구를 철저하게 무시해왔음을 발견하게 됩니다(특히 『현대 칭의론 논쟁(CLC)』에 기고하신 대다수 신학자 및 목회자 분들이 <법정적 칭의론>이 칭의론 및 구원론에 있어서 전부인냥 간주하는 이러한 심각한 오류에 빠져계신다 추정됩니다). 그 근거로는 ‘안토니 후크마’의 글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주지하듯 ‘벌코프’뿐만 아니라 ‘안토니 후크마’ 역시 <법정적 칭의론>을 강조한 신학자로 유명합니다만 ‘후크마’는 실제로 자신의 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논증하였습니다.



⬛️14.
【 1.- ‘칭의’는 과정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단 한번’ 일어난다.
2. - 그렇지만 신자는 끊임없는 믿음의 실천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칭의’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
☑️출처❰ ⬛️14.1.~2. ❰ 『개혁주의 구원론』(기독교문서선교회-CLC)/안토니 A.후크마 ❱ p.284. ❱



▪️ 15. 즉, 위 ⬛️14.1.에 따르면 심판주의 ‘단번’의 판결로서 주어지는 <법정적 칭의론>에 기반한 진술이지만, ⬛️14.2.에 따르면 이 <법정적 칭의>를 받았다고 확신하는 자가 삶으로서 <법정적 칭의>가 증명되지 않으면 어떠한 관점으로 볼 때에<⬛️14.1.의 법정적 칭의>는 애시당초에 주어지지도,성립되지도 않았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뒤(▪️ 30. 참고)에서 더욱 심도있게 다루어 보겠습니다. 예를들어 설명드리자면 이렇습니다.



▪️ 16. 이 땅에 있는 어떤 지상교회안에 다섯명의 신자(A,B,C,D,E)가 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이 다섯명은 전부 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법정적 칭의>를 받았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원의 확신은 지상교회를 넘어 천상교회(천국)로의 입성에 대한 확신을 뜻합니다. 그럼 실제로 이러한 <법정적 칭의>를 위시한 구원의 확신만 장착하고 있으면 전부 다 천상교회 멤버쉽 회원이 될 수 있을까요? 다음의 인용문을 통해 확인해보자면 이렇습니다.



⬛️17.
【Q: 복음을 듣고 교회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습니까?

A: 복음을 듣고 유형교회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고, 다만 무형교회의 참된 회원들만이 구원을 받습니다(롬9:6; 마7:21;22:14;요12:38-40;마13:41,42;롬11:7).】

☑️출처❰ ⬛️17. ❰ 『헌법』(대한예수교장로회_고신총회)_제1부 교리표준_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_61문 ❱ p.124. ❱



▪️ 18. 위 ⬛️17.의 인용문에 살펴본 바와 같이 지상교회(또는 유형교회,가시적 교회)의 멤버쉽을 가진 신자들이라고 해서 천상교회(또는 무형교회,비가시적 교회) 멤버쉽을 무조건 자동적으로 얻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즉, 위 ▪️16.의 예시에 등장하는 A,B,C,D,E 다섯 신자가 다 구원을 받는다면 좋겠지만, 실질적으로 누군가(회색지대-지상교회 내의 불신자 그룹)는 최후의 심판대에서 정죄받아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만약 여기서 사후에 하나님께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A,C,E만 천상교회로 입성하고 나머지 B,D는 지옥으로 유기될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B,D를 이렇게 분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
【 1.- 이 부분은 믿음을 고백하고 교회에 들어왔으나 ≪그리스도의 거룩함≫으로 옷 입지 않은 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된다고 본다.
2.-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를 이렇게 모욕하는 자들을, 심지어 암적인 존재들(위 18.의 B,D에 해당)을, 영원토록 참지 않으시고 그들의 그 천한 처신에 합당한 대로 그들을 내어쫓으실 것이다.
3.- 그러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았으나 그 가운데 택함 받은 사람은 적은 것이다(참조. 마20:16).】
☑️출처❰ ⬛️19.1.~3.❰『기독교 강요』(크리스쳔다이제스트)/칼빈 ❱ 3.24.8. ❱



▪️ 20. 총신의 문병호 교수님께서 2020년 6월 25일에 생명의 말씀사를 통해 출간하신 <칼빈의 『기독교 강요』1559년 라틴어 최종판 직역본>을 통해 위 ⬛️19.1.의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해당하는 부분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의 성화≫라고 직역하셨습니다. 즉 칼빈이 원본의 해당 부분에서 사용한 단어를 직역하자면 ‘성화’로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화’의 주체자이신 ‘성령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저희의 구원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위 ⬛️19.의 배경본문이 되는 마태복음 22장에 대한 칼빈의 주석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21.
【마22:11. - 임금이∙∙∙보러 들어올새. -
1.-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부르심을 멸시했다고 유대인들을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 대신에 잔치에 불려온 자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그의 잔치에 참여하게 하실 때에, 그들의 부정(不淨)함 또는 더러움으로 거룩한 혼인 잔치를 더럽히지 말 것을 미리 경고하시는 것이다.
2.- 지금까지는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이 그들의 불경건하고 오만방자한 태도로 인하여 혼인 잔치에 참여하는 이 특별한 영광과 특권을 박탈당하게 될 것이고, 유대인들이 그토록 혐오하였던 자들이자 원래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자들이었던 이방인들이 유대인들 대신에 그 잔치에 부르심을 받게 될 것임을 가르치셨다.
3.-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이방인들 가운데서 교회를 욕되게 하는 자들은 추방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4.- 즉,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초대하시는 까닭에, 거룩하지 못하고 가증스러운 자들도 많이 교회 속으로 들어와서, 한동안 거룩한 성도들과 더불어서 공존하겠지만, 장차 하나님이 손님들을 살펴보실 때에, 그런 자들은 결국 밖으로 끌어내져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5.- 이 말씀의 요지는 일단 교회에 들어왔다고 해서 모두가 다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 궁정에 합당한 “예복”≫을 입은 것이 확인된 자들만이 영생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출처❰ ⬛️21.1.~5. ❰『칼빈주석-공관복음』(크리스챤다이제스트/CH북스)(2011.03.15.발행)/칼빈 ❱ p.631.❱



▪️ 22. 여기서 놓치기 쉬운 부분은 칼빈이 강조한 ≪하늘 궁정에 합당한 예복≫에는 단순히 ‘성화’뿐만 아니라 ‘칭의’그리고 ‘견인’등과 같은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에 내포되어 있는 다양한 속성의 은혜들로 충만하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의인이나 아직 죄인으로 간주되는 지상교회 신자들이 이 땅에서 해야 할 것은 오로지 믿음으로 끝까지≪하늘 궁정에 합당한 예복≫을 신실하게 입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위 ▪️15.에서는 보기에 따라서는 거짓 신자들에게 애초에 <법정적 칭의> 자체가 주어졌던 적이 없었다 볼 수도 있겠다고 언급했으나 다음의 인용문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성경신학적'으로 살펴보면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 또한 있다 보여집니다.



⬛️23.
【 1.- 그러나 여기에서 혼인 잔치에 온 거지가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해서 이토록 심한 벌을 받아야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의문이 생긴다.
2.- 왜냐하면, 길거리에서 먹을 것을 구걸하던 이 불쌍한 거지가 추한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3.- 이 의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여기에서는 “예복”을 어디에서 얻느냐 하는 것은 전혀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4.-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잔치에 초대를 받은 자들은 그들이 입을 “예복”을 다름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5.-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불쌍하고 벌거벗은 것과 가증스러운 더러움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시지만, 우리에게 훌륭한 정장(正裝)을 입히셔서 우리를 빛나게 해주실 것이라는 에스겔의 말씀(16:7-8)은 우리 모두에게서 이루어진다.
6.- 또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로 옷 입는”(롬13:14; 갈3:27)것 외에는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지는 길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 혼인 잔치에 온 손님들을 꼼꼼히 살펴보실 때에, 자신의 옷장에서 값비싼 옷을 꺼내서 입고 올 형편이 되지 못하는 불쌍한 자들이 아니라, 여전히 자신의 부정(不淨)함과 더러움 속에 머물러 있는 자들에 대하여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는 명령을 내리실 것이라고 선언하고 계시는 것이다.】
☑️출처❰ ⬛️23.1.~7. ❰ 『같은 책.』 ❱ p.631-632. ❱



▪️ 24. 즉, 위 ⬛️19.에서 인용한 글 중 칼빈의 심히 날카로운 표현인 ≪암적인 존재들(χαρχινώματα)≫ 역시 믿음을 고백하고 교회에 들어올 때 이미 "예복"을 받았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주님과 언약까지 체결했던 자들이었음을 다음의 글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25.
【1.- 언약은 영원하고 파기될 수 없는 것으로서 하나님은 이 언약을 깨뜨리지 않으시지만, 언약 안에 있는 자가 그것을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2.- 법적인 언약 관계 안에 있는 자는 언약의 삶에 아직 들어오지 않을지라도 여전히 ‘언약의 일원’이다.
3.- 그는 언약 요구 사항들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죄책이 성립되고 ‘언약 파기자’가 된다(렘31:32; 겔44:7). ∙∙∙
4.- 그러나 성도들이 언약에서 떨어져 나가는 일은 없다.】
☑️출처❰ ⬛️25.1.~4. ❰ 『벌코프 조직신학』(CH북스)/루이스 벌코프 (2판 2쇄 2019.02.11. 발행) ❱ p.541. ❱



▪️ 26. 이러한 벌코프의 주장은 실제 후크마의 작품을 통한 칼빈의 언약 사상에서도 동일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27.
【1. - 후크마도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2. - “은혜언약은 하나님에 의하여는 깨질 수 없지만 인간에 의하여는 깨질 수 있다.”】
☑️출처❰ ⬛️27.1.~2. ❰ 『칼빈의 언약사상』(CLC)/피터 A.릴백 ❱ p.34. ❱
☑️출처❰ ⬛️27.2. ❰ 『Calvin’s Doctrine of the Covenant』/Hoekema ❱ p.9. ❱



▪️ 28. 이러한 논증들로 살펴볼 때 『현대 칭의론 논쟁(CLC)』의 시발점이신 최덕성 박사님께서 과거 2016년 6월 7일에 김영한 박사님과의 대담에서 말씀하신 여러 대목들 중에 하나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대략의 스케치는 이렇습니다. 그때 최박사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속하였었지만 하나님께 끝까지 불신과 불순종으로 일관하여 버림받은 자들에 대하여 그들이 애초에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안에 들어온 적이 없던 자들이라고 규정하셨던 부분입니다. 실제 최박사님의 해당 워딩을 그대로 옮겨보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29.
【1.- 제가 큰 그림을 그리는 차원에서 이야기하자면, 이스라엘에 속했지만 그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언약 관계 속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칭의를 받지 못한 자기 때문에, 그러한 불순종을 행하고 그러한 악행을 행한 것이지
2.- 그들에게 칭의가 주어졌는데 나중에 이들의 행위로 이게 탈락되었다 이렇게 보면 좀 곤란한 거 아닌가 하는게 제 생각입니다】
☑️출처:❰ ⬛️29.1.~2. ❰ https://youtu.be/unquWUrzTRc?si=86tyUDJ_9JF5MwSa ❱ 8:39~9:07 ❱
☑️해당워딩 바로가기 링크: https://youtu.be/unquWUrzTRc?si=82bpd9zLJVsIhGv_&t=519



▪️ 30. 위 ⬛️25.의 벌코프의 논증과 ⬛️27.의 후크마 논증에서 두루 살펴볼 수 있듯이 위 ⬛️29.1.의 최덕성 박사님의 주장은 <언약파기>에 대한 기본 개념 부재에서 찾아오는 대혼란을 겪고 계신 것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그래서 위 ▪️15.와 ▪️22.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직신학>적으로나 <성경신학>적으로도 최교수님의 위 ⬛️29.의 주장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최박사님께서는 이러한 잘못된 전제 위에서 김세윤 박사님의 칭의론을 저격하시다 그만 루터,칼빈의 칭의론까지 정죄해버리는 돌이키기 너무나 힘든 우를 범하셨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일상생활에서도 양자간에 상호계약을 맺어야 계약 파기에 따른 위약금과 법적 책임이 발생하듯이 영적인 세계에서도 하나님과의 언약을 체결한 후에 파기해야만 그 <언약 파기>에 따른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서 <언약 파기자들>에게 물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정리하자면 벌코프가 위 ⬛️25.4.에서 지적했듯이, 진정한 천상교회의 성도(위 ▪️ 18.의 A,C,E에 해당)들은 언약을 파기하지도 아니하고 언약에서 떨어져 나갈 일 자체가 없습니다만 지상교회에 소속되었음에도 지옥에 가는 회색지대에 속한 자들(위 ▪️ 18.의 B,D에 해당)은 본인들 스스로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다는 것이지요.



▪️ 31. 그리고 위 ⬛️29.2.의 논증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최박사님은 행위로 탈락된다고 보셨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언약파기자들(예:출애굽 1세대의 절대 다수)은 믿음으로 홍해바다를 건너고 시내산에서 믿음으로 하나님과 언약까지 체결하고도 가데스바네아에 까지 가서 여태까지 그들이 누려왔던 믿음과 언약등을 자발적 의지로 강제청산하고 환애굽하려 했던 것입니다. 즉, 히브리서 6:4~5.등의 넘치는 성령의 조명과 여러 은혜등등을 맛보고도 회개가 절대 불가능한 완벽한 불신상태로 되돌아간 것이지요. 그래서 영원한 파멸로 이끄는 이런 매우 위험한 ≪언약 파기죄(성령훼방죄)≫를 조심하라고 사도 바울께서 고린도전서 10장을 통해 경고를 하셨던 것입니다. 이를 피하는 좋은 방안으로 칼빈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남겼습니다.



⬛️32.
【1.- 사탄이 신자들을 낙심시킬 때에 사용하는 가장 극심하고 위험한 유혹은, 그들을 구원에 대한 의심으로 불안하게 하며 동시에 구원에 대한 확신을 정도(正道)를 벗어나서 찾도록 악한 욕심을 부추기는 것 이상 없다.
2.- 내가 “정도를 벗어나서 찾는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지혜의 은밀한 정수에까지 꿰뚫고 들어가고, 가장 높이 있는 영원하심에까지 파고 들어가서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자기에 대해서 어떤 결정이 내려졌는지를 확인하려고 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
3.- 사람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지혜에까지 이르려고 할 때에, 인간의 생각의 그 어리석음이 그렇게 끔찍한 파멸로 징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4.- 그러므로, 배가 파선당할까 두려움이 있다면, 이 <암초(직역:바위)>를 조심스럽게 피해야 할 것이다.
5.- 그 <암초(직역:바위)>에 부딪혀서 멸망에 이르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6.- ≪예정에 대한 논의≫를 ‘위험한 바다’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은 악한 욕망만 갖지 않는다면, 그 바다를 건너서 안전하고도 고요한 – 그리고 유쾌한 – 항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32.1.~6. ❰ 『기독교 강요』(크리스쳔다이제스트)/칼빈 ❱ 3.24.4. ❱



⬛️33.
【1.- 그러나 죄가 언제나 우리 속에 거한다는 말을 들을 때에, 우리 자신을 속이거나 우리 자신의 죄악성을 안이하게 바라보아서도 안된다.
2.- 죄가 언제나 우리 속에 거한다는 말은, 그렇지 않아도 너무 쉽게 죄에 빠질 소지가 있는 자들이 자기들의 죄에 대하여 전혀 개의치 않고 그 가운데 편안히 있다는 뜻이 아니고, 다만 자기 육체로 말미암아 괴로움과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이 낙심하거나 실망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3.-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들이 아직 나아가는 중에 있다고 생각해야 하며, 날마다 자기들의 정욕이 조금씩이라도 제거되는 것을 느낄 때에 자기들이 제대로 전진하고 있으며, 마지막 종착지에 도달할 때에, 즉 육체가 마지막으로 죽을 때에, 그것이 완결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출처❰ ⬛️33.1.~3. ❰ 『같은 책.』 ❱ 4.15.11. ❱



▪️ 34. 현재 한국교회에서는 칼빈이 위 ⬛️32.2.~3.에 걸쳐 경고한 것과 같은 정도에 지나친 구원의 확신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 ⬛️32.4.~5.에 등장하는 <암초>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즉 우리 자신이 마치 최후의 심판대에서의 판결 결과를 미리 보았고 동시에 천국 시민권을 이미 획득한 듯한 교만한 자세는 칼빈이 위 ⬛️32.3.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거대한 망상이며 그 결과는 ‘영원한 파멸’이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 35. 즉, 다시 정리하자면, 위 ▪️18.과 ⬛️32.에서 살펴보았듯이 A,B,C,D,E 성도들은 살아 생전에 자신들의 최후의 심판대에서의 결과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저희는 그저 ⬛️21.5.에서 발견했듯이 ≪하늘 궁정에 합당한 “예복”≫을 믿음으로 입고 제대로 입었나 늘 성경을 통해 매일매일 재차 확인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또 ⬛️33.3에서 칼빈이 말하듯 하루하루 죄와 싸우며 믿음으로 전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선이 결국 <칼빈의 예정론>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럼 다음번 글에서 <칼빈의 예정론>을 중심으로 논증을 추가적으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결론 및 요약: 교회의 핵심은 구원론이고 구원론의 핵심중추는 칭의론이므로 한국 장로교회의 메인(주류) 신학은 '칼빈 신학'이 아니라 '멜랑흐톤 신학'입니다!
작성일:2023-11-26 18:18:56 218.237.7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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