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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이해] (Biblical and Theological Understanding of Salvation) (0005)

닉네임
PAUL
등록일
2023-11-29 05:10:04
조회수
57
✝✝ ✝ [구원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이해] ✝✝✝ (0005)
(Biblical and Theological Understanding of Salvation)

제1부 구원에 대한 성경적 이해
(Biblical Understanding of Salvation)

3. 성경의 완전성 (Perfections of Scripture)

(2) 성경의 명료성 (Perspicuity)

로마교회에서는 성경의 명료성을 믿지 않고, 애매한 부분들이 많으므로 교회에서 해석을 해주어야 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삼위일체나 그리스도의 성육신 등과 같은 내용들은 신비롭고 애매하므로 성경해석권을 가지고 있는 교회가 확실하게 해석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해석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내용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자들은 성경의 명료성을 강조했다. 물론, 일반 모든 사람이 성경을 쉽게 해석할 수 있도록 명료한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부분에는 상당한 지식이 있는 사람도 이해하기 어려운 곳도 있다. 그래서 성경은 성경 공부를 통하여 열심히 읽고 연구하라고 성경 자신이 말하고 있다(요 5:39; 벧전 1:10).

성경의 명료성은 성경 스스로 증거하고 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심지어 예수님과 선지자, 사도들까지도 자신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면서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고전 2:15; 10:15; 요일 2:20). 이 말씀은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어려운 학문적인 용어가 아니라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보통 언어로 설명해주었다는 것이며, 둘째, 성경의 저자인 성령이 임하셔서 깨닫게 해주신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느 부분이나 명료하게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통일된 전체적인 의미로 전달했기 때문에 듣고 읽는 사람이 성경의 명료성을 이해하고 믿게 된다는 것이다.

(3) 성경의 충족성 (Sufficiency)

로마교회와 재 침례파에서는 성경의 충족성을 믿지 않는다. 로마교회는 성경보다 교회의 권위를 앞세워 교회가 성경을 해석하고 교리로 결정하게 되는데 교회 일반이 할 수 없고 다만 “교회 교사회”(ecclesia docens) 즉 교회의 공의회의 주교회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 자체로서는 충분하지 못하므로 교회 사제들로 구성된 주교회에서 성경을 해석해서 부족한 부분들을 보충하겠다는 것이다. 더구나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교회의 전승들(the oral traditions of church)을 결정할 때 모이는 교사들이 오류가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의구심이 일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결정권을 최종적으로 교황(Pope)이 갖고 선언하게 되고, 선언된 것을 교회의 효력 있는 구속력을 갖게 되니 교황 독재가 될 수밖에 없다.

재 침례파(Anabaptist)에서는 성경 자체보다도 신자의 “내적 빛”(inner light)과 다시 받는 모든 특별계시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 3:3)라는 말씀을 인용하여 성경보다도 신자의 영적 체험을 중요시하여 신비주의(mysticism)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기록된 성경 말씀(the written words)의 사역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객관적인(objective) 말씀인 성경을 무시하고, 도리어 신자들의 영적 체험(spiritual experience)을 중시하는 주관주의(subjectivism)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혁자들(Reformers)은 성경에 무엇을 보충해야 한다는 로마교회나 신자의 내적 빛을 중시하는 재 침례파의 입장에 반대하여, 성경의 충족성을 주장했다. 개혁자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나, 예수님과 선지자, 사도들이 말한 모든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충족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과학과 같은 세상의 모든 학문에서 거론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뜻도 아니다. 만일, 요한이 언급한 대로 “제자들이 성경에 기록된 일 이외도 예수께서 행하신 일 외에도 많아서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것”(요 21:25)이라고 한 것을 보면 예수님의 행적을 양적인 계산이 아니라 질적으로 평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오히려 세상만사가 성경의 원리에 의해서 해석될 수 있다는 뜻이다. 양적으로 아니라 질적인 성경 원리로 세상만사를 설명하고 해석할 수 있고 교훈할 수 있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사도들의 전통이 아니라, 예수님 시대에 유행했던 장로들과 조상들의 전통과 같은 교회 전통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 반대했다(마 5:21-48; 15:4, 9; 고전 4: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최종적 계시(the final revelation)로 절정을 이루고 있다(마 11:27; 요 1:18; 17:4, 6; 히 1:1). 기독교의 전승도 성경에 의해서만 인정했지만, 이것도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갖지는 못했다. 구원의 길(the way of salvation)을 알기 위해서도 오직 이 성경에 근거해서 이해하고 믿어야만 한다(요 17:20; 요일 1:3).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데는 이 성경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4) 성경의 자증성 (Self-Proof)

우리는 성경을 자문자답서 즉 자습서(自習書)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문제에 관한 질문과 답변이 모두 성경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문제를 성경이 답한다는 뜻이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라는 말이다. 성경 외의 다른 서적들은 성경을 해석하기 위한 참고서에 불과할 뿐, 독자적으로 정답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문제는 성경으로 풀어나가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성경을 성경으로 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호의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을 보고 읽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 성경을 이해하는 깊이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성경에 기록된 문자(letter)를 읽을 수 있어야 하고, 문맥(context)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과 지식이 있어야 함은 물론, 어거스틴의 인식론(epistemology)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믿음에 의한 지식”(knowledge by faith)에 따라 성경을 이해하는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학문에 조예가 깊다고 해도 믿음이 없으면, 성경의 영적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자신의 수준에 따라 성경의 지식으로 믿음을 얻게 되며, 심지어 무식한 사람이라도 성경 말씀을 잘 들으면, 믿음이 생기게 된다. 물론, 일반 지식이 필요하지만, 영적인 지식을 위해서는 믿음으로 영적인 성령의 은혜/은사(charismata)를 받아야 한다. 이러한 지식을 갖추었다면, 성경을 해석할 때, 그 해답을 성경에서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묻는 문제의 정답이 성경에 있기 때문이다. 지식이 있다고 해서 성경 밖을 넘어가거나, 상상력을 동원해서 추론으로 빗나가면 안 된다.

바르트(Karl Barth)도 19세기 합리주의 사상으로 땅에 떨어진 하나님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무한의 초월적인 하나님을 말하다가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고 성경까지 벗어나 저 멀리 가버린 타자(the Otherness)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인간과 관계없는 하나님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성경이 답하고 증명하도록 해야 한다. 이는 성경은 스스로 증명할 수 있는 자증성(自證性)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성경이 말하는 데까지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데서 침묵하며, 성경이 가는 데까지 가고, 성경이 멎는 데서 멎는다”라고 하여 성경 밖을 넘지 않았다.

특히, 칼빈은 요한계시록(the Revelation)을 주석하다가 제4장에 이르러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천상의 영적인 장면(scene)이 전개되니까 더 이상 주석을 할 수 없다며 무릎 꿇고 손들고 말았다고 한다. 그래서 갈빈이 신구약 66권 주석 전권을 모두 저술하는 가운데, 요한계시록은 빠졌다고 한다. 물론 지혜와 위엄이 충만하신 하나님 앞에서 겸비한 마음으로 손을 드는 자세는 경건한 신앙에서 나온 자세이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도(the Words)에 관해서 깨달을 만치 깨달을 수 있기에, 우리에게 주신 계시의 말씀(the words of revelation)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얼른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필자도 이미 출판한 서적들, 특히 ⸢성경 난제 해석과 방법론⸥에서 성경이 말씀하지 않은 부분에서는 철저하게 성경에 언급이 없다고 피력하고 더 이상 넘어가지 않았지만, 성경도 우리의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얼마든지 연구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성경 자체에서도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라고 했다(스 7:10; 요 5:39; 벧전 1:10). 이것도 성경의 자증성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작성일:2023-11-29 05:10:04 76.33.9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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