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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동 목사와 동방요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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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철
등록일
2009-08-02 19:33:34
조회수
30196
한상동 목사와 동방요배

금년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 된지 64년이 되는 해다.
해방직전 한국교회를 탄압하기 위해 신사참배와 동방요배. 일본국기게양. 황국신민서사를 강요하는 등 한국교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한 영적 암흑기였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계명과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저항한 많은 주의 종들이 투옥되어 형언할 수 없는 모진 고난을 받고 옥중에서 피흘려 순교하기도 했고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굽히지 않았으나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일제의 무력시위 앞에 굴복하고 하나님을 배반했다.

민족의 해방과 함께 출옥한 주의 종들을 중심으로 범죄 한 한국교회를 쇄신하고 새로운 한국교회를 재건하는 것이 그들의 과제였는데 교회재건 원칙에는 뜻을 같이 했지만 방법에는 여러 가지 의견차를 보여 대체로 세 그룹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첫째는 일제에 부역한 것을 합리화여 기존교회를 고수하는 교권파 그룹, 둘째는 배교한 기존교회와 단절하고 새로운 재건교회를 설립한 재건파 그룹. 그리고 기존교회에 참여하여 우상앞에 무릎 꿇고 범죄한 것을 회개하고 교회개혁을 수행하고 저 했던 고신파 그룹으로 나눠졌다.

경남지역에서 신사참배 불참운동을 주동했던 한상동 목사는 환난 때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한 것이 신학의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옥중에서부터 평양신학교를 계승할 개혁주의신학교 설립을 구상하였는데 남하한 후 함께 출옥한 주남선목사, 손양원목사와 더불어 박윤선 박사를 교장대리로 고려신학교를 개교하여 타락한 한국교회 쇄신을 부르짖었으나 교권주의자들의 교묘한 저항에 의해 좌초되고 오히려 쫏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장로교 분열의 시발지인 경남노회 분규의 주된 원인은 신사참배로 인한 교회지도자들의 자숙문제였다. 그러나 친일 교권파 인사들의 간악한 모함과 고려신학교를 둘러 싼 지방색. 선교사문제 등 분열 요인이 간단치가 않으나 어쨌든 재건교회 측으로 볼 때 고신은 타협주의로 비쳐졌고 최덕지 전도사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들이 독자적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재건파도 고신파도 장로교의 분열에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작년 어느 모임에서 재건교회 목사 몇 분과 자리를 같이한 일이 있었다. 자연히 한상동 목사님의 동방요배에 대한 이야기 중에 동방요배한 것이 사실 이라는 말을 듣고 자료를 보내달라고 하면서 주소를 적어드렸는데 그 목사님께서 별세하심으로 자료를 받지 못했으나 필자의 짐작으로는 최훈 목사님의 논문을 근거로 한 재건교회 목사들의 주장이 아닌가 생각된다.

최훈 목사는 6.25 전쟁 때 김창인 목사와 함께 부산으로 피난하여 고려신학교를 졸업(1956년)하고 1960년대 동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해 35년간 섬기면서 대형교회로 성장시켰다. 1984년 제 69회 합동교단 총회장과 한기총 회장을 역임한 한국교단에서 큰 사역을 감당한 목사이다.

한때 재건교회에 몸담아 한국교회 친일행적에 대해 비판을 이어왔던 최훈 목사는 그의 저서 한국재건교회사에서 한상동 목사님은 신사참배는 반대했으나 동방요배, 묵도. 경례 등은 일본 천황이 신이 아닌 살아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에게 절하는 것은 관계없다며 동방요배를 했다. 그러나 최덕지, 이광록, 박선근 등은 신사참배는 물론 강요된 동방요배. 국가배례. 황국신민서사 등도 강력히 거부하여 더욱 혹독한 고난을 받았다고 함께 출옥한 최덕지 전도사가 증언했다는 것이다.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는 동전의 앞뒤와 같은데 신사참배는 생명을 걸고 반대하면서 같은 목적으로 일제가 강요한 동방요배를 수용했다는 것이 납득이 가는 소린가? 예를 들면 진리문제는 아니나 성도들의 건덕문제로 금하고 있는 금주에 대해서 소주 맥주는 마시지 않았으나 탁주는 도수도 낮으니 마셨단 말인가? 설사 탁주에 꿀을 탓으니 마셔도 괜찮다고 합리화해도 술이기 때문에 금주했을 것이다.

한목사님의 신앙인격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없다. 그는 한국 교회사에서 순교신앙의 상징이며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고난 받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형극의 삶을 믿음으로 인내했으며 평양감옥에서 형언 할 수 없는 고문과 혹독한 옥중생활에서 승리하신 그분의 신앙과 인격을 폄하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재건교회 측 인사들이 동방요배를 했다는 비방에 대해 “그럴 리가 있나”라는 한마디 뿐 일일이 변명하고 대응하기 보다는 천국에 가면 다 해명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과 신념을 가졌던 한목사님은 출옥 후에도 자기의 영광을 과시하거나 자랑한 일이 없었다. 그에 대한 비방이나 오해된 문제들 하나하나를 해명하고 자신을 변호하시는 그런 어른이 아님을 교단 인사들이라면 너무도 잘 아는 사실이다.

고신 하면 한상동 목사를 연상할 정도로 한목사님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영적 카리스마가 있었다.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한 경건성을 유지했고 불의를 용납지 않는 선지자적 기상을 소유했으나 타인에 대해서는 항상 인자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격려해주고 느거럽게 대해주었다. 그의 올곧은 신앙과 겸손한 인품은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으며 진리 문제에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영적 권위를 가진 고신교단의 상징적 지도자임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주지하시다 시피 출옥 성도들 중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도 반대한 최덕지 전도사(후에 한국최초로 여목사가됨)가 중심이 되어 독자적으로 교회를 세운 것이 재건파 교단이다.

이들은 기성교회는 이미 타락했으니 사탄의 회로 규정하고 교회당마저도 마귀당이라 하여 예배를 거부할 정도로 독선적이고 배타적이여서 기성교인과의 교제는 물론 인사조차도 안했다. 재건교회 초창기지도자들은 자신들만이 순교신앙을 온전히 이어가면서 생활의 순결을 계승하려 했던 강경파 근본주의자들로서 한국교회사에서 일정부분 긍정적인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으나 신학적 뒷바침과 기독교 문화적 요소의 빈곤으로 현재 전국적으로 130교회와 1만명 정도의 교인을 가진 교파로 일반교인들은 거의 모르는 교단이다.

필자가 교단에서 청년신앙운동을 하던 시절(1977년) 300만 부산시민 복음화를 위한 초교파적 전도 부흥회를 개최키로 결정하여 강사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그 당시 모시기 힘든 최훈 목사님을 필자가 직접 방문하여 허락을 받고 준비에 들어가자 부산노회 목사님들께서 우리 교단에 부흥회 강사가 많은데 하필 타 교단 강사 그것도 최훈 목사는 강사로 세울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노회에 불려 가니 최훈 목사가 한상동 목사님이 신사참배는 거부했으나 동방요배를 했다는 논문을 쓴 장본인이기 때문에 최 목사를 강사로 세울 수 없다는 이야기를 처음 듣게 되었다.

문제가 된 한목사님의 동방요배에 대해 심군식 목사님께 알아보라고 해서 준비위원 몇 명이 부산 용호동 심목사님을 찾아가서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 우여곡절 끝에 이사벨여고 무궁화 홀 에서 4일간의 집회를 은혜롭게 마치게 되었는데, 이 일로 교단간의 벽 때문에 서로 교류하지 못했던 목사님들이 손잡고 대화의 장이 된 일도 있었다.

초기 고신교단의 선지동산인 부산 송도(서구 암남동 34)는 일제 때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목사들이 자진해서 천조대신의 이름으로 신도식 침례(미소기 바라이)를 받았던 송도바다를 바라보는 곳에 신사참배를 반대한 출옥성도가 중심이 되어 개혁주의 신학과 순교신앙의 계승을 목표로 설립된 고려신학교와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예수사랑으로 치료해주는 복음병원이 세워진 것은 하나님의 오묘하신 뜻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땅을 매입하게 된 경위와 공동묘지를 정지하는 과정에 있었던 일화라든지 교단의 재산이 되기까지 그 일을 맡아 수고한 당시 교단 인사들에 대한 공적이 사라지지 않도록 교단역사에 기록되었으면 한다.
다행스럽게도 필자는 교단지도자들 가까이에서 생활하면서 고신교단의 초기 역사의 현장을 접하게 된 것은 필자에게는 큰 행운이며 그분들의 지도와 사랑을 받게 된 것 또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 여겨진다.

이처럼 고신교단의 초석이 된 초기의 지도자들의 설립정신과 진리를 파수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의 피와 출옥성도들의 투쟁정신으로 타락한 한국교회 교회개혁을 부르짖으며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앙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이루어 놓은 교회사적 가치를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오직 하나님만 섬겼던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 개혁주의교단의 정체성을 이어가는 것이 코람데오 정신일 것이다.
작성일:2009-08-02 19:33:34 113.131.218.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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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물 2009-08-04 12:02:38
박시영 목사님께서 좋은 자료를 주시니감사합니다.한목사님의 동방요배문제나 교파분열에 대해 부정적 이야기를 들으면 괜히 열이나서 그냥못참게 됩니다.금번에 한목사님께서 일경에 구속될때 시무지인 밀양마산교회 113주년 기념집을 박시영목사님께서 집필하여 출판기념회를 성대하게 가졌습니다. 출옥성이신 한상동목사 이인재목사를 비롯하여 전 교인이 신앙의 정조를 지켰던 밀양마산교회는 순교신앙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도시 어느교회보다도 선교와 문화사역에 큰 비전을 가지고 사명을 다하는 건강한 교회로 전국에 소문난 교회입니다. 이 귀한 자료를 원하시는 분은 교회로 연락하시면 통큰 목사님께서 거절못하고 보내주실것 같은데....자랑스러운 교회위에 하나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jfirst 2009-08-04 10:32:07
최덕지 목사는 일제 수난기에 잠시 우리 밀양마산교회에 칩거한 적이 있는 귀한 분이십니다. 당시 밀양마산교회에서 한상동 목사님과 함께 할 때 동방요배를 한 목사님께서 묵과하거나 동조했던 것처럼 와전되어 전해져 오는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최훈 목사는 전언받은 이야기를 사실화시켜 마치 한 목사님께서 동방요배를 용인하신 것처럼 주장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당시 마산에 있던 테메시 선교사댁에 방문했을 때 한상동 목사님께서 다소 동방요배에 대해 유화적인 발언을 했던 것을 두고 재건파는 두고 두고 이를 고신은 동방요배를 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도 수 차례 이 문제를 두고 토론을 하고 있는데 ...
jfirst 2009-08-04 10:27:30
우리 교회 설립자의 자부 이름은 김귀남 집사이고요, 자녀는 박성철 장로입니다. 남편 - 고 박유덕 장로
jfirst 2009-08-04 10:26:28
본 글을 쓰신 김인철집사는 밀양마산교회 초대 장로였던 박수민 장로님의 외손자이십니다. 박수민장로님은 신사참배 반대로 수 차례 예림주재소(밀양경찰서의 전신)에 끌려가 고문과 옥고를 치루신 귀한 신앙의 투사이십니다. 박수민 장로님의 아드님들이 박손혁목사(제일영도교회 담임 역임, 고려신학교 3대 교장) 박치덕 목사, 박정덕 목사입니다.
jfirst 2009-08-04 10:23:31
한상동 목사님이 친히 100주년기념강좌에서 밝혔습니다. 동방요배는 명백한 죄이기에 자신은 물론 자신과함께 했던 교회들도 동방요배를 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한상동 목사께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펼치던 교회(밀양마산교회) 담임목사로서 여러 증인들의 증언을 통해 이점에 대해 명백하게 증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당시의 증인들이 현재 살아계십니다. 설립자의 아들 박명술집사(87세), 설립자의 자부(97세)의 증언에 의하면 신사참배 반대는 물론 동방요배를 한 목사님은 단호히 거부하셨습니다(증언녹취 자료있음, 2009. 5. 14). 밀양마산교회 홈페이지 역사관에 접속하시면 한상동 목사 육성 증언이 올려져 있습니다. 박시영 목사(밀양마산교회 담임,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총무, 손양원목사생각복원 사업회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