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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교회에 대한 저의 생각

닉네임
류대형
등록일
2012-09-11 15:02:23
조회수
4805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 고신대학원 입학 준비하고 있는 학생입니다만, 지나가다가 저도 몇 자 적어보려고 합니다^^

저도 이러한 의문점을 가져본 적이 있습니다만 이세령님께서는 제가 가지고 있던 의문점들에 보다 더 심도 있게 풀어 놓으신 것 같습니다. 특히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교회의 멤버쉽과 제자도의 상관성에 대해 의문점을 던지신 것이 눈길이 갑니다.

사실 저는 대형 교회에 대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양면 모두 살펴보는 것이 균형을 갖고 생각을 정립하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시간 관계상 저는 대형교회의 부정적인 측면, 거기에서도 특히 대형교회의 규모 즉, 성도 수가 많아지면 어떤 위험성을 가지게 될 지에 대해서 위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앞서 제기하신 것처럼 주변의 소형교회를 굳이 일부러 힘들게 하려 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대형슈퍼마켓이 소형슈퍼마켓을 힘들게 하는 것처럼 소형교회를 잠식시켜갈 것에 대한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대형화된 교회에서는 헌신된 리더급 신자들을 주변 미자립교회(개척교회)에 단기 파송하여 돕는 방안과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방안 등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교회 내에서도 자교회 중심에서 벗어나 조국교회, 나아가 세계교회를 생각하고, 여기에 헌신할 수 있는 인적자원들을 확보해야 하며, 교회내에서도 여기에 대한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 되어야 하고, 당회에서도 이것을 추진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감수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노력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할 것입니다.

교회 마다 자 교회 내부의 기도제목들이 있을 것이며, 교회 교육관 설립이나 주차장 확장 문제와 같은 재정과 관련된 안건들을 비롯하여, 각 부서 교사나 직분자 혹은 교역자 부족과 같은 인력부족에 대한 부담을 안고 있는 문제들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고민들은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있는 법이니, 이것을 뛰어 넘어 주변의 나보다 힘든 교회에 눈을 돌리고 힘을 쏟을 만한 교회가 되려면 과연 성도들의 수준이 얼마나 높아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물론 이를 부분적으로, 혹은 상당한 부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교회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이런 노력은 대형교회에 상당히 도전이 되는 부분일 것입니다. 게다가 만일, 대형교회의 당회내 직분자들이 특정 안건에 대해 당파를 이루고 있고, 서로에 대해 적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상태에 있다면, 주변 교회를 섬기기 위한 자교회 희생에 대한 안건에 대해 회의를 하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울 것입니다. 더욱이 의견의 합일을 이루어 가는 과정의 일환으로서의 토론문화에 익숙하지 못하며, 대화의 방법에 있어서도 상대방을 존중하는 기술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 직분자들일 경우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당회야 말로 가장 큰 장벽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당회를 해체해야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만큼 대형교회가 소형교회에 힘을 기울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형교회가 개척교회, 혹은 소규모 교회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교회에 나누어 주는 노력을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며, 대형교회가 그런 부분에 보다 더 관심을 갖는다면 소규모 교회들과 함께 공존을 넘어 아름다운 연합을 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 대형 교회의 규모가 가질 수 있는 허점은 규모가 큰 교회의 직분자일수록 직분자의 자리를 권력자의 자리로 여기는 경향을 더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직분자의 자질 부족이라고 치부하기에 앞서 우리가 갖고 있는 보다 더 근본적인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인간적 연약함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 개개인은 자연스럽게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혹은 군에서 계급사회의 구조에 익숙해져 왔습니다. 저는 우리가 이러한 사회계급 체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또 그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인간이라는 점, 그리고 교회가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동일한 이름의 직분자에게 주어지는 권력 즉,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의 범위가 커질 수 있다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대형교회일수록 직분자가 갖게 되는 권력에 대한 유혹과 권위 의식이 커질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경제적 규모가 큰 직장의 보스일수록 더욱 큰 권력을 갖기 마련이며, 더욱 큰 권력이 있는 곳일수록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피어나기 쉬운 법입니다. 교회를 경제원리의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상당히 혐오스러운 일이지만, 저는 교회 안에서도 분명한 권력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인수가 100명이 되는 교회에서 교회 일을 결정하기 위해서 대표자 10명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는 것과 10,000명이 되는 교회의 일을 결정하기 위해서 대표자 100명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는 것과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입니까? 둘 다 가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냥 생각할 때에 10,000명의 집단의 대표자 100명이 하는 회의가 100명의 대표자 10명의 회의 보다 왠지 더 무게감 있어 보입니다. 어쩌면 대표자들 자신들 또한 많은 사람의 대표자인 경우에 보다 자신이 더 큰 책임을 맡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위의 사례를 통해서 저는 사람 숫자가 많아지면 그 집단의 대표자와 집단 구선원 모두 계급의식 혹은 권위의식의 패러다임에 노출되기 쉽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권위의식은 ‘내가 저 사람보다 의사 결정 과정에 높은 자리에 있고, 나의 영향력의 범주 속에 저 사람이 속해 있으며, 그러므로 내가 저 사람보다 높은 고지에 올라있다’라고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그런 개념을 갖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본인의 양심에 물어볼 문제이지만 사실 대형교회의 직분자일수록 더 많은 수의 성도를 대표하는 봉사자의 직분을 맡게 된 것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과 함께 자신이 속해 있는 큰 교회의 대표자라는 ‘빛나는 감투 의식’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생각건대 이런 권위의식은 자신도 모르게 갖게 되니 큰 교회의 직분을 맡은 자일수록 여기에 대해 더욱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교회 직분자들을 대하는 평신도들의 태도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직분자를 나보다 권력자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온 교회를 대표해서 앞서서 수고하시는 큰 일꾼이며, 교회의 어른으로서 존경해야 할 것입니다. 단지 교회의 어떤 유력자라고 해서 식사대접을 하고 잘 보이는 식의 대접은 중대 직분자들로 하여금 교만하게 만드는 촉매제 역할을 할 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직분자 선출의 문제에 있어서도 대형교회는 성도수가 많은 이유 자체만으로도 한 가지 약점을 갖게 되는데, 그것은 투표의 방법을 거칠 때에 교인들의 성숙도가 낮을 경우에 인기투표와 같이 흘러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수가 적은 교회도 그것은 마찬가지 아니냐는 반론을 제기 할 수도 있으며 공천위원회의 공천을 거쳐서 직분자 후보들을 선임하는 과정 후에 하는 투표는 건전성을 확보하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많은 사람의 투표는 당선자(?)로 하여금 교만과 우쭐함을 낳는 위험성을 언제나 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직분자 선출과정에 대해서는 교단 별, 교회별 정해놓은 법에 따르겠지만, 어쨌든 저는 후보자가 인기투표의 과정으로서 당선되었거나 혹은 탈락되었다고 느끼게 만드는 시스템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며, 여기에 대해서는 교회의 법을 만들고, 조정하는 분들께서 깊은 배려를 해주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보고체계를 갖추는 일련의 상하 수직적인 체계가 갖추어져 있는 집단의 경우, 그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리고 상하 보고체계의 단계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피라미드처럼) 최상위 그룹과 최하위 그룹간의 소통에 한계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대형화되면서 생겨나는 상하수직 보고체계의 다단계화(여기서 ‘다단계’라고 함은 한 그룹이 직속상위 그룹이나 개인에 보고하고, 또 그 개인이 그 위에 해당하는 그룹에 보고하는 식의 단계가 많아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의 부정적인 측면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말하는 소통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교회의 소통 문제에 대해서 여기에서 이야기 할 때에 저는 문제가 되는 것과 문제가 안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제가 생각하는 교회의 소통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경우를 들어 보겠습니다.

교회의 당회에서 논의하고 있는 안건들에 대해서 의사소통 단계의 최하 단계에 있는 무직분 자들이 그 사항에 대해서 감히 손을 들고 궁금한 사항을 물어보거나, 의문점을 던지기 힘들거나 혹은 더 나아가 그러한 안건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는 상태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의 주 요인이 교회의 몸집의 비대함에 있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대형교회의 문제가 될 수 있겠습니다. 아무리 대표자들이 추진하고 있는 사항이라지만, 교회의 대표자들이 함께 기도하고 고민하며 당회에서 이야기 되고 있는 중대한 사항들에 대해서는 그 교회에 속한 교인들 모두에게 충분히 전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한 한 가지 방안으로는 스마트폰 SNS나 인터넷 등을 활용하는 것이 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교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대형교회 일수록 당회의 안건들에 대해 말단에 있는 평신도들과 소통이 안 되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작은 교회도 이에 대한 마인드가 없는 사역자가 사역을 하고 있는 경우는 대형교회보다 심각한 소통의 장벽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대형교회일수록 이러한 교회 안건들에 대한 평신도들의 관심도가 떨어지는 것은 교회의 주인의식을 갖기 못하는 평신도들의 의식과 그것에 어느 정도 기여하는 대형교회의 몸의 크기에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대형교회는 당회의 안건들에 대해 의사소통의 최 말단에 있는 평신도들에게까지 전해야 할 사항에 대해서는 최대한 적극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전달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교회의 소통의 문제에 있어서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라고 보는 것은

성도간의 교제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의 사람이 많아서 서로 누가 누구인지도 잘 모른다는 것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뒤의 내용을 끝까지 잘 들어주세요) 대형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얼마든지 가정교회가 존재 할 수 있으며 서로의 얼굴을 알고, 깊은 사정을 이해해주고 서로의 기도제목을 공유하는 성도의 교제는 가정교회에서 담당해야 한다고 봅니다. 한 교인의 문제를 모든 성도들이 다 알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한 명의 교인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이 목회자 한 명뿐인 교회라면 그것은 문제가 되겠지만, 적어도 가정교회와 같은 소그룹교회에서 한 명의 교인에 대해 여러 사람이 관심을 갖고 서로 소통을 하고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가정교회의 목자와 목원과의 이러한 소통은 반드시 막힘이 없어야겠습니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면 대형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어떠한 형태로든지 한 명의 목자가 소수의 목원을 목양하는 형태의 가정교회가 없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목양은 1:1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신 명령과 그리고 베드로에게 “가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목양에 대한 말씀을 생각해보고, 과연 예수님께서 교회에 기대하고 계시는 목양의 모습은 어떤 것일지에 대해 고민을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위의 예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은 단지 많은 회중에게 말씀을 선포하는 것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일은 예수님께서도 하셨지만 예수님께서 수 백, 수 천명이 아닌, 12명의 제자만을 선택해서 부르시고 집중 훈련시킨 것을 통해 볼 때에 제자화는, 혹은 예수님이 생각하시고 말씀하신 목양의 관계는 1대 1의 관계이며, 소그룹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궁극적인 목양은 주님과 신자간의 1:1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지상명령, 제자화에 대한 부분은 분명히 일대 다수, 아니 일대 초다수의 관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목자의 목양의 범위를 생각할 때에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를 생각해 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대형교회라는 큰 집단에 공예배에 선포되는 말씀만 듣는 것만으로도 목양을 잘 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평신도들이 아무런 마음의 부담감이 없는 상태에 있으며, 한 사람의 목사에게 너무나 많은 심방의 업무가 부과된 상태에 있으며, 동시에 성도의 수에 맞게 목양의 역할을 담당할 평신도 가정교회 목자가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상태에 있다면, 그 대형교회는 목양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에 만약, 대형교회 내의 시스템이 1명의 교역자에게 너무나 많은 책임이 부여되어 있으며 그 1명이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정도의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며 그것으로 인해 정작 제자화를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대형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소수의 목회자들이 절대 다수의 교인을 심방하기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규모가 큰 교회일수록 여기에 대한 대안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만, 어쨌든 저는 대형교회의 큰 울타리를 해체하는 것이 대안이 아니라, 대형교회의 큰 울타리 안에서 가정교회를 이끌어갈만한 평신도 목자를 양성하는데에 주력하고, 그 가정교회마다 성도의 교제와 전도의 역할을 감당해 내고 대형교회의 크기로 인해 생기는 여러 가지 단점들을 보완해 나간다면 적어도 목양의 부분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해결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제자화에 대한 주님의 지상명령 성취를 초대 교회는 어떻게 이루어 갔으며, 세계 선교의 역사와 한국 교회의 역사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이루어 왔는지를 살펴보고, 성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저도 앞으로 더 공부가 필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또한 대형교회의 문제점으로 성도수가 많으면 교회 등록을 하지 않고 예배만 형식적으로 드리고 가는, 그래서 어떠한 훈련이나 봉사에 임하지 않고 숨어 지내는(?) 교인들이 안주할 기회를 제공하게 됩니다. 여기서는 단지 성도수가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지 단지 이것만으로는 대형교회가 건강한 성도를 키워내는 데에 문제가 된다고는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형교회는 상대적으로 소형교회보다 교인을 육성할 수 있는 교역자가 많은 편이고, 평신도 사역자도 많아서 교육인프라가 더 잘 갖춰있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형교회는 성도수가 많다는 이유만으로도 여전히 공예배만 형식적으로 드리는 ‘썬데이 크리스쳔’, ‘명목상 그리스도인’, 혹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을 갖고 있으면서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에 먹칠하는 신자 아닌 신자’를 배출해 내는데에 기여할 위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대형교회가 사람의 숫자가 많이 모이는 사실만으로도 여러 가지 위험성을 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기서 대형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좀 더 균형있는 논지를 펼치지는 못한 것 같아 아쉽습니다만, 어쨌든 저는 대형교회는 대형교회 나름의 장점과 주님께로 부터 맡은 교회의 은사로써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대형교회는 자신이 갖고 있는 장점을 살리되 위의 기술한 것과 같은 대형교회가 가질 수 있는 약점들을 보완하기 위해서 주변 소규모 교회들에게 눈을 돌리고, 손을 펴며, 교회 내부 소통의 문제와 목양시스템상의 문제를 보완하고자 노력해 나간다면, 대형교회는 분명히 아름다운 열매들을 많이 맺어가게 될 것이며, 몸이 크다고 놀림을 받는 것이 아닌, 주변의 몸이 작은 교회들을 도와주고 세워주는 아름다운 교회가 될 것입니다.
작성일:2012-09-11 15:02:23 182.218.180.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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