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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온 글]크리스토텔릭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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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창기
등록일
2013-08-21 13:20:11
조회수
5935
누군가가 씨뿌리는 비유에 대한 글을 올렸습니다. 길가, 돌짝밭, 가시밭, 옥토에 뿌리워진 씨앗이 열매를 맺거나 맺지 못하게 되는, 유명한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댓글 싸움이 재미있습니다. 한 사람은 당시 이스라엘 농법을 염두에 두고 땅을 완전 갈아 엎은 경우가 옥토이며 30, 60, 100백 결실을 얻는다고 했어요.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2천년 전 팔레스타인 지역의 농법을 전혀 생각지 않고 현재 한국에서 농사짓는 일반적인 시각으로 봅니다. 당연 땅을 갈아 엎는다는 방식을 비웃습니다. 농사짓는 법을 모른다고.

여기서 해석 관점의 큰 차이를 봅니다. 당연히 1세기 오리지널 문맥을 살필 것이냐(첫번째 사람) 아니면 21세기 내가 처한 한국 문맥에서 1세기 텍스트를 볼 것이냐(두번째 사람)라는 문제로 충돌이 일어납니다.

두 사람의 다툼이 흥미있다는 말은, 바로 그 씨뿌리는 비유가 펼쳐졌던 1세기 신약의 기록 방식이 어떠했을까라는 관점과 맞물려 있는 다툼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21세기의 우리는 팔레스타인 1세기의 문맥에 따라 정확한 해석 작업을 먼저 벌이려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21세기 우리에게 적용하려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과연 1세기 크리스천들이 BC8세기, 혹은 BC13-15세기 기록인 선지서나 토라를 오리지널 문맥에 따라 원 뜻을 먼저 캐는 작업을 했을까요?

그런 작업을 했을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한국의 21세기 농법 시각을 통해서, 1세기 팔레스타인 농법에 따라 펼쳤던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를 보는 시각 자체를 마구잡이로 나무랄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읽는 독자 혹은 커뮤니티 문맥에 따라, 보다 이전의 문학 작품이나 역사적 사건을 읽어내는 작업은 이해할 만합니다.

그렇다면 신약이 타나크(유대인의 스크립쳐) 기록을 인용하거나 변증할 때 오리지널 문맥을 정확히 캐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현재의 문맥을 통해서 이해했다는 크리스토텔릭 독법 역시 이해할만합니다
작성일:2013-08-21 13:20:11 58.239.109.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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