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목회자료실

제목

차이를 인정하고, 배척을 조심해야!

닉네임
황창기
등록일
2014-01-11 23:16:34
조회수
3852
“차이를 인정하고, 배척을 조심해야!”

~~~성경신학적 연구 ‘결과들’을 교리적 틀로써 판단하기에는 신중에 신중을! ~~~

필자는 요즈음 새로 구입한 책에 몰입하고 있다. 방금 익힌 군고구마 맛이다. 옛날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의 프레임(Frame) 교수의 대표적 저술인 『조직신학: 그리스도교 신앙 소개서』(Systematic Theology: An Introduction to Christian Belief, 2013. 1219페이지).즐겨듣던 그 분 강의 때문이리라.

저자 프레임교수는 30살 후반에 조직신학서론을 웨스트민스터 신대원 학생들에게 강의하였다. 반틸 박사의 사랑받는 제자로 학생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었다. 정말 명석한 노총각 교수로 A 학점을 받으려면, 출판될 수 있는 글이어야 하고 비판적이어야 한다고 했다.

이미 주되심(Lordship)에 대한 4권의 큰 책을 비롯한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어느덧 80이 넘은 노 교수로 그의 대표작(magnum opus)을 내놓은 것이다. 영지가 겸비한 그의 학문적 원숙성을 67명의 조직신학자, 교수 및 목회자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는 걸작이다.

여기 이글은 서평이 아니다. 필자와 전공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저 학문의 분야별 차이나 발전 과정상,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은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간단히 지적하고자 한다. 대강 훑어보고, 단편적인 느낌을 간단히 적어, 지극히 주관적인 글이라고 생각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신자로서 자기와 다소 견해 및 입장이 다르다고, “바로 정죄하고 적대시(敵對視) 하지 말자!”는데 이 글의 주안점이 있다.

성경신학은 17세기 초에 싹튼 학문으로, 조직신학에 비하면 그 역사가 짧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게하르드 보스(G. Vos)가 성경신학 분과 첫 교수로 나선 것이 1893년일 정도이다. 그러나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관계는 서로 보완적임을 알아야 한다.

즉 구속역사적, 언약적 흐름에 따른 여러 주제는 그리스도 완결적 성취로 성경신학의 귀한 열매이다. 이것들은 조직신학의 기본자료가 되어 교리로 정립되어간다. 성경신학의 연구결과는 조직신학의 점검이 필요하다. 반면에 성경신학적 연구에 소홀하면, 그 조직신학은 사변적 이론으로 흐르기 쉽다.

문제는 성경학자들의 연구 열매들이 이런 교리서에 반영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지나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을 프레임 교수의 새 책 『조직신학』이 잘 보여주고 있다.

①‘하나님 나라’ 주제 중 ‘이미’와 ‘아직 아니’ (already, but not yet)라는 가르침이 이 조직신학 책에 포함되어 있다(90 쪽). 60년대 우리 신학교 세 박사님의 강의에도 이 주제가 나올 정도로 성경과목 쪽에서 자주 듣던 이론이다. 이제 이 새 책에 들어오기까지 보스 (G.Vos)로부터 100 여년이 더 걸린 느낌이다.

② 성경신학 쪽에서 종말론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다. 시간과 공간 중심의 말세론이 아니다. 그러나 조직신학 쪽에서는 아직도 시.공간 위주의 종말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1075 쪽 이하). 결국 죽은 다음의 ‘천국’은 강조하나, 여기서 지금의 ‘재창조’는 별로 주목을 하지 않는듯하다.
③ 또 ‘파루시아(강림=coming)’가 지닌 여섯 가지의 뜻이 성경에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아직도 “재림”으로만 쓰고 있다.
④ 이 책에 성전(Temple)신학의 주요한 핵심이 아직도 조직신학에 잘 반영되어 있지 않다.

교회에서는 성탄절은 예수님의 생일축하 의미는 강조해도, 세상의 끝(히 9:26)으로 오는 세상(Age to come)의 ‘재창조’의미를 강조하여 축하하지 않는다.예수님의 탄생은 곧 송구영신이란 점을 놓치고 있다.

하여, 성탄절 후 1주일 정도 밖에 지나지 않은 새 창조 기간인데도,시간 중심의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고,새해아침이라고 또 구정에도“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하여 성경과는 거리가 먼 ‘세상 복’을 갈구하는 면에선 세상과 차별이 없는 이유도 두 학문의 거리 때문이 아닐까?

또 찬송가의 ‘천국’ 찬양(234~249장)은 온통 내세의 일 즉 ‘요단강 저쪽’의 일 만 찬양하는 내용 일색이다. 재창조를 찬양하는 면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처럼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이 따로 논다고 할까?

우리의 신학교육은 조직신학 중심이다. 그래서 교리로써 성경본문을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만으로 안 된다. 즉 성경의 큰 그림 (Big picture)이나 스토리(story)를 이해하여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그 성취가 그리스도께서 이루셨음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성경신학의 최근 연구가 꼭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는 두 과목 사이에 어쩔 수 없는 학문의 추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강력히 부탁한다. 성경연구에서 좀 특색적인 주장이 나와도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다. 성경연구열매를, 특이하다고, 쉽게 배척하지 말아야 한다. ‘차이’는 시간이 좀 지나서 ‘차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지는 지금 성경연구는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좀 다른 석의(釋義) 결론이 나와도 ‘성경 본문’의 연구결과라면 ‘참고 기다려 보자!’는 말이다. 그것이 신학적 교리로 정착하기에는 많은 시일이 지나야 한다. 그 동안 그 연구 결과가 성경적이지 못하면 오래 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검증되지 아니한 연구로 교인을 혼란스럽게 하는 경우는 다스려야 하지만...!)


한국동남성경연구원장
www.kosebi.org
작성일:2014-01-11 23:16:34 58.239.109.243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게시물 댓글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목록
최신순 추천순  욕설, 타인비방 등의 게시물은 예고 없이 삭제 될 수 있습니다.
2014-01-30 21:48:41
그런데, 우리 신학계는 특히 교리에 비추어 문제가 있다고 쉽게 판단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 후 바로 배척하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습니다.조심할 일입니다.
2014-01-28 23:11:58
이건 저의 분야에서도 같습니다. 건전한 비판은 하되, 열린 마음을 가지도록 가르칩니다. 그래야 의학이 발전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