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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로 먹고 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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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콩달콩
등록일
2016-11-04 10:20:31
조회수
1948

아무리 진리라도 경계에 서서 외치면 다른 두 진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쫓겨난다. 빌어먹어야 할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살기 위해선 진리에 집중하는 것 이전에 자신이 속한 진영에 집중하여야 한다. 진영의 주장이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경우엔 문제가 없지만 항상 그렇지 만은 않다. 그걸 인지하더라도 그에 대해선 함구한다. 진영에서 안전이 보장받는 쪽을 택하는 것이다. 주경학자나 교의학자나 예외가 없다.

바울 사도의 출애굽과 그 이후에 대한 이해를 볼 때에 그 모두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접했고 그 이후의 삶으로 인해 멸망하기도 했다는 것(986번), 고린도교회의 음행자가 신자였는데, 그 죄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것(999번),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자기 생각을 내세워 나누는 자를 멸하신다는 것(1,000번). 이것이 이해하기 어려운가? 전혀 아니지 않은가? 기존의 잘못된 교리를 합리화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쉽게 이해되는 내용이다.

미래교회포럼에서 종교개혁 500주년 맞아 "이신칭의, 이 시대의 면죄부인가?"라는 제목으로 포럼을 개최한단다. 김세윤, 박영돈, 권연경 교수가 강의를 한다. 목사들이 이런 자리를 왜 만드는가? 그들의 강의를 듣고 칭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기 위함이다. 강의를 듣고 분별할 수 있기에 그러한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목사들은 신학을 공부했다. 성경은 난해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신학 성경만 하더라도 그 시점에서 아무런 공부를 하지 못했던 노예들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시대의 차이로 인해 바른 이해에 제약이 있긴 하지만 조금만 신경을 쓰면 이해에 별로 어려움이 없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행위 구원과 믿음 구원을 대비하고 있지 않고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대비하였다. 조문으로 된 모세의 율법을 따르는 삶과 성령을 선물로 받음으로 심비에 새겨진 율법인 성령의 율법을 따르는 삶에 대한 대비이다. 유대인 신자들과는 달리 이방인 신자들은 전자와는 전혀 무관하고 후자와만 상관이 있기에 전자를 지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이 이해하기에 어려운가? 아니다. 이방인 신자들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 뜻을 나타내신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한다. 믿음으로인데, 이는 율법이 아니라 이방인 신자들에게 삶의 원리로 주신 성령의 (율)법을 따르는 것이다(996, 997번). 이 말이 이해하기 힘든 것인가? 전혀 아니다.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는 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부르심을 받는 것이 구원인데, 그 구원은 오직 믿음이다.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 이 땅에서 살다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영원한 구원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인 믿음 구원이면서 동시에 순종 구원이다. 여기에선 믿음과 순종이 동전의 양면이다. 이는 양 언약 시대 모두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나님께서 그 언약 시점의 자기 백성을 대하시는 구체적인 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생긴 것일 뿐이다. 조문으로 된 율법에서 성령을 통하여 심비에 새겨진 율법으로. 바울 사도가 문제를 삼은 것은 새 언약 시대에 새 언약 백성들에게 옛 언약의 방식을 적용시키는 것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다. 천사가 전한다고 하더라도 저주를 받을 다른 복음이라며 강하게 책망하였다.

개인적으로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이렇게 설명하는 경우를 접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설명이 어려운가? 처음 듣는 설명이라서 낯설 수는 있겠지만 어려운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하다.

신학은 신학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목사도 책임이 있고 말씀사역자가 아닌 성도들도 책임이 있다. 이 시대에는 교육 수준이 차이가 없기에 그 책임을 감당하는 데에 별 어려움이 없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그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신학자들과 똑같이 처신하는 것이다.

자유게시판에 올린 제 글에서 Hot 표시가 된 글은 모두 정주채 목사님과 관련된 것이다. 저는 그분의 지난 목회와 삶을 존경한다. 코닷에 게시하는 글에 대해서도 대부분 공감한다. 짝퉁 개혁주의자가 아닌 진짜 개혁주의자의 의식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내용이 실천으로 옮겨지고 있는가? 아니다. 정직하고 냉철하게 평가하면 아니다.

신학자와 목사는 자기 진영을 지키는 일에 열정적으로 협력하고 있다. 서로 서로 앞에서 얘기한 구조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구조로 인해 전통은 유지된다.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개혁은 그냥 구호이다. 스스로를 위안하는 데에 필요한.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이냐 맘몬이냐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냐 맘몬이냐. 신학자나 목사나 언제나 그 선택을 앞두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며 산다고 볼 수 있다. 스스로 그 사실을 인지하든지 인지하지 못하든지 간에.

물론 이는 원리적으로 모든 성도에게 동일하다.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있지만 원리는 같다. 하나님이냐 맘몬이냐.

당신은 삶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가?

여러분들이 꼭 기억하여야 할 것이 있다. 다시 적지만 신약 성경은 행위 구원과 믿음 구원을 대비하고 믿음 구원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 구원을 말하면 다 성경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 그것을 붙들고 있으면 성경적인 주장을 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선언하셨다(마 12:34). 바울 사도는 어떤 유대인 교사들의 주장에 대해 저주받으리라(갈 1:9)고 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새 언약의 역사를 자신들의 전통을 앞세워 거부하는 태도에 대한 책망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조상들을 붙드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었다. 지금 자신을 돌아보라. 현재 자신이 바리새인의 자리와 다른 곳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성경을 오독하여 만들어진 전통을 붙들고 오직 전통을 외치는 모습이 과연 바리새인들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제 글을 곡해하지 마시길 바란다. 저는 여러분들이 독사의 자식이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용에 있어서 그 시점의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도 아니다.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다른 버전일 수 있다고는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는 면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잘못된 지식을 따른다는 면에서. 그렇기에 심각하게 생각하여야 하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 전통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모습은 결코 하나님 신뢰가 아니다. 그 삶에 대한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다. 신학자나 목사나 말씀사역자가 아닌 성도들 모두 예외 없이.
 

작성일:2016-11-04 10:20:31 183.103.5.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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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jj5016 2016-11-04 10:44:23
저는 이 글에 신학자나 목사님들이 분노나 모욕감이나 어떤 형태로든지 감정적인 느낌이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한 어떤 반응이 있기를 바랍니다.
침묵과 회피로 일관하면서 결국은 현상 유지에 머물지 않기를 바랍니다.
명백한 한 가지는 그러한 태도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곧 이 사안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이지요. 불신앙인 것입니다.
진심으로 그 불신앙에서 벗어나 신앙으로 살아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