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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제해설] 천국에서의 상은 단지 구원을 의미할 뿐,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행한 대로 받는 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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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등록일
2016-11-20 18:14:53
조회수
3125
천국에서 성도들이 행한 대로 받는 상급이란 없다?

[들어가는 말] (칭의와 성화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해야)

“상급”(reward)은 “칭의”의 연속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보면 “성화”가 칭의에 연속되는 과정이라면, “상급”은 성화의 결과이다. 그런데 문제는 칭의와 성화와 상급의 함수관계에 대한 견해가 학자들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정통학파에서는 칭의와 성화와 상급에 대하여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단락된 불연속성(discontinuity)과 동일선상에 있다는 연속성(continuity)의 관계로 이해한다. 물론 새 관점학파에서도 같은 패턴(pattern)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결과가 달라진다는 데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정통학파에서는 처음의 칭의가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상급(영생)의 결과에 이른다고 하나, 새 관점학파에서는 처음의 칭의가 성화의 과정을 통해 상급(영생)에 이를 수도 있고, 상급을 빼앗겨서 심판(멸망)을 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상급에 대한 견해는 교파를 떠나서 워낙 다양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정리하기가 복잡하고 어려운 점도 없지 않다. 심지어 개혁파 안에서도 첨예하게 양립하고 있어서 상급에 대한 개혁신학적인 정론(orthodox theory)을 정리하기도 힘들 지경이다. 개혁파 내에서도 성경적인 상급에서 크게 두 가지 견해로 갈리고 있다. 하나는 성경의 상급은 우리가 믿음으로 받는 “구원”(영생)에 국한시키는 견해와, 또 하나는 “구원”에 한정시키지 않고 믿음의 행위에 대한 “보상”까지 포함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전통적인 개혁파의 견해는 후자의 견해와 일치한다.

개혁파 신학자들 가운데서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저명한 신학자들 중에서도 이와 같이 상급에 대한 견해가 엇갈리고 있어서 이 상급론을 정리하기가 용이하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대단히 유명한 개혁주의 정통신학자들은 대부분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Calvin, Berkhof, Hendriksen, Hodge, Vos, Hoekema, Grosheide, Kuyper, Berkower, Grudem, Erickson, Bavinck etc.). 필자도 후자에 무게를 두고 좀 더 그것의 합당한 이유를 밝히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급에 대한 아날로그 방식과 디지털 방식 등 종합적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1. 성경적 상급의 정의에 대한 견해

성경의 상급론에 있어서 이미 타계한 OOO교회 K목사와 OO신학교의 K교수는 전통적인 개혁주의 상급론과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전자의 입장이다. 이와 같은 입장은, 말하자면 우리의 상급은 “영생” 즉 우리가 받는“구원”일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뜻으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한 대로 받는 상급을 기대하는 것은 잘 못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것과 같은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곳(천국)에서도 차별(discrimination)이 있을 것이 아니냐는 논리이다. 바울의 상급론을 세상의 원리라는 다른 차원에서 조명하고 있는 셈이다.

아마도 필자의 견해로는 그분들이 성경을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에 상급에 대한 온전한 개념을 다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상급에 대한 포괄적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상급”이라는 말 자체를 물리적인 개념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성경의 상급에 대한 개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는 것 같다. 그러나 “구원”이 하나님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라면, “상급”은 하나님의 공의가 동기가 되어 심판으로 내리시는 하나님의 보상이다. 하나님의 공의에 의한 심판으로 선을 행한 자는 상을 선물로 내리시고, 악을 행한 자는 벌을 내리시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부분은 사도요한이 계시로 본 “책들”(계 20:12)과 “다른 책” 곧 “생명책”(계 20:12)에 연관되어 있다. 생명책은 단수(βίβλος)로 되어 있어 그곳에는 오직 구원 얻을 사람들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책에 이름이 없는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구원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책들”은 복수(βιβλία)로 되어 있는데 이는 선악간의 모든 사람들의 행위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에 따라 상벌이 결정된다(마 16:27; 롬 2:6; 딤후 4:14; 계 20:12).

이 부분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심판이다. 성경은 선인이나 악인에 대하여 마지막 날에 심판하셔서 선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사망의 부활)로 나오게 된다고 하셨다(요 5:28). 그러나 이 구절에서 말하는 인간의 행위는 수동적인 행위로 “믿음의 행위”와, 그리고 능동적인 행위로 “불신의 행위”를 의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믿음의 행위로는 생명의 부활로 구원(유업의 상)에 이르지만, 불신의 행위는 멸망으로 영원한 사망(유업에서 탈락하여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인한 “신앙”과 “불신앙”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 심판은 구원과 멸망에 관한 심판이기 때문에 신앙에 관한 심판으로 근본적인 존재론적 심판이지만, 또 다른 “책들”에 기록된 대로 하는 심판은 행한 대로 하시는 심판이기 때문에 행위심판이라고 한다. 이 심판은 인간의 행위에 따른 심판으로 상벌에 관련되어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전자는 심판 혹은 재판(judgement/trial)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후자는 심문, 평가, 계산(to have account, evaluation)등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좀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전자는 생사(영생과 영사)에, 후자는 상벌의 문제에 관한 내용이다. 물론 불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므로 이 생명책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다(요 3:18; 16:11). 이것은 현재적 심판이지만, 주님의 이 선언은 다른 한편으로 종말론적 심판으로 마지막 심판에로 연결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 정통관점과 새 관점의 차이가 여실이 들어난다. 성경의 종말론적 견해에 관하여 정통관점에서는 처음과 나중이 동일하게 정확히 일치한다는 견해인 반면에, 새 관점에서는 처음과 나중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견해이다. 이 처음(알파)과 나중(오메가)의 진리는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변함없는 진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주님)이 처음(알파)과 나중(오메가)이시기 때문이다(계 1:8; 21:6; 22:13; 22:13).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의 선언은 처음과 나중이 달라질 수 없는 것이다. 처음에 “예” 했다가 나중에 “아니라”함이 없기 때문이다(고후 1:17~19). 그런데 새 관점 학파에서는 구조론 적 접근방법을 사용함으로 처음과 나중이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과정철학(process philosophy)에 기초를 둔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의 주장과 같은 것으로, 고생물학과 지질학자이면서 가톨릭교회의 예수회 신부였던 데아르드 드 샤르댕(Theilhard de Chardin)의 진화론적 논리와도 맥을 같이 한다.

그러므로, 존재론적 생사(영생과 영사)의 심판은 이미 의인과 악인의 신앙과 불신앙의 상태에서 결정이 났고(요 16:11), 그 심판의 연속선상에서 종말론적 심판대 앞에서 마지막으로 확정을 받아야 되는데, 그 때에 악인들의 불신앙과 불경건한 행위와 불의에 대한 선고가 최종적으로 내려지게 된다. 여기서 칭의(중생)를 받은 사람은 성화의 과정이나 결과에 관계없이 구원을 받게 되며(십자가상에서 직접 낙원에 들어간 강도와 같이), 단지 생존(성화의 과정)에서 있었던 그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행위심판에 따른 상급이 결정된다. 물론 생명책에 기록된 칭의 받은 사람은 “믿음”에 의해 유업의 상급인 구원(영생)의 상을 받고, “행위”에 따른 보상의 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불신자들은 “불신”에 의해 멸망(영사)의 심판을 받고, 그들의 “행위” 여하에 따라 형벌이 결정된다.

2. 상급에 대한 성경적 개념

“상급”은 성경에 두 가지 개념으로 언급되어 있다. 즉 “유업의 상”(the reward of heritance, 골 3:24)과 “보상의 상”(the rewards of compensation, 단 12:3; 고전 3:8,14)이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이 두 가지 상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자비)에 의한 것이지만, 상을 받는 방편 즉 그 통로는 다르다. 전자(구원/영생)는 “믿음”으로, 후자(칭찬/보상)는 믿음의 “행위”로 받게 된다. 이와 같은 상급의 개념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직접적으로(denotation) 또는 간접적으로(connotation) 수없이 많이 언급되어 있다. 물론 히브리어나 헬라어의 원문에는 상급에 대한 용어나 해설이 다양하게 서술되어 있다. 직설적 용어나, 비유(figure, parable), 은유/암유(metaphor), 직유(simile) 혹은 알레고리(allegory)등과 같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구약적 개념 (OT Concept of Reward)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용어는 “사칼”(sakal)로, 주로 일꾼의 고용 급료(삯, hire), 임금(wages), 상급(reward) 혹은 보상(rewards)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언약에서부터 이미 하나님의 상급에 대한 사상이 나타나 있다. 이 상급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유업의 상”(창 15:1)과 “보상의 상”(창 30:28)을 의미한다. 헬라어 역본인 칠십인 역(LXX)은 “미스도스”(μισθός)로 번역되어 있어(창 15:1) 영역(English version)에서는 주로 “상급”(reward)외에 “보상”(rewards), “노임”(labor), “임금”(wage)등 다양하게 번역되었다. 이러한 사용 용례로 볼 때, 구약에서도 비록 물질적(material, physical)이기는 하지만 “상급”에 대한 개념이 지상에서의 “기업”(유업)과 “보수”의 개념과 함께 천상에서의 영적 상급의 개념으로서의 믿음으로 받는 구원인 “영생”과 신자들의 행함으로 받는 “보상”의 상급을 암시하고 있다.

신약적 개념 (NT Concept of Reward)

신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용어는 “미스도스”(μισθός)와 “아포디도미”(ἀποδιδώμι)로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으나 그 의미는 대동소이하다. 그러므로 “미스도스”와 “아포디도미”는 신약성경에서 교호적으로 사용되었다. 즉 이 두 단어들은 영생의 의미와 보상의 의미로서 서로 교호적으로 사용되었다. 구약에서 육적인 상속의 의미로 사용된 창 15:1의 “사칼”(sakal)이 헬라어 “미스도스”(μισθός)로 번역되어(LXX), 영생의 기업을 예시하고 있는데, 때로는 신약에서 “보상”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마 10:42; 고전 3:8,14; 계 22:12). 그리고 “아포디도미”(ἀποδιδώμι)가 영생의 유업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골 3:24). 이와 같은 용어들이 교호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단어 하나만으로 그 뜻을 구별하기가 어려움으로 문맥과 성경전체의 원리를 신학적으로 정리해서 이해해야 한다.

3. 성경의 상급에 대한 교회사적 서베이

유대교에서는 철저하게 율법(토라)에 기초하여 하나님(여호와)과의 관계를 율법계명을 준수하는 것에 고정시키고 있다. 이로 인하여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과 상급이 결정된다는 공로사상으로 발전하여, 자신들은 오로지 계명(율법)을 준수하는데 집착하게 되어 때로는 예수님의 책망을 듣기도 했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바라보고 믿는 믿음보다는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공의에 부응하며, 이로 인하여 구원과 보상이 결정되는 것으로 믿었다. 물론 새 관점학파(특히 샌더스)는 유대인은 “언약적 율법”으로 지켰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이것은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율법을 지킨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복음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스라엘에 대한 언약의 계속성은 표면적 유대인에 관한 언약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 즉 "남은 자"들에 연관된 언약임을 알아야 한다

초대교회의 상급론이 충분하게 정립되지 못한 채, 중세시대의 가톨릭교회의 공로주의 사상으로 넘어갔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 기초한 스콜라주의의 신앙(faith)과 이성(reason)에서 신의 초자연적인 이해에도 불구하고, 유대교의 율법지상주의는 아니지만 교리에 초점을 맞춘 가톨릭교회의 공로사상을 부추겼다. 결국 공로사상이 교리화 된 것이 가톨릭의 상급론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가톨릭교회에서는 인간의 구원에서부터 인간의 상급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공로사상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종교개혁시대에 들어와서 “오직 믿음”(sola fide),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이 구원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위까지도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개혁정신을 바탕으로, 구원과 상급에 대한 이해에 집중되었다. 물론 개혁자들 중에서도 약간의 이견으로 인간의 행위에 의한 구원과 상급을 논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종교개혁의 주류인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의 사상은 공로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근거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기초한 상급론을 정립했다. 즉 인간의 구원은 물론 인간의 행위에 의존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여, 인간의 행위도 믿음에 의한 행위를 강조했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구원은 물론, 보상의 상급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4. 상급에 대한 성경 원리적 추론과 전제

성경적인 원리로 보면, 구약과 신약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온전한 성경이며, 인간은 영과 육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온전한 사람이며, 영생의 부활체 역시 변화된 영과 육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온전한 부활의 몸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도 마찬가지다. 하늘과 땅(천지)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온전한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마지막 우주 만물의 최종적인 구원으로 회복되는 세계를 “새 하늘”(οὐρανόν καινόν)만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οὐρανόν καινόν και γῆν καινήn)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의 구원도 영적인 구원으로만 이해하면 안 되고 영혼과 육신의 전인적 구원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의 신자들에 관해서도 영적인 개념과 육적인 개념으로 이해해야 온전한 신앙인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영육이 부활한 몸으로 받는 상도 (1) 일한 것이 없이 은혜로 받는 영생으로(물론 이 구원은 상급의 일반적인 개념으로 볼 때에 행위의 대가가 아니므로 맞지 않는 말이지만) 하나님의 일이라는 믿음의 차원에서 볼 때에 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이에 해당하는 “유업의 상”(the reward of inheritance, 골 3:24)과, (2) 이 세상에서 행한 대로 받는 “보상”(rewards, 마 10:41~42)에 대해서 주님과 바울이 수 없이 많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물론 우리의 상급이 우선적으로 “영생”인 것만은 틀림없으나, 바울과 요한이 말한 이 세상에서 행한 대로 받는 상급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물론 성경의 다른 주제들과 마찬가지로, 이 두 가지 상에 대하여 그 내연(connotation)의 의미를 혼용해서 사용할 때도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려운 점도 없지 않다. 예를 들면, 짐승의 표의 원형(archetype)과 표상(type)의 관계와 같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생의 상과 보상의 상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5. 성경의 상급에 대한 조직신학적 이해 (죄관과 구원관)

상벌의 문제를 조직신학적으로 보면, 원죄(peccatum originale)와 자범죄(peccatum actuale)에 관련되어 있다. 조직신학적으로 우리의 구원과 멸망은 원죄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 원죄 해결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단번에 성취되었고, 그 공로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의 죄가 한 번에 완벽하게 해결되었다. 그러므로 이것을 믿어 칭의를 얻은 사람은 더 이상 구원의 문제를 논할 필요가 없다. 이는 중생의 성령으로 인을 처서 우리에게 보증해주신 것이기 때문이다(고후 1:22). 단지 우리가 평생을 두고 반복해서 범하는 자범죄는 이 세상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영원한 은혜로 인하여 베드로와 같이 결국에는 회개에 이르게 되고 이에 대한 보응(징계)은 받으나, 정죄함을 받지 않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대에서 역시 이 죄의 책임을 묻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 대신 불의한 행위와 의로운 행위에 대해서 심판(심문, 평가)하여 그에 대한 상벌이 결정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신학자들은 물론, 개혁주의 조직신학자 루이스 벌코프(Berkohf)도 상급을 “영생”으로 전제 하면서 행위에 따르는 상급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의인들의 선행이 그들의 공로일 수는 없지만, 은혜로운 상급의 척도가 된다고 했다(Systematic Theology, p.737). 최후심판 때, “생명책”(singular)이 펴져있는 것 외에, 행위대로 심판하는 또 다른 “책들”(plural)이 펴져 있다(계 20:12). 그러나 그 상급으로 인한 차별이 아니라, 본질 적으로 영생의 영광이 동일한 것과 같이, 행위로 인한 각자의 상급인 지복(bliss) 즉 “영광”의 빛의 본질은 같지만, 영광의 빛의 정도(the degrees in the bliss of heaven)가 각자의 행위에 따라 다른데(단 12:3; 고후 9:6; 고전 15:41~42), 그렇다고 차별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 개혁신학의 입장이다. 이에 대하여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하여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의 조직신학을 인용해보도록 하겠다.

“The reward of the righteous is described as eternal life, that is not merely an endless life, but life in all its fullness, without any of the imperfections and disturbance of the present, Matt. 25:46; Rom. 2:7. The fullness of this life is enjoyed in communion with God, which is really the essence of eternal life, Rev. 21:3. They will see God in Jesus Christ face to face, will find full satisfaction in Him, will rejoice in Him, and will glorify Him. We should not think of the joys of heaven, however, as exclusively spiritual. There will be something corresponding to the body. There will be recognition and social intercourse on an elevated plane. It is so evident from Scripture that there will be degrees in the bliss of heaven, Dan. 12:3 2Cor. 9:6. Our good works will be the measure of our gracious reward, though they do not merit of it. Notwithstanding this, however, the joy of each individual will be perfect and full.”(Berkohf, Systematic Theology, p.737).

다시 말하자면, 성경적인 상급의 개념은 두 가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첫째로, 우리가 받는 “유업의 상”(골 3:24; 히 11:6; 눅 6:23; 마 5:12; 딤후 4:8; 약 1:12)인 “영생”(eternal life)을 의미함과 동시에, 둘째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행위에 따라서 받는 “보상의 상”(단 12:3; 고전 3:8; 고전 3:12,14; 마 5:46; 마 10:41~42; 눅 6:35; 고전 9:17, 9:18, 9:24~26; 빌 4:1; 살전 2:19; 딤후 2:5; 요이 1:8), 즉 하늘의 기쁨인 지복(reward, that is, the bliss of heaven)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상급 중에 구원에 해당하는 “영생”은 원죄를 해결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원죄를 단번에 해결해주신 그 공로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유업의 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범죄에 대한 보응(징계)과 자신의 선행에 대한 상급을 주신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행한 대로 주시는 “보상”(the rewards according to works)이다.

이 상급들은 모두 “영광”으로 빛나게 된다. 예수님과 바울도 분명히 이 상들(rewards)에 관해서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마 5:46; 6:1~4; 10:41~42; 고전 3:8,14; 고전 9:17~18; 9:24; 계 22:12). 물론 성경은 이 두 가지 상을 구체적으로 구별하지 않고 말하면서, 믿는 자들의 행위의 여하에 따라 그 영광의 빛의 정도가 다른 것으로 표현하기도 했다(단 12:3; 고후 9:6). 그러나 만약에 상급을 “영생”(구원)으로만 한정한다면, 모두가 똑같은 영생, 똑같은 구원에 참여하게 될 터인데,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상을 위하여 쫓아가며 열심을 다하여 일할 필요도 없을 것이며, 상으로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더구나 이 세상에서의 성도들의 헌신과 봉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바울은 이 상을 얻도록 노력하라고 했다(고전 9:24~27; 딤후 4:7,8).

6. 성경의 상급에 대한 성서신학적 이해 (상급에 대한 언약)

성서신학의 핵심적인 주제는 하나님과 첫 아담과의 언약, 그리고 하나님과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와의 새 언약관계이다. 하나님의 언약은 성서신학 적으로 말하자면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으로 요약된다. 이 행위언약(선악과언약)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생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이 행위언약을 위반함으로 죽음을 맛보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영생에 들어가는 문이 닫히게 된 것이다(창 3:24). 그리고 난 후에 다시 인간에게 행위언약에 대한 재시험을 치르게 하셨는데 그 시험문제가 바로 모세의 율법(옛 언약)이다. 결과는 뻔 한 것이었다.

세상에 이 시험에 합격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롬 3:10). 세상에 의인은 없나니 아무도 없으며,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될 육체는 없다는 것이다(롬 3:20). 그렇다면 왜 지키지도 못할 율법의 시험문제를 주셨는가? 이는 인간의 죄로 심히 죄 되게 하여 죄에서 죽게 하시려는 것이다(롬 7:13). 재시험의 결과는 뻔 한 것이었다. 즉 낙제를 면치 못한 것이다. 물론 샌더스(E. P. Sanders)에 의하면 유대주의는 언약의 백성에 근거한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로 "그리스도 안에 있음"(being in Christ)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언약에 의한 구원으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음"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언약의 백성은 복음으로 이해할 때 표면적 유대인의 언약관계가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의 언약관계로 "남은 자"의 사상에서 증명된다(사 10:20~21; 롬 11:5; 9:27). 그러므로 유대교의 구원론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가 아니라 언약의 백성이라는 특권아래 율법(토라)을 지키는 것에 집중되어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아 메시아를 죽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은혜언약(새 언약)을 통하여 영생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이 은혜언약은 하나님과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언약관계를 말한다. 그 언약의 내용이 무엇인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인간이 풀 수 없는 재시험문제인 율법의 문제를 푸시는 조건으로 아버지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영생에 들어가게 하시겠다는 언약으로 이것이 바로 새 언약인 은혜언약이다. 예수께서는 바로 아버지와 맺은 이 언약의 조건 즉 율법을 성취하시겠다는 약속을 십자가상에서 성취하시고 이 은혜언약을 통하여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던 죄의 법에서 해방되어 구원(영생)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언약관계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가 얻는 “유업의 상”이다.

다음으로, 이 은혜의 언약관계에서 중생하여 칭의를 받은 성도들의 행위까지 인정을 받게 되어 소위 약속된 “보상의 상”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상들은 칭의와 성화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면에서 “보상의 상”은 정도의 차이가 있어서 칭의된 사람이 성화의 과정에서 맺은 의의 열매에 비례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화의 과정을 통한 의의 열매가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칭의를 얻은 사람은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의의 열매를 맺어 상급에 참여하게 된다. 만일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했다면, 그 사람의 칭의를 의심해야 할 것이다. 이 상급의 정도는 이 세상에서는 신앙인격의 성숙의 정도를 나타내며, 때에 따라 금생에서의 하나님의 축복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천국에 가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의 빛으로 발하게 된다.

이것이 성경에서 일관성 있게 증거 해주는 상급의 원리이다. 예수께서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하셨다(눅 18:29~30). 바울이 말한 대로, 이 상을 위하여 경건한 생활을 하는 사람은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고 했다(딤전 4:8). 이와 같이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언약과 바울의 증거는 확고부동한 것이다. 사람의 예대로 말하더라도 언약을 정한 후에는 아무나 마음대로 폐할 수 없는 법인데, 하물며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은 언약이 변할 수 있겠는가?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갈 3:15).

7. 성경의 상급에 대한 주경신학적 이해 (고전 3:3~17)

상급에 대한 주경신학적인 접근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 하면, 성경에 상급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수 없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간접적인 언급도 대단히 많고 더 나가서 그림언어(pictorial language)를 통하여 교훈해주고 있는 상급의 원리적인 언급도 수 없이 많다. 한정된 지면상 이 모든 상급에 관련된 성경의 언급들을 모두 다루기는 어렵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언급된 구절을 통하여 두 종류의 상급에 관해서 살펴볼 것이다. 물론 본 구절들에 대한 신학자들의 해석이 다를 수도 있기 때문에 되도록 객관적인 성경본문을 기초로 한 해석을 통하여 상급에 관한 이해를 도우려고 한다. 대표적인 구절이 바로 고전 3:3~17 말씀이다.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본문의 역사적 배경(historical setting)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그 당시 고린도교회의 상황(context)을 이해하는 것이 본문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본래 고린도는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서 동서의 문물이 교차되는 지역으로 복합적인 문화형태를 띠고 있었다. 특히 고린도교회에 영향을 미친 문물 중에는 그리스의 철학과 로마의 정치 그리고 동방의 신비종교를 들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복잡한 문제들(종교, 지식, 은사, 윤리, 풍속 등등)을 해결하기 위해 당시의 다양한 소재들을 이용하여 복음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린도교회에는 이미 바울 파, 아볼로 파, 게바 파, 심지어는 그리스도 파라며 육신을 따라 분당을 짓고 있는 분파들이 생겨나서 교회공동체를 위협하는 문제로 바울이 충고하는 내용이 본문의 내용이다. 문제의 본질은 교회의 리더들이 인본중심으로 가르치고(teaching) 있다는 것이다. 사역자들을 비롯하여 교회의 모든 멤버들은 하나의 지체들에 불과할 뿐,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바울이 말하는 교회공동체의 원리이다. 바울은 심었고(개척사역), 아볼로는 물을 주었을 뿐(목회사역),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신데 어찌하여 분쟁을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교회를 세우려면,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나라 건설사역에 성실히 참여하여 자신들의 공력에 대한 상을 받으라는 뜻이다.

교회공동체는 생명을 주시는(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바울은 교회의 터를 닦은 개척자(church planting founder)이며, 아볼로는 목회사역을 하는 자(watering minister)의 역할을 하는 주의 일꾼이며, 교인들은 밭(목회현장, ministry field)으로 목회사역의 대상일 뿐, 이 모든 것에 원동력이 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 교회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을 농사일(husbandry)과 건축(architecture)하는 것에 비유하여 그림언어(pictorial language)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 본문말씀이다.

3:8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분명히 “구원의 상”(the reward of inheritance)이 아니라 각각 행한 대로(일하는 대로) 받는 “보상의 상”(the rewards for efforts)을 의미한다(고전 3:15). 이 말씀은 분명히 사역에 관한 말씀으로 일차적으로 사역자들(masterbuilders)에 적용되지만, 이차적으로 전 교인들(builders)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다(3:17). 바울의 권면의 대상이 전교인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음 구절에서 증명된다.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라”

여기서 “우리”는 바울과 아볼로와 같은 교회의 사역자들(masterbuilders)이며, “너희”는 고린도 교회공동체(congregation)요 지체들(members)이다. 이 부분에서 사역자들과 멤버들은 하나님의 집에 붙어있는 지체들로서 함께 일하는 공동체의 같은 멤버(교인)들이다.

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여기서 바울은 농사일(husbandry)에서 건축사역(building)으로 발전시킨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 사실상 전자와 동일한 사상을 보여준다. 환경만 바뀌었을 뿐이다. 바울은 터를 닦았고 다른 이(아볼로)와 교인들이 건물을 지어야 하는데,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핵심은 교회공동체를 세우는 일에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지혜롭게 건축하라”는 것이다. 왜냐 하면 반드시 그들의 공력을 시험하여 상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11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하나님의 나라의 기초, 즉 교회의 터는 이미 바울이 닦아 둔 것으로, 이 터는 예수 그리스도시며, 이 기초를 다시 닦는 자는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갈 1:8,9).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터 위에 교회를 건설하는 일이다.

3: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울 교회건설의 재료들을 비유로 말한 것이다. 이 재료들을 보면 두 종류로, 불에 견딜 뿐만 아니라 더욱 빛을 발하는 재료들(금, 은, 보석)과 불에 타서 없어질 재료들(나무, 풀, 짚)로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 중요한 이슈는 (1) 건축의 기초 즉 터는 동일하다는 것과 (2) 건축 재료와 건축방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1) 건축의 터는 그들이 믿는 분인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구원의 기초는 이미 놓은 것이고, (2) 건축 재료는 교훈들(teachings)로 복음의 교훈들인 금, 은, 보석과 인본주의 교훈들(humanistic teachings)인 나무, 풀, 짚을 말하며, 건축 방법은 복음적 방법과 세속적인(분당 짓는) 방법에 의존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씀으로 그 공력을 시험할 것이다.

3:13 “각각 그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여기서 공력은 사역 행위(work) 즉 교회를 세우는 일을 의미하며, 그 연장선상에서 각 개인의 행위를 의미한다. 이 행위의 결과가 마지막 심판 날(그 날)에 불로 나타내게 된다. 이는 구원에 관계된 심판이 아니라 행위에 관계된 심판을 의미한다(계 20:12). 이 부분에서 “각각,” “누구든지,” “너희가” 등등은 사역자를 포함하여 구성멤버 모두를 가리킨다.

이 부분에서 사람에 따라 상급관이 달라진다. 사역자들(아볼로와 교회리더들)의 상으로 제한할 경우에는 본문에서 상으로 교회공동체의 구원만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본문에 대한 시야를 더욱 넓혀서 바울의 생각과 성경 전체의 사상으로 확대시켜 보면 교회의 구성원들이며, 모든 교인들이 공동체를 위한 사역 멤버라는 차원에서 각자의 상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우선 본문을 보면, 이 편지의 대상이 아볼로나 리더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고린도교회 모든 교인들이며, 더욱 확대시키면 오늘날 우리들까지 눈에 들어온다. 그러므로 본문 내용 중 계속해서 언급된 “우리는,” “너희는,” “누구든지,” “각각” “자기의”라는 대명사들은 사역자들뿐만 아니라 교회의 전 교인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 대명사들이다.

더구나 이 문제는 마지막 부분인 3:16~17이 밝히 증명해준다. 이 부문은 공동체인 교회의 성전개념에서 개인성전의 개념으로 발전되어 확대되고 승화되는 장면이다. 즉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며”라는 말씀이 교회공동체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고, 확대된 개념인 “개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사상은 바울이 말한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와 주님께서 자신을 성전(요 2:21)이라고 말씀하신 성경사상과 일치하는 것이다. 성경을 단편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며, 신학적 체계에 의하여 성경의 전체적인 원리에 따라 통전적인 의미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구속의 영역이 어떤 집단, 예를 들어 이스라엘이라는 특수 집단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를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성경말씀을 오해할 수도 있다.

어떤 이들은 상급이 자신의 ”개인구원”(영생)일 뿐이라고 한다. 이 공식에 “상”을 대입시킨다면 본문의 문맥에서 단체인 “교회구원”이 “상”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오직 각자 개인들이 구원(영생)을 얻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인데, 그러므로 성도들이 자신의 의로운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일 뿐, 각자의 행위에 따른 “보상”(rewards)은 없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본문의 문맥으로 보아 상급이란 “교회구원”(교회건설)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주장이 맞는다면, “교회구원”이란 단지 사역자들(아볼로, 교회리더들)의 상급에 국한된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권면하는 대상은 교회리더들 뿐만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라는 점에서 일면 맞기도 하고, 다른 면에서는 틀린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본문의 문맥을 끝까지 이어보면, 사역자들을 포함하여 교인 모두가 교회공동체와 신령한 성전인 각각 자신을 세워나가는 일의 공력에 대한 상을 의미한다. 이것은 믿음위에 “자기를 건축 한다”는 성경말씀과 일치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유 1:6). 이는 3:16~17에서 증명된다.

3: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이것은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위에 귀한 재료들(금, 은, 보석)을 가지고 올바르게 하나님의 나라(교회)를 세우면 상을 받는다는 뜻이다. 여기의 상은 일각에서 말하는 대로 “구원”(영생)의 상(유업의 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한 대로 갚아주는 “보상의 상”을 의미한다(계22:12). 왜냐 하면, 구원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터로 세웠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교인들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의 상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의 행위에 따라 보상하는 상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다음 구절(3:15)에 명시되어 있다.

3: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여기서 “누구든지”는 사역자들을 비롯하여 그리스도를 기초로 자신(신령성전)을 건축하는 모든 신자들을 의미한다. 이 문제 역시 다음 구절(3:16)에 확실하게 명시되어 있다. 모든 신자들이 행한 일(공력, work)은 불에 의해 시험할 것으로, 공력이 불타서 시험에 낙제하면 해를 받게 된다. 여기의 “해를 받는다.”는 것은 영원한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상을 잃는다는 뜻이다. 이는 바로 다음에 접속사(but)로 이어지는 문장에서 증명된다. 즉 “자기는 구원을 얻되”라는 말씀이다. 화급하고 결정적인 시점(그날)에서 구사일생으로 멸망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즉 처음에 얻은 “구원”은 유지된다는 의미이다.

뿐만 아니라 혹자는 사역자(바울)의 목표가 고린도교회의 “교회구원”이기 때문에 “교회구원”이 불로 인한 시험으로 남게 되면 그것이 사역자들의 상이 되고, 불에 타서 교회구원이 없어지게 되면 해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교회의 궁극적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 유익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의 문제이다. 그 이유는 교회의 기초가 아니라 교회건설을 위하여 잘 못된 재료(교훈)와 인위적인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이지 사역자들로 인해 교회가 완전히 멸망되었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사역자들이 해를 받으나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에 비추어보면 확실하다.

궁극적으로 교회를 멸망시켰다면 당연히 그 사역자들도 멸망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을 받았다. 그러므로 교회의 구원이나 멸망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 즉 교회가 잘되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혹자는 교회건축을 위한 금, 은, 보석이나 혹은 짚, 풀, 나무 등의 재료들이 곧 “교회교인들”이라며, 금, 은, 보석의 재료는 불에 타지 않는, 말하자면 교회에서 없어지지 않는 무리들이고, 나무, 풀, 짚과 같은 재료들은 곧 교회에서 없어질 무리들이라고 주장하나 이것은 전혀 잘 못된 비유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의미하는 재료들은 인본주의적 교훈과 방법을 말하는 것이지 교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의 초점은 “교회구원”이 아니라 사역자들의 “공력”에 맞추어져 있다. 교회가 잘되는 것은 사역자들의 “목표”로서 그들의 사역(공력)을 통하여 교회가 잘되면 그들에게 상이 된다는 것이다. 즉 바울의 생각은 교회(교인들)가 잘되는 것이 자신의 기쁨이요 영광의 면류관이라고도 했는데, 이것을 “상(급)”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한 초점에서 빗나갔기 때문에 상급에 대한 이해도 잘 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본문에서는 교회건설을 위한 공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다음에 나오는 신령한 성전인 자신을 믿음위에 건축하는데 있어서도 인본주의적인 교훈과 방법을 사용해서 해를 받는 것이지, 근본적으로 성령의 전인 “자신”이 구원에서 탈락되어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다.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 말씀은 얼핏 보기에는 따로 떨어진 단락으로 보기 쉬우나 사실은 앞의 내용과 연관된 말씀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구속사역이 단체적인 역사에서 개인적인 역사, 그리고 구약의 유형적인 역사에서 신약의 신령한 역사로 진행되는 성경원리를 보여주는 대목 중의 하나이다. 이것을 다시 말하자면, 보이는 교회(visible church)에서 보이지 않는 교회 (invisible church), 물리적 성전(physical temple)에서 신령한 성전(spiritual temple)으로 발전, 승화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자신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말씀하셨고(요 2:21), 바울도 우리의 몸을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라고 했다(3:16).

3: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니라.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죽이거나(레 15:3)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추방시켰다(민 19:20).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신 성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거룩하신 성령이 계시는 성전인 우리의 몸을 더럽히면 하나님께서 멸하시겠다고 했다. 이 구절에서 “더럽히다”(defile, ϕθείρω, ϕθείρει)와 “멸하다”(destroy, ϕθείρω, ϕθερεῖ)는 동일한 동사(ϕθείρω)가 사용되었다. 이 말은 도덕적 타락으로 도덕적인 해를 입힌다는 뜻으로 바울이 좀 더 강세 형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고린도교회의 분당의 범죄와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범죄행위들이 심각함을 보여준다(고전 5:1, 5). 그러므로 그들에게 분당의 죄를 물어 하나님께서 멸하시고(destroy, ruin, 고전 5:5), 출교(excommunication)를 시킬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구절의 말씀들(더럽히다/멸하시다)이 도덕적인 범죄행위를 넘어 영적으로 궁극적인 범죄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가 분분하다. 혹자는 궁극적인 범죄로 영원한 멸망에 해당한다고 하나, 개혁주의 계통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그들의 사역이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출발한 것으로 구원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과 도덕성을 비롯하여 심각한 타격을 받는 것으로 이해한다.

아마도 본문의 문맥으로 보아 후자의 견해가 타당할 것이다. 본래 “더럽히다”와 “멸하다”의 헬라어가 동일하게 “프데이로”(ϕθείρω)로 본래적 의미로는 ‘주름지다’, 또는 ‘시들다’, 즉 ‘상하게 되다’(어떤 과정에 의해서), 혹은(일반적으로) ‘멸하다’(특히 상징적으로 도덕적인 영향에 의해서 ‘타락하다’), 또는 “해하다”(고전 3:15; 고후 7:2)의 뜻이다. 또 이 단어의 뜻은 ‘곤두박질치다’(to run headlong), 그리고 ‘파선으로 고통을 당하다’(to have suffered loss from shipwreck)의 뜻이며, 이 단어가 여자의 경우에는 ‘불임으로 몹시 슬퍼하다’(to pine away in barrenness)는 뜻으로 사용된다(OGL).

이제까지 살펴본 결과, 성경적인 상급은 (1) “유업의 상”(the reward of inheritance)과 (2) 행위에 따른 “보상”(the rewards according to works)으로 압축된다. “유업의 상”은 다른 표현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받는 유업으로 “구원”(영생)을 의미하며, “보상”은 구원 받은 우리가 주의 종으로서 행한 대로 받는 행위에 따른 상을 의미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 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세상 같으면, 훈장이라든지, 금메달이라든지, 트로피라든지, 포상금이라든지, 표창장이라든지 등등 여러 가지 물리적인 표시가 있을 것이지만 천국에는 그러한 물질적인 상이 있을 리가 없을 터인데, 그러면 하늘나라의 상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비적인 신자들은 천국에서 자기가 받을 상이 아름다운 큰 집이라고 하며, 천국에 가보니까 그들의 신앙생활의 공력에 따라 그 집의 크기가 다르다는 등의 표현을 하기도 하지만, 바울은 셋째 하늘에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듣고 사람이 감히 이르지 못할 말을 들었다며 간증하고 있을 뿐, 물리적인 것으로 말하지는 않았다(고후 12:4). 사실, 천국은 각 사람들이 각각 주택을 가지고 사는 이 세상의 개념이 아니라, 구태여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성전을 중심으로 장소를 초월하여 사는 곳으로 상이란 자유와 영광에 빛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성경에는 이 세상의 개념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상급을 “면류관”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 면류관은 상급 자체가 아니라 승리로 인한 상에 대한 상징적인 대명사로 그 종류가 많음을 시사하고 있다. 구약에서는 물리적인 모습으로 등장하여, 왕과 제사장, 승리자 등등에게 씌워주는 관(면류관)으로 표현하고 있으나(대상 2:2; 레 16:3,4; 삼하 1:10), 신약에 와서는 신령한 의미로 사용되어, 불후의 면류관(고전 9:25), 전도의 면류관(빌 4:1; 살전 2:19), 승리의 면류관(딤후 2:5), 의의 면류관(딤후 4:8), 생명의 면류관(약 1:12),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자랑의 면류관(살전 2:19) 등등으로 여러가지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성경에 면류관으로 표현하고 있는 상급을 요약하자면, 역시 “생명의 면류관” 즉 구원(영생)에 해당하는 “유업의 상”과, “승리의 면류관” 즉 행위를 따라 받는 상에 해당하는 “보상의 상”등 두 가지로 압축된다. 위에 언급한 면류관들도 역시 이 두 종류의 면류관으로 압축된다.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불후의 면류관과 같은 것들은 “유업의 상”으로, 그리고 승리의 면류관, 전도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자랑의 면류관 등은 행위에 따라 주어지는 “보상의 상”으로 분류될 수 있다. 전도행위의 부분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역의 대상인 교인들”이 자신의 상이요 면류관이라고 했고, 자신이 사역할 때에 자신이 양보하고 희생함으로써 자기의 권을 다 쓰지 않은 것을 자신의 상이라고도 표현했다(살전 2:19,20; 빌 4:1; 고전 9:18).

8. 상급에 대한 성경적 등급과 성격

전술한 바와 같이 성경에는 상(reward)에 관해서 두 가지 종류로 표현하고 있다. 말하자면, 은혜의 믿음으로 값없이 받는 “유업의 상”(the reward of heritance)과 행함으로 받는 “보상의 상”(rewards according to works)으로 표현하고 있다(마 19:29). 물론 이 두 상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으로 자랑할 것이 없다(눅 17:10). 이것은 아날로그 방식으로 이해한 것일 뿐, 구체적으로 꼭 집어서 설명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난제에 속한 말씀이다.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하자면, 구원의 본질에 있어서 모든 사람이 동일하지만, 그들이 받는 영광은 이 세상에서 연달한 신앙인격 즉 성화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이다.

다만 비유로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별들의 빛은 그 본질에 있어서 모든 별들이 동일하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의 구원은 누구에게나 전혀 차이가 없이 동일하다. 그러나 그 빛의 밝기의 정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마치 용량이 큰 100W의 전구가 용량이 작은 10W의 전구보다, 그리고 태양의 밝기가 달의 밝기보다 더욱 밝은 것과 같다. 작은 별에서부터 가장 큰 별에 이르기까지 구별되지만, 별들의 밝기(영광)도 그 빛의 본질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그 빛의 밝기(영광)의 정도가 다른 것 모양으로, 태양으로 비유된 주님(말 4:1)의 빛을 받은, 인간의 여인이 낳은 자 중에서 가장 큰 자로서, 달로 비유될 수 있는(주님께서는 등불로 비유하셨지만, 요 5:35) 세례요한으로부터 여러 별들(선지자들에 대한 비유)의 빛의 밝기(영광)에는 차이가 있는 것과 같이(고전 15:41), 주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영광의 정도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는 각자의 성화의 과정을 통한 수용 용량에 따라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정도가 다르다는 뜻이다.

바울은 부활의 영광을 말하면서 이 영광은 주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얻은 것으로 모든 사람들의 영광이 동일하지만(equality),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의 영광도 다르며 달의 영광도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고전 15:41)라고 하여 그 영광의 차이를 말하고 있다. 화란의 주경신학자 그로솨이데(F. W. Grosheide)도 역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Among the celestial bodies themselves also there is a difference of glory. Not only between the sun, the moon and the stars, but also between the various stars. This goes to prove that though there may be equality between the one body and the other, yet there is a great variety because of a difference in quality(not nature) and in glory.”(천체들 중 그것들 자체에 또한 영광의 차이가 있다. 해와 달과 별들 사이의 차이뿐만 아니라 또한 여러 별들 사이에도 영광의 차이가 있다. 이것은 그들 사이에 동질성도 있지만, 그러나 각각의 우수성과 영광에 있어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다양성이 있음을 증명해준다.)

성경적으로 보면,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구별된 상대적 피조물이라 다양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피조물이 타락하기 전에는 에덴동산에서와 같이 오로지 하나님의 선(absolute good)의 품안에 있었기 때문에(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어떤 갈등이나 불평이나 시기와 질투와 같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타락함과 동시에 선악이 분리되고 영육이 분리되고 생사가 분리되는 불행을 당하게 된 것이다. 천사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처음 창조 시에는 죽음과 같은 불행이 없었으나 한 천사장의 타락으로 인하여 그들 세계에 죽음의 그림자가 깃들이므로 하나님께서 그 천사들을 좇아냄으로 천국의 평화를 유지하신 것이다. 타락하기 전에는 전혀 차별이 없는 평안한 세계였다. 그러나 타락하기 전에도 천사들 사이에 엄연히 구별과 차등적 직책이 있어서 각 분야에서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며 각자의 정도에 따라 영광의 빛을 발하지만, 그 모든 영광을 오로지 하나님께로 집중시키는 세계다(사 6:3; 계 4:8,9).

천국에도 차별이 있을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될 것이나, 천국의 그림자(agency)라고 할 수 있는, 불완전하지만 교회(church)나 가정(home)에서도 엄연한 구별이 있으면서 그 구별에 따라 존경의 대우를 받는다고 해서 불공평하다거나 차별을 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더 큰 존경을 받고, 아들이 올림픽에 나가서 다른 형제들이 받지 못한 승리의 금메달을 타는 영광을 받았다고 해서 시기하거나 질투할 부모나 형제들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가문의 영광이라며 영광을 받은 부모나 형제자매에게 더욱 더 축하해주며 같이 기뻐하고 그 영광에 함께 참여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일 것이다. 영광을 받는 사람도 자만하지 않고, 오히려 부모나 형제들에게 금메달을 목에 걸어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 교회와 가족이라면, 모든 것이 완전하고 충만한 천국에서야 더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원리는 이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 인간이 큰 자나 작은 자를 막론하고 본질적으로는 모두가 차별 없이 동일하지만, 사람들 간에 인격과 능력에 따라 구별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이다(마 5:19). 사람에 따라 인격을 도야해서 훌륭하게 된 사람은 자신이 훌륭하다고 자처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만큼 그 훌륭한 인격에 대하여 존경을 받게 되어 있으며, 이에 대하여 차별의식을 갖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노력하여 습득한 능력에 따라 그의 능력을 행위로 나타난 결과(예: 승리)에 대하여 더 영광을 받게 되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인정을 받고 축하를 받게 될 것이다. 그만큼 그 자신에서 발하는 영광의 빛에는 차등이 있다는 뜻이다. 이는 상급에는 계급적인 차별은 있을 수 없으나 인격과 능력에 의한 영광의 빛에는 차등이 있다는 뜻이다.

천국에서 영광의 상급 때문에 불공평한 처우나 차별을 받을 이유가 없는 근본적인 이유 중에 하나는, 각자가 받은 상급의 영광을 이웃들과 나누는 것을 넘어서 근본적으로 오로지 한 분이신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것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들 중에 상급을 받으면서도 이 무익한 종이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나(눅 17:10), 구원받은 사람들의 대표가 되는 24장로들이 자기들이 받은 영광의 면류관을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벗어 던지며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0,11)라고 외치면서, 오로지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린 것을 보면, 천국에는 모두가 각자의 받은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로 집중하여 돌리기 때문에 절대자 하나님 안에서 절대평안을 누리는 세계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영원한 평안을 의미한다.

다음으로 천국에서 영광의 상급 때문에 불공평한 처우나 차별을 받을 이유가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천국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상급을 얻는 근본적인 근거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공로라는 철저한 사상과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들과 끈끈하게 용접된 하나의 신령한 공동체이기 때문에 시기나 질투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차별이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차별이란 사랑이 결핍될 때에 튀어나오는 성토의 심리적 현상으로서 사랑이 충만할 때에는 상호간에 일체감으로 서로 칭찬하며 격려하며 존중하며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주님께서 세례요한을 여인에게서 난자들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셨고(눅 7:28; 달과 같이), 그 빛에 있어서 가장 큰 빛인 태양으로 비유된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말 4:2). 예수 그리스도는 빛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신 원초적인 빛(요 1:9; 요일 1:5)이요 세례요한은 빛의 반사체로 율법과 선지자의 마침이 되기 때문에 이 세상 여인에게서 난자들 중에 큰 자라고 했다(눅 7:28). 이 중에서 예수님의 빛을 받은 우리 모두가 동일한 구원에 참여하게 되는 데, 이와 같이 본질적인 면에서 모두가 똑같은 영생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쌓은 공력에 따라 그에 대한 상이 다른 것이다. 이 상에 참여하는 자는 그 만큼 주님의 칭찬과, 더욱 큰 기쁨(bliss)을 얻을 것이며, 그 공력이 시험(test to prove)에 의하여 불타버리면 그들의 상은 없어질 것이다(고전 3:14,15). 이 공력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신자들이 칭의의 연속선상에서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의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한 행위의 노력을 의미한다.

그러면 천국에서도 이와 같은 상급의 차별이 있겠는가? 그러나 인간의 언어로만 이해하려고 할 때에, 이와 같은 질문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보면,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다. 또 이와 같이 자신이 하나님께 상을 받았다고 해서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은 무익한 종이라고 비하하며(눅 17:10) 심지어 천국에서 자기가 받은 영광의 면류관을 주 앞에 벗어 던지면서 모든 영광을 주 앞에 돌린 것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상 받은 사람이라고 해서 자랑할 것 없고, 상을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해서 위축되거나 시기가 나는 곳이 아니라는 뜻이다. 상을 받은 사람은 더욱 교만하지 않고 그 영광의 기쁨을 이웃과 더불어 나누고, 상을 받지 못한 사람은 겸손한 마음으로 상을 받은 사람들을 축하하며, 가장 중요한 것은 모두가 하나님께로 영광을 돌려드린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천국에서는 이러한 일로 시기 질투나 오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이다.

만일에 천국이 완전하므로 모두가 모든 면에서 동일하다고 하여 이러한 상에 대한 유무나 등급이 없다면, 여기에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 마디로 천국에는 모두가 동일하기 때문에 “개성”(individuality) 마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천국이 절대성의 세계라고 해서 그곳에 거하는 피조물인 인간에게까지 절대적 존재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절대자는 오직 조물주 되시는 하나님뿐이시다. 피조물은 누구나 상대적 존재로, 영생에 들어간다는 말은 단지 하나님의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지, 자신이 홀로 영생의 존재 자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절대자 조물주와 상대자 피조물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이라고 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구획선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함으로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일 뿐, 존재론적 동일성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피조의 세계인 천사들 중에도 각각 직분이 있고, 등급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사들은 자기를 올려 세우지 않고 모두가 각기 가지고 있는 자랑과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드리기 때문에 천국이요(사 6:2~4), 그러므로 천국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평화로운 세계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자신을 차별화하려던 한 천사장이 반역하는 범죄로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난 것이 아닌가? 동료들과의 차별의식에서 하나님께 반역을 했기 때문에, 천국에 있을 자격을 박탈당하고 흑암의 세계(지옥)로 쫓겨난 것이다(유 1:6; 벧후 2:4). 결론부터 말하자면, 천국은 차별이 없는 곳이지 구별이 없는 곳은 아니라는 뜻이다.

9. 상벌의 차등에 대한 성경적 증거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로 인간을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은혜를 베풀어서 인간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으로 인간의 상벌이 결정된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행위와는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행위로도 칭의(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성경구절들 중에 야고보의 논증(약 2:14~26)과 예수님의 양과 염소의 비유(마 25:1~16)를 들고 있다. 그러나 이 두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선택과 믿음을 전제로 한 행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행함으로 참 믿음을 증명하는 귀납법형식으로 이 두 경우가 모두 믿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이것을 아날로그 방식의 논리적 순서로 이어보면, 행함이 믿음을 생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행함을 유발시키는 것으로 그 행함이 참 믿음을 증명해주는 형식이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 2:18).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것과 같이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 같이 믿음의 행위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신자의 범죄들은 용서받은 죄들로서 심판대 앞에서 밝
작성일:2016-11-20 18:14:53 107.184.13.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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