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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 교수로 인해 세 번 놀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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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콩달콩
등록일
2016-12-13 11:14:12
조회수
1235

2016년 미래교회포럼에서 그의 강의를 처음 들었다. 본문을 근거로 전개되는 그의 강의에 담긴 힘은 그의 명성이 결코 헛되지 않다고 여기기에 충분하였다. 책이나 온라인상의 글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하였던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첫 놀라움이다.



그는 강의 말미에 성도의 견인과 은혜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것이 다 성경적이라고 하였다. 성도의 견인은 은혜에서 탈락할 수 없다는 말인데, 둘이 동시에 성경적이라고 하다니. 두 번째 놀라움이다. 최덕성 교수를 주축으로 한 칼빈주의자들의 격렬한 반발로 인해 타협점을 찾은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유보적 칭의론이나 은혜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주장이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실제적으로는 그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교리에서 벗어난 것이지만 말이다.



그와 메일을 주고받았는데, 그러한 생각은 이미 자신이 저술한 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최덕성 교수의 주장은 자신의 책도 읽지 않고 하는 것이란다. 이전부터 그렇게 생각하였고 그것을 밝혔는데도 아무런 문제 제기가 없었다는 말이다. 둘이 동시적이라는 말은 성경이 내용적으로 모순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의 주위에 그것을 말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나 누군가가 말해주었는데 그가 그것을 수용하지 않은 것이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전자라면 그의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고 후자라면 그가 겸손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느 경우이든지 안타까운 상황이다. 세 번째 놀라움이다.



그가 강의 중에 오늘날 신자의 삶의 원리로 이중 사랑 곧 하나님 사랑, 내 몸같이 이웃 사랑을 제시하였다. 그것들은 율법의 대강령이다. 오늘날의 신자에게 율법은 삶의 원리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시고 그렇게 완전하게 하신 율법을 삶의 원리로 주셨기 때문이다. 율법의 대강령도 완전하게 되었다. 이웃 사랑은 “내 몸같이”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요 13:34)로 바뀌었다. 둘은 질적으로 다르다. 하나님 사랑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신 것과 같이”가 추가되었다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를 알려주고자 하여 글을 전달하였으나 읽을 의사가 전혀 없다. 겸손과는 거리가 먼 타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성경의 어떤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에 자부심이 너무 강하여서 그런 것 같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율법이 없는 자가 아니라고 했다(고전 9:21).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율법을 폐하셨다고 했다(엡 2:14). 그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그 당대의 이방인 신자들에게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을 행위라는 표현으로 강력하게 정죄하였다. 둘은 문자적으로 상반되는데, 모두 진리이다. 기록 시점에서의 특수성 때문에 가능하다. 해석이다. 그 해석이 없으면 율법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모순이 된다. 오늘날 율법주의자니 율법폐기론자니 하는 논쟁은 그 연장선상이다. 각자가 어느 한 면을 취한 결과인 것이다. 김세윤 교수는 그냥 둘 다 취하고서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생각하며 말한다고 얘기한다. 문자주의이다. 그의 명성과 실력을 생각할 때에 안타깝기 그지없다. 학문에 있어서 조금만 겸손하게 자신의 관점에 대한 어떤 비판을 듣는다면 더 온전해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성경은 구원과 관련하여 “구원 얻었다, 구원 얻는다, 구원 얻을 것이다”라는 삼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첫 구원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이 하나님의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아 그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구원은 이 땅에서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를 나누는 것을 뜻한다. 세 번째 구원은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이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딤후 4:18) 곧 영원한 구원(히 5:9)을 의미한다. 첫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다. 이 믿음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이다(요 1:12). 두 번째와 세 번째 구원도 믿음으로 가능하다. 이 믿음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가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의지하는 것이다. 이는 그분께 순종하는 것과 직결된다. 그래서 두 번째와 세 번째 구원은 순종으로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다고 말씀하는 이유이다(히 5:9). 순종은 육체의 욕심을 거스르는 성령의 역사를 따르는 것이다. 이는 은혜인데, 이 은혜는 헛되게 할 수 있다(고후 6:1). 곧 육체의 욕심으로 성령의 역사를 거스르는 것이다(갈 5:17). 불순종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첫 번째에 의해 자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첫 번째의 은택을 입었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의지하지 않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회개하여야 한다. 회개하면 회복이 이루어진다. 미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시기 때문이다(요일 1:9) 그런데 회개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 수도 있다. 그 결국은 썩어질 것 곧 영원한 멸망이다(갈 6:8). 주 예수님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마 25:12),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겨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것(마 25:30), 주 예수님을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는 것(마 25:41)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원을 설명하는 다양한 그림 언어들이 성경에 있다. 영생, 의, 거룩, 영화이다. 그 언어들은 자연히 나타내고자 하는 구원의 표현 방식을 그대로 담고 있다. 영생 얻었다, 영생 얻는다, 영생 얻을 것이다. 의롭다함을 받았다, 의롭다함을 받는다, 의롭다함을 받을 것이다. 거룩하여졌다, 거룩하다, 거룩해질 것이다. 영화롭게 되었다, 영화롭다, 영화롭게 될 것이다. 각각의 처음은 구원에 있어서 처음과 같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구원에 있어서 두 번째, 세 번째와 같다.



지금까지의 진술이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부분이 있는가?



칭의에 있어서 첫 번째에 의해 두 번째와 세 번째가 결정되고 불변이라는 전통적 칭의론은 성경의 가르침을 벗어난 것이다. 영화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전통적 영화론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왜 그것을 그렇게도 고수하려고 하는지...



성경대로 성도들에게 전해져야 한다. 성경대로 전해질 때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택에 대한 감사와 감격과 자신의 인간적 욕심대로 살면 탈락하게 되는 것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 함께 작용하게 된다.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바울 사도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고전 15:10)라면서 동시에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후에 자신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한다(고전 9:27)고 한 것과 같다.



성도의 견인론은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그 신학자들은 바울 사도의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한다는 고백이 상급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에 대한 얘기라고 주장한다. 차등상급론인데, 천박하기 그지없다. 성경에서 상급은 영원한 구원에 대한 그림언어이고 그 어떤 차등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고 바르게 받음으로 곧 순종으로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됨에 대한 표현 양식인 것이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빌 3;14)고 할 때에 그 상이란 앞 절에서 얘기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것(빌 3:10)이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것이 바로 영원한 구원이다.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포도원에서 끝까지 일한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이 주어지는 것(마 20:9)과 같이 아무 차등이 없다. 그들의 주장을 따라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영원한 구원은 불변이고 상급을 못 받는 것일 뿐인데 그것으로 인해 두려워할 필요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김세윤 교수로 인해 세 번 놀라면서 성경의 진술에 대해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게 된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의 연구와 그 결과들과 성경의 가르침이 바르게 밝혀지는 부분에 대해 존경한다. 동시에 그에게 나타나고 있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인지되고 수용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자신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교리를 따라 성도의 견인론을 주창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성경을 잘못 해석한 결과물을 붙들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며 전하고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하나님의 판단이 어떠할 지를 심각하게 제고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가르침이 좋다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신자들도 진지하게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되기를 바란다. 말씀사역자이든지 아니든지 지금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며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것을 위하여 달려가는 것이다. 그 삶이 온전해지도록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여야 할 것이다(히 10:24).



 



추신, 성경의 가르침을 밝혔다고 제명된 저를 회복시키는 것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고신의 목사님들은 이에 대해 성령의 음성을 듣고 따르기를 바랍니다. 10년이 다 되어가니 개인적으로 지칩니다. 함께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삶을 사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작성일:2016-12-13 11:14:12 14.43.77.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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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jj5016 2016-12-14 09:09:45
성도의 견인론에서 제시되는 근거 성구는 두 종류이다. 효력 있는 부르심에 관한 성구(요 6:39, 엡 2:8~9, 딛 3:5~5 등)이든지 아니면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에 대한 것인데, 주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내포되어 있는 성구(롬 8:38~39, 고전 1:9 등)이다. 첫 번째에 관한 성구를 견인에 가져오는 것은 잘못이다. 믿음이 내포된 성구는 옳지만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경우를 배제하고 얘기되기에 온전하지 못하다. 믿음으로 살지 않는 경우에 대한 기술이 바로 은혜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이는 성구에 대해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해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성도의 견인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말하게 된다.

2016 미래교회 포럼에 참여한 이들에게서 벌써 김세윤 교수의 가르침을 따라 성도의 견인론과 은혜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것이 모두 성경의 가르침이라며 균형을 말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한 사람의 권위자가 하는 말이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이는 더 큰 책임이 뒤따르는 것이다. 야고보서에서 많이 선생되지 말라(약 3:1)고 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 둘은 다 취하고 균형을 가져야 할 사안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사안이다. 하나는 옳고 다른 하나는 잘못된 것이다.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면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잘못된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