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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를 통곡하게 하는 황 목사

닉네임
알콩달콩
등록일
2017-01-15 21:23:16
조회수
903



그가 의도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행위구원론자라고 정죄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의 바울 사도의 가르침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그곳에서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진술하였다. 이신칭의이다.



만약 여기에서 행위가 신자의 모든 행함을 가리킨다면 그의 주장은 성립된다.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과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병행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자신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과 정반대의 주장을 한 것이 된다. 예수님의 권위와 바울 사도의 권위를 비교할 때에 누가 더 높은가? 예수님이다. 그는 자신을 사도로 세우시고 교회에 파송하신 주 예수님의 뜻을 거스른 사람이 될 것이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자연스럽게 읽으면 그곳에서 얘기되는 행위가 이방인 신자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신자가 되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어떤 유대인 신자들의 가르침을 따라 율법 준수를 받아들이고 따랐던 것이다.



여기엔 신자들의 삶과 의롭게 함을 얻는 것이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먼저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하였을 때에 의롭다 함을 얻었다(롬 3:22). 영접함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 예수님께서 죄 자체에 대한 대가를 완전히 지불하셨기에 그분과의 인격적인 연합으로 인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 차별이 없다. 그 시점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법정적 칭의이다.



그것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끝인가? 그렇지 않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들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겔 18:24). 구약 성경엔 그 시점의 언약 백성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불의하다는 선언이 많다.



신약은 다른가?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은 불변하지 않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렇지 않다. 로마서를 생각해 보자. 바울 사도는 로마교회에게 스스로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라고 했다. 세대를 본받지 말고. 신자가 스스로를 산 제물로 드리지 않으면 그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는가? 세대를 본받아 세대가 추구하는 것들을 추구하며 살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는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그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당사자들이 인지하든지 못하든지 간에. 당연히 하나님은 그러한 신자를 불의하다고 하신다. 겔 18:24과 같다.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일 뿐이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이방인 신자들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는 방편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지 않고 현재적으로 그들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가르쳤다. 그분은 예수님에 의해 완전하게 된 율법인 생명의 성령의 (율)법을 이방인 신자들의 삶의 원리로 삼도록 하셨다. 로마교회는 그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한다. 믿음이다. 의지함인 믿음으로 이방인 신자들은 삶에서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 관계적 칭의이다.



로마서 12장 이후에 ‘그러므로’로 시작되는 내용들이 생명의 성령의 (율)법의 내용이다. 하나님을 현재적으로 의지한다면 주어진 삶의 원리를 받아들이고 따를 것이다. 그러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 또한 관계적 칭의이다. 반면에 하나님을 현재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면 그 원리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받아들였더라도 따르진 않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불의하다고 판정하신다. 이 판정의 원리는 앞에 언급한 겔 18:24과 같다.



바울 사도는 신자의 모든 행함을 행위라는 말에 담아 그것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자인 루터나 칼뱅 이후로 신학자들이 그렇게 읽었는데, 잘못된 것이다. 그것을 근거로 선행구원을 주장하면 행위구원론자라고 당당하게 정죄하는 것은 바울 사도가 하늘에서 통곡을 하게 하는 것이다.



선행구원론과 이신칭의론은 사실 상 내용적으로 같은 것이다. 선행구원론의 선 곧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산상수훈에서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새 언약 백성들의 삶의 원리이다. 이신칭의론의 현재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인 믿음은 그분이 제시하시는 삶의 원리를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이신칭의를 바르게 읽으면 법정적 칭의만 아니라 관계적 칭의를 함께 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법정적 칭의만도 아니고 관계적 칭의만도 아니다. 둘 다다. 바울 사도는 법정적 칭의에 토대를 두고서 관계적 칭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렇게 나아가는 것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인 믿음에서 그분을 현재적으로 주님으로 의지하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것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면 이신칭의를 앞세워 선행구원을 말씀하신 예수님을 행위구원론자라고 정죄하게 된다. 바울 사도가 통곡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빠지는 것이다. 



최소한 이런 삶에서는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작성일:2017-01-15 21:23:16 223.62.7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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