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라고 칭하는 것은 대칭적 위치에서 보는 착시일 뿐...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요즘 유튜브와 페이스북에서 기독교 보수 청년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사회적 이슈에 대해 침묵하며 세속 정치에 무관심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는 등식은 교회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좋은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보수적인 기독교 청년들을 향해 차가운 비수를 날리는 좌익 언론들이 있다. 이들은 기독청년들이 정치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분명한 자기의 의견을 표출하는 것에 대해 심기가 불편한 내색이다. 특히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 ‘국대떡볶이’ 대표 김상현 씨와 이정훈 교수의 행보를 향해서 ‘극우’라는 프레임으로 지속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의 윤리로 기업을 운영하는 책임이 있는 김상현 대표, 한국교회에 기독교 보수주의가 무엇인지 일깨우고 국제적 감각으로 광폭 활동을 하는 이정훈 교수. 이들은 약진하고 있는 기독교 보수 청년들의 리더들이기에 이들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는 것 같다. 이런 김상현 대표, 그리고 이정훈 교수를 ‘극우’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데에는 객관적이라거나 논리적인 근거는 찾아보기 어렵다. 단지 좌익 진영에서 볼 때, 불편한 진실을 폭로하고 비판을 하면 극우친일로 몰아붙이는 전형적인 프레임 논리의 반복으로 보일 뿐이다.

반대로 그들은 우익 진영을 향해 물리적 폭력과 악의적인 거짓 루머를 확산시키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관대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성경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신 5:32)고 가르치신다는 말씀을 인용하며 자기들의 논리를 합리화 한다. 이들의 논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좌와 우를 다 아우르시는 포스트모더니즘적 하나님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명령을 더하거나 감하지 말고 온전히 지키라는 의도로 기록된 것이다.

 
최근 조국 장관 임명 강행과 현 정부의 친북 정책 등에 대한 정치적 의견을 피력하다 반대파의 공격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국대떡볶이’ 대표 김상현 씨. 김상현 대표는 크리스천 청년 사업가로 국대떡볶이, 지구당 같은 기업의 CEO이다. 김상현 대표를 반대하는 측은 sns 상에서 국대떡볶이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는 데 표현의 자유가 있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냐?는 의견도 있다. 한편 김상현 대표 옹호 측은 국대떡볶이 애용? 운동을 벌이고 있다. - 편집부

이제 우리는 좌익 성향의 언론이 기독교 청년들의 정치적 보수화에 대해 자비 없는 공격을 가하는 것에 대해 어떤 관점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보자.

먼저 우리는 기독교인들이 정치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이 성경적으로 정당하다는 점부터 확신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에드먼드 버크의 말처럼 “국가는 하나님의 섭리가 만들어낸 창조물”1)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이는 누군가의 주장처럼 국가가 사회계약의 산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국가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하나님의 섭리가 만들어낸 창조물이라고 본다. 이것이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들의 국가관이다. 칼빈도 “국가의 통치를 없애버리려는 생각은, 그야말로 지극히 야만적인 생각”2)이라고 가르쳤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을 믿는 신자들에게 정치는 세속의 영역이므로 무관심해야 한다는 점은 성경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다. 도리어 우리 개혁파는 ‘교회와 세속정부 사이는 혼합할 수 없으면서도 완전히 분리시킬 수도 없는 관계’라고 믿는다.3) 그렇다면 신자는 세속정부에 무관심해야 한다는 논리는 결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자는 정치의 영역에서도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마땅하다. 이것이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 주권설”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기독교가 정치 영역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수행하게 될 때, 자동적으로 보수적인 특성을 보이게 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에드먼드 버크의 말처럼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에게 “정치는 도덕적 행위”4)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도덕성은 종교가 결정한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인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면 자동적으로 정치의 도덕성은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도덕성을 ‘자연법’5)이 규정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미국과 영국의 정치적 보수주의는 “법 아래의 자유, 한계가 뚜렷한 자유, 법률로 그 한계가 결정되는 자유”6)를 추구했다. 반대로 정치적 진보 진영은 마르크스와 같은 유물론적 관점에서 자연법을 무시하는 자유를 추구한다. 이런 점에서 좌익 진영은 기독교와 양립할 수 없다. 그들은 인권이라는 명목하에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려 한다. 무슬림을 난민이라는 명목하에 쉬운 입국의 길을 열어주려 한다. 그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에 대해서도 관대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태도를 견지하기까지 한다. 이 모든 것은 자연법에 위배되기 때문에 기독교와 보수주의자들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런 사람들 가운데 기독교인과 목회자들도 상당수 있다는 점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런 입장의 차이를 본다면 정치적으로 보수의 입장을 견지하는 기독교 청년들이 좌익들의 정치 성향과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보수적인 기독 청년들의 태도는 극단적인 모습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소위 극우라고 공격하는 기독교 보수 청년들은 그들과 대칭적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극우라고 칭하는 것은 사실 대칭적 위치에서 보는 착시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언급해보고 싶다. 오늘날 기독교 보수 청년들을 향해서 극우라고 맹공을 가하는 분들은 과연 보수와 극우 용어에 대한 개념을 객관적으로 사용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물론 아직 보수 기독교 청년들이 신학적으로나 이념적으로 미숙한 것은 사실이다. 굳이 그들을 대변한다면, 그들의 이런 미숙함은 신학적으로, 이념적으로 성숙한 보수주의자로 훈련받기에는 턱없이 척박한 한국 교회와 사회적 풍토도 한몫을 했다. 그 때문에 보수 기독교 청년들의 정치적 행보가 때로는 거칠고 무례한 양태로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향하여 극우라든지, 극보수라는 표현은 결코 정당하다고 보이지 않는다.

필자는 묻고 싶다. 좌측 언론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반대하기 때문에 이들을 극우라고 매도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사전적 개념에 부합하기 때문에, 정말로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극우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인가? 극우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물리적 폭력도 서슴지 않는 급진적인(radical) 태도를 일컫는 것이 아닌가? 이 말에 동의한다면, 그리고 나라를 정말 걱정한다면, 이런 거친 비판의 화살은 좌익 운동권들을 향해 먼저 겨냥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 반성적 태도 하에서 정말로 양쪽의 균형을 맞추는 평가로 나라를 걱정해 주었으면 한다.

주님은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고 말씀하셨다.

 

※미주

1) 러셀 커크,「보수의 정신」,(지식노마드,2018),p.105.

2) 「기독교강요」Ⅳ.20.3.

3) 조용훈,장신논단 제38집,「칼뱅의 정치사상과 그 사회윤리적 함의에 대한 연구」,p.221.

4) 러셀 커크,op.cit.,p.98.

5) 자연법이란 모든 인류에게 보편타당한 불변의 법칙이 있다고 보는 관점을 말한다.

6) 러셀 커크,op.cit.,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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