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는 무엇이고, 성화는 무엇인가?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를 전통적인 칭의의 의미만이 아닌 성화의 의미도 포함하는 포괄적인 어휘로 사용하고 있다" -최갑종 교수

최갑종(전 백석대 총장, 현 미국 조지아 센트럴 대학교 신약교수) 고신대(1974)와 고려신학대학원 졸업(1977), 미국 Reformed 신학대학원, Calvin 신학대학원, Princeton 신학대학원, Iliff 신학대학원과 Denver 대학교대학원에서 신약(부전공 구약)을 전공(M.A. Th.M ., Ph.D. in Biblical Studies).

 

I. 들어가는 말

로마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다. 루터는 로마서의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 서신은 실로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참으로 가장 순수한 복음이다. 로마서는 모든 크리스천이 마땅히 마음으로 모두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 영혼의 양식으로 묵상하여야 할 만큼 가치를 지니고 있다”(Luther's Works, 35, 1960, 365). 캘빈은 로마서를 성경 전체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열쇠로 본다: “만일 우리가 이 서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게 된다면, 우리는 성경 전체의 가장 귀중한 보화에 접근할 수 있는 문을 가지게 된다”(Romans, 1960, 5). 이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은 우리가 신앙과 생활의 난제를 만났을 경우 로마서가 이에 대한 적절한 답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최근에 한국 교계와 신학계가 직면하고 있는 난제 중의 하나가 ‘칭의’와 ‘성화’의 관계 문제이다. 신학자와 목회자는 물론 평신도 사이에도 의견이 다르다. 칭의는 무엇이며, 성화는 무엇인가? 양자는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는가? 칭의는 한 번 주어지면 여하히 취소되거나 변경될 수 없는 확정적인 것인가? 반면에 성화는 점진적이며, 계속 변화되는 가는 것인가? 어떤 사람은 칭의를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내리는 법정적 선언, 혹은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주는 선물, 혹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轉嫁)로 이해한다. 그리고 이 법정적인 선언, 혹은 선물, 혹은 전가를 신자에게 단 한 번 주어지는 확정적인 것으로 본다. 반면에 성화에 대해서는 칭의가 주어진 사람에게 계속 일어나는 거룩함 혹은 삶의 변화로 본다. 이 삶의 변화는 신자 안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사역이지만, 단회적으로 완성되지 않고 최후 심판 때에 완성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이 성화가 신자의 최종적인 구원의 여부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최후 심판에서 한 사람의 최종적인 구원을 결정할 때는 성화가 아닌 칭의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성화는 다만 그가 받을 상급에 영향을 미칠 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어떤 사람은 칭의와 성화를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결국 신자의 구원의 과정에 성화가 가진 자리를 빼앗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의 구호를 주장하는 구원파 구원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우려한다. 말하자면 이러한 이해는 성화가 가진 구원의 기능을 일체 배제함으로써 기독교 윤리의 온당한 자리를 제거하는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칭의를 재해석하거나 성화를 칭의에 통합시키려고 한다. 칭의로부터 법정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게 하는 언약적이거나 종말론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또는 칭의와 성화를 똑같은 구원의 의미를 다른 측면에서 서술하는 동의어로 보려고도 한다. 그는 캘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그리스도가 가진 칭의만이 아닌 성화도 동시적으로 함께 참여하기 때문에(고전 1:30), 칭의와 성화는 그 어느 순간에도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따라서 칭의 없이 성화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성화 없이 칭의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 사실’(3.16.1)로부터 캘빈도 성화에 구원의 기능을 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과연 칭의는 무엇이고, 성화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로마서 주제 문단(1:16-17)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찾아보려고 한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이 주제 문단이 로마서 전체 메시지를 미리 보여주는 거울일 뿐만 아니라, 전체 메시지에 접근할 수 있는 해석학적 열쇠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주제 문단의 핵심어휘인 ‘하나님의 의’가 사실상 로마서에서 63번 나오는 모든 ‘의’ 명사나 동사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가르침을 알기 위해서는 로마서의 주제 문단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고찰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이제 사도 바울이 로마서 주제 문단에서 ‘하나님의 의’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 ‘하나님의 의’가 로마서 전체 내러티브를 통해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우리의 고찰은 논란이 되고 있는 ‘칭의는 무엇이고, 성화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도 적절한 답변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 글은 필자가 집필하고 있는 로마서 주석에서 발췌된 것이라는 점과, 핵심적인 내용은 2019년도 12월에 발간된 한국 복음주의 신약학회지『신약연구』제8권 4호(503-529)에 실린 “로마서 중심 주제에 대한 연구. ‘하나님의 의’에 대한 내러티브 접근을 중심으로”에 소개되었다는 점을 밝혀둔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코람데오닷컴」 독자들을 위해 주석과 논문에 있는 헬라어 원문이나 학자들의 인용문 그리고 각주 등을 모두 생략하였다.

 

II. 로마서 주제 문단(1:16-17)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1. ‘하나님의 의’의 중요성

로마서의 구조적인 면에서 볼 때 주제 문단인 1:16-17은 서언(1:1-15)과 문제의 진술(1:18-3:20) 사이에 있으면서 하나의 전환점을 형성한다. 동시에 1:16-17은 좁게는 로마서의 논제 문단인 3:21-31의 메시지를, 넓게는 로마서 몸체인 1:18-15:13의 전체 메시지를 대변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주제 문단은 서언(1:2-4)에 있는 복음의 진술(“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과 결언(16:25-26)에 있는 복음의 진술(“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과 평행을 이룬다. 이러한 주제 문단의 구조적 위치는 주제 문단이 로마서 전체의 내러티브와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1:16-17의 주제 문단은 16절과 17절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1:16a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서언(1:1-4)과 결언(16:25-26)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를 밝힌다. 그리고 1:16b절에서 그가 로마 제국의 수도에 사는 사람들 앞에서도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복음이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천명한다. 그런 다음 1:17a절에서 왜 그 복음이 (복음을) 믿는 모든 자, 유대인과 헬라인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인가를 밝힌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복음을) 믿는 자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계속해서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1:17b절에서 하박국 2:4을 인용하여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뒷받침한다. 그가 하박국 2:4을 인용한 것은 하박국에 나타나 있는 ‘의인’, ‘믿음으로’, ‘살리라’가 1:16-17a에서 바울이 말한 핵심적인 어휘 ‘복음’, ‘구원’, ‘믿음’ ‘하나님의 의’와 평행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로마서의 주제 문단은 ‘하나님의 의’를 중심으로 매우 점진적이고 또한 논증적이다:

나(바울)는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1:16a).

  왜냐하면 그 복음은 유대인든 헬라인이든 모든 믿는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1:16b).

          (그 복음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이유는)

그 복음을 믿는 자를 통해

‘하나님의 의’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1:17a).

이것은 하박국 2:4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를 통해 말씀하신 바와 같다(1:17b).

위의 배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의’가 주제 문단의 흐름을 좌우하고 있다.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도, 복음이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인 이유도, 하박국 2:4를 인용하는 이유도,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의’가 복음 안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복음이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이 될 수 없을 것이고, 복음이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바울도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하박국의 인용도 불필요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는 주제 문단의 핵심어휘이며 귀결점이다. 주제 문단의 귀결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로마서 전체를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주제임을 뜻한다. 이것은 바울 서신 전체에서 ‘하나님의 의’가 모두 10번 사용되고 있는데 그중에 8번의 경우가 로마서에 나타나고 있는 사실(1:17; 3:5,21,22,25,26; 10:3x2)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렇다면 로마서의 핵심어휘인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바울이 ‘하나님의 의’를 칭의와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는가? 아니면 성화도 포함하는 포괄적인 용어로 사용하고 있는가? 이제 우리는 바울이 ‘하나님의 의’를 무슨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먼저 바울의 언어 사용의 배경인 ‘하나님의 의’의 구약적 용법을 살펴보고, 그다음 로마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어휘의 용법을, 마지막으로 로마서 전체 내러티브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의’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의’의 구약적 배경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다른 신약성경 저자처럼 히브리어 성경이 아닌 주로 칠십인역 헬라어 구약성경을 인용하거나 사용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의 ‘하나님의 의’ 사용의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칠십인역(LXX)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의’ 용법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칠십인역 헬라어 구약성경에 보면 ‘의’ 어휘가 하나님과 관련해서 사용될 때도 한 가지 의미만이 아니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의’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약속된 것을 하나님이 신실하게 지키시는 그의 언약적인 신실함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이 개인이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약속하신 것을 지키심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신다. 느헤미아 9:7-8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대로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 왕의 압제에서 구출하시고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심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의로운 분으로 나타난다: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라함을 택하시고...그와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 가나안 족속과..기르가스 족속의 땅을 그의 씨에게 주리라 하시더니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매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 사무엘상 12:6-7 역시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는 여호와이시니...여호와께서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행하신 모든 의로운 일”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 땅에서 구원하여 내신 일을 가리켜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의”라고 말한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98편 2(LXX 97:2)에서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의’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동일시한다.

역시 이사야 선지자도 여러 곳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이루시는 구원을 하나님이 행하신 의와 동일시한다: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그것이 멀지 아니하나니 나의 구원이 지체하지 아니할 것이라”(사 46:13); “내 의가 가깝고 내 구원이 나갔은즉”(사 51:5);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나의 의는 영원이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51:6-8). 시편 98편 2절, 이사야 46장 13절과 51장 6-8절에 있는 의와 구원의 평행문구는 의와 구원이 동의어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통해 나타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물론 이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인 신실함의 표현이다. 칠십인역이 종종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 혹은 신실하심을 뜻하는 ‘헤세드’를 ‘의’로 번역하고 있는 사실(창 19:19; 20: 13; 21:23; 24:27; 32:10)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처럼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신실함과 긍휼하심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 나타난다.

둘째, ‘의’는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이다. ‘의’를 결정하는 분도, 의롭게 하시는 분도, 의롭다고 판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시편 7:17은 이 의를 가리켜 “그[하나님]의 의”로, 시편 35편은 “주의 의”(24,28)와 “나의 의”(27) 라고 말한다. 시편 50편 6절은 하나님이 재판장으로서 “그의 의를 선포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의’가 법정적인 선언임을 강조한다. 역시 열왕기상 8:32도 하나님은 악한 자를 그 행위대로 심판하시고, 반면에 “의로운 자를 의롭게 하시고, 그의 의를 따라 그에게 의를 주신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의’가 법정적인 선언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선물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의’가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이사야 45:25은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말한다. 앞에서 인용한 이사야 46장과 51장에서 ‘의’를 거듭 “나[하나님]의 의”라고 말하고 있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처럼 구약성경에서 ‘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의’이다. 이 ‘의’는 하나님의 법적인 선언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법적인 선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설 수 있게 된다.

셋째,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다. 개인이든 이스라엘 민족이든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가 될 수 없지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의 의’를 주실 때 그들은 ‘의’를 선물로 받게 된다. 그리고 이 ‘의’의 선물을 받은 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설 수 있게 되고, 이 의를 나타낼 수 있다. 신명기 6:25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그의 모든 명령을 지키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로움”이 된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그의 명령을 지키는 자에게 그의 의를 주시고 그래서 그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점은 열왕기상 8:32의 (하나님은) “그의 의를 따라 그에게 의를 주신다”와 에스겔 18장 9절의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진실하게 행할진 데 그는 의인이니”에서 확인된다. ‘하나님의 의’가 이스라엘에게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은 시편 72편에도 나타난다. 시편 72편 1-2절에 따르면 하나님이 그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을 의롭게 재판하도록 기도한다: “오 하나님, 당신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당신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어 당신의 백성을 의로 재판하게 하소서.” 여기서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이 왕에게 주는 선물임을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처럼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는 단일 의미로만 사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 혹은 그의 언약을 지키는 ‘그의 구원 활동’을 가리키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하는 ‘하나님의 법적인 선언’, 혹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는 ‘하나님의 선물’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의’의 용법이 바울에게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3. 로마서에 나타난 ‘의’ 어휘의 용법

로마서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의’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를 살펴보기에 앞서 그동안 성경학자들이 로마서 1:17의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해석하여왔는가를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루터는 로마서 1:17의 ‘하나님의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의인 이신칭의,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수동적인 의인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轉嫁)로 보았다. 불투만도 루터처럼 로마서 1:17의 ‘하나님의 의’(역시 3:21, 22; 10:3; 고후 5:21)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에게 수여하는 의로 보았다. 크랜필드 역시 루터와 불투만의 노선을 따라 1:17의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신자에게 주시는 의로운 신분으로 본다. 그는 로마서 10:3, 빌립보서 3:9, 고린도전서 1:30, 고린도후서 5:21에서 ‘하나님의 의’가 신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로 제시되고 있는 점과, 로마서 1:17에서 하나님의 의가 신자의 믿음을 가리키는 “믿음으로부터 믿음으로”와 연결되고 있는 것을 그 근거로 삼는다.

하지만 케제만은 로마서 1:17의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는 자질이나 선물로 보는 것을 반대한다. 그 대신 그는 17절의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인 복음과 연결된 점, 로마서 8:30, 고린도후서 3:18에서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영광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점, 고린도후서 3:8 이하에서 “의의 사역”과 “성령의 사역”이 서로 동일시되고 있는 점 등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하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구원의 능력’으로 본다. 슈튤마허는 구약, 초기 유대 문헌, 그리고 쿰란 문헌에서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피조 세계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활동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고 보면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창조주와 심판자인 하나님의 구원적 활동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라이트는 1:17의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에 주신 언약 그리고 그 범위를 넘어 전 피조 세계에 주신 하나님 자신의 언약에 대한 그의 신실함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에 대한 성경학자들의 해석은 다양하다. 한가지 공통점은 성경학자들이 ‘하나님의 의’를 구약에 나타나 있는 복합적인 의미보다 구약과 바울 서신에 나타나 있는 특정한 의미를 발전시켜 각각 단일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로마서 주제 문단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바울의 용법은 구약의 용법과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가?

첫째, ‘하나님의 의’는 ‘의’가 하나님의 의롭게 하는 활동 혹은 하나님의 법적인 선언을 대변한다. 로마서에는 ‘의’ 어휘가 모두 63번 사용되고 있는데, 바울의 다른 12 서신에 나오는 ‘의’ 어휘가 모두 합쳐 51번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로마서의 ‘의’의 사용은 거의 압도적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명사 ‘의’(‘디카이오수네’)를 모두 34번 사용되고 있는데, 여러 번 “하나님”, 혹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그의”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하여 ‘의’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하거나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강조한다. 이 중에 6번의 경우 “하나님의 의”(1:17; 3:5, 21,22; 10:3x2)로, 2번의 경우 하나님을 가리키는 인칭대명사와 함께 “그의 의”(3:25,26)로, 5번의 경우 ‘의’가 하나님의 행동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수동태 동사와 함께 사용되고 있다(4:3,9,11,22; 6:18). 이것은 로마서의 나오는 ‘의’의 명사는 사실상 주제 문단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의 축약어라는 점을 시사한다.

동사 ‘의롭게하다’(‘디카이오’)는 모두 15번 사용되고 있는데, 능동태로 사용되는 경우 하나님이 직접 동사의 주어로 나타나고(3:26,30; 4:5; 8:30,33), 수동태의 경우 신적 수동태 형식으로 사용되고 있다(2:13; 3:4,20,24,28; 4:2; 5:1,9; 6:7). 이와 같은 ‘의’ 동사의 용법은 동사도 명사처럼 ‘하나님의 의’를 반영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의’가 구약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법적인 선언을 가리킬 경우가 많다. 3:5-6을 보면,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결코 그렇지 아니 하니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3:25-26의 경우에도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속죄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신 것에 대해 그의[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를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심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심판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나타나셨음을 강조한다. 이와 동일한 내용이 5:18-19절에도 나타난다. 거기에 보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예수의 순종하심[십자가 사건의 심판]을 통해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8:30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신다”고 말한다. 둘째,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지키시는 그의 언약적 신실함을 뜻한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바울은 로마서 1:2-4에서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약속하신 것이며, 이 약속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예수의 오심,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성취가 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런 다음 1:17a에서 수동태 동사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여기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인 그의 언약적인 신실함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 점은 3:21에서 동일한 신적 수동태 동사 ‘페파네로타이’를 사용하여, 하나님께서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셨다고 말하고 있는 점과, 16:26에서 동일한 신적 수동태 분사 ‘파네로덴토스’를 사용하여, 선지자들에 의해 약속되었던 것(‘하나님의 의의 복음’)을 하나님께서 이제 나타내셨다고 말하고 있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 모든 구절은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 자신의 약속의 성취인 그의 언약적 신실함을 뜻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 30절에서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셨다”고 말한 다음 39절에서 하나님의 이 의롭다 하신 것을 구약에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을 뜻하는 ‘헤세드’의 헬라어 번역인 ‘하나님의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바울은 11장 26절에서 ‘온 이스라엘의 구원’을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11:27)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언약의 성취를 11:30-32에서 ‘헤세드’를 가리키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하나님의 의’를 가리키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처럼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을 가리키고 있다.

셋째, ‘하나님의 의’는 예수를 믿는 자에게 주는 선물을 지칭한다. 바울은 로마서 1:17a에서 ‘하나님의 의’를 말하면서 믿음과 연관시킨다. 그리고 1:17b에서 의와 믿음이 연관된 하박국 2:4를 인용한다. 3:22에서도 ‘하나님의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과 연관시킨다. 3:26에서도 ‘하나님의 의’는 예수 믿는 믿음과 연관된다. 4장에서 아브라함이 의를 얻게 된 믿음을 가리켜 “믿음의 의”(4:11, 13)로 부른다. 그리고 9장과 10장에서 이방인들이 얻은 의를 “믿음에서 난 의”(9:30; 10:6)로 부른다. 믿음이 의를 얻는 혹은 의가 주어지는 통로가 되기 때문에 바울은 5:16-18에서 한 사람 예수의 의로운 행위를 통해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을 가리켜 “의의 선물”(5:17)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의의 선물’을 받은 자를 가리켜 ‘의인’이 된 것으로 규정한다(5:19).

‘하나님의 의’가 믿는 사람에게 주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은 로마서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바울 서신에도 나타난다. 빌립보서 3:9에 보면 바울이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라고 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의 선물을 받았음을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1:30에서도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고 하면서 신자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혜, 의로움, 거룩함, 구원함에 참여하였음을 말한다. 역시 고린도후서 5:21에서도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면서, 신자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를 신자의 믿음과 연관시켜 ‘하나님의 의’가 신자의 믿음을 통하여 주어지는 선물임을 강조한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의 남은 문제는 1:17a의 ‘하나님의 의’에 뒤따라 나오는 문구 “믿음으로부터 믿음으로”를 신자의 믿음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적지 않은 학자들이 3:22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문구와 함께 1:17a의 “믿음으로부터 믿음으로”를 그리스도를 믿은 신자의 믿음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의 믿음’ 혹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신실성’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왜 1:17a의 믿음 어휘를 그리스도의 믿음이 아닌 신자의 믿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성경 본문에 나타나는 특정한 어휘나 문구는 우선적으로 그 어휘나 문구가 사용되고 있는 본문의 전후 문맥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더구나 로마서는 독자들이 눈으로 읽고 확인하여 이해하도록 쓰인 것으로 보기보다는 편지를 지참한 자가 청중 앞에서 소리 내어 읽는 것을 듣고 이해하도록 쓰인 것이다. 그렇다면 편지를 쓰는 사람이 앞에서 사용했던 동일한 단어나 문구를 사용하지만 그 내용을 다르게 전달하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이 단어나 문구가 왜 앞의 것과 다르게 이해하여야 하는가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 설명 없이 동일한 단어나 문구가 사용된다면 독자나 청중은 당연히 앞의 단어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먼저 1:17a의 “믿음으로부터 믿음으로”의 문구 앞에 있는 믿음 어휘를 살펴보면, 1:5의 “믿음의 순종”, 1:8의 “너희의 믿음”, 1:12의 “너희와 나의 서로의 믿음”과 1:16의 “믿은 모든 자” 등 모두 4번 나타난다. 그리고 1:17a의 믿음 문구 뒤에 나타나는 믿음 어휘를 보면 1:17b에 있는 하박국 2:4의 인용구에 있는 “믿음으로”와 3:2의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졌다”, 그리고 3:3의 “하나님의 미쁘심”이 나타난다. 그런데 1:17a의 “믿음으로부터 믿음으로”의 선행 문맥의 믿음 어휘는 그리스도의 믿음이나 하나님의 믿음 아닌 모두 믿는 신자의 믿음을 가리킨다는 점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1:17b의 하박국 인용구에 나타나는 믿음 어휘 역시, 나중에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사람의 믿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3:2의 믿음의 어휘도 복수 수동태로 사용된 점을 보아 사람들과 관련된 것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처럼 바울은 믿음 어휘를 계속 사람과 관련해서 사용한다. 그러다가 3:3에서 믿음 어휘에 처음으로 “하나님의”라는 말을 덧붙여 지금까지 사용한 사람의 믿음 어휘와 구분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들이 혼돈하지 않도록 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1:17a의 “믿음으로부터 믿음으로”의 문구를 그리스도나 하나님의 믿음이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믿음으로 보게 한다. 이중적인 믿음의 표현은 전자나 후자를 다른 믿음으로 볼 것이 아니라, 동일한 믿음을 강조하는 수사학적인 표현일 뿐이다. 이처럼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가 신자의 믿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로서의 의, 혹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한 의를 그를 믿는 신자에게 돌림으로서 신자를 의롭다고 선언하는 법적인 의나 전가의 의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넷째, ‘하나님의 의’는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 종말론적인 의미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구약에서 미래에 주어질 것으로 약속되었던 것인데, 그 약속된 것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성취가 되었다는 것과, 그러나 그 최종적인 완성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종말론적이라는 사실을 바울의 언어 사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의’를 종종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진 어휘를 통해 설명한다. 로마서 서언에서 바울은 복음이 구약을 통해서 약속되어진 것임을 분명히 밝힌 다음(1:2-4), 1:17a에서 ‘하나님의 의’가 복음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 ‘나타나다’의 동사 ‘아포칼룹테타이’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사건의 계시를 알려주는 단어이다. 곧 ‘하나님의 의’가 구약성경에서 마지막 때 계시될 것으로 예언되었다가 이제 복음을 통해 계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3:21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종말론적인 계시임을 밝힌다. 3:21에서 바울은 시간적인 대전환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그러나 이제”라는 말과 함께 종말론적인 사건의 계시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완료형 동사 ‘페파네로타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선언한다. 그런 다음 3:22 이하에서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이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바울은 로마서 결언(16:25-26)에서도 3:21에서 사용한 동일한 동사를 사용하여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던 그 복음, 곧 ‘하나님의 의’의 복음이 이제 종말론적으로 드러났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의’가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은 동사 ‘의롭게하다’(‘디카이오’)의 용법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동사 ‘디카이오’를 모두 15번 사용하고 있는데 과거나 완료형 시제를 7번(3:4; 4:2, 5:1,9; 6:7; 8:30,30), 현재 시제를 5번( 3:24,26,28; 4:5; 8:33), 미래 시제를 3번(롬 2:13; 3:20,30) 사용한다. 그런데 과거나 완료형 시제는 5:1의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미 의롭게 하셨음을 강조한다. 현재형 시제는 8:33의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의롭게 하심은 지금 여기서 계속 일어나고 있는 현재적 사건임을 강조한다. 미래형 시제는 하나님의 의롭게 하심이 마지막 날 심판에서 주어질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바울은 2:13에서 “하나님 앞에서는...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말한 다음 2:16에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고 말한다. 마지막 날 의의 심판이 있게 된다는 것은 14:10의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와 갈라디아서 5:5의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를 통해 확인된다.

이와 같은 ‘의’ 동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종말론적인 사용은 바울의 ‘구원하다’의 동사 용법과 일치한다. 바울은 로마서 8:24에서 구원의 과거시제를 사용하여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라고 하면서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음을 강조한다. 구원이 이미 이루어진 과거 사건이라는 사실은 에베소서 2:8의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구원에 대한 현재형 시제는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가 구원을 지금 여기서 계속 이루어져 가는 현재적인 사실로 보고 있다는 것은, 빌립보서 2:12의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는 현재 명령형 시제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바울이 구원에 대한 과거나 현재 시제만이 아닌 미래 시제도 사용한다. 바울은 특별히 로마서에서 최종적인 구원이 미래에 주어짐을 말하는 미래 시제를 여러 번 사용하고 있다(5:9,10; 10:9,13; 11:26). 로마서 5:9에서 그는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것임이라”고하면서 이미 의롭게 된 자들에게도 그들의 최종적인 구원은 하나님의 심판 날에 주어지는 미래적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를 다양한 의미로, 다양한 시제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의를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한 하나님의 법정적인 선언 혹은 전가의 의미만이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 하나님의 구원 활동, 또는 종말론적인 의미 등 다양하게 사용한다. ‘하나님의 의’가 갖고 있는 이와 같은 포괄적인 용법은 1:17b의 하박국 2:4의 인용에서도 나타난다.

 

4. 하박국 2:4의 인용구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의 의미

바울은 1:17a에서 복음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말한 다음 1:17b에서 하박국 2:4을 인용하여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하박국 2:4의 인용구를 살펴봄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의’를 무슨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바울의 하박국 2:4의 인용구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를 보면 “의인은 그의 믿음/신실성 때문에 살리라”는 히브리어 성경 본문(참조, 1QpHab 7.17)도, “의인은 나의 믿음/신실성 때문에 살리라”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 70인역 본문도 따르지 않는다. 바울이 종종 구약 본문의 본래 의미를 더 확실하게 밝히기 위해 임의로 변경하고 있다는 점을 볼 때, 그가 히브리어 본문에 있는 3인칭 대명사 “그의”나 70인역의 1인칭 대명사 “나의”를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점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 구절에서 해석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인용구 서두에 나오는 ‘의인’을 누구로 보느냐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믿음으로’를 주어인 명사 ‘의인’에 연결시킬 것인가, 아니면 동사 ‘살리라’에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하박국 2:4에 나오는 ‘의인’은 메시야/그리스도를, “믿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산다”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삶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자 한다. 그는 칠십인역(LXX)에서 하박국 2:4이 메시야론적으로 번역되어 있는 점, 제 1 에녹서에서 의인이 종말에 하나님의 공의를 계시하거나 실현하는 분으로 제시되 있는 점(38:2; 53:6),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인”으로 호칭하고 있는 점(행 3:14; 7:52; 22:14; 벧전 3:18; 요 1서 2:1)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하박국 2:4이 칠십인역과 유대교 문헌에서 메시야론적으로 이해되고 있었고,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의인”으로 호칭되었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바울의 인용구에 나타나 있는 “의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의 동일한 하박국 2:4의 인용문을 보면 칠십인역에 나오는 인칭대명사 “나의”나 히브리성경(MT)본문에 나오는 “그의”를 생략하여 본문을 일반화시키고 있다. 바울이 개인을 지칭하는 인칭대명사를 생략하고 있다는 것은 여기서 개인적인 특정 인물보다 일반적인 인물을 통칭적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는 정확하게 동일한 인용 본문을 가지고 있는 갈라디아서 3:11b의 경우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갈라디아 문맥을 보면 바울의 하박국 인용은 가까이는 그 앞에 있는 11절 상반 절과, 좀 더 멀리는 3:10과 연결되어 있다. 부정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3:10의 “율법의 행위의 사람들”(복수)은 긍정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3:7, 9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복수)과 대조되고 있다. 그런 다음 다시 3:11 상반 절에서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단수)가 부정적으로 제시되고, 바로 이어서 하 반절에서 “믿음으로 사는 의인”(단수)이 긍정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문맥의 흐름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율법의 행위의 사람들”(복수)과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단수)가 서로 짝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복수)과 “믿음으로 사는 의인”(단수)이 서로 짝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바울은 어느 곳에서도 이 일련의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거나 기독론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일반 사람을 지칭하고 있다. 그러므로 문맥적으로 볼 때 하박국 2:4의 인용구에 나타나는 “의인”은 그리스도가 아닌 믿음으로 사는 신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의인” 다음에 나오는 “믿음으로”라는 말은, 명사인 “의인”으로 연결시키든, 동사 “살리라”에 연결시키든, 자연히 신자의 믿음과 관련시켜야 한다. 이와 같은 갈라디아서의 용법은 정확하게 동일하게 인용된 로마서에서도 그 의인은 그리스도가 아닌 신자를, 믿음도 그리스도의 믿음이 아닌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믿음으로 보아야 할 것을 일깨워 준다.

이제 남은 것은 ‘믿음으로’를 주어인 명사 ‘의인’에 연결시킬 것인가, 아니면 동사 ‘살리라’에 연결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어떤 주석가는 ‘믿음으로’라는 말을 동사보다도 명사에 연결시켜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 즉 이신칭의(以信稱義)에 강조점이 있다고 본다. 반면에 다른 주석가는 ‘믿음으로’를 ‘살리라’에 연결시켜 믿음으로 사는 삶, 곧 성화에 강조점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바울이 ‘믿음으로’를 명사 의인 앞에 두거나 혹은 동사 살리라 뒤에 두지 않고 양쪽 사이에 두고 있는 것은 그가 ‘믿음으로’를 명사뿐만 아니라, 동사까지 같이 연결시켜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즉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은, 또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의’가 새로운 신분과 새로운 삶을 함께 함축하고 있는 종말론적인 구원의 의미를 가졌다고 본다면, 그리고 바울이 종종 믿음과 순종을 통합시켜 “믿음의 순종”(롬 1:5; 16:26)을 말하고 있는 점은 ‘믿음으로’가 양자와 다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을 정당하게 한다. 나무와 그 열매가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의인됨(칭의)과 그의 거룩한 삶(성화)은 결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사실상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은 또한 믿음으로 산다. 그것이 서언과 결언에서 언급하고 있는 ‘믿음의 순종’이 뜻하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바울은 하박국 2:4을 인용하여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들은 또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그의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강조하고 있는 로마서 3:21-11:36 뿐만 아니라, 또한 믿음으로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로마서 12:1-15:13을 다 포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하박국 인용구에 있는 ‘살리라’는 말도 ‘하나님의 의’처럼 종말론적인 어휘로서 미래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현재적인 의미도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5. 로마서의 내러티브를 통해서 본 하나님의 의의 의미

로마서 전체를 구조적으로 살펴보면 로마서의 플롯은 서언(1:1-17), 몸체(1:18- 15:13), 결언(15:14-16:27)으로, 그리고 몸체는 직설법 형태인 1:18-11:36과 명령법 형태인 12:1-15:13로 되어 있다. 로마서 몸체는 먼저 창조, 타락, 심판의 내러티브로 시작한다. 1:18-32의 첫 번째 내러티브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인류(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는 모든 불경건과 불의한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의로운 진노 아래 처하였다(1:18; 3:9). 인류의 범죄는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된 모든 피조물까지 오염시키고 타락시켰다(1:21-23; 3:23; 5:12). 창조주 하나님을 순종하고 그만을 영화롭게 하여야 할 자가 오히려 피조물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죄를 범하였으며(1:25), 피조물까지도 허무한데 굴복하게 하여 탄식과 고통을 받게 하였다(8:20-22). 그 결과 인류는 모든 성적, 윤리적, 사회적 범죄를 자행하게 되었다. 그래서 1:18과 1:32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범죄한 인류는 이제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아래 처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1:18-32는 죄에 대하여 분노하시고 심판하는 하나님의 의의 내러티브이다.

2:1-29의 두 번째 내러티브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율법을 부여받은 언약 백성 유대인/이스라엘의 실패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4장의 아브라함 내러티브가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세울 것과, 그들을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할 것을 약속하셨다(창 12:2-3). 이 약속은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피조 세계를 회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이 약속을 반드시 지키신다는 그의 언약적 신실함을 믿었고, 그가 믿은 언약적 신실함이 그에게 의로 간주되었다(창 15:6; 갈 3:6; 롬 4:3). 하나님께서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을 바로 왕의 압제에서 구원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은, 출애굽기 3:24-25의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의’의 표현, 곧 그의 언약적 신실함의 표현이었다. 출애급 사건 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것도, 그들을 통해 전 창조세계를 회복하려는 그의 언약(창 12:3)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 유지는 물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되고, 찬송과 명예와 영광을 받게 되고(신 26:19; 28:1-2), ‘하나님의 의’가 유지되는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신 6:25). 그러나 율법에 불순종할 경우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파멸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신 28:15-22; 29:58-62; 30:17-18).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로마서 2:1-3:20과 9-11장의 내러티브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광야 시대, 사사 시대, 왕정 시대, 바벨론 포로 이후 시대를 걸쳐오면서 계속 율법에 불순종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비추는 이방인의 빛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이방인들과 똑같은 범죄를 자행하여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다(2:22-23). 그런데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족장들에게 맺은 그 언약을 파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은 이스라엘의 행위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신의 성품과 의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3:3-4; 9:6; 11:1,11, 25-27). 오히려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이 파기한 옛 언약에 좌우되지 않는 새 언약(예 31:31-33), 화평의 언약, 영원한 언약(겔 37:26)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이 언약을 수행할 마지막 아담, 새로운 이스라엘, 곧 야훼의 의로운 종, 메시야를 보내실 것과 그를 통해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사 53:11). 이처럼 2:1-3:2에 있는 이스라엘의 실패 이야기도 이스라엘에 대하여 오래 침으신 하나님의 의의 내러티브이다(참조 3:25).

3-5장에 있는 메시야의 죽음 및 부활 이야기(3, 4장), 아브라함 이야기(4장), 첫 아담과 마지막 아담 이야기(5장; 참고 고전 15:45)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 곧 모든 창조 세계(유대인, 이방인, 모든 창조물)를 회복하시겠다는 아브라함에게 준 언약(창 12,15장), 야훼의 종을 통해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시겠다는 영원한 언약(사 53,55장), 모세의 언약과 다른 새 언약(렘 31장), 다윗의 후손을 이스라엘의 목자와 왕으로 보내시겠다는 화평의 언약(겔 37장)의 성취 이야기이다. 곧 3-5장은 마지막 아담, 이스라엘의 대변자 메시야 예수 안에서 1-2장의 창조, 타락, 심판을 구원과 회복으로 바꾸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에 대한 내러티브이다. 3-5장의 내러티브는 그 다음 6-8장의 내러티브와 동전의 이면과 저면처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전자가 그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언약의 역사적 성취 내러티브라고 한다면, 6-8장은 하나님께서 예수의 성취를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너희/이스라엘 안에서 그 언약을 적용을 시키는 내러티브이다. 말하자면 6-8장은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준 화평과 영원한 언약,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며 너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겔 36:26-28)의 성취 이야기이다.

9-11장의 이스라엘의 내러티브와 그 앞에 있는 6-8장의 너희/우리의 내러티브는 불가분의 관계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1장의 인류 창조, 타락, 심판의 이야기가 2장의 유대인/이스라엘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6-8장의 너희/우리의 회복 이야기와 9-11장의 이스라엘 회복 이야기는 서로 무관하지 않다. 전자가 세워지면 후자도 세워지고, 후자가 무너지면 전자도 무너진다.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였음으로 이제 죄의 종이 아닌 의의 종이 되어야 한다(6장), 너희는 그리스도의 연합을 통해 죄와 율법에 죽었음으로 더 이상 율법의 종이 되지 않아야 한다(7장), 오직 성령만이 너희/우리를 의의 종이 되게 한다(8장)는 3-8장의 결론인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8:39)로 귀착된다.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마지막 아담/이스라엘을 통한 우리의 구속과 전 창조세계의 회복은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곧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의 표현이다. 그런데 3-8장의 우리/너희에 대한 이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은 9-11장의 그들/이스라엘의 회복 이야기와 맞물러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준 그 언약이 이스라엘의 불순종 때문에 무너진다면, 우리/너희에게 준 하나님의 사랑, 곧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도 무너질 수 있다. 그러므로 3-8장의 내러티브가 9-11장의 내러티브에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9-11장의 이스라엘 내러티브 역시 3-8장의 우리/너희 내러티브에 의존한다. 이점은 바울이 9-11장의 결론 부분(11:25-36)에서 “온 이스라엘”의 구원을”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11:26-27)이라고 말한 다음,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1:31)에서 확인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는 로마서 중심 주제로서 “너희”(3-8장)와 “그들”(9-11장)의 내러티브를 이끌어간다.

로마서 몸체의 전반부(1:18-11:36)가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저들에 대한 자신의 언약을 “이미” 이루신 일(과거와 현재 시제), 곧 예수의 십자가와 성령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5:5,8; 8:39)과 긍휼하심(11:30,31,32)의 내러티브라고 한다면, 후반부 12:1-15:13은 이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이 “아직” 하나님의 전 창조 세계 안에서, 곧 이웃과 사회(12장)와 국가(13장)와 교회 공동체 안(14-15장)에서 이루어져야 할 현재와 미래 사역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전자는 주로 직설법의 내러티브로 구성되어 있고, 후자는 명령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전자가 후자와 독립되어 있지 않은 것처럼 후자도 전자와 독립되어 있지 않다. 전자가 후자를 위한 것이며, 후자는 전자에 의존하고 있다. 이 점은 후반부를 시작하는 바울의 권면 “내가 너희를 권한다”(1절), “내가 말한다”(3절)가 각각 전반부를 가리키는 “하나님의 자비하심”(12:1)과 “(하나님의) 은혜”(12:3)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과, 후반부의 내러티브를 이끌어가는 ‘아가페’ 사랑이 전반부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5:5,8; 8:39)에 의존하고 있는 점에서 분명하다. 즉 후반부의 결언인 15:7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 같이(3-11장), 너희도 서로 받으라(12-15장)”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후반부의 우리가 서로 받는 것(이웃 사랑)은 전반부인 그리스도가 우리를 받은 것(하나님 사랑)에 의존하고 있다(5:8, 참조 요 1 4:9-10). 그런데 후반부가 전반부의 직설법과 달리 명령법으로 되어있다는 것은 우리의 능동적인 윤리적 책임을 강조한다. 이 책임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14:10)를 통해 더욱 강화된다. 이것은 전반부가 아무리 강조되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후반부의 자리를 훼손하지 않아야 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동시에 후반부의 명령법이 아무리 강조된다 하더라도 어느 순간에도 전반부와 독립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의를 이루어가시는 후반부의 성화 사역은, 에스겔의 화평과 영원한 언약에 이미 나타나 있는 것처럼(겔 36:25-27), 성령이 우리 안에 새 마음을 불러일으키어 자유와 기쁨으로 이 세상 안에서 명령법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다(참조 빌 2:12-13; 롬 8:36).

이 점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의 내러티브가 믿음의 내러티브와 병행하고 있는 점에서 확인된다. 이것은 우리가 아무리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적인 신실하심으로서의 의를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우리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선물로서의 ‘하나님의 의’를 약화시키지 않아야 함을 뜻한다. 로마서에서 ‘의’ 어휘는 로마서에서 61번 나오는 믿음 어휘와 자주 같이 간다. 두 어휘가 똑같은 구절에 나타나는 경우도 13번(1:17; 3:22,28,30; 4:3,5,9,11x2,13; 9:30; 10:4,10)이나 된다. 로마서에서 믿음의 내러티브는 서언의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1:5)로 시작하여, 결언의 동일한 문구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하시려고”(16:26)로 종결된다. 이것은 로마서가 의의 내러티브인 동시에 또한 믿음의 순종 내러티브인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믿음의 순종은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1:16)의 들음을 통해서 발생하는 성령의 선물이기 때문에(살전 1:5-6 참조), 믿음의 내러티브는 또한 성령의 내러티브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사실은, 아브라함의 믿음 이야기가 아브라함을 통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의 이야기인 것처럼, 우리의 믿음의 순종 이야기도 결국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이 역사하는 ‘하나님의 의’의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바울이 로마서 8:9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와 고린도전서 12:3에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처럼, 신자의 신분과 삶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고전 12:3; 롬 8:9-10). 바울은 이미 주제 문단인 1:16에서 “복음이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면서 복음이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방편임을 강조하였다(참조 10:17). 이 점은 로마서의 결언에서 바울이 자신의 복음전파 사역을 가리켜 “그 일은...성령으로 이루어졌다”(15:13,19)고 말한 사실(역시 갈 3:5; 살전 1:5)에서 확인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로마서 전체의 내러티브는 주제 문단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설명하는 내러티브이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의’에 단일 의미만을 주기가 어렵다. 바울은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의’를 다양한 측면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로마서에서도 ‘하나님의 의’를 다양한 측면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로마서의 내러티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이미 살펴본 바울의 ‘의’ 용법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로마서 주제 문단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특정한 단일 의미만을 주면서 다른 의미를 배척하려는 자세를 갖지 않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가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III. 나가는 말: 적용

지금까지 우리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가를 주제 문단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만일 주제 문단에 대한 우리의 주석과 로마서 전체 내러티브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정당하다고 한다면, 우리의 연구는 한국 교계와 신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고 있는 칭의와 성화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보게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떤 사람은 바울의 ‘의’ 어휘의 용법을 법정적인 칭의로 제한하여 칭의와 성화를 엄격하게 구분하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의 ‘의’ 어휘 사용에서 윤리적인 의미, 곧 성화의 의미를 배제하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로마서를 해석하면서 1-4장에서는 칭의론을, 5-8장에서 성화론을 찾으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칭의와 성화를 나누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1-11장에서 칭의론을, 12-16장에서 성화론을 찾으려고 한다. 이처럼 이들은 칭의와 성화를 나누기 위해 로마서의 전체 내러티브의 통일성까지 훼손시키려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로마서 1:16-17이 로마서 전체를 통일시키는 주제 문단이라는 사실과 이 주제 문단의 핵심어휘이며 귀결점이 ‘하나님의 의’임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의’를 로마서의 특정 부분에 한정시켜 ‘하나님의 의’의 의미를 제한하거나, 칭의와 성화를 나누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의 의미를 로마서 전체의 내러티브를 통해서 이해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다. 즉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를 전통적인 칭의의 의미만이 아닌 성화의 의미도 포함하는 포괄적인 어휘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에서는 물론 그의 다른 서신에서 성화의 어휘를 자주 사용하지 않는 이유일 수 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동사 ‘거룩하다’(‘하기아조’)를 단 한 번만 사용하고, 명사 ‘거룩함’(‘하기아스모스’)를 2번(6:19, 22) 사용한다. 그리고 형용사 ‘거룩한’(‘하기오스’)을 8번 사용하는데(1:7; 8:27; 12:13; 15:25,26,31; 16:2,15) 모두 이미 의롭게 된 성도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울은 로마서는 물론 다른 서신에서도 ‘거룩하다’의 동사를 한 번도 현재 시제나 미래 시제로 사용하지 않는다. 항상 과거나 완료형 시제로 사용한다(롬 15:16; 고전 1:2; 6:11; 7:14x2; 엡 5:26; 살전 4:3,47; 살후 2:13; 딤전 2:15). 예를 들면 로마서 15:16에서 이방인들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졌다”(완료형 수동태 분사)고 말하고 있으며, 고린도전서 6:11에서도 고린도 교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으로 씼었??과거형 중간태), 거룩하게 되어졌고(과거형 수동태), 의롭게 되어졌다(과거형 수동태)고 말한다. 특별히 여기서는 거룩하게 됨인 성화를 의롭게 됨인 칭의앞에 둘 뿐만 아니라, 양쪽을 똑같이 성령의 사역으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신자를 가리켜 이미 거룩하게 된 자를 뜻하는 “성도”라 부른다.

이와 같은 바울의 성화 어휘 용법은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하나는 바울의 ‘의’ 어휘 안에 이미 ‘거룩’(성화)의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에 성화의 어휘를 별도로 발전시킬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왜 바울이 로마서에서 성화의 어휘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또 하나는 바울은 칭의를 단 한 번 주어진 과거 사건, 성화는 현재 혹은 미래에 계속해서 이루어져 가야 하는 사건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바울이 칭의 어휘를 과거나 완료 시제 만이 아닌 현재나 미래 시제를 사용하고 있는 점과, 이와 대조적으로 성화 어휘를 현재나 미래 시제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항상 과거나 완료 시제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바울의 언어 사용은 그가 칭의와 성화를 각각 서로 별개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신약 저자들 가운데 로마서의 저자인 사도 바울이 누구보다도 탁월한 문필가요 수사학자인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어떤 서신보다도 그가 로마서를 신중하게, 용의주도하게 작성하였음을 알고 있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때 그가 처음 방문하려고 하는 로마교회는 소수의 유대인 신자와 다수의 이방인 신자 사이에 적지 않는 갈등을 갖고 있었다(14-15장). 그는 로마 제국의 수도에 위치하고 있는 로마교회가 안디옥 교회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의 미래적 선교 대상인 스페인 선교를 도울 수 있는 거점이 되기를 원했다(15:22-29). 동시에 그는 그가 세운 교회들로부터 모금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의 예루살렘 방문은 자신의 생사가 걸린 매우 위험한 것이었고, 그래서 로마교회로부터 기도의 지원을 부탁하려고 하였다(15:30-33). 이런 상황에서 그는 로마교회를 방문하길 원했고(1:8-15), 그리고 로마서를 썼다. 그렇다면 그가 로마서를 작성할 때 어떤 것을 주제로 삼고, 그리고 그 주제를 어떻게 전개하여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를 심사숙고 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서는 편지이긴 하지만 탁월한 문학적인 플롯(구성)과 논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플롯과 논증을 이끌어가고 있는 핵심적인 어휘가 바로 ‘하나님의 의’이다. ‘이 하나님의 의’의 복음이 로마교회의 상황, 그의 스페인 선교의 비전, 당면한 예루살렘 방문을 모두 포괄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의 ‘하나님의 의’ 어휘 사용으로부터 특정한 단일 의미만을 찾는 것을 지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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