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제는 한 번 지나가는 에피소드가 아니다
더 큰 폭풍(perfect storm),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총신대학교 윤리학 교수가 재단 이사들에 의해 해임이 됐다. 이 문제에 대한 합동 측 총회장과 대학교 실무 책임자들과 총장, 그리고 여러 교단들의 대응은 생각보다 실망스럽다. 이 문제가 과연 이렇게 조용하게 넘어가서 될 문제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사건은 단순히 이상원 교수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 윤리를 세상의 잣대로 얼마든지 정죄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한국교회 전체를 향한 정조준이다. 다른 곳도 아니다. 보수 신학의 상징성을 띠고 있는 총신대학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것도 윤리학을 가르치는 신학교 교수의 윤리를 세상의 잣대로 판단하고 해임한 사건이다. 이는 신본주의 윤리를 인본주의 윤리가 얼마든지 판단할 수 있다는 역린을 의미한다. 때문에 이 사안은 모든 기독교가 심각하게 보아야 마땅하다.

 

기독교 윤리와 세상의 윤리

과연 기독교 윤리가 세상 윤리와 잣대에 의해 평가받을 수 있는가? 세상의 윤리는 상대적이고 상황적인 윤리다. 그 때문에 가변적(可變的)인 성격을 띤다. 반면 기독교 윤리는 절대적인 신적(神的) 윤리다. 가변적인 상황과 시대, 그리고 상대성에도 휘둘리지 않고 변함없는 절대 윤리를 제시한다. 어느 시대든지 교회는 이렇게 절대 윤리를 외치면서, 세상이 넘어서는 안 될 안전선(safe line)을 넘지 않도록 제동 역할을 한다. 누구나 잘 아는 것처럼 적절하게 제동이 잘 드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제동이 걸리지 않는 사회는 한순간 붕괴한다. 그래서 민주주의에서 견제와 균형은 중요한 원리로 여긴다. 그러나 이 사회는 견제와 균형이 아니라 일방통행적 행태를 가속화 하고 있다. 그 가속화 일환이 기독교 윤리를 말도 안 되는 명분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성소수자의 인권이라는 구호를 견제와 균형의 원리로 바라보려 하지 않고, 일방적인 원리로 제도화하려 한다.

이번 사건은 교회를 향하여 더 이상 사회에서 건전한 견제와 균형의 역할을 포기하라는 압력으로 이해되기에 충분하다. 만일 이런 압력에 교회가 굴복하게 된다면 이 사회는 제동이 걸리지 않는 도덕적 일방통행을 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역사가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극단적인 모습이 나타날 뿐이다.

강의하는 이상원 교수
강의하는 이상원 교수

 

실망스러운 교단과 학교 측의 반응

실망스럽게도 교단의 총회장은 이 문제를 단순한 화해의 문제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이 교수의 문제를 그냥 사과했으면 끝났을 문제라 한다. 이 발언은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고 있다. 이상원 교수의 문제는 사과와 화해의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근간을 뒤흔들기 위한 공격이었다. 만일 이 문제로 사과를 해서 넘어간다 하더라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신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문제 될 수 없는 사안에 사과하게 된다면 앞으로 신학교 강단은 옳고 그름과 관계없이 학생들의 주관적 반응에 눈치를 보고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는 무능한 강단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 때문에 어렵더라도 총회장이 좀 더 적극적이고 본질을 다루는 발언을 해주길 바랄 뿐이다.

더욱 답답한 것은 총신대 총장의 입장이다. 나름대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책 위원회를 만들어 대응했다고 한다. 그러나 재단이사회가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총장의 반응이 너무 사무적인 반응처럼 보이는 것은 지나친 것인가? 기독교인으로서 총장이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다면, 좀 더 적극적인 저항이 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문제에 학교와 기독교의 사활이 걸려 있다는 강경한 결의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 문제는 한 번 지나가는 에피소드가 아니다. 더 큰 폭풍(perfect storm)을 몰고 올 전조가 틀림없다. 이 문제를 승리로 이끌지 못하면 호미로 막을 것을 앞으로 가래로 막아야 할 때가 올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작금의 기독교는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 그러나 이 위기의 핵심은 외부로부터 오는 위기보다, 내부의 무감각과 무분별에 있다. 외부의 공격이 아무리 거세더라도 교회가 깨어 있다면 반드시 이긴다. 두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탄식이 나오고 눈물이 난다. 냄비 속에서 안락함에 취하여, 아무 저항 없이 죽어가는 개구리가 이 시대 교회의 모습처럼 보인다. 점점 우리에게 다가오는 위협 앞에서 교회가 그 심각성을 깨닫고 각성하고 회개하며 거룩한 전쟁을 단호하게 잘 감당하길 하나님께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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