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라면 정조처럼, 김준혁 지음, 더봄, 2020년

저자 소개: 저자 김준혁은 한신대학교 교수이며, 정조와 화성 전문가다. 저자는 중앙대 사학과를 졸업하였고 중앙대 대학원에서 정조를 전공하여 ‘조선 정조대 장용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정조는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일반 은총의 관점에서 그를 통한 리더십의 교훈을 얻고자 한다.
저자 소개: 저자 김준혁은 한신대학교 교수이며, 정조와 화성 전문가다. 저자는 중앙대 사학과를 졸업하였고 중앙대 대학원에서 정조를 전공하여 ‘조선 정조대 장용영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정조는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일반 은총의 관점에서 그를 통한 리더십의 교훈을 얻고자 한다.

 

서평:  김해 늘푸른전원교회 담임 김일국 목사 저서 '다음 세대를 구하는 7가지 법칙'
서평:  김해 늘푸른전원교회 담임 김일국 목사 저서 '다음 세대를 구하는 7가지 법칙'

리더는 외면과 내면이 성숙해야 한다

정조는 독서하는 리더였다. 정조는 어려서부터 엄청난 양의 책을 읽었다. 국왕이 된 후에도 정조는 책 읽기를 쉬지 않았다. 정조는 책을 두 번 읽었다. 한 번 읽고 다시 두 번째 정독을 해서 그 내용을 파악했다. 리더는 남들에 비해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독서가 필요하다.

정조는 신하들을 가르치는 군사’(君師)의 지위를 얻었다. 학문에 있어서 정조는 신하들보다 탁월했다. 정조처럼 현대의 리더들은 자기 분야에 정통한 사람들이다. 만약 리더가 되기 원한다면, 자기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정조는 무예 실력을 기르기 위해서 시간을 정해 놓고 꾸준히 운동했다. 정조는 학자인 동시에 무예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리더는 항상 건강한 체력을 유지해야 한다. 리더는 적극적으로 운동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또한 정조는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한 것을 왕가의 법도라고 말했다. 이것이 정조의 내면의 모습이었다.

 

리더는 진정한 의미의 통합을 추친해야 한다

정조는 백성들을 부유하고 행복하게 하는 탕평정책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추진했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을 계승하여 보다 발전된 탕평정책을 썼다. 정조시대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번암 채제공이다. 그는 탕평정치의 중심인물이었다. 정조는 채제공을 화성유수로 발탁했다. 채제공은 화성을 쌓을 때 3대 원칙을 발표했다. (1) 서두르지 말 것, (2) 화려하게 하지 말 것, (3) 기초를 단단히 쌓을 것.

정조는 지역 차별을 극복하는 통합을 시도했다. 정조시대 이전에 서북 지역과 동북 지역이 차별을 받았다. (즉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이었다) 정조 즉위 이후(1788)에 서북 무사들의 차별을 전면 폐지했다. 또한 정조는 당시까지 소외된 영남 남인을 적극적으로 등용했다.

 

리더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한다

1791, 즉 신해년에 백성들이 자유롭게 장사하게 되었다. 이것은 조선 건국 후 399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전에는 금난전권’(독점권을 갖고 있는 시전 상인들에게 특별한 권한을 주는 것) 때문에 백성들이 장사하지 못했다.

정조는 수재를 당한 백성들의 마음을 치유하게 했다. 정조는 전염병에 대해서도 지혜롭게 대처했다. 정조는 전염병의 사회적 공포를 없애는 데 힘을 썼다. 또한 병으로 농사를 못 짓는 가정을 위해서 공동체가 나서서 도와주도록 했다.

정조는 추노꾼들이 비인간적인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 정조는 소외되고 천한 이들의 삶에 진정으로 관심을 가졌다. 정조는 백성에 대한 생각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정조의 위민정신이 실현되었다. 정조는 말을 탈 때 사람을 밟고 내리지 않기 위해서 하마석을 만들어 사용했다.

붉은 산은 조선의 산, 즉 나무가 없어서 산의 맨땅만 보이는 조선의 산을 말한다. 정조는 식목 정책을 추진했다. 정조는 나무를 심는 것은 백 년 뒤를 위한 것이 아니라 만년을 내다보는 계획이라고 말했다.

 

리더는 정의로운 사람이어야 한다

정조는 나는 감영에서 올라 온 판결문을 경전 대하듯 읽었다.”라고 말했다. 정조는 재판 기록 살피기를 매우 중요시했다. 그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노력은 다른 재판에도 영향을 주었다.

1785(정조 9) 911, 조선의 새 법전이 만들어졌다. <대전통편>(大典通編)이다. 대전통편이 빨리 제정된 것은 정조의 강력한 개혁 의지 덕분이었다. (이는 선대 왕들이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정조는 화성을 축성하는 과정에서 기술자와 일꾼들에게 임금을 지불했다. 정조의 민본주의 정신을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기술자와 날품팔이하는 노동자들을 높이 대우했다. 그리고 정조는 추운 겨울에 성곽을 쌓는 이들에게 털모자를 하사했다. 조선 시대 한겨울에 정3품 당상관이 되어야 귀마개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조가 털모자를 만들어 쓰게 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정조는 기술자와 막일꾼들에게 솜옷을 하사해 주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귀한 물품이었다)

 

리더는 인재를 알아보고 중용할 줄 안다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은 정조와 다산의 만남을 풍운지회라고 말했다. 정조는 다산을 통해 암행어사와 목민관의 모범을 세우려고 했다. 정조는 다산 정약용을 혹독하게 훈련시켜 문무겸전의 인재로 양성했다. 정조는 다산이 있었기에 정조일 수 있었고, 다산도 정조가 있었기에 다산이 되었다. 좋은 리더는 재목이 될 인재를 알아보고 그를 키워낼 줄 안다.

정조는 뛰어난 창조적 사고를 지녔다. 정조는 약관의 정약용을 등용해서 한강을 건너갈 배다리를 설계하게 했다. 정조는 화성 축성의 기본 설계를 실학의 과학 정신을 통해서 이뤄냈다. 정조가 정약용에게 <기기도설>이라는 책을 하사했고, 정약용을 그 책을 바탕으로 거중기를 만들었다 (정조가 하사한 책에 이와 비슷한 기중기라는 크레인의 그림과 기계 작성법이 들어 있었다) 정조는 수레도 직접 고안하고 개발했다.

정조는 인재 양성을 위해서 규장각을 설립했다. 정조는 인재양성과 평등정신의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서얼허통’(庶孽許通)을 실시했다. 1777(정조 1) 321일 신분제 개혁안이 발표되었다. ‘서얼허통에 대한 정조의 결단이었다. 정조는 서얼 출신들을 개혁의 근거지인 규장각의 검사관으로 임명했다. 정조는 평민 중에서도 인재를 발굴했다.

정조는 인재 육성이 조선의 개혁에 가장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육은 여유가 있으면 하고 여유가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어려운 때에도 반드시 교육을 해야 하고 그 교육을 통해 성장한 인재들이 어려운 난국을 헤치고 보다 나은 사회로 나가게 해야 한다.

 

리더는 용기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리더는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정조는 자중하도록 노력했다. 정조는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훈련을 했다. 또한 리더는 친인척을 멀리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핏줄이라는 이유로 능력도 없으면서 욕심을 부리다가 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조는 기득권의 저항을 막아내고 이들과 싸웠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윤범행이 파직되었다. 그는 수원 성곽의 도면을 잘못 올렸다. (윤범행은 도면을 엉터리로 그려서 보냈다) 윤범행은 정조의 국가 개혁의 중요한 명령을 무시한 처사를 했다. 정조는 개혁에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해 지혜롭게 대처했다.

조선 후기의 다른 왕들과 달리 정조는 군사력을 가진 왕이었다. 군사력이 왕에게 없다면 국왕의 힘은 무의미한 것이다. 정조는 대규모 군사훈련을 통해 국왕의 지엄함을 보여 주었다.

리더에게 가장 힘든 일이 있다면, 측근을 내치는 것이다. 홍국영은 천하를 호령했지만, 영원히 조정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홍국영은 더 큰 권력을 갖고 싶어 했고, 국왕의 외척이 되어 왕과 권력을 양분하고 싶어 했다. 마침내 홍국영이 스스로 무덤을 팠다. 그가 정조의 왕비인 효의왕후를 독살하려고 했던 것이다. (홍국영이 비록 동덕회 멤버였지만 무사하지 못했다) 정조가 과감한 결단으로 권력을 농단하는 관료를 처단했을 때, 대다수의 관료들은 정조와 함께 개혁을 추진해 나가게 되었다.

 

리더는 소통을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다

정조는 자신의 반대세력인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에게 비밀 편지를 보냈다. 정조가 비밀 어찰을 보낸 것은 효종이 자신의 스승이었던 송시열에게 글을 보낸 것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 정조의 비밀서찰이 가진 의미는, 바로 소통이다. 리더는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과도 소통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청람의 중요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다. 정조는 엘리트 집단뿐만 아니라 초야에 은거한 이들의 의견까지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정조는 군신동락(君臣同樂)이 현실적인 정국 운영에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는 여민해락’(與民偕樂)과 같은 것이다. 정조는 국왕만의 공간인 창덕궁의 옥류원 계곡을 신하들과 산책함으로 군신동락의 의지를 다졌다. 이때 신하들은 말할 수 없이 기뻐했다.

정조는 능행을 통해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정조는 22년 동안 66회를 행차했다. 백성에게 국왕의 행차는 귀찮고 힘든 일이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정조의 행차에 대해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봉사했다. 그 이유는 정조가 이런 행차를 통해서 백성들과 직접 대화를 통해 그들의 억울함을 해소해 주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능행 시(행차할 때) ‘상언격쟁의 제도를 활성화했다. 정조는 능행을 하고 돌아온 후 서울과 지방의 상언(上言)을 모두 친히 열람하여 그날을 넘기지 않았다. 여기서 백성과 소통하고 그 결과를 반드시 나타내고자 하는 리더의 훌륭한 면모를 볼 수 있다.

 

리더는 미래를 위해 일해야 한다

조심태는 새로운 도시(화성)의 비전을 제시하는 탁월한 도시계획 전문가였다. 조심태는 창의성이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 정조가 자신의 국방개혁과 화성신도시 건설을 위해 조심태를 중용했다. 리더는 개혁을 위해서 가장 적절한 사람을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정조의 시대는 북학(北學)의 시대인 동시에 북벌(北伐)의 시대였다. 북벌은 사대부와 백성을 하나로 만들 이데올로기였다. (북벌은 우리가 중국에 속하지 않았다는 민족적인 자긍심에서 나온 것이다) 정조는 조신이 중국과 차별화된 민족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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